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일행 출신 사제의 우울-117화 (117/137)

〈 117화 〉 20. 투기장에 흐르는 피

* * *

20.투기장에 흐르는 피(1)

".. 흐으...?"

온몸에서 감도는 익숙하지 않은 불편함에 쇳소리를 닮은 숨을 힘겹게 내쉬며 정신을 차린 노인은 공기 중에 짙게 자리 잡은 축축한 먼지 냄새와, 시체 냄새를 떠올리게 하는 이 불쾌하고 서늘한 공기가 왜인지 모르게 평소보다 더 와닿는 느낌이라는 의문과 함께 두 눈을 떴다.

"이제야 일어났나. 뭐, 괜찮아 나는 인내를 미덕으로 생각하니까."

아직 다 깨어나지 못 한 머릿속으로 웅웅 울리며 파고들어오는 낯선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올린 노인은 희뿌연 시야 속에서 짧은 적갈색의 머리칼만을 간신히 확인했을 뿐이다.

"... 당신은.. 누구요."

그는 자신의 목뒤가 얼얼하게 부어오른 듯한 느낌을 받으며 마지막 기억을 떠올리기 위해 분투했다.

사라져버린 모르부스의 사제들과 부서진 성당의 모습을 보며 사절단의 이들이 당황해하고 있을 즈음, 용사와 뜻을 함께 하고 있다는 이들과 조우할 수 있었다.

미심쩍기는 해도 인류배반자가 밖에서 가져온 정보대로 용사의 인상착의를 똑같이 설명했기에 달리 갈 곳도 없었던 만큼 어쩔 수 없이 그들을 따라 남부지구로 향하는 길이었다.

하지만.. 도중에 사방을 포위하고 나타난 검붉은 갑옷의 기사들.

그들에 의해 사제들을 지키기 위해 따라온 병사들이 모조리 도륙 당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무자비한 검이 한 번 휘둘러질 때마다 갑옷 채로 석둑석둑 잘려나가는 병사들을 보고 사절단은 혼비백산하여 흩어졌고, 부끄럽게도 자신 역시 깊은 골목 사이로 도망쳐 문이 열려있던 인근의 민가로 들어가 숨어있었다.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있었지만 기사들의 발소리는 말 없이 가까워졌고,

자신은...

"여, 여기는 어디오..! 용사님을 뵙게 해주시게...! 나는 바실리카의 주교인 설리번이네!!"

"푸흡.."

"...!!"

"푸흐흐하하하..."

노인은 자신이 주교라고 밝혔음에도 터져 나온 그의 섬뜩한 웃음소리에 곧바로 입을 다물게 되었다.

"소개가 늦었군, 나는 베르디히라고 하네. 일단은 자네가 멋대로 발을 들인 이 나라의 황제이지."

"황제..?!"

노인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적갈색 머리칼의 남성을 훑어본다.

하지만 자신을 황제라고 소개한 이 남성의 머리에 화려한 제관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입고 있는 옷도 우의를 연상시키는 투박한 색감의 방수천을 어깨에 둘러놓았을 뿐이다.

어딜 봐도 황제처럼은 보이지 않는 그에게서 유일하게 품위를 찾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열 손가락 모두에 사치스럽게 끼워져 있는 커다란 보석들이 박힌 반지들뿐이다.

"뭐, 사실 이 자리에서 내가 황제라는 사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으니 자네는 편하게 베르디히라고 부르면 되네."

"..."

그리고 이만큼이나 대화가 진행되었을 즈음에야 노인은 자신이 지금 어떤 꼴을 하고 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그나저나 의문스럽군. 내가 보기에는 자네는 그저 비쩍 마르고, 복부에는 기름진 비곗 덩이가 붙은 형편 좋은 늙은이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는데, 그 유명한 바실리카의 주교를 자처하다니 큭흐흐.."

"... 왜 나를 이곳에 가둔 것이오."

노인은 철제의자에 앉혀진 채 자신의 두 손목과 발목이 단단히 묶여있는 것을 느꼈기에 모욕적인 언사에도 불구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몸 위로 아무것도 걸치지 못하고 지저분한 체모와 치부, 거기에 살가죽 겉으로 앙상하게 드러난 골격까지도 다 보여지면서야 인간은 본래의 위치를 깨닫게 되는 법이다.

하지만 노인은 아직 하나의 비루한 약자임을 거부하고 주교로서의 위치를 지키려 하고 있었다.

"묻지 않았소..!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이냔 말이오...!"

"참 궁금한 게 많아. 그걸 꼭 지금 알아야 하나?"

"흐이익...?"

노인은 자신의 얼굴 바로 앞까지 예고 없이 들이밀어진 그의 얼굴을 정면에서 바라보게 되었다.

그는 무표정했지만, 번들거리는 저 두 눈에서 숨길 생각이 없어 보이는 원색적인 즐거움은 노인의 불안을 증폭시킨다.

"보통은 귀족이든 누구든 이렇게 전부 벗겨놓으면 기를 못 쓰는 법인데, 그래도 자네는 아직 기운이 넘쳐 보이니 좋군."

까드드득...! 까득..!

지하실을 울리는 이 불쾌한 소음은 다름 아닌 반지를 낀 그의 손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도망칠 수 없도록 속박된 팔과 다리.

속박을 푼다 하더라도 빠져나가는 것을 단념하게끔 하는 깊은 지하의눅눅한공기.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존엄, 원하는 대로 몸을 움직일 자유와 의복을 걸칠 자유까지도 빼앗긴 지금 상황에서 귓구멍을 열고 들어오는 이 불쾌한 소음은 노인의 불안한 심리를 비집고 들어와 공포심마저 조성한다.

"... 날.. 어떻게 할 생각인 거요."

병사들은 도륙 당하고, 사제들 역시도 그 검붉은 갑옷의 기사들에게 썰려나가는 운명을 피하지 못했다.

그런 와중에 자신만은 살아남아 이곳에서 깨어났다.

주교인 자신에게 만일 달리 원하는 것이라도 있는 거라면...

"그렇군, 내게 원하는 게 있는 건가. 하지만 나는 충실한 신의 심복이자 신앙에 영혼을 맡긴 몸..."

까득..!

"...!!"

"뭔가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자네는 이미 내가 원하는 것을 주었어."

"무슨?"

찰각, 찰그락..

"그 볼품없고 연약하지만, 그럼에도 건강한 몸뚱이를 이렇게 내게 주지 않았나."

"... 헛소리..! 이 몸은 오직 신의 것이오..!"

자신을 황제라 칭하는 남성이 테이블 위를 뒤적거리며 불길한 쇳소리를 내고 있었음에도 노인은 여전히 굴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그를 더욱 즐겁게 하는 것에 불과했음을 노인은 곧 그가 보여준 노골적인 미소를 보고서야 실감했다.

"자네에게는 이미 이야기했듯 인내 역시 중요한 미덕이지만.. 나는 저항의 가치를 더욱 높게 사고 있네."

"..."

"허나 희망 없는 절망 속에서 인간은 저항할 의지를 상실하는 법이고.. 당신네들에게는 늘 도움을 받고 있기도 하니 이렇게 기회를 주겠네."

그가 하는 이야기를 노인은 제대로 듣고있었음에도 이해하지 못했다.

저항이니 미덕이니, 그리고 늘 도움을 받고 있다는 말 역시 의미를 알 수 없다.

.. 하지만 노인이 그의 이야기를 이해하고 이해하지 않고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기회라기보다는 간단한 내기가 맞으려나? 이 모래시계는 반나절 정도면 다 떨어져 내린다만, 만약 그때까지도 자네가 그 고결한 신앙심을 잃지 않는다면 자유롭게 풀어주도록 하지."

"그게 무슨.."

"궁금했거든, 주교 정도나 되면 얼마나 굳건하고 신실한 마음을 가지고 있을까. 젊은 사제들은 기껏해야 이 모래가 반이 떨어지기도 전에 자신의 신을 욕보이더란 말이지. 하하하!"

"...!! 당신.. 당신은 미쳤소..!"

흘려들을 수 없는 불경한 이야기에 노인은 치밀어 오른 분노를 입에 담고 말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저 기다란 송곳 하나를 집어들었을 뿐이다.

"시작은.. 이게 좋겠군."

느긋하게 즐기기 위해 먼저 집어든 송곳의 먼지를 깨끗한 천으로 닦아내는 그의 모습을 보며 노인은 끝내 두려움이 찾아드는 것을 느꼈다.

그가 앞으로 하려는 짓이 무엇인지를 이제는 확실하게 알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뾰족한 송곳을 닦아낸 그는 작은 망치까지도 나머지 손에 들어 올리고는 헤벌쭉 웃는다.

감히 황제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운 천박한 얼굴이었다.

"...!!"

노인은 그가 들고 있는 송곳이 어디로 향하는지를 눈으로 좇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몸을 보호하기는커녕 가릴 수 있는 옷도 없었고, 저항할 수 없도록 팔다리는 단단히 속박되어 있다.

바실리카의 주교라는 직책도 이 눈앞의 미치광이에게는 통하지 않는 지금 노인이 할 수 있는 건 그의 기대에 찬 손짓을 따라 시선을 옮기는 것뿐이었다.

"약속은 반드시 지키는 편이니 안심하게. 모래가 다 떨어질 때까지, 자네는 평생을 섬겨온 신에 대한 신앙심을 잃지 않으면 되는 거야."

"..."

"평생의 믿음이 고작 반나절의 시련에 흔들리지는 않겠지? 부디 나를 실망시키지 말아주게."

스푸욱...!

"꺼어어...!?"

날카로운 송곳의 끝을 노인의 약지 손톱 아래의 여린살에 부드럽게 밀어 넣은 그는 망치로 송곳의 손잡이 뒤를 겨눈다.

그의 손동작이 앞으로 이어질 일을 예고하고 있었던 만큼 평생을 인연없이 살았던 낯선 고통에 벌써 눈물까지 머금은 노인은 필사적으로 몸을 뒤흔들며 고개를 좌우로 젓는다.

"아, 그렇지."

이에 응답해 준 것일까?

씨익 웃은 그는 손톱 아래로 찔러 넣었던 송곳을 다시 빼내더니 망치를 내려놓는다.

"...!"

투욱.

사르르르...

그러고는 드디어 모래시계를 뒤집어 놓은 것이었다.

"잊을뻔했어. 적어도자네가 남은 시간을 확인할 수는 있어야지."

노인의 시야 바로 건너편에 놓인 모래시계는 야속하게도 아주 조금씩, 조금씩, 그 고운 모래를 아래로 떨어뜨리고 있다.

그러나 이 고통의 시간의 끝을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은 마치 독과 같았다.

희망이라는 이름의 독.

황제는 이 독을 쓰는데에 몹시 능숙했다.

툭!

"끄어아아아악...!!!"

툭툭!

"헉! 꺽, 억!!"

손톱 아래로 밀어넣어진 송곳은, 그가 망치로 송곳의 손잡이 뒤를 툭툭 두드려줄 때마다 안쪽으로 쑥쑥 밀려들어간다.

끝이 뾰족한 송곳의 특성상 안쪽으로 밀어넣어져 손잡이에 가까워질수록 두께가 두꺼워지며 처음에는 좁았던 틈을 강제로 넓혀나가는 것이었다.

약지부터 엄지까지,

송곳이 끝까지 박혀들어갈 때까지 망치를 두드린다.

처음에는 손목만을 움직여 툭툭 두드려주면 쉽게 밀려들어가던 송곳도, 끝에는 그 두께 탓에 점점 힘을 주어 끝내는 팔로 휘두를 수밖에 없다.

투쿡!! 투쿡!!!

"으허허어어!! 우어어어!! 꺽, 꺼어어!!!!"

한참을 망치질하여 결국에는 송곳의 두께와 망치의 충격에 못이겨 노인의 손톱이 반으로 갈라질 때까지 놓아주지 않는다.

노인은 나이에 맞지 않는 짐승 같은 울음소리를 내며 눈물과 콧물을 가리지 않고 줄줄 흘려댔지만, 그럼에도 굴복을 입에 담지 않는 이유는..

어디까지나 눈앞에 보이는 모래시계에서, 모래가 여전히 떨어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으으어... 그어.. 으허허헝.."

"자네는 정말 마음에 드는군, 기대하게 되어버려."

그는 노인의 손가락과 발가락.

총 스무 개의 구멍을 열어젖혀놓은 다음에서야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내며 허리를 편다.

"그나저나.. 더는 써먹을 곳이 없군. 이건 조금 아쉬운데."

"으흐흐흐허... 어허허허허허허..."

피가 줄줄 흘러내리는 송곳을 바라보며 아쉬운 눈빛을 하는 그를 보며,우는 것인지 웃는 것인지 구별이 되지 않는 목소리를 내며 몸을 뒤흔드는 노인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있던 이전과는 다르게 약간의 핏기가 돌고 있다.

더는 저 악마가 괴롭힐 손가락과 발가락이 남아 있지 않다.

다음으로 기다리고 있을 것이 무엇일지 그가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지금 이것보다는 낫지 않겠냐는 가상한 생각이었다.

"하하! 자네도 아쉬운가 보군, 그래 어쩔 수 없지."

정말이지 가상한 생각이었다.

짝. 짝.

그가 손뼉을 두어 번 치자 지하실의 문이 열리고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보이는 이들이 우르르 안 쪽으로 들어온다.

노인은 자신의 두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간신히 다잡은 정신 속에서 일전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그의 말에 담긴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당신네들에게는 도움을 받고 있다고 했던 그 말.

"아직 나는 좀 더 즐기고 싶거든, 깨끗하게 치유해 주시게들."

"... 이.. 이이.. 악마 같은..."

자신을 둘러싸고 선 이들은 틀림없는 성양교의 사제복을 입고 있다.

다 무너져 가는 것처럼 보이던 모르부스의 성당.

그리고 역병에 의한 혼란을 내버려두고 사라진 사제들.

그들은 모두 이곳, 황궁의 지하실에 있었다.

사제들이 두 손을 뻗어 지저분하게 열린 노인의 손가락과 발가락들을 치유하기 시작한다.

"안돼.. 안돼애애...!! 그만...!!! 그만해..!!!!"

"푸흐흐흐... 흐하하하하..!"

노인의 절망 어린 울음소리에도.. 사제들은 하나같이 무언가를 잃어버린 듯한 공허한 눈동자로, 노인에게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황제가 명령한 치유를 속행한다.

손과 발이 전부 아물어간다.

송곳의 뾰족한 끝에 긁어내려진 손뼈도,

갈라져 깨진 손톱도,

헐렁하게 벌어진 피부까지.. 전부.

처음의 상태로.

"자네가 믿어 의심치 않는 이 신성한 은총이, 지금은 혹시나 원망스럽다 생각하지는 않나?"

"...!"

상처부위가 상대적으로 작은 탓에 눈깜짝할 새에 아물거아가는 상처를 넋놓고 바라보던 노인은, 귓가에서 들려오는 소름끼치는 속삭임에 몸을 쭈뼛 일으켰다.

그럴 리 없다.

상처받은 이를 치유하기 위한 이 신성한 힘은..

자애로운 신이 자신의 신도들에게 건네준 은혜이자 축복이다.

그러니.. 절대 그럴 리 없다고 노인은 곧바로 마음속으로 반박했지만, 그 신경질적이기까지 한 즉각적인 반응은 오히려 그의 불경한 속마음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했다.

"물론 그럴 리는 없겠지?"

"... 대체.. 왜 이런 짓을..."

그렇기에 그는 찰나의 불경심을 부정하기 위해서라도 이 같은 일을 벌이는 원흉에게로 그 책임을 돌리기로 한 모양이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반응이었지만, 무엇보다 의미 없는 행동이기도 했다.

"왜냐니.. 그야..."

노인은 자신이 흘린 눈물로 희뿌옇게 변한 시야 속에서 표정으로 대답을 대신하는 인간의 탈을 쓴 악마를 보았다.

... 너무나도 즐거워 보였다.

이유 없는 절망 속에서 이유를 찾으며 눈앞의 희망에 목매어 포기하지도 못 한 채 한없이 비참하게 저항하는 꼴을 구경하면서 말이다.

노인이 어떤 삶을 살아왔고, 어떤 생각을 가지고, 어떤 믿음에 의지하고 있는지 따위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것처럼.

그의 의지를 불합리한 방식으로 꺾어 넘어뜨리는 이것을 마치 놀이인 양 자유를 빼앗고, 그의 존엄을 짓밟으며..

... 떨어뜨린다.

"으흐흐흐.."

그는 황홀한 눈빛으로 노인의 무가치한 저항을 감상하고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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