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일행 출신 사제의 우울-111화 (111/137)

〈 111화 〉 19. 금빛 새벽을 불러오는 용사

* * *

19.금빛 새벽을 불러오는 용사(2)

한때 시끌벅적했을 넓은 광장의 분수대에는 물이 차있지 않다.

불빛을 필요로 하는 이들이 없음에도 광장을 환하게 밝히고 있는 가로등은 어디 하나 불안정하게 깜빡거리는 것 없이 빈 풍경 속에 틀어박혀 오히려 어색한 느낌으로 거리를 밝히고 있다.

이곳, 성당에서 멀리 떨어진 광장까지 한참을 더 걸어온 다음에야 나는 소녀에게 휴식을 제안할 수 있었다.

"..."

소녀의 고향이라 할 수 있을 트라사에서는 적어도 동족 포식의 참상이 벌어지지는 않았었다.

아무래도 충격이 적지 않은 모양인지, 분수대에 걸터앉아있는 소녀는 여전히 풀이 죽은 모습이다.

저대로 홀로 계속해서 생각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도 마냥 나쁜 선택은 아니겠지만, 지금은 내 한 마디가 더 필요해 보인다.

다만.. 나는 사과 다음으로 위로가 그 누구보다도 서투른 사람이라서 말이다.

".. 네 생각은 어때, 어떻게 하면 그들을 구할 수 있었을까."

담담히 묻자 소녀는 그제서야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올린다.

죽음에 내몰린 약자는 이웃의 얼굴을 한 시체를 태우다 힘없이 스러지고,

허기에 잡아먹힌 짐승들은 더 이상 인간을 자신과 같은 존재로 여기지 않게 되었다.

식량 부족에 모자라 그 위로 끼얹어진 역병은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는 것을 부정하고.. 떨어뜨렸다.

나와 소녀는 이미 늦고 만 것이다.

"... 모르겠어.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럴 수밖에.

나만 하더라도 그 이상으로 내가 할 수 있었던 게 대체 뭐가 있었는지 모르겠다.

"나도 비슷한 고민을 할 때가 있었지, 어떻게 해야 내가 더 잘 할 수 있었을까 하고."

내가 그때 더 노력했다면, 이런 결과를 맞게 되지는 않았을 텐데 하고,

늘 최선을 다했음에도 더 해내지 못한 것을 후회해 왔다. 후회로 가득 점철된 여정이었다.

역귀라는 이름이 어울리는 그 움직이는 시체들에게는 무엇도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지만, 그럼에도 나는 무언가를 선택할 수 있는 상황이 마냥 유쾌한 것도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다.

선택받는 그 다른 한 편에서는 항상 포기하게 되는 무언가가 있었으니까.

차라리 내게 선택지라는 게 없었으면 하고 바랄 때가 있었을 정도다.

그들에게 있어 이건 내 배부른 소리겠지만..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이유는 늘 후회할 수밖에 없었던 결말의 반복에 지쳐버렸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구해낸 이들보다도, 구해내지 못한 이들이 더욱 눈에 밟혀서... 도저히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어."

쳐다보지 않으려 해도 그들의 억센 손이 내 발목을 잡고 늘어진다.

자식을 잃은 부모의 시선을,

부모를 잃은 자식의 시선을,

사랑하는 이를 잃은 이들의 시선을 하나 둘 지나쳐가다 보면... 어느 순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나는, 결코 이들을 구할 수 없었구나 하고.

처절한 무력감이 사슬처럼 나를 옭아매 왔다.

구우욱..

"아..."

"에단은.. 나를 구했어."

소녀는 내 옷자락을 꾹 잡고 늘어뜨린다.

이건 위로의 표현인 걸까?

"... 그래."

내가 구해낸 이들이 분명히 있다고, 그렇게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내가 구해낸 이들을 지키려고 하고 있었다.

이쪽에서 위로를 해줄 생각이었는데 말이지..

이래서야 완전히 내 의도와 달라져버렸다.

하지만 이대로 입을 다무는 것도 어색했던 만큼 나는 소녀에게 해주려던 말의 마무리를 짓기로 했다.

"내게 모두를 구할 수 있는 그런 편리한 능력은 없어."

"..."

".. 하지만 이미 놓쳐버린 것에 대해 후회하고, 또 후회하면서... 후회하기만 할 뿐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구할 수 있는 것조차 잃어버리고 말아."

이 가혹한 운명은 상당한 피로를 내게 안겨주는 것이었다.

슬프고, 고통스럽고, 후회스럽고, 절망스러워서 증오가 차올라 모든 걸 다 놓아버리고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 조차도 나는 앞으로 계속해서 나아가는 걸 멈출 수 없었다.

일종의 저주처럼, 내 발목을 붙잡는 이들이 점차 늘어감에도 오히려 처음보다 굳건히 발걸음을 옮겨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반드시 더 크게 후회하게 될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신탁의 선택을 받아 세상을 구원해야 하는 용사 일행이기 때문에.

... 하지만 나는 어렴풋이 느낀다.

이 고된 여정의 가장 앞에 선 것이 내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내 눈앞에는 항상 누군가의 등이 있었다.

수많은 갈림길 앞에서도 나를, 우리를 이끌어주던 든든한 누군가의 뒷모습이..

그래...

".. 용사라면 모를까."

입이 멋대로 중얼거리며 머릿속의 말들을 꺼내놓는다.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어 누르며 이곳까지 온 본래의 목적을 상기시켰다.

"용사..."

그래, 그렇다.

나는 신탁의 용사가 이곳 어딘가에 있을 거라고 짐작하고 있다.

스폴을 떠나 베헤멘티아에서 목적지로 삼을만한 곳이라고는 바실리카와 모르부스 이외에는 없었으니까.

용사의 타고난 전투능력과 그 강인한 육체, 그리고 올곧은 정신은 사악한 붉은 용과도 홀로 대치할 수 있을 만큼이나 대단한 것이었다.

"나는 모두를 구하지 못해. 하지만 이곳에 용사가 와 있다면, 그를 찾는다면.. 아?"

반가움..? 혹은 기쁨일까? 나는 이유 모를 고양감에 홀로 흥분하여 중얼거리다 다시 한번 내 옷소매를 잡아당기는 소녀의 손길을 느끼고 나서야 입을 다물었다.

"에단, 나는.. 용사가 아니야."

"..?"

당연하기에 오히려 더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말을 내게 건네온 소녀에게 의문 섞인 시선을 옮겨 놓았지만, 보이는 눈동자는 선명한 진은색을 담아 확고한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그러니까.. 나도, 에단처럼 모두를.. 구하는 건 할 수 없어."

"실비아?"

"그래도.. 내가 앞으로 더 강해지면.. 많이 강해지면, 모두를 구하기 위해서.. 뭐라도 해 볼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

아직까지는 제 몸 하나 지키는 것도 벅찬 주제에, 용사도 아닌 소녀가 저런 말을 하는 것은 오만으로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어쩌면 이건 겪어본 자와 겪어보지 못 한자의 차이인지도 모르겠다.

모두를 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후회하는 것이 두려운 나와,

모두를 구하기 위한 첫 번째 시도라도 해보기 위해 강해지고 싶어 하는 아직 어린 수인 소녀.

분명 언젠가 무너질 거라고, 후회하게 될 거라고.. 입안에서 맴도는 이 말을 차마 이 소녀의 앞에서는 할 수 없었다.

그 이유는 또 어째서일까.

"..."

첫 번째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면 두 번째 시도를,

그 두 번째 역시 실패로 돌아가면 이 소녀는 세 번째를, 그리고 네 번째를, 다섯 번째를 위해 노력하여 준비할 것이라고 내가 은연중에 느끼고 있기 때문인 걸까.

.. 적어도 이 소녀가 왜 당장 이런 말을 했는지는 알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도 이 소녀도 용사가 아니었고,

"... 그래, 지금 당장 이곳에 용사가 있는 것도 아니니까."

"응."

원래의 답하기 곤란한 주제로 돌아오게 되는 것이었지만, 분명 필요한 것이기도 했다.

조금 부끄럽기까지 하다.

그럼에도 소녀가 이젠 기운을 차린 모습을 보면, 괜히 이야기를 꺼낸 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어떻게 한다."

동부지구의 상황이 어떤지는 대략 짐작이 갔던 만큼 일단은 노인이 말해준 남부지구를 향해 대로를 따라 마냥 걷고 있었다.

헛된 저항을 구경하는데에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대화가 통하는 이들과 만나게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에서였다.

게다가 사절단은 저항군에 가담했다는 죄목으로 처형당했다는 이야기를 방금 그 사내에게 듣고 오는 길이었으니,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사절단의 생존자는 현재 저항군과 함께 있을 가능성이 높다.

철걱, 철그덕..

슬슬 움직이자는 생각에, 잠깐 풀어놓았던 사슬을 다시 조이고 일어난 내가대로를 따라 광장으로 쌀쌀한 바람이 불어드는 것을 느끼며, 소녀의 후드를 막 눌러씌워 주었을 때였다.

흠칫.

"...!"

나와 소녀는 거의 동시에 몸을 긴장으로 굳혔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뭔가 다른 행동을 섣불리 취할 수는 없었다.

휘오오오....

스스사사사삭..

이번에는 조금 더 세게 불어온 바람에 쓰레기 따위가 바닥에서 쓸려 다니는 소리가 들려오고,

곧이어 옷자락이 펄럭거리는 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온다.

"... 냄새."

바짝 마른 한 마디를 툭 내뱉은 소녀는 떨고 있지 않았다.

아니, 팔 하나.

허벅지의 단검집 위로 어느새 올려둔 손 하나만큼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아우우우우우우­!"

마치 누군가에게 신호라도 주는 것처럼 하늘 위로 한차례 길게 늑대의 울음소리가 뻗어져 나가고,

골목 사이사이로 그 소리가 갈라지고 퍼져나가고 있을 때,

나 역시도 천천히 고개를 돌려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바라보았다.

"..."

그곳에는 검붉은 로브를 입은 두 괴인이 가로등의 불빛 아래 나란히 서서, 이쪽으로 후드 아래의 누런 안광을 번뜩이고 있었다.

곧바로 달려들지 않는 둘을 경계하며 광장 주변을 신중하게 살폈다.

여태 걸어온 방향에서 나타난 저들이 누구인지는 검붉은 로브가 아니더라도 소녀의 반응만으로 충분히 눈치챌 수 있다.

지크프리트.

적룡교의 대주교이자 순혈자인 그 상식밖의 괴물을 따르는.. 동포라 불리던 이들이다.

그러나 그때처럼 수가 많지는 않다는 점이 유일한 위안거리다.

고작해야 둘,

그렇다면 방금 그 울음소리는 분명 위치를 알리기 위한 신호이리라.

"뛰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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