소설리스트

용사일행 출신 사제의 우울-106화 (106/137)

〈 106화 〉 18. 비명이 파묻힌 도시

* * *

18.비명이 파묻힌 도시(1)

입구에서부터 양옆으로 늘어선 두꺼운 대리석 기둥들은 어둠 속에서도 묵묵히 높은 천장을 떠받들고 있다.

뚜벅. 뚜벅. 뚜벅.

소음도 없이 열린 거대한 문 안쪽으로 걸어들어온 한 인영.

화륵, 화르륵..

어두운 복도를 걸어나가는 그의 발걸음에 맞춰 기둥의 화로에서 저절로 불이 일어나 내부를 서서히 밝히기 시작한다.

화로의 불빛이 주변을 밝히며 하나 둘 드러나기 시작한 기둥 아래에는 가운데의 지나갈 통로를 제외하고는 전부 기괴한 형태의 조각상들로 빈틈없이 들어차 있다.

흔들리는 불빛에 이리저리 반사되어 일렁이는 탓에 이것들은 마치 흐물거리며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도 느껴진다.

뚜벅. 뚜벅. 뚜벅. 뚜벅.

조각상들은 하나같이 인간의 형상을 하고는 있지만 그들은 두려움과 절망에 몸서리치는 얼굴에, 몸은 비쩍 말라비틀어지도록 과장되어 표현되어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불쾌한 감상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이것들을 가로질러 대리석 바닥의 복도를 지르밟으며 깊은 곳까지 걸어들어온 이의 발소리는 오히려 유쾌하기까지 하다.

뚜벅. 뚜벅. 뚜벅.

그런 그의 거침없는 발걸음이 복도의 끝에 다다라 작은 홀에 도착했을 때.

화르르륵...!

비로소 그의 모습이 화로의 불빛 아래 어둠 밖으로 쫓겨난다.

적갈색의 머리 위에는 황금으로 번쩍이는 제관이,

또한 그 어깨 위로는 붉은 보석을 녹여내 실로 뽑아 지은 것 같은 두꺼운 망토가 황금 자수로 장식되어 발밑까지 늘어뜨려져 있다.

그의 차림은 이 거대한 황궁의 주인이 아니고서야 설명이 되지 않는 화려한 행색이다.

까드득.. 까득.

문득 단단한 무언가가 잘못 맞물려 내는 괴로운 소리가 들려온다.

".. 슬슬 움직여 준다면 좋을텐데."

보석과 황금으로 번쩍이는 반지들을 열 손가락 모두에 끼워둔 그는 의미모를 중얼거림을 내뱉곤 다시 한번 주먹을 움켜쥐어 보이더니 반지를 서로 맞물려 습관처럼 소리를 낸다.

까드드득... 까드득.. 까득..!

그의 앞으로 보이는 홀에는 여태까지의 것들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의 일곱 개의 조각상들이 하나같이 중앙을 향해 바라보고 있었는데,그중에서도 그가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서서 올려다보고 있는 것은..

"... 아아."

벌거벗은 여인과 소년의 시체로 쌓아 올린 왕좌 위에 인간의 몸과 돼지의 머리를 한 괴물이황금 자수가 새겨진 망토를 두르고왕관을 쓰고 앉아 있는 형상의 조각상이다.

돼지의 흐리멍덩한 눈동자와 입가에 흘러내리는 침까지 표현되었으며,목 아래 여러 겹으로 뭉친 살집과 옷 밑으로는 욕망을 삼킨듯한 지저분한 뱃살도 조각되어 있다.

그는 이 기분 나쁠 정도로 정교한 조각상이 마음에 들기라도 하는 것처럼 멍한 눈빛으로 한참을 바라보다, 드디어 움직임을 보인다.

끼릭.

그그그그그그그극...

그가 돼지의 손에 쥐어진 화려한 술잔을 가볍게 쥐고 반바퀴를 돌리자 놀랍게도 조각상의 바로 옆의 벽면이 안쪽으로 돌아가더니 사람 하나가 들어갈 수 있을만한 크기의 어두운 통로가 모습을 드러내었고,그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그 어둠속으로 자신의 몸을 들이밀었다.

뚜벅. 뚜벅. 뚜벅.

까드드득... 까드득..

그는 자신의 황금과 보석의 빛을 모조리 앗아가는 이 좁고 어두운 통로를 걷는 것이 무섭기는커녕, 즐겁고 기대된다는 것처럼 발걸음을 서두르고 있다.

뚜벅.. 뚜벅..뚜벅...

.. 그렇게 이 짧은 통로가 끝났을 때,

그는 익숙한 침실에 도착한 것을 깨닫고 입이 찢어져라 해맑게 미소 짓는다.

통로와 마찬가지로 불빛 하나 없는 어두운 침실이었지만 그는 언제나처럼 그녀를 불렀다.

"... 어머니."

*

바실리카만큼은 아니었지만 날지 못하는 마물이라면 충분히 막아낼 수 있을 정도로 높은 성벽이다.

이런 벽이 왕도 전체를 감싸고 있다는 걸 떠올리면, 확실히 대단한 곳이다.

심판의 날 이전에는 아케라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던 왕국의 왕도답다는 감상이다.

그런 곳이니 만큼 기본에도 충실하여 성벽 주변으로는 몸을 숨길 수 있을만한 나무나 바위 따위는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

이유라면 당연히 수성을 용이하게 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이쪽이 접근한다면 먼저 발견될 수밖에 없었으니 애초부터 잠행은 포기하고 성문과 이어진 가도를 따라 걷고 있었던 거지만..

"흠.. 이건 예상 밖인데."

성벽 위는 드문드문 횃불이 밝혀져 있기만 할 뿐 지키는 병사 하나 보이지 않는다.

멀리에서부터 의아했지만 이렇게 가까이 다가갔음에도 성문은 물론 성벽 위에도 사람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게 많은 난민들이 어떻게 모르부스 밖으로 도망칠 수 있었는지는 이제 알겠다.

하지만.. 황제는 그들이 도망치는 걸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건가?

바실리카와 가장 가까이에 있는 북쪽의 성문이 이렇다면 다른 곳은 굳이 찾아가볼 필요도 없이 똑같을 테고..

스폴의 상단은 어떻게 문을 드나들고 있는지 문득 궁금해졌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처음 계획대로 움직이는 게 나을 거라는 판단이다.

"실비아, 벽을 뛰어넘을 거다."

내 등 뒤로는 여전히 관이 사슬로 묶여있었기에 자세를 숙이고 앞으로 두 팔을 내밀자 소녀는 익숙한 듯 내 곁으로 다가와 내밀어진 팔에 몸을 기대어 온다.

작은 마을을 나선 이후로부터 계속 나를 힐끔거리고 있는 게 조금 신경 쓰이기는 했지만, 여태껏 했던 것처럼 그대로 안아들었다.

"으앗.."

가볍게 들어올려진 소녀의 허벅지 아래를 받치고 있는 팔에 부드러운 꼬리가 살랑거리고 있는 게 느껴진다.

"단단히 붙잡아, 많이 흔들릴 테니까."

".. 으응..."

가슴께에 얌전히 모으고있던 두 팔로 내 허리를 끌어안고 얼굴을 파묻어오는 소녀.

내가 그녀를 제대로 붙잡았는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확인한 다음, 고개를 들고 착지할 위치를 어림잡아 쟀다.

.. 벽을 넘기 위해 필요한 장비같은 건 준비해 오지않았다.

하지만 바실리카처럼 하늘 위를 모조리 뒤덮은 결계같은 게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놓치지 마."

나는 그대로 요동치는 신성한 기운을 전신과, 특히나 두 다리에 가득 실었다.

꾸궁...!

은총에 강화된 두 다리가 강하게 바닥을 밀어내는 힘에 못 이겨 땅이 짓이겨져 어긋나는 커다란 소리와 함께, 욱신거리는 발목과 무릎만큼이나 나는 빠른 속도로 벽면을 따라 솟아오르고 있었다.

쐐애애애애애액..!

바람에 사제복이 시끄럽게 펄럭거리다 그 소리가 점차 멎어갔을 때쯤에는 충분히 속도가 늦추어져 있었고 눈앞에는 어느새 그 높은 성벽의 꼭대기가 보인다.

턱..!

철그럭..!!

여유로운 체공시간 덕분에 늦지않게 멀쩡하게 돌아온 두 다리는 가볍게 성벽 위로 착지해 낸다.

의도한 대로 횃불의 불빛이 가작 적게 닿는 곳에 정확하게 올라설 수 있었던 나는 먼저 성벽 위를 살폈다.

"..."

바실리카의 사절단과 관련해서는 좋지 않은 소식들뿐이었으니 굳이 찾아가 위험한 환대를 받을 생각은 없었고,방금 전의 큰 소리를 듣고 뒤늦게라도 병사들이 달려올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었지만...

그런 경계가 무색하게도 아래에서 봤던 것처럼 성벽 위는 깨끗하게 비어있을 뿐이다.

"후.."

내려가는 건 병사들이 이용하는 길을 찾으면 될 테니 우선 실비아부터...

"..?"

"..."

"실비아..?"

성벽 위로는 무사히 도착했지만 여전히 내 허리를 끌어안고 얼굴을 파묻고 있었던 실비아의 귀가 내 부름에 제대로 쫑긋거리며 반응하는 걸 보며 잠시 의아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팔에 힘을 푸는 시늉을 하니 그제서야 두 팔을 풀고 옆으로 내려선다.

내 시선을 피해 성벽 너머의 풍경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건.. 설마 부끄러워 하고 있는 걸까?

"..."

뭐, 그럴리는 없겠지.

"... 엄청 커다란.. 마을."

소녀는 어느새 눈앞에 나타난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늘어져 있는 성벽과, 그 넓은 안쪽으로 빽빽하게 들어서 있는 주거구역을 바라보며 놀란 눈빛을 숨기지 못하고 있다.

엘프들의 지하 요람도 수인들의 주거구역까지 본다면 상당히 넓은 편이었지만, 이곳 모르부스와는 비교할 수조차 없다.

저 멀리.. 도시의 중앙 부근에 다른 곳보다 솟아오른 고지대에 위치한 저곳이야말로 왕궁... 지금은 황궁이겠다.

"살아남은 이들이 가장 많은 곳이니까."

많은 이들이 살고 있었던 만큼이나 이름없는 묘비아래 묻힌 이들의 수 역시도 많았겠지만 말이다.

"응.. 그런데 너무 조용해서..."

".. 음."

확실히, 소녀의 말대로 당장 발아래로 늘어져 있는 집들만 수십 채였지만 이 근방은 너무나도 조용하다.

사실 이 근방이라고 할 것도 없이 이 커다란 도시 전체에 침묵이 내렸다.

잠들어 있다기보다는..

마치 숨죽이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이 조용한 분위기는 불편하고 어색하게까지 느껴진다.

"... 골치 아프게 됐네."

짐작가는 이유라면 역병과 저항군.

혹은 황제 본인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우선 사절단이 남긴 흔적을 쫓아야 겠지만그보다도 먼저 이곳의 현 상황을 제대로 파악해놓을 필요가 있다.

"일단 저곳부터 확인해 보자고."

"... 응."

소녀는 목에 묶여있는 하얀 천조각을 코 위까지 빈틈없이 가리도록 끌어올리곤 고개를 끄덕인다.

내 손가락 끝이 가리키고 있는 건 무언가를 태우고 있는지 이 어두운 도시에서 그나마 불빛을 만들며 거뭇거뭇한 연기가 하늘 높이 차오르고 있는 광장의 한 구석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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