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4화 〉 19. 금빛 새벽을 불러오는 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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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금빛 새벽을 불러오는 용사(5)
내 손을 맞잡는 것은, 투박하고 거친 영웅의 두 손이다.
"에단, 늘 그렇게 미안해하지 않아도 괜찮아."
"하지만.."
내 손을 감싼 그의 손에 구욱 하고 힘이 들어갔기에 나는 잠시 멈칫했지만, 그럼에도 하려던 말을 도로 삼키지는 않았다.
"... 우리는 같은 일행이지만, 항상 가장 앞에 나서서 다치는 건 너뿐이니까.."
"하하.. 너는 늘 그랬지. 그래서인지 나는 이렇게 싸울 수 있는 것 같아."
"노아..?"
굳은살투성이의 거친 손바닥과는 어울리지 않게 아직은 앳된 티를 다 벗지 못 한 순박한 얼굴로.. 그는 내게 밝게 웃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에단, 이전에 내게 물었었지. 내가 이렇게나 노력한다고 해서 그들이 알아줄 것 같냐고... 날 위해서 대신 화를 내줬잖아."
"..."
"하지만 나도 알고 있어. 그들은분명알아주지 않겠지."
".. 노아."
그는 손바닥으로 내 손등을 가볍게툭툭두드려주고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치유는 진작에 끝났기 때문이었다.
다시 싸우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그 누구보다 전투에 있어서 뛰어난 그가 늘 이렇게 다치는 이유는... 다름아닌 우리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럼에도 그는 이렇게 말해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내겐 너희들이 있어. 내 노력을 알아주는 너희들이 있기 때문에... 나 역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거야."
*
"..."
꿈을 꾼 것 같지만, 그 기억이 나지 않는다.
물론 이런 일이 한두 번도 아니었고 기억해내려 머리를 쥐어짜낸다 해서 되는 게 아니라는 것까지도 알고 있었던 나는 과감하게 미련을 떨쳐내고 주변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집중했다.
"적룡교와 엮여서 좋을 일은 없습니다. 게다가 시체나 다름없는 이를... 이젠 묻을 땅도 부족하지 않습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줘, 나도 거사를 앞두고 불안요소를 껴안고 갈 생각은 없어.'
"잔느.."
들려오는 목소리는 어째서인지 또렷하지 않다.
내가 있는 장소는 어떤 방안인 걸까.
슬슬 눈을 떠봐야겠다는 생각에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보이는 건 지하실인지 창이 나지 않은 돌벽이다.
그에 어울리는 눅눅한 먼지 냄새를 이제서야 맡을 수 있었고,
옅은 빛을 따라 자연스럽게 옮겨진 시선에는멀쩡히 있는 화로에 불꽃 대신 빛을 다 잃어가는 작은 수정 조각들 여럿을 폐병에 담아 놓아둔 것을 볼 수 있었다.
"...?"
그렇게 주변을 살피고 마지막으로 내 쪽으로 내려온 시선은 무언가 다른 것을 발견하고는 부자연스럽게 멈춰 선다.
그때그때 수선하는 것에 과연 의미가 있는지 이제와서는 알 수 없게 되어버린 피투성이의 사제복 위로 안기듯 잠들어 있는 작은 인영.
그것이 실비아라는 사실을 나는 그리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
실비아가 무사하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자 당연히 고개를 드는 의문은 누가, 그리고 어떻게 이다.
언뜻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그 환청 같은 목소리가 생각날 듯 말 듯 하며 머리가 깨질듯이 지끈 거렸지만.. 일단은 일어나 봐야 할 것 같았다.
"... 끙.."
다만... 당연하다는 듯이 내 말을 듣지 않는팔다리가나를 막아선다.
몸은 분명 제대로 재생되었을 거다. 이 저주가 그리 호락호락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확신했다.
그렇다면 어째서 움직이지 않는가?
결코 정상적이지 않은 무식한 방식으로 몸을 혹사시켜 부스러져나갈 때까지 그 고통을 삼켜냈기에, 내 정신이든 몸이든 아직 신호를 보내거나 답할 준비가 덜 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시도로 몸을 조금이나마 움찔거렸기 때문인지..
소녀의 귀가 쫑긋거리고, 이내 눈이 떠진다.
"에단...?"
수정 빛에 의지한 은은한 어둠 속에서 밝게 빛을 발하는 소녀의 두 눈동자.
동시에 내 허리를 끌어안고 있던 여린 팔에 힘이 들어간다.
"에단..! 미안해... 이번에도.. 몸이... 멋대로 움직이지 않아서.. 난..."
수인인 이상 태어났을 때부터 본능에 새겨져 있었을 순혈자에 대한 경외와 공포 속에서도, 소녀는 끝내 날카로운 단검 한 자루를 그에게로 집어던지는 기행을 저질렀다.
그것도 아주 절묘한 순간, 가장 필요한 때에 말이다.
"괜찮아. 네가 아니었다면, 그 한 번의 저항조차 해낼 수 없었을 테니까."
.. 이번에도 소녀는 내게 도움이 되어주었다.
"그래서.. 그 이후로 어떻게 된 건지 물어봐도 될까."
화로 옆으로 세워져 있는 저 배낭,
분명 그 검붉은 로브를 두른 이들과 조우하고는 그대로 분수대 앞에 두고 도망쳤던 걸로 기억하는데 말이다.
"용사님을 만났어."
"... 용사..?"
"정말.. 대단했어."
용사라는 말을 입에 담으며 그 순간을 떠올리듯 이야기하는 소녀의 눈동자는 선망으로 반짝거리고 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나는 그 한 편으로는 그녀가풀이 죽은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그 무서운... 괴물을 상대로.."
절망에 가까운 격차를 실감한 순혈자로도 이미 높은 목표였지만... 그 보다도 더 높은 벽이 눈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자신은 감히 따라잡을 수 없으리라는 생각이 드는 아득히 높은 위치를 그것도 직접 도움을 받으며 겪었기에 더더욱 자신의 무력감이 와닿는 모양이었다.
만약 나와 소녀를 구해준 것이 정말로 용사라면 소녀의 이런 반응이 이해되지 않는 것도 아니었기에 나는 잘 움직이지도 않는 팔을 어떻게든 뻗어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아무래도 이 행위를 마음에 들어 하는 것처럼 보였으니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손바닥 아래로 머리칼과 함께 스치는 뾰족한 귀의 감촉이 꽤나 부드럽다.
그리고, 이 짧은 대화는 밖에서도 들렸는지 문 너머에서의 대화가 끊어지고 이쪽으로 기척이 가까워 지고 있다.
"실비아. 누군가 오고 있어."
뚜벅. 뚜벅. 뚜벅.
소녀도 하나가 아닌 이 발소리들을 듣고는 귀를 움찔했지만 크게 경계하지는 않는 모습이다.
그렇다면... 지금 이쪽으로 오고 있는 이들이야말로..
"나쁜 사람들.. 아니야."
철걱,
소녀는 분명 나쁜 사람들이 아니라고 했지만, 방 안쪽이 아닌 바깥쪽에서 자물쇠를 여는 듯한 소리가 들려오고.
곧 문이 열리자 환한 등불을 앞세워 안쪽으로 들어온 것은 세 명의 이들이었다.
"..."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딜런과 견줄 수 있을 만큼이나 큰 덩치에 갈색 머리칼을 짧게 자른 남성이다.
그는나와 눈이 마주치자 잠깐 멈칫했지만자신의 의무를 다하듯 입을 다물고 등불을 나와 소녀에게로 비추며 안전을 확인한다음 옆으로 길을 비켜주었다.
그 호의를 기꺼이 받아 앞으로 걸어나온 것은 방금 전의 덩치 큰 남성 때문에라도 비교되어 보일 수밖에 없는 한 여성이다.
다만 그녀의 표정과 눈빛은 앞선 덩치를 압도하는 당당한 의지를 품고 있었기에 나는 그녀를 다시 보았다.
"반가워요. 제 이름은 잔느, 저항군을 이끌고 있는 이번 반란의 주동자입니다."
"..."
등 뒤로 적갈색의 머리칼을 질끈 묶어 늘어뜨린 여성은, 화장 따위는 물론 하지 않았으며 잠행복에 가까운 의상에 바지와 낡은 군화를 신고 있다.
다만 일부러 숯칠을 해둔 것만 같은 그녀의 피부가 어울리지 않게 고와 보인다는 어색함을 느낀다.
당장은 모르는 척 해야겠지만..
어쨌거나 자신이 저항군을 이끌고 있다는 것에 더해 반란 주동자라는 다소 자극적인 단어를 초면인 내게 굳이 내뱉는 이유에 대해 조금 더 의문이 생겼기에, 일단은 순순히 그 인사에 답하기로 했다.
"나는.. 에단... 콜록.."
물론 일으키려던 몸은 변함없이 거부반응을 보이며 꽉 막힌 기침을 내뱉는다.
"무리하면 안돼.. 에단, 심장 소리가... 엉망이야."
억지로 몸을 일으켜 세우려던 내 어깨를 붙잡고 다시 침대로 눕혀주는 실비아의 걱정스러운 눈빛을 한 번 살피고, 다시 저쪽을 바라보자 자신을 잔느라 소개한 그녀는 누운 채로 있어도 괜찮다는 듯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준다.
그리고 드디어.
"그리고 이쪽이.. 당신들을 구해준 용사님이십니다."
"...!"
그녀의 등 뒤에 서있었기에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내가 저들에게서 관심어린 시선을 뗄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저벅 저벅.
소개를 받아 옆으로 걸어 나와 모습을 드러낸 그는..
밝은 금발이 어울리는 순박한 얼굴과, 다소 어울리지 않는 다부진 몸을,
그리고 등 뒤로는 두 자루의 검을 교차하여 매어둔..
실비아가 줄곧 해주었던 용사일행의 이야기 속,
노아와 너무나도 닮아 있었다.
"... 반갑습니다. 에단."
그는 내게 인사를 건네었지만, 나는 한동안 그 인사에 대답하지 못하는 실례를 저지르고 말았다.
그에게서 도저히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사무치는 그리움이 어색하게 차오르면서도, 나 자신이 가지는 의문이 이를 막아서며 모호한 감정이 뒤섞여 휘몰아쳤기 때문이었다.
"으음, 제가 뭔가 실수한 걸까요..?"
그는 눈을 찡긋거리며 어색하게 웃고는 엄지를 아랫입술에 가볍게 가져다 댄다.
그의 모습보다도, 나는 저 습관이 너무나도 익숙했다.
누구의 습관인지 나는 결코 떠올릴 수 없었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이 다정다감한 목소리는... 그리고 저 유쾌하고자 하는 성격은.. 틀림없는 그의 것이라고 나는 근거도 없이 확신했다.
"하하, 그럼 일단 제 소개부터 먼저 할게요."
그리고 그런 내 확신에 고개를 끄덕여 주는 것처럼 그는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다.
"제 이름은 노아, 아직 미숙하지만... 많은 이들에게 용사라는 과분한 칭호를 이름 대신 불리고 있는 자입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