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일행 출신 사제의 우울-112화 (112/137)

〈 112화 〉 19. 금빛 새벽을 불러오는 용사

* * *

19.금빛 새벽을 불러오는 용사(3)

"햐악.. 햑...!"

검붉은 로브 자락이 펄럭거리는 소리는 등 뒤를 바짝 쫓아오고 있었고,

소녀의 호흡은 점점 차오르기 시작했다.

소녀는 맨몸, 내 경우에는 커다란 관을 등에이고 있기는 하지만 이런 달리기 쉬운 대로에서는 내 속도를 엇비슷하게 따라오는 수인의 뛰어난 신체능력이 엿보인다.

그렇다고 그것이 아직 어린 소녀에게 기대할 수 있을 만큼이나 만능도 아니었기에 체력이 곧 고갈된다는 것을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는 소녀의 뜀박질 동세가 말해주고 있다.

거리는 그리 쉽게 좁혀지지 않았지만 이런 대로를 쭉 달리는 걸로는 저들을 결코 떨쳐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골목으로 들어가는 것 역시 위험이 뒤따른다.

이곳의 지리에 익숙하지 않을 뿐더러, 언제 어디에서 저들의 동료가 모습을 드러낼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

잠깐.

그제서야 가슴속으로 밀려들어오는 서늘한 기분에 나는 급박하게 도망치는 와중이었음에도 고개를 뒤로 돌려 쫓아오고 있는 그들의 모습을 살폈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저 검붉은 로브를 보고 일단 도망치기는 했지만, 어째서 저들은 기습하지 않고 굳이 가만히 서서 기척을 흘려준 걸까.

마치 도망가 보라는 것처럼..

하지만 그런 게 아니라면?

조금만 더 침착하게 생각해봤다면 분명 이상한 점이 한 두가지가 아니라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건...

설마 몰고 있는 건가?

터업..!

"햑..?!"

그렇게 생각하니 이젠 그들이 그다지 전력으로 달리고 있는 것 같지도 않다는 느낌까지 든다, 그렇기에 비틀거리다 곧 넘어질 것만 같은 소녀를 한 팔로 안아들고 나서는 아예 확신했다.

방금 그 잠깐의 내 큰 동작 탓에 거리는 훨씬 줄어있어야 했지만..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것처럼 저들은 가까워지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엄습해오는 불안감에 곧장 주변의 수많은 어두운 골목들로 눈알을 굴리며 몸의 방향을 튼, 바로 그 순간이었다.

"....!!!"

꿍­!!

쿠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광....!!!!

몸이 위로 붕 떠오르는 듯한, 아니라면 딛고 있던 바닥이 갑작스레 아래로 꺼진 듯한.

그런 느낌을 받으며 공중에서 헛 발질을 두어 번 할 즈음에는 이미 거대한 굉음과 충격파가 전신을 덮쳐들었고...

눈 한 번 깜빡이기도 힘든 짧은 시간 만에 하늘과 바닥이 뒤집히고 건물의 잔해가 하늘 높이 솟아오르는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쿠구구구구구구구구구구구구구구구구구궁....!!

쿠두두두둑..! 쿵­! 쿠궁!!

"컥...!"

하늘과 땅이 몇 번을 더 뒤집히고 나서야 갈라진 땅덩어리 위로 떨어져 내린 나는, 눈앞으로 쏟어져 내리고 있는 크고 작은 건물 잔해들을 발견하고 늦지 않게 신성 보호문을 앞으로 펼쳐낼 수 있었다.

쿠궁­! 쿵­!

쿠구구구구...

"... 실..비아.."

".. 커훅, 켁..! 콜록콜록."

하늘 높이 떠올랐다 바닥에 곤두박질치게 된 반동으로 놓쳐버리기는 했지만 다행히 바로 옆에 몸을 웅크리고 있는 소녀를 보고 일차적으로는 안심했다.

분명 눈앞으로는 대로가 펼쳐져 있었고 거리는 환하게 밝혀져 있었지만... 지금은 온통 어둡기만 하다.

"대체 이건... 콜록, 커흑."

목을 거칠게 긁어대는 것뿐만 아니라 안면으로 충분히 자욱하다 느껴지는 흙먼지 때문이라기에는.. 이 한 번의 폭격은 이 근방의 빛 한 줌 남기지 않은 모양이었다.

마법 폭격? 아니라면 함정이 마련된 위치까지 나를 유인한 건가?

어둠이 가라앉듯.. 높게 솟아오른 먼지 구름도 시간이 지나자 바람에 흩어져 가고,

나는 어느 정도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고 나서야 그야말로 움푹 파여들어간 대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깨진 거울을 보는 것처럼 쩍쩍 갈라져 뒤집히고 무너져내린 땅,

잘라놓은 석재를 그 위로 빼곡하게 채워두었던 대로나 가로등.. 2층, 3층 건물들 까지도 지금은 수많은 잔해들의 일부가 되어 바닥에서 나뒹굴고 있다.

"..."

한순간에 대로를 낀 시가지가 초토화되어버린 비현실적인 광경에 한숨이 목 중간에 턱 틀어막히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멀지 않은 가까이에서 내 뒤를 바짝 쫓아오던 둘 역시도 몸 위로 떨어져 내린 거대한 잔해를 밀쳐내고는 비적비적 몸을 일으키고 있는 게 보인다.

"실비아, 일어설 수 있겠어? 지금 도망쳐야.."

".... 도망칠 수 없어."

".. 실비아?"

네발로 바닥을 짚어서야 겨우겨우 땅바닥에서 몸을 떨어뜨린 소녀는 이전보다 훨씬 더 큰 두려움에 간신히 저항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확실한 반응에는 드디어 내게도 짐작가는 바가 있다.

"..."

그리고 그제서야 나는 아직까지 일렁이는 흙먼지 저 너머로...

이 거대한 구덩이의 정중앙이라고 할 수 있는 타격점에 두 발로 서있는 거대한 덩치의 실루엣과, 흉흉한 안광이 붉은빛으로 번뜩이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르르르..."

짐승의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섞인 거친 목소리가 장내를 진동시키고, 나는 무력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놈과의 첫 만남을 떠올리며 몸이 굳어지는 것을 느낀다.

".. 발견했다는 게 이쪽이었을 줄이야, 인사치고는 조금 과격했겠어. 틀림없이 용사 놈이 드디어 꼬리를 드러냈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저벅, 저벅..

"나참 우습군 그래, 도망쳤던 네 놈들이 제 발로 사지에 기어들어올 줄은 몰랐거든."

저벅... 저벅, 저벅.

"그 성가신 귀쟁이 년은... 음, 보이지 않고."

당장이라도 일어나 실비아를 데리고 도망쳐야 했지만 그게 불가능하다는 걸 몸과 머리가 모두 확신에 가깝게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굳어진 몸은 쉽게 내 의지에 따라주지 않는다.

"그나저나.. 벌써 그렇게들 뻗어버려서야 싸우러 온 내가 곤란하다고."

.. 왜 모르부스에 이놈이 있는 걸까.

... 게다가 당장 찾고 있던 건 내가 아니었다는 것처럼 이야기했었다.

물론 당장 날카로운 손톱을 길게 빼내들고 있는 저놈의 앞에서 지금은 해봤자 하등 쓸모없는 생각들이었지만..

지금의 나는 그것 이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 그래도 잘 됐군, 분명 말했었지? 나를 적대한 자는, 그 누구든 살려두지 않는다고 말이다. 어린 동포야."

"흑.. 햐악.."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와 숨통을 조여드는 흉포한 기세로 실비아를 위협하고 있는 놈을 올려다보며, 나는 그럼에도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이브의 도움 없이, 지금 이 자리에서 실비아를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을 말이다.

하지만 도저히 머릿속에서는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두통으로 머리가 짓이겨질 만큼이나 이 상황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을 떠올리려고 해도, 저 괴물과의 압도적인 힘의 차이는 그것이 불가능하게끔 눈 앞에 절망을 들이밀고 있는 것이었다.

하늘 높이 뛰어올라 힘껏 내려앉은 것만으로도 시가지를 박살 내놓는 상식 밖의 괴물은 그야말로 규격 외의 변수다.

".. 네가 원하는 건 나일 텐데..."

그렇기에 나는 놈의 목적을 들먹이며 관심을 끌 수밖에 없다.

"킁킁, 음..? 그래, 인류 배반자 에단. 네놈을 척살하는 게 적룡교의 머리로서 내가 해야 할 일이기는 하지.. 그런데 어째 조금 바뀌었군."

"뭐..?"

".. 심장박동, 호흡의 주기, 시선, 이제 막 이마 위로 돋아나고 있는 땀방울까지... 그리고 이 냄새는, 그런 거로군? 그흐흐흐.."

섬뜩한 핏빛으로 나를 꿰뚫어 보고 있는놈의 눈동자는 확신으로 가득차있다.

재밌다는 듯이 손톱의 끝으로 나를 가리키며 킬킬대던 놈은 지금 이 순간 내가 가장 듣고 싶지 않았던 말을 내뱉고 만다.

"네놈은.. 이 아이를 어떻게 해서든 살리고 싶어하고 있어. 이상하군, 다른 인간들과는 달라. 그건 네가 인류 배반자이기 때문인가? 크하하...!!"

자신이 생각해도 재밌는 농담이라는 것처럼 걸쭉하게 웃은 놈은, 이미 주변으로 퍼뜨리는 기세가 이전에 만났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이나 거대해져 있었다.

이미 한번 말한대로... 놈은 놀아주기 위해서가 아닌, 싸울 준비를 모두 마치고 이곳까지 온 것이었다.

"크후흐, 별난 놈 같으니.. 하지만 내가 한 번 내뱉은 말이 번복되는 일은 결단코 없다."

"나는, 이 소녀만큼은 지켜내야 해... 네가 원하는 건 나잖아? 너에게.. 굴종하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석..! 서걱...!

투둑,

촤르르르르르륵!!

쿵....!

"....!!"

가볍게 손짓이라도 하듯 휘둘러진 놈의 손가락 하나에 나는 양쪽 어깨 바로 아래로 극심한 열통이 차오르는 것과 동시에 어깨에 묶어놓듯 하던 사슬까지 잘려 관이 바닥에 떨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윽... 크윽....!"

내가 한 말의 어디에 어떻게 자극이 되었는지는 몰라도 나를 향해오는 눈빛이 놈의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게 싸늘하게 식었다는 점에서.. 소녀에 대한 관심을 잠시나마 떨어뜨려 놓을 수는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놈은 차갑게, 몹시 차갑게 분노한 듯 보인다.

".. 이 아이를 지키겠다고..? 네놈처럼 약해빠진 녀석이 무언가를 지키겠다고 말하는 거냐...!! 게다가 굴종이라니, 하! 어리석구나. 네놈은 참으로 어리석어."

"..."

"약자에게는 그 어떤 선택지도 주어지지 않아!! 약자는 언제나 강자에게 빼앗기고 또 빼앗기면서..! 끝내는 제 목숨과 미래까지도 빼앗겨 비참한 말로를 맞게 될 뿐이다...!!"

놈은 피가 멎고 이제서야 뼈가 돋아나고 있는 내 양팔을 보면서 비식 웃고는 높게 손을 들어 올린다.

"그럼에도 간절하다면.. 어디 한 번 지켜봐라. 감히 내 앞에서 굴종을 입에 담은 네놈에게 주는 절망이다."

그리고 천천히 놈의 손톱은 아직도 일어서지 못하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소녀에게로 떨어져 내리고 있다.

두 팔이 완전히 재생되기까지를 기다려서는 늦는다.

".. 편하게 머리를 조아리고 그저 바라기만 해서는 살아있을 가치가 없다. 투쟁할 가치조차 없다."

"가호를...!"

챙강!

"그림자를 걷어낼 의지를..! 끄윽.."

쩌적...! 챙강!!

제대로 시간을 가지고 시전한 신성 보호문조차 놈의 날카로운 손톱을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나는 무의미하게 저항을 하고, 꼴사납게 울부짖었다.

"빼앗기고, 울부짖어라. 그 절망과 분노를 불태우고, 내게 다시 한번 그때처럼 전사의 눈동자를 보여라."

"젠장...!!! 젠자앙...!!"

환희로 번들거리는 놈의 눈동자를 보며 나는 깨달았다.

이래서야 달라질 게 없다.

또다시 이브가, 혹은 또 다른 누군가가 구해주기를 바라서는 안된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건,

지금 저 소녀를 구할 수 있는 건...

오직, 나뿐이니까..!

"크흐윽..!!"

유일하게 움직일 수 있는 두 다리를 움직였다.

놈의 손톱 아래로 망설임 없이 뛰어든 내가 소녀의 목덜미를 이빨로물어 옆으로 내던지고 중심을 잡지 못 해 예정된 죽음 아래로 넘어지자, 마치 지렁이가 꿈틀거리는 듯한 나의 이 추한 저항을 놈은 마음에 든다는 듯이 히죽 입꼬리를 끌어올린다.

".. 에단...!"

하지만 기껏 떨어뜨려 놓은 소녀는 다시 그 덜덜 떨리는 팔과 다리로 이쪽으로 기어와 내 옷자락을 잡고 놈의 손톱 아래에서 어떻게든 벗어날 수 있게끔 당기려 하고 있다.

"... 떨어져..! 이대로 있으면.. 너까지.."

쿵! 쿵! 쿵! 쿵! 쿵!

이대로 나와 소녀를 단번에 베어버리려는 것인지, 잘 벼려진 눈빛으로 이쪽을 내려다보며 손톱의 날을 세운다.

두 팔의 매개도 없이 신성 보호문을 억지로 쥐어짜내기 위해 끌어올린 은총 때문일까, 심장이 찢어지는 듯한 격통과 함께 거칠게 날뛰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이래서는... 이래서는..

쿵...! 쿵...! 쿵...! 쿵...! 쿵...!

"그래. 굴종하는 가축이 되어 살아남느니, 비참한 꼴로 폭력에 저항하는 한 마리 짐승인 채로 죽어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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