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일행 출신 사제의 우울-125화 (125/137)

〈 125화 〉 21. 붉은 달

* * *

21.붉은 달(3)

"괜찮니..?"

소녀는 땅을 마주 보고 엎드린 채 거칠게 숨을 내쉬다, 문득 들려온 상냥한 목소리에 소스라치듯 놀라 반쯤 몸을 일으켰다.

반사적으로 움켜쥔 손가락 사이로는 피에 젖은 거무칙칙한 흙더미 대신 싱그러운 풀과 꽃잎이 어그러져 있다.

"...? 하악.... 학.. 하아..."

분명 방금 전까지 자신을 괴롭히던 비릿한 피 냄새와, 심장을 조여드는 흉악한 포식자의 기척이 맑은 물에 씻겨내린 것처럼 사라져 있다.

"이제 좀 진정되니?"

상냥한 목소리는 다시 한번 자신을 걱정하며 들려왔지만, 소녀는 여전히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에단이... 안돼.. 나... 돌아가야.. 우윽..."

에단이 자신의 앞을, 그 괴물의 앞을 막아서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이대로라면 에단은...

"괜찮아, 여기에서라면 아직 괜찮으니까."

"케헥.. 콜록..! 콜록콜록!"

꽃향기로 가득한 여인의 품에 안기고 나서야 소녀는 겨우 마음이 진정되어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네가 지금 처한 상황은 알고 있단다."

"... 하아.. 하아.."

"갑작스럽겠지만그래서널 부른거기도 해. 실비아."

하지만 에단을 떠올리면 마음속이 다시 풍랑이 이는 바다의 한가운데와 같이 들썩거리는 것을 막을 수 없다.

뒤에서 발목만 잡을 거라면 어째서 자신은 기어코 따라가겠다고 한 것일까.

.. 부끄러웠다.

"난.. 여전히 약해. 이대로는... 에단을 도와줄 수 없어."

또한, 소녀는 분했다.

여인이 가르쳐준 투척술은 분명 도움이 되었지만 그 이상으로 여인이 다른 것을 알려주지 않는 이유는 아직 자신의 신체가 제대로 단련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도와주기는커녕.. 그의 옆에 서는 것조차 할 수 없어... 으흑.."

분함에 눈물이 흘러내린다.

혼자 멋대로 말하고, 멋대로 눈물 흘리며 서러운 마음에 이 상냥한 품에 더욱 깊이 파고들었지만 여인은 아무렇지도 않게 응석을 받아주며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 그럼, 싸워보겠니?"

"..!"

그리고 뒤이어 여인이 내뱉은 말은 축 처져있던 소녀의 두 귀를 다시 쫑긋 세우게 만드는 것이었다.

"나.. 싸울 수 있는 거야...?"

고개를 올려다보자 화사한 햇살의 역광으로 여전히 모자의 그림자 안에 숨은 여인의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늘 상냥하게 웃고 있던 입이 지금만큼은 우려를 담아 자신을 걱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여인의 근심에 편승해 겁먹고 있을 여유 같은 건 없었다.

"분명 고통스러울 거야. 살아있다는 게 후회스럽다 느껴질 정도로."

"...."

"그리고 이건, 에단조차 지금껏 간신히 버텨온 고통의 무게이기도 하니까."

여인은 경고하고 있었지만 소녀의 귀에는 한가지 이외에는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에단이... 버텨온 아픔..?"

"... 그래, 이 힘은 네겐 아직 이르단다."

자신이 아직 약해서,

제대로 단련되어 있지 않아서,

그렇기에 대가가 따를 것이라고 분명하게 경고하고 있다.

하지만 소녀는 이미 마음을 정한지 오래였다.

대가는 따르는 것이 당연하다.

자신은 약하니까.

강해지기 위한 노력도 이를 위해 필요한 시간도, 여전히 부족하기만 했다.

그런 자신에게조차 대가를 치를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에 오히려 감사해야 맞을 것이다.

"나.. 알고 싶어, 에단이 느껴온 아픔을... 그리고, 싸우고 싶어."

"... 실비아.."

"에단을.. 지키고 싶어."

그가 짊어져온 고통의 무게.

가장 가까이에 있으면서도 늘 보호받기만 하던 자신으로서는 결코 느낄 수 없었던 것.

이를 알고 싶었다.

그리고.. 자신 역시도 그의 고통을 똑같이 짊어지고 싶다는 다소 건방진 생각조차 했다.

약해빠진 자신이지만, 그럼에도 에단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더 이해하고 그의 곁에 있고 싶었다.

그의 곁에 남고 싶었다.

길을 잃은 자신이 유일하게 돌아갈 수 있는 장소를... 이 손으로 지켜내고 싶었다.

그런 마음이 소녀를 강렬하게 이끌었다.

"하, 드디어 내 차례로군."

"..!!"

그렇게,

이번에는 등 뒤에서 들려온 불길한 목소리는 비난하듯 소녀의 등허리를 찔러들어왔다.

"그래서.. 넌 언제까지 어린애 응석이나 받아주고 있을 셈이지?"

"... 어디까지나 이건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이니까요."

"알아, 안다고. 그러시겠지."

이전에 한번, 저 꺼림칙한 존재로부터 여인이 자신을 떨어뜨려내주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 이후로 이 푸른 하늘 아래에서 한동안 저 목소리를 듣지 못했지만 어느새 머리 위의 푸른 하늘에는 짙은 먹구름이 찾아들었고, 등 뒤의 목소리는 이전보다 훨씬 더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서 있었다.

"분명 고통스러울 거다 꼬맹이. 하지만 난 상냥하니까, 언제든지 그만두고 싶어지면 이야기해도 괜찮아."

분명 여인의 품에 안겨있는데도,

등 뒤를 아직 돌아보지 않았는데도,

귓가에 끈적하게 내려앉는 이 부정한 목소리는 숨통을 조여들어온다.

"... 하악.. 학.."

아니.. 여인의 품속이기에 이 정도에서 그치는 것일까.

순혈자의 존재감 아래 종의 기억이 몸에 강제로 내리는 명령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순수한 공포.

그리고 절망이다.

죽음이... 자신의 등 뒤에 서 있었다.

"한 번 검을 휘두를 때마다 뼈는 부스러지고, 근육이 뒤틀리고, 네 여린 살은 쉽게 뜯어져나가고 말겠지."

죽음은 속삭여 온다.

"불을 삼키는 것처럼 목구멍은 타들어가고, 심장의 혈관은 수십 갈래로 찢어져 나갈 거다. 내장의 위치가 수시로 바뀌는 듯한 느낌을 아마 너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거다."

... 두려워하라고.

"그러니 더 이상 버티지 못하겠다고 느낄 때라면, 언제든지 내 이름을 부르려무나."

.... 그리고 안심하라고.

"내가 친히너를 찾아갈 테니."

*

나는 분명.. 내 두 눈을 부릅뜬 채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는 놈의 커다란 손바닥을 노려보고 있었다.

기껏해야 인간의 몸으로 양팔을 교차시켜 막아선다고 해봤자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실비아와 노아에게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 끝까지 포기할 수 없었다.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 아."

그런데..

무엇일까 이...

아름다운 은광의 정체는.

툭.

내 어깨를 우악스럽게도 움켜쥐고 있던 지크프리트의 손이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린다.

투욱.

그리고 뒤이어, 내 머리 위로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던 놈의 반대편 손 역시도 허공에서 반바퀴를 돌아 곧 바닥에 떨어져 내린다.

"크르륵...?"

너울 치듯 시야를 가로지른 은광이 길게 이어진 끝에 맞닿아있는 것은 다름 아닌 한 자루의 짤막한 단검.

그리고 어느새 몸을 일으킨 소녀의 뒷모습이었다.

"... 말씀드렸죠. 잘못된 선택과 방황으로 얻은 부끄러움과, 지키고자 하는 마음을 잊지 않는 한 저는 당신을 돕겠다고요."

"실비아..?"

아니, 다르다.

분명 그때와 같다.

깊고 깊은 땅 밑의 요정들의 마을에서,

이브와 헹겔 둘 모두가 죽지 않는 길로 이끌어주었던 그녀가 한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나 이렇게 또다시 그 존재를 드러내었다.

"당신은..."

"분위기가 바뀌었나, 네년은 누구지..?"

나는 소녀의 몸을 멋대로 빌린 저 존재의 이름조차 아직 몰랐기에 저절로 말이 끊어졌지만,

당장 폭발할 것처럼 맹렬히 타오르다 거짓말처럼 차갑게 가라앉은 지크프리트의 목소리는 내가 하지 못 한 말을 이어받는다.

그러나 정체를 묻는 말에 그녀는 이름 대신 자신을 이렇게 칭한다.

"누구냐고 물을 것도 없이, 저는 그저 과거의 낡은 검집일뿐입니다."

".. 그르르르륵... 운명의 강제성이라는 녀석인가, 용케도 저 사제 놈의 옆에 들러붙어 있었군."

분명 깔끔하게 떨어져 나갔을 터인 지크프리트의 양손이 저절로 떠올라 손목의 단면으로 이끌려 간다.

상처 부위와 떨어진 신체 사이로 길게 늘어져 공중에서 꿀렁거리는 핏줄기를 타고 원래의 자리로 가 맞붙은 것이다.

나조차도 처음 보는 기이한 재생 방식이었지만, 다시금 소녀의 몸을 차지한 존재는 방금은 그저 따끔한 경고 정도였을 뿐이라는 것처럼 아랑곳 않는다.

"신탁이 정한 운명의 실 위에 함부로 흙 묻은 발을 올려놓으려는 짐승을 이대로 내버려 둘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요."

"그래, 그런가! 운명조차 나를 한낱 짐승으로밖에 보지 않는가..!!!"

허탈한 듯 웃던 지크프리트는 뚝 웃음을 그치고는 자세를 낮춘다.

"... 그렇다면 나는!! 그 운명조차 이 힘으로 어그러뜨릴 뿐이다...!!!"

"실비아..!"

그것이 공격을 준비하는 자세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아챌 수 있었기에 나는 여전히 등을 보이고 서 있는 소녀의 이름을 불렀지만, 이미 눈 깜짝할 새에 그 뒤로 날아든 지크프리트는 길게 뽑아낸 손톱으로 당장이라도 소녀를 갈기갈기 찢어발겨놓을 것처럼 보였다.

".....!!"

그러나 다시 한번 들이친 은광의 파도는 부드럽게 지크프리트의 전신을 훑어내고, 다시 내 앞으로 이어져 있었다.

쩌억...!

푸슈슉....!! 왈칵...!

후두두두두둑...!!! 철퍽!!

무거운 고깃덩이들이 떨어져 내리는 소리와 함께, 나는 지크프리트의 몸이 수십 조각으로 갈라져 흙바닥 위를 나뒹구는 것을 두 눈으로 직접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 허."

그리고 이를 해낸 것으로 보이는 소녀는 그저 무덤덤한 표정으로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아있는 나를 똑바로 주시하고 있을 뿐이다.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뭐..?"

뭐가 끝나지 않았다는 것일까 하고 허무하게 조각난 지크프리트의 사체를 돌아보자, 그의 피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꿀렁거리며 신체를 다시 짜 맞추고 있는 기괴한 광경이 눈에 들어온다.

"그것보다 에단, 당신의 피가 필요합니다."

"내.. 피가..?"

"이미 한 번당신은그 피로 이 소녀를 살려낸 기억이 있을 테죠."

"그걸 어떻게..? 아니, 그건 역시 피의 저주 때문에...?"

아무리 나라고 해서 이런 상황에까지 침착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소녀에게 용의 저주가 짙게 들어찬 내 피를 마시게 한 것이 되살릴 수 있었던 이유였다고 이 존재는 내게 말하고 있다.

"설명할 시간이 없어요. 보이겠지만 이 소녀의 여린 신체는 제 움직임에 버텨주지 못 할 테니까요. 이제 고작 두 번 휘두른 것만으로 벌써 몸이 망가진 게 느껴져요."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뼈가 부스러졌는지 너덜너덜해진 채 거꾸로 늘어진 손목을 들어 보인다.

"...!! 잠깐, 그럼 실비아는..!"

"고통스러운 시간이겠지만 이는 소녀가 스스로 선택한 길이기도 해요."

"실비아가...?"

"이 소녀 역시도 에단.. 당신을 지키려 하고 있다는 거예요."

아직 멀쩡한 반대편 손으로 검은색 일색의 단검을 옮겨쥔 그녀는 내게 그것을 건네어 보인다.

... 피.

나의 피가 필요하다고 했다.

"물론 강요할 생각은 없어요. 소녀의 마음에 응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당신의 선택이기도 하니까요."

"... 그런가."

주르륵..

뚝... 뚝.

나는 건네받은 날카로운 단검으로 망설임없이 내 손바닥을 긋어 붉은 피를 흘려내었다.

".. 실비아가 스스로 그렇게 선택했다면, 나는 막아서지 않을 거다."

이미 이 자리에 서기 전에도 나는 소녀에게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네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하라고.

그러기 위해 내가 있는 것이라고 말이다.

"..."

이 빠른 결단을 조금은 의외라는 듯이 잠시 입을 다문 소녀는 자신이 시간이 없다고 말했던 것을 떠올렸는지 곧바로 내 손목을 이끌어 입가에 가져다 댄다.

용의 저주를 한가득 품은 불길한 핏줄기가 소녀의 입속으로 부드럽게 흘러내리고,

이를 삼켜내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막아서지 않을 거라 스스로 말했음에도 역시 꺼림칙한 근심이 생겨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 그리고 그 효과는 이전과는 달리당장소녀의 몸에서부터 눈에 띄게나타나기 시작했다.

우드드득...

꾸지득..!

덜렁거리던 손목이 저절로 바로 세워져 원래의 형태를 되찾는다.

다소 휘청이며 무너져 있던 자세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저주에 의해 재생되는 내 몸을 보는 것 같았다.

물어보고 싶은 것은 많았지만 단검을 돌려받은 소녀는 이를 움켜쥐고 내게 마지막 전달사항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10분. 저주에 노출된 상태로 버텨낼 수 있는 건 그 정도가 한계에요. 그 이상이라면.."

"실비아는 어떻게 되는 거지?"

"... 저주에 집어삼켜진다면 온몸이 썩어문드러져 시신조차 남기지 못하겠죠. 그러니 정화의 준비를, 최후의 최후까지 당신만큼은 쓰러져서는 안됩니다."

"그런..!"

그리고 시간이 없다는 그녀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처럼 분노에 찬 짐승의 고함소리가 내 목소리를 끊었다.

"잡담은 끝났나..!!!"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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