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일행 출신 사제의 우울-115화 (115/137)

〈 115화 〉 19. 금빛 새벽을 불러오는 용사

* * *

19.금빛 새벽을 불러오는 용사(6)

쐐애애애액...!!

쿠궁­!!

모르부스의 어두컴컴한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암청색의 그림자는 성당의 첨탑과 충돌하여 굉음과 함께 먼지 구름을 일으킨다.

쾅! 꾸궁...!

후두두둑!

꿍, 쿠구웅..!!

무너진 잔해와 함께첨탑의 안쪽으로떨어져 내린 커다란 덩치가 바닥을 깨부수는 소리는 성당 내부를 묵직하게 울렸고, 그를 뒤쫓던 그림자들은 서둘러 로브자락을 휘날리며 성당 안쪽으로 따라들어간다.

"... 크르르륵.. 크윽..."

깨진 바닥 위로 몸을 늘어뜨리고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는 그의 주변으로 로브인들은 일정 거리 이상 다가가지 않았고, 단 한 명만이 발걸음을 옮겨 그의 몸상태를 살핀다.

".. 이번에는 고집부리지 않고 물러서 준 것에 대해 고마워해야 하나? 지크."

"그르르르.. 발터..."

투쟁에 있어서 만큼은 절대 물러서는 선택지 따위는 없는 것처럼 행동했던 그가, 지금은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고 있다.

동포들의 앞에서는 차마 드러낼 수 없는 희열이 여전히 그의 피를 뜨겁게 달구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용사의 강대한 힘을 마주할 준비를 마치고 그 자리에 간 것이었던 만큼, 고작해야 신탁의 사제에 불과한 그가 자신과 거의 호각으로 맞서 싸우며 정해진 역할 이상의 것을 해낸 것은 정말이지 신선한 충격이었다.

... 놈과 다시 한번 제대로 싸워보고 싶다.

그리고 이 손으로..! 직접 끝장을 내고 싶다.

이런 충동들이야 말로 그가 순순히 발걸음을 돌리게 한 가장 큰 이유였을 것이다.

마지막 순간 방심한 끝에 독에 당해 한쪽 팔을 잃었지만 그는 이를 그리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 않는 눈치다.

투쟁에서 무언가를 잃는 것은 당연한 일일뿐더러,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고 그는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흐흐흐..."

용의 저주가 부여한 놈의 재생능력은 분명 대단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놈에게는 제대로 된 투지가 느껴지지 않았다.

이전에 대삼림에서 만났을 때만 하더라도 놈은 싸우는 것보다는 도망치는 것, 혹은 도망치게 만드는 것에만 집중했었으니까.

그러나 이번에는 아니었다.

아무리 신탁에 구속된 사제라 할지라도.. 진정으로 지키고 싶은 것이 생긴 수컷은... 그래, 강해질 수밖에 없는 거겠지.

"... 어때, 재생할 수 있겠나?"

발터라고 불려진 로브인이 그에게 상태를 묻자, 상체를 일으켜 주저앉은 지크프리트는 늦기 전에 스스로 잘라냈던 손목을 힘껏 부여잡고 한가득 인상을 찌푸린다.

설마하니 이 몸에 듣는 맹독이 있을 줄이야.

놈의 눈빛에서 끝장을 보겠다는 살의를 읽어내는 게 조금만 늦었다면, 그리고 판단이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아마 팔 한 쪽을 잃는 것만으로는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뿌득...! 뿌드득..!!

푸슈웃..! 푸흇!

"크르르륵...! 크헤르르르륵..!!"

재생을 시도하기 위해 쌓아둔 피를 끌어오자 손목주변으로 굵게 핏줄이 돋아나더니 이내팔 주변에진한 피의 안개가 솟아오르는가 싶었지만, 이는 구체적인 형상을 이루지는 못하고 그대로 공기중으로 흩어져 버린다.

기껏 지혈해둔 상처부위가 더 찢어져 피가 터져나왔을 뿐이다.

후두두두둑...!

뚝... 뚜욱,

"제길..."

생각대로 되지 않자 욕지거리를 내뱉는 그를 보며, 발터는 무덤덤하게 중얼거린다.

"그렇군, 동포의 뼈와 살점이 필요한 건가."

"... 크르르르.."

지크는 대답대신 담담한 그의 시선을 마주하며 미간에 생겨난 깊은 골을 더욱 선명하게 만들어냈을 뿐이다.

"...."

추락의 충격으로 이리저리 쓰러진 나무 십자가들 너머로 숨죽이고 있던 로브인들의 기척이 어수선하게 변해간다.

아마도 발터의 중얼거림을 들었기 때문인 듯 했지만...

그런 사이로, 로브인들 중 하나가 앞으로 걸어나온다.

"... 제가 함께하겠습니다."

함께하겠다는 의미모를 말과 함게 앞으로걸어 나온 이는 로브인들 중에서도 작은 체구에, 그 여린 목소리 덕에 여성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 도라..! 아니요, 제가 함께하겠습니다. 제가 함께하게 해주십시오!!"

한발 늦게 뒤따라 나온 남성은 그녀의 손목을 움켜쥐고 뒤로 잡아당기려 했으나, 여성은 쉽게 물러나지 않는다.

그런 그들을 중재하고 나선 것은 발터였다.

그의 목소리는 마치 감정이 없는 것처럼 무미건조하다.

어쩌면 그래야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도라, 동포들 중에서도 가장 피가 짙은 암컷인 네 역할은 이미 정해져 있다."

"..."

"그러니 헥터, 네 뜻을 받아들이지."

선고와도 같은 발터의 대답에, 남성은 안도감과 불안이 한데 뒤섞인 복잡한 얼굴로 그녀 대신 앞으로 걸어 나온다.

두 다리가 덜덜덜 떨리는 것도,

마른침을 삼키자 목울대가 요동치는 것도 그는 숨길 수 없었다.

"꿀꺽..."

그런 그의 앞으로 놓인 것은 한 쌍의 붉은 안광이다.

하지만 그럼에도,그는 부탁했다.

".. 반드시.. 저희 동포들의 투쟁을... 이어나가 주십시오."

"고맙군, 헥터."

"... 영광입니다. 순혈자시여."

남성의 몸은 주체할 길 없이 떨리고 있다.

순혈자를 앞에 둔 수인은... 그 누구라고 할지라도 이런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물러서지도, 주저앉지도 않았다.

"우리의 투쟁이 미래에 가져올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평화다."

투욱..

암청색의 털로 뒤덮인 지크의 커다란 손이 그의 어깨 위로 놓인다.

그러자 남성의 몸에서 떨림이 조금은 잦아드는 듯하다.

그는 두려워하고 있었다.

순혈자를 따르는 수인들에게 있어,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오직 하나뿐이다.

자신의 비참한 삶은 비록 가치가 없었을 지언정..

죽음 만큼은 과연 가치가 있는가.

"나는, 신탁을 단호히 거부하겠다."

지크는 그런 그에게 확신을 주려 하고 있었다.

"또한, 용의 의지를 따를 생각 따위도 없다."

사실 단순한 이야기다.

구더기처럼 우글대는 인간들을 자신의 날카로운 손톱에 몇 천명의 피를 묻히든, 몇 만명의 머리를 으스러뜨리든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불어나 타종족의 삶의 터전을 탐내고, 신뢰를 내어준 끝에 등에 칼을 꼽으며, 차별하고 핍박하며 심지어는 가축과 같은 노예로 부리려 든다.

놈들의 욕망은 지금껏 수도 없이 많은 전쟁을 일으켜 왔지만, 그렇게나 많은 무의미한 희생을 겪고도 그들의 욕망은 수천 년간 단 한 번도 그 추악한 형태가 바뀐 적도, 결코 사라진 적도 없다.

그러나 지금, 붉은 용의 겁화에 의해 그 어느 때보다 이 역겨운 놈들의 개체 수가 줄어든 것이다.

"모든 인간들을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만들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인류의 구원을 상징하는 신탁의 용사일행을 모조리 파멸시켜야 하지. 놈들이 모이기 전에... 반드시 구축해야 한다."

용사 노아의 실패 이후로 격화된수인들에 대한 핍박과, 불합리한 체계를 뒤엎는 것만을 그가 바라고 있었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그는 결코 변하지 않는 인간의 추악한 본성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고,

따라서 그가 내린 결론은..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을 구축하는 것이었다.

인간이라는 종을 아케라의 지도에서말끔하게지워내 버리는 것.

그것이야 말로 그의 투쟁이 바라는 결과였다.

단순하다면 단순했지만, 이 결론에 다다르기까지의 과정은 결코 단순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고 나면, 이 시끄러운 세상도 조금은 조용해지겠지. 개인과 개인 간의 순수한 힘의 투쟁만이 이 세상의 올바름을 나타내는 유일한 척도가 될 것이고, 너희들은 평화의 시대를 연 영웅으로 언제까지고 칭송받게 될 거다."

꽈아악!!

"...!!"

자신의 어깨를 으스러뜨릴듯 움켜쥐는 지크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헥터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동자에는 더이상 흔들림이 없었다.

뿌득...! 꾸드드득!!

울컥, 울컥!!

그의 커다란 입이 벌어지고, 날카로운 이빨들이 질긴 살점을 잡아뜯는다.

뿌드드득!! 쿠득!

빠득!!!

마물과 견줄수 있을 치악력은 수인의 단단한 뼈를 손쉽게 으스러뜨리고, 찢어진 혈관에서는 뜨거운 피가 솟구쳐 지크의 얼굴을 뒤덮는다.

털썩! 툭!!

반으로 갈라진너덜너덜한그의 몸이 이빨에 내장이 걸려 길게 늘어진 채로 끝내 바닥으로 떨어져 내린 소리였다.

그러나 이는 선홍빛의 창자를 우악스럽게 움켜쥔 그의 손에 의해 힘없이 끌려올라간다.

콰드드득!!! 꽈득..!

뚜둑!

아무도 입을 열지 않는 조용한 성당 안에서 섬뜩한 파육음은 한참을 이어졌지만..

그는 으스러져라 이를 악물고 핏줄 터진 눈으로 고통을 참아내며, 자신의 육신이 모조리 그의 입안에서 부스러질 때까지 단 한 마디 비명조차 내뱉지 않았다.

동포의 육신은 그의 뼈와 살이, 그리고 피가 되어 이전보다 더 강인하게 그의 존재를 이룬다.

뚜두두두둑...! 쿠두두둑!!

두꺼운 손목의 절단면에서 뼈가 먼저 자라나는가 싶더니 그 위로 혈관과 근육이, 그리고 살점으로 뒤덮인 후 암청색의 윤기나는 털이 그 위로 솟아난다.

완전히 재생한 것이다.

이는 태고로부터 이어진 순혈자의 권능과는 그 성질이 크게 다른 것이었다.

... 그러니, 이것이야말로 사악한 붉은 용으로부터 부여받은 그의 권능.

'포식'

그가 먹어치운 약자들은 미약한 힘일지라도 버려지는 일 없이 그의 육체에 축적된다.

이는 그의 지치지 않는 체력의 근간이 되며,

그의 살점과 뼈를 이루어 무결하게끔 하며,

그리고 때때로는...

그에게 있어 여벌의 목숨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먹어치우면 먹어치우는 만큼.

그의 무한한 허기와 투쟁에 대한 갈망은 서로 들어맞아... 끊임없이 죽이고, 먹어치우고, 싸울 수 있는 괴물을 만들어 냈다.

"지크,새 팔은 어떻지?"

찢어진 로브 조각과 약간의 핏자국을 제외하고는 더 이상 형체를 남기지 못 한 동포의 이름을 가슴에 새기며, 발터는 새롭게.. 그리고 더욱 강하게 탄생한 그의 팔을 보며 물었다.

"크르르르..."

스그극...!!

이전보다 훨씬 두껍고 날카롭게 벼려진 손톱을 거칠게 뽑아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 지크를 보며 발터는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헥터의 투지는 무엇보다 확실하게 지크와 함께할 것이다.

잔인한 죽음이었을지언정 그는 동포의 희생이 무가치하다 여기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지크프리트의 팔 하나가 이루어낼 수 있는 가치는 틀림없이 동포 한명 이상의 가치를 가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는 제 한 몸을 희생하여, 대의를 이룬 것이다.

만약 자신의 차례가 오더라도 그는 겸허히 그의 일부가 될 것이었다.

여태까지 그에게 씹어먹힌 수많은 동포들을 위해서라도 그렇게 해야할 것이다.

"그나저나, 일단은 용사와 사제가 만나게 된 셈인가?"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상관없다. 신탁이 이끄는 운명의 강제성이 제대로 나타나기 시작하는 건, 네 명이 모두 모인 다음부터니까."

"... 그렇군."

"한자리에서 둘을 처리해 버릴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해. 게다가, 놈들을 돕고 있는 게 어떤 놈들인지도 대충 알것 같고 말이지.. 그르르르..."

미리 쌓아둔 피를 모조리 소모하는 것으로 규격외의 힘을 발휘하는 지크프리트에게는 최대한 많은 먹잇감들이 한 자리에 모여주는 것이야말로 그가 바라는 투쟁의 장이었다.

심지어는 그 강한 용사조차도 찢어발길 수 있는, 모든 생명체의 정점에 군림하는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만큼, 한 번 전력을 다한 다음에는 준비기간이 길었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그 사제의... 에단이 해낸 투쟁에 대해 그는 순수하게 감탄한 것이었다.

"그르르르..."

재생된 손을 몇 번 쥐었다 펴곤 발터에게 새로운 로브를 건네받은 지크프리트는 피투성이가 된 자신의 왼팔과 얼굴을 대충 닦아내고는 어깨 위로 걸친다.

상대의 전력이 예상을 벗어난 만큼,그는 단 한 순간이라도 멈춰있을 생각이 없었다.

"지크."

"... 뭐지?"

분명 틀리지 않은 선택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바닥에 남은 핏자국에서 시선을 떼지 못 한 발터는 끝내 그를 멈춰세우며 한 마디를 내뱉었다.

"우리의 목숨은 너의 것이다. 그리고 너의 목숨 또한 우리의 것이기도 하지."

"하, 잘 알고 있다. 나는 결코.. 너희들의 죽음이 무의미한 희생이 되게 할 생각은 없어."

처음과 일관된 그의 대답에 안심한 것처럼 로브인들은 지크프리트를 따라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발터 역시도 드디어 바닥의 핏자국에서 시선을 떼어놓았다.

"우리 동포들은.. 언제까지나 너를 따를 거다. 지크."

서쪽을 향해 고개를 돌린 지크프리트는, 여전히 그들을 들진 채로, 하지만 여느때처럼 당당하게 자신을 따르는 동포들에게 답해 주었다.

"그렇다면 나는... 너희들에게 승리를 안겨주도록 하겠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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