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일행 출신 사제의 우울-116화 (116/137)

〈 116화 〉 19. 금빛 새벽을 불러오는 용사

* * *

19.금빛 새벽을 불러오는 용사(7)

"그렇군.. 산탈라 출신이었나. 고향까지도 같을 줄이야."

"네..?"

"아니, 혼잣말이니 신경 쓸 필요 없어."

노아의, 그러니까 전 용사의 부모가 산탈라에 살고 있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오히려 모를 수가 없다.

하늘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비가 쏟아져 내리던 그날.

비속에서도 환하게 타오르던 산탈라의 밤을 나는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윽, 우윽.."

"..! 에단 씨, 괜찮으신가요?!"

꽈아악..!

"괜찮... 콜록.. 실비아, 배낭에 남은 수통이 있으면.."

"아니요, 아무래도 속이 안 좋으신 것 같으니 제가 잘 듣는 차를 준비해 드리죠."

산탈라, 그리고 이미 잿더미가 되어버린 노아의 본가를 떠올렸기 때문일까.

참기 어려운 구역질이 위장을 뒤틀어왔기에 나는 의자를 힘껏 움켜쥐며 신물을 겨우 도로 삼켜냈다.

나를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는 실비아와 노아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지금 당장은 그것보다도 안정을 찾는 게 우선이었다.

"에단, 여기."

잔느가 차를 준비해 주겠다고 말했지만, 실비아는 이미 배낭에서 수통을 찾아와 내게 건네준다.

서늘함과 미지근함 사이의 물이 수통의 쇠맛을 머금고목을 타고넘어가고,옆에서는 물 끓는 소리가 들려오며 곧 지하실에 퍼지는 차분한 향은... 생각보다 마음을 가라앉히는 데에 도움을 준다.

"...."

그렇게 한동안 이 작은 테이블 위로 정적이 흐르고, 먼지쌓인 잔을 천으로 닦아내 테이블 위로 각각 내려놓은 잔느가 합석하여 차를 다 따라주었을 즈음에는 나도 머리를 짚고 있던 손을 간신히 떼어낼 수 있었다.

"... 실례했군, 그럼 스폴과 연결되어 있는 항구마을에서 지크프리트를 상대했던 것도 너일테고."

"아..? 그걸 어떻게."

"역시 그랬나.. 콜록, 네게는 감사해야겠지."

그건 레베카 혹은 용사가 아니고서야 불가능한 전투의 현장이었으니 말이다.

덕분에 수가, 그리고 실비아와 나도 무사할 수 있었다.

"감사라니요. 오히려 그때 그자와의 싸움을 마무리 하지 못한 탓에 에단 씨가 위험에 처하고 말았으니 저도 책임을 통감하고 있습니다."

"놈은.. 끝장낸 건가?"

일말의 기대를 품고 물은 것이었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천천히 고개를 젓는다.

"손의 부상 때문인지 곧바로 물러났습니다. 그래도 만약 그 자리에서 응전했다면 저 소녀가 위험했을 겁니다."

"그렇군.. 그랬겠어. 네겐 몇 번을 감사를 해도 부족해."

나는 빛이 바래지 않은 환한 금발과 푸른 눈동자의 미청년을 바라보며 힘겹게 고개를 숙였다.

실비아의 부축을 받아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고는 하지만 당장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었기에 지금은 이 정도가 그에게 전할 수 있는 최대한의 감사 표현이다.

"아니요, 아뇨..! 고개를 들어주세요. 제가 해야만 하는 일이었으니까요. 그리고 에단 씨는 이젠 제 일행이시기도 하니 당연합니다..!"

"..."

망설임 없이 나와의 일행을 자처하는 그의 모습에 이유 모를 거부감을 느꼈지만, 내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찻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나와 그의 사이를 끼어들어 온다.

달그락.

"이분이 정말로.. 용사 일행의 사제님이신가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답을 요구하는 잔느에게 나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고, 따뜻한 찻물을 목구멍으로 넘겨 속을 가라앉히고 나서야 작게 고개를 끄덕여 주니 그녀의 눈동자에 이채가 서린다.

"... 그랬군요. 설마하니 용사일행의 두 분이 이 자리에 모여주셨을 줄이야."

"다른 할 말이라도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다소 놀란 심정을 능숙하게 숨기는 반응까지는 평범했지만 그 이후로도 그녀의 표정이 그다지 풀어지지 않았기에 물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건 정답이었던지 그녀는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게, 실례지만 용사님께는 이미 부탁드린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건.. 나도 들어야 하는 이야기인가?"

"아무래도 네, 그렇습니다. 부디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단순히 저항군을 도와달라는 이야기는 아닌 듯 했기에 주의를 기울이자 그녀는 죄송하다는 말을 먼저 한 다음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저희 저항군이 하려는 것은 반란이고, 그 종점은 현재 폭거를 행하는 미치광이 황제를 처형하는 것입니다. 귀족들은 이미 황제의 손에 모조리 죽었으니 이후의 혼란은 분명 금방 가라앉힐 수 있겠습니다만..."

말꼬리를 늘어뜨리며 나와 노아를 한 번씩 바라보는 것을 보아그녀가 하려는 이야기를 대충은 알 것 같다.

한 나라의, 지금은 하나의 도시일 뿐이지만 그 수장을 죽이겠다는 건 그 자리를 대신할 인물을 미리 준비해 두지 않고서는 더 큰 혼란만을 초래할 뿐이다.

보통은 저항군의 수장이 그 뒤를 잇게 되겠지만..

"그렇군. 용사일행의 도움을 받았다가는 기껏 하나로 모은 민중이 둘로 갈라질 가능성이 있다는 건가."

그렇다고 눈앞에 보이는 저 용사 님이나, 내가 황좌에 오르려고 하지는 않을 것 같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무엇을 우려하는 것인지는 충분히 알겠다.

"... 이미 용사 님께 도움을 받고 있는 입장이지만 부끄럽게도 그렇습니다. 저는 이번 반란이 용사일행의 힘에 의한 것이 아닌.. 하나로 모인 민중의 힘에 의해 성공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일선에는 나오지 않은 채로 도움을 달라는 거군, 나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아. 내 명성은 인류배반자 하나로 충분하니까. 오히려 나섰다가는 역효과가 나겠지."

비식 한숨을 내쉬며 찻잔을 내려놓고, 잔느의 얼굴을 살폈다.

신중하고, 그럼에도 대담하게 자신의 주관을 밝히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다른 이들의 태도를 보아 그녀는 이 단체 내에서도 상당히 신뢰받고 있는 모양이고...

다만..

그녀의 얼굴에서 시선을 떨어뜨려놓는 도중에 내 앞에 놓인 깨끗한 찻잔이 눈길을 끈다.

"나는 아직 너희를 돕겠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어."

"..."

"물론 몸을 맡길 공간을 내어준 건 고맙지만, 네가 바라는 도움에 비하면 조금 부족하다고 생각하는데."

잔느의 눈빛이 나를 조심스럽게 살피는 게 느껴진다.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무엇을 바라는지가 궁금한 거겠지.

하지만 저항군의 본거지와 같아 보이는 장소에 이렇게 와버린 이상 순순히 걸어나갈 수도 없을 것 같고, 이미 용사는 이들을 돕고 있었던 모양이니 그에게 도움을 받은 나 역시 흐름상 이들을 도울 수밖에 없다.

인류배반자로 잘 알려져있을 나에게조차 이렇게 선뜻 도움을 청한다는 건, 그만큼 이들에게 손이 부족하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니 대가를 내놓을 수 있을만한 처지로도 보이지 않는다.

".. 내가 원하는 건 정보야. 동부지구의 성당에서 이미 대부분의 이들이 처형된 흔적은 보고 온 참이지만, 바실리카의 사절단 중 혹시나 있을지 모를 생존자를 찾고 있거든."

그러니 정보를 제공받고자 한다.

용사를 만나는 것이 먼저가 되고 말았지만 어찌 되었든 소기의 목적대로 저항군을 찾는 데에는 성공하게 되었으니 이들이라면 분명 알고 있을 사절단의 행방을 듣고 싶었다.

하지만 어째, 잔느의 표정이 그리 좋지 않아 보인다.

"... 죄송합니다. 사절단에 대한 첩보를 입수하자마자, 용사님의 이름을 내걸고 이쪽에서 먼저 접촉을 시도했었습니다."

"그렇군, 그걸로 저항군에 가담했다는 이야기가 나온 건가."

"맞습니다, 이곳으로 이동 중 황제의 칼날에 꼬리가 밟히는 바람에.. 사절단의 대부분의 이들은 죽거나 붙잡혔습니다. 나중에 민가에 숨어있던 사제 한 분을 구출해낼 수 있었던 것 이외에는 아마 모두.."

그나마 하나라도 살아남았다는 건 다행이라고 해야하는 걸까?

"그는 저항군에서 보호하고 있나?"

"그렇습니다. 감사하게도 저희 저항군을 도와주시고 계십니다."

"후..."

살아남은 건 사제 하나.

딜런에게는 안타까운 소식이 되겠다.

".. 그렇다면, 그를 보호해 준 것에 대한 값도 있겠지. 그러고 보니 넌, 음. 너는... 노아라고 부르면 되나?"

"물론이죠, 에단 씨."

쉽게 입으로 나오지 않는 그 이름을 언급하자, 그는 환하게 웃으며 자신을 이름으로 부르는 것을 허락한다.

"..."

저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리는 것이 상당히 어색하다.

실비아에게는 이미 몇 번이고 불린 나의 이름이지만, 이 녀석에게만큼은 더더욱. 이 기시감은 어째서인지 알 길이 없다.

".. 노아."

홀로 마음속으로 되뇔 뿐이었던 그리운 이름은, 누군가를 부르기 위해 입 밖으로 나오는 것을 여전히 꺼려 하고 있다.

설마 나는.. 노아라는 이름으로 기억하는 실낱같지만 결코 끊어진 적 없는 나의 감정이 눈앞의 용사에 의해 덧씌워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는 걸까?

그럴지도 모른다는 이 생각은, 홀로 겁을 집어먹고 궁상을 떠는 것과 다름이 없어 보였기에 괜히 스스로를 부끄럽게 만들어 온다.

"네, 말씀하세요. 에단 씨."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그런데 어째서 너는 바로 바실리카로 향하지 않았던 거지?"

중얼거린 그의 이름에 반응해온 노아를 보고 당황한 나머지, 원래 하려던 이야기를 건너뛰어 쓸데없는 방향으로 이야기가 새고 말았다.

"그건.. 스폴의 주민분들께 이곳의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황제를 칭하고 나타난 폭군의 압정에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다고요. 저는 운 좋게도 금방 이분들과 합류할 수 있었고요."

물론 잠시 벗어난 물음에도 그는 성실하게 대답을 해주었지만 말이다.

게다가 이야기의 방향을 나를 대신해 원래대로 되돌려주기까지 한다.

"그래서.. 협력해 주실 수 있나요, 에단 씨?"

그러고는 자신의 손을 내밀어 온 것이다.

장갑을 끼고 있는 그의 손을 보고.. 그 이유를 금방 알 것 같았던 나는 이끌리듯 그 손을 맞잡게 되었다.

구우욱...

내 손을 꽉 붙잡은 그의 시선에서 느껴지는 저 간질거리는 감정들이 부담스러워 일단을 손을 빼내었지만, 이걸로 나도 이들과 한 배에 타게 되었다.

"우선 모르부스의 현 상황에 대해 자세히 설명을 듣고 싶은데."

"그럼, 제가 대신 두 분의 대화에 잠시 실례해도 괜찮을까요?"

잔느.

그녀는 자신이 내린 차를 홀짝이며 묵묵히 기다리다, 드디어 자신의 차례가 왔다는 얼굴을 하고는 눈빛으로 허락을 구한다.

노아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고, 나 역시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그 편이 낫겠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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