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6화 〉 21. 붉은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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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붉은 달(4)
소녀는 춤을 춘다.
먼 과거 밤하늘을 밝게 비추던 만월과 같은 광채를 흩뿌리며.
"... 아아.."
힘 있게 뻗어나가는 두 다리는 마치 빙판 위를 미끄러지듯 소녀의 작은 몸을 이끌어 흉악한 발톱을 피해내고,
자신 있게 휘둘러지는 단검은 이 어둡게 가라앉은 투기장에 은광을 만연히 하여 절망의 그림자를 걷어낸다.
"크윽.. 켁! 크르르륵...!!!"
에단조차 미처 눈으로 좇지 못하고 놓쳐 버린 사이사이의 공방은 둘의 주변에 맹렬한 기세로 흩어져 나가는 흙먼지가 아니었다면 분명 눈치채지도 못했을 터였다.
푸슉!
퓻!!
신화 속 영웅과 괴수의 싸움을 이 자리에 재현하듯, 둘은 평범한 이들의 인지를 뛰어넘는 영역에서 서로의 이빨을 맞부딪히고 있었다.
투기장의 관람석이 비어있다는 사실이 아쉬울 만큼이나 이것은 심지어 아름답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그렇다면 다음으로는 역시 이 싸움의 승패가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
얼핏 보기에 속도로 우위를 점한 듯 보이는 소녀는 지크프리트가 두 번을 움직일 동안 세 번을 움직이며 그 거대한 몸뚱이에 몇 번이고 깊은 상처를 만들어내고 있었으나 이는 조금도 결말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금방 아물어 버린다.
"흡..! 하앗!"
바닥을 굳게 딛고 허리를 비틀어 그 힘으로 넓게 휘두른 검격이 다시 한번 지크프리트의 복부를 깊게 훑어내고 지나간다.
푸슉...!!
하지만 동시에, 소녀의 연약한 몸은 이곳저곳이 망가지는 소리를 내며 부러지고 찢어져나가고 만다.
우드득..!! 뚜둑!
"으햐윽...!"
지크프리트가 자신의 상처를 아물게 하는 동안, 소녀 역시 자신의 망가진 몸을 회복하며 결국에는 서로에게 유의미한 피해를 주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 당장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소녀에게는 차근차근 패배가 다가오고 있다는 의미였다.
"햑.. 하악... 으극, 아파... 끅.."
이제 고작 1분.
고작 1분이 지났지만 벌써 소녀는 자신이 지금껏 살아오며 겪은 그 어떤 고통보다도, 그에 비하면 찰나일 이 짧은 시간 동안의 고통이 훨씬 더 끔찍했다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아프지만.. 학.. 버텨야 해... 하악... 버텨낼 거야.."
괴롭게 숨을 헐떡거리면서도 스스로에게 버텨야 한다고, 버틸 수 있다고 홀로 중얼거리지라도 않고서는 그대로 주저앉아버릴 것만 같았다.
머리가 뜨겁다.
고통은 마치 열기처럼 올라오고 있다.
그런 사이로.. 어떤 목소리가 들려온다.
상냥하지만 강인한 의지를 품은,분명 들어본 적이 있는 여인의 목소리.
하지만 어디에서 들어봤는지를 떠올리기도 전에 다시 한번 그 목소리는 자신을 일깨우듯 머릿속으로 밀려들어온다.
발을 멈추지 마.
집중해, 상대에게서 눈을 떼지 마.
손에 힘을 줘, 당장 검을 쥐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
지금 에단을 구할 수 있는 건 너뿐이니까.
너 자신을 믿어, 실비아.
"학.. 하악, 학... 에단.."
에단은 지금껏 싸워오며 이런 고통을 인내해 온 걸까.
유약한 사제의 몸으로 주어진 역할 그 이상을 해내기 위해, 이런 대가를 줄곧 치러왔던 걸까.
이 몸이 피와 살이 아니라 모래로 이루어진 것은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 만큼이나 한 번의 움직임에도 이곳저곳이 무너지는 소리를 내며 고통을 수단 삼아 멈추라고 호소해 온다.
그러나 멈출 수 없다.
멈춰서는 안된다.
여기에서 멈췄다가는..
"에단을... 지키려면.. 내가...!"
마치 모닥불과 같이,
그는 이렇게 스스로의 몸을 불태우며 주변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그 옆에서 편하게 몸을 누이고 불길의 온기를 느끼며 잠자리에 들었던 자신은 결코 알 수 없었다.
불속에 직접 손을 집어넣어보고 나서야 타들어가는 살갗의 고통을 깨닫게 된 것이다.
"... 내가, 버텨내야 해..!"
바로 이전 지크프리트와의 싸움에서만 하더라도 에단은 모든 것을 불살라가며 자신을 지켜내기 위해 분투했었다.
그때뿐일까? 아니다.
저주받은 땅. 영원히 불이 꺼지지 않는 그 대지의 검게 우거진 숲에서도,
빛 한 줌 새어들어오지 않는 암흑으로 뒤덮여 그 안의 생명을 품은 모든 존재를 부정하던 대삼림에서도,
에단은 이와 같은 고통을 늘 말없이 삼켜내고 있었다.
"햐압..!"
눈을 떴을 때 이미 자신은 검을 휘두르고 있었고, 뒤섞이는 모호한 기억 속에서 확신을 얻기도 전에 고통이 온몸에 닥쳤다.
하지만 그 대신, 자신은 더 이상 이 괴물의 앞에서 두 다리를 떨지 않고 있었다.
그러니 스스로에게부끄럽지 않기 위해서라도..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여기에서 쓰러질 수 없다.
.. 지금이 아니면 싸울 수 없다.
"..."
그렇게 소녀가 스스로와의 싸움 속에서 올곧은 의지를 관철하기 위해 분투하는 사이, 둘의 공방을 근심 어린 눈으로 지켜보던 에단 역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대로는 결코 저 괴물에게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절망 속에 떨어져 내린 한 줄기 희망은 당장이라도 끊어질 것처럼 위태로이 매달려 있었지만, 이를 따라 시선을 올려다 놓으면 이 깊고 어두운 구렁텅이 속에서라도 어디로 가야 할지 그 방향만큼은 알 수 있게 되는 법이다.
"크르르륵...!! 케윽.. 헤윽.."
"하악... 학.. 하악.."
드디어 둘이 제자리에 멈춰 서고 그 잠시 동안은 주변의 먼지 구름이 얌전한 기색을 보인다.
거칠게 숨을 뱉어내며 서로의 눈동자를 노려보고 있는 그 모습에서, 이 싸움이 아직 끝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르르.. 너는 놈을 위해 어째서 그렇게까지 하는 거냐..!"
"..."
지크프리트 역시 지금 눈앞의 소녀가 에단과 다름없는 기괴한 방식으로 스스로의 몸을 무너뜨려가며 싸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기에 물었으나, 소녀는 여전히 입을 꾹 다물고 그를 노려보고 있다.
"칫, 대답하지 않는 건가.. 그렇다면 멋대로 떠들어 주도록 하지."
괴물의 속삭임 따위 자신에게 좋을 것은 없다고 생각한 소녀는 그대로 몸을 앞으로 밀어냈지만 다시금 쏟아지는 참격에도 그는 아랑곳 않고 주둥이를 벌려 보인다.
"인간은 신뢰를 맡길만한 대상이 아니야. 끊임없이 피와 혼란을 추구하고, 허구한 날 제 욕망에 집어삼켜져 스스로 파멸하는 어리석은 족속들이다! 그흐흐.. 하물며 그러한 인간 놈들 사이에서도 배반자라 불리는 한심한 놈에게 수인인 네가 어째서...!"
소녀의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지는 것을 보며 즐겁다는 듯이 주둥이를 놀리던 지크프리트는 가벼운 먼지 구름을 새로이 남기고 모습을 감춘 상대를 뒤늦게 좇았다.
"..?!"
그리고 그는 고개를 들어 올린 끝에, 보았다.
차갑게 이글거리며 분노로 타오르고 있는 진은색의 눈동자를.
"... 더 이상.. 짖지 마."
부드럽게 너울 치던 은광이 처음으로 맹렬한 기세와 함께 지크프리트에게로 떨어져내렸고,
"컥..?"
갑작스러운 공세의 전환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 한 그는 끝내 한쪽 팔을 떨어뜨리고 만다.
아니, 떨어뜨렸다고 하기에는 상처에서부터 이어져 기분 나쁠 정도로 꿈틀거리고 있는 핏덩이가 곧바로 떨어져 나간 팔을 당겨 붙이려 하고 있었지만..
이는 소녀가 몸을 넘겨받은 이후 처음으로 놈에게 유효타를 성공시킨 순간이었다.
"... 네가 에단에 대해 뭘 그렇게 잘 알기에 그렇게 짖어대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딱히 듣고 싶지도 않아."
"무슨?!"
서둘러 팔의 재생에 집중하고 다음 공세를 대비하려던 지크프리트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방금 전 정도의 공세라면 저 수인 소녀 역시도 어느 정도 회복할 시간이 필요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소녀는 제 몸을 더 이상 아끼지 않고 내달려 어느새 자신의 뒤를 잡고 있었다.
"이 내가.. 뒤를 내주었다고? 웃기지 마라..!!"
후웅....!!
팔이 맞붙는 것을 더 기다리지 않고 마찬가지로 공세로 전환하여 뒤쪽으로 참격을 흩뿌린 그였지만, 금방 자신이 속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바닥을 찢어 들어내 보이고 투기장의 외벽까지 그 위력이 닿을 만큼 강력한 참격이었지만 손끝에 남는 감각이 너무나도 가볍다.
펄럭...!
그리고 보게 된다.
갈기갈기 찢어진 채 펄럭이고 있는 소녀의 로브를.
에단에게 이와 같은 방식으로 이미 한 번 속은 적이 있었지만, 후각의 의존도가 높은 수인에게는 다시 속아 넘어갈 수밖에 없는 덫이다.
"어디에...?!"
서둘러 희미하게 이어진 냄새의 끈을 뒤쫓았지만 이미 늦었다.
그가 만들어낸 먼지 구름 아래, 바닥에 납작 엎드리듯 숨어있던 소녀는 이 사이에 충분히 회복을 마쳤다.
석!
서걱..!
질긴 고깃덩이가 시원하게 썰려나가는 소리와 함께 거구가 무너져 내린다.
그의 다리 사이로 몸을 날려, 한바퀴를 회전하며 그대로 두 다리를 잘라낸 것이었다.
카가가가각...!
어찌나 섬광 같은 일격이었는지 소녀는 바닥에서 고작해야 5레니는 떨어졌을 그 날렵한 도약을 멈추기 위해 단검으로 바닥을 찔러 자신의 몸을 가누어야 했다.
"에단에 대해 함부로 말하는 녀석을.. 나는 용서하지 않아."
덕분에 지크프리트에게서 너무 멀리 떨어지지 않을 수 있게 된 소녀는 차분히 두 다리와 손목의 재생을 기다리곤, 단검을 역수로 들어 보인다.
로브를 벗어던지고 늑대의 귀와 꼬리를 드러내 보인 소녀는 한층 더 민첩해진 모습으로 자세를 숙였다.
고통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어째서인지 몸이 가볍게 느껴진다.
더 이상 고통이 두려워 몸을 움직이기를 주저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그건 아마도 상대가 자신의 머릿속을,그리고 가슴을.. 고통이 아닌 다른 것으로 뜨겁게 달구어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에단은 내 영웅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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