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일행 출신 사제의 우울-131화 (131/137)

〈 131화 〉 22. 짐승들의 왕

* * *

22. 짐승들의 왕(4)

"아.."

잠에서 덜 깬듯한 힘없는 눈을 느릿느릿 꿈뻑거리며 정신을 차린 도라는 처음 눈을 떴을 때 있었으면 한 이가 바람대로 있어주었다는 사실에 기뻐하면서도, 점차 끝이 다가옴을 실감하고 가슴께의 욱신거림을 느꼈다.

"깨어난 건가."

여느때와 다름없는 쌀쌀맞은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도라는 싱긋 웃었다.

이번만큼은 웃어 보였다. 죽음이 가까워졌기 때문인지.. 평소만큼 그가 무섭지 않았다.

"... 발터.."

그는 분명 변했다.

변해버렸다.

그리고... 그가 변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자신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상황이 좋지 않아. 하지만.. 이런 꼴로는 밖에 나가는 것조차 곤란하군."

욕지거리를 나지막이뒤에붙이며 조용히 혀를 찬 발터는 자신의 꼴을 내려다보았다.

너무 오랫동안 지크의 피에 의지하고 있었다.

더 이상은 참기 어려운 허기가 턱밑까지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그는 이제 막 도라의 양팔에 천과 끈을 감아 지혈을 마치고, 갈라진 복부에 로브의 두꺼운 천을 가져다 대고 있던 참이다.

하지만 그는 알고 있다. 이런 처치도 고작해야 잠깐의 시간을 벌어줄 뿐, 이대로 피를 더 흘리게 되면 그녀는 틀림없이 죽게 된다는 것을 말이다.

"기뻐..."

"대체 뭐가 기쁘지?"

지크가 상대하고 있던 소녀와 꺼림칙한 반쪽짜리 용사의 낌새가 심상치 않았던 만큼 신경이 곤두서 있던 발터는 공감하기 어려운 도라의 말에 퉁명스럽게 받아쳤을 뿐이었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다시 한번 싱긋 웃었을 뿐이다.

"발터가.. 아직 내가 기억하고 있는 발터라는 생각이 들어서..."

".. 무슨 소리를..."

자신의 상처를 지혈하기 위해 감싸누르고 있는 그의 단단한 손이 여전히 성심성의껏 맞닿아있었기 때문일 거다.

이런 처치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분명 그도 알고 있을 텐데 지금도 이렇게 자신의 곁에 있어주고 있다.

그의 말대로... 지크가 곤란한 상황일 텐데 말이다.

"약속.. 기억나? 역시 기억 안 나려나..? 아무래도 우리들 한참 어렸을 때 이야기니까..."

"기억나지 않아. 그러니 너도 이만 조용히 해. 피가 빠져나가는 속도만 빨라질 뿐이다."

".. 싫어."

"..."

발터는 그녀의 입에서 저런 명백한 반대 의사를 처음 들어봤다고 생각했다.

워낙 소심하고, 늘 홀로 겉돌아서 먼저 다가가지 않으면 좀처럼 그녀 쪽에서 먼저 말을 거는 일도 없었을 정도였으니까.

"어차피 나.. 죽는 거지?"

그런 그녀가 지금은 마치 죽음도 두렵지 않다는 것처럼 태연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그러니까 그냥 말할래. 지금까지 말 잘 들어왔으니까... 마지막에 잠깐 정도는.. 눈감아줄 수 있는 거잖아."

이제 와서 거짓말이 통할 리도 없다.

그녀의 몸은 그녀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을 테니까.

한눈에 보기에도 이미 얼굴과 입술에 핏기가 많이 옅어졌고, 숨소리도 점차 약해져가고 있다.

"... 미안해."

그러나 그녀의 입에서 처음으로 내뱉어진 것은 미안하다는 사과의 한마디였다.

"왜 사과를 하는 거지?"

"말려주지 못해서.. 그리고... 네 마음속 빈자리를.. 채워 주지 못해서."

그를 말리지 못했다.

말릴 수 없었다.

자신에겐 그럴만한 의지도 없었을뿐더러, 그녀의 빈자리를 대신할 존재도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발터가 헬레나 씨에게 마음을 품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조금 서운하게도.. 그류엘드 아저씨 대신 사냥한 괴조를 그녀에게 가져다줬을 때, 단 한 번 짧게 대화를 나누었던 것이 그 계기라고 했다.

지크와는 다르게 그녀는 좀처럼 중앙의 천막에서 나오질 않았으니까..

다만 피를 잇기 위해 지크와 헬레나 씨가 짝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마을의 어른들이라면 누구나가 알고 있었다고 하니, 아마 발터도 자신의 아버지인 그류엘드 아저씨에게 이야기를 들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게 아마 처음으로 발터와 헬레나 씨가 말싸움을 한 날이었다.

"혼자서.. 계속 쓸쓸해 보이는 눈을 하고 있었잖아... 아무렇지도 않은 척.. 애써 표정을 굳히고 있어도 나는... 알수 있거든."

"..."

"절대 혼자 두지 않겠다고... 발터는 나한테 그렇게 약속해 주기까지 했는데.."

그런 말은 한 적 없다고 부정하기 위해 달싹거리던 그의 입이 좀처럼 떨어지 않는다.

선명하게 떠오르는 기억은 아니었을지 몰라도, 분명 그랬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라면 분명..

"..."

그가 곤란함을 느낀 것을 금방 알아챈 도라의 얼굴 위로 그 어느 때보다 쓸쓸해 보이는 미소가 잠시 머무르다 생명의 기운과 함께 옅어져 간다.

"알고 있어, 헬레나 씨가 날 신경 써줬으면 한다고.. 발터에게 부탁했다는 것 정도는."

"...!"

이런 이유에서였다.

도라에게 그런 말을 했던 기억 자체는 이미 잊어버린지 오래였지만 헬렌, 그녀가 했던 말이나 부탁은 설령 사소한 잡담까지도 아직까지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지크를 돌보기 위해서였겠지만 마을의 아이들과 함께 놀고 있을 때면 헬렌은 저 멀리에 우두커니 서서우리들을 지켜보고 있곤 했다.

그녀의 굳세고 상냥한 마음씨는 겉도는 것으로 보이던 도라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겠지.

그건 어쩌면.. 잔인한 친절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는 정말 기뻤거든... 욱, 쿨럭..!"

"... 도라!"

"큭.. 우윽..."

차가운 돌바닥에 새빨간 피를 한차례 토해내고, 더욱 수척해진 얼굴로 비틀거리는 도라의 상처를 지혈하는 동시에 붙들기 위해서라도 발터는 하나뿐인 팔로 그녀를단단히껴안을 수밖에 없었다.

"하아... 하아.."

"이제 그만 말해. 더 말했다가는.."

"... 미안해.."

그의 따뜻한 체온이 가장 잘 느껴지는 곳으로 자신의 몸을 내맡겨온 도라는 그의 품속에서 다시 한번 목소리를 쥐어짜내 사과를 건넸다.

"그러니까.. 어째서 네가 사과를 하는 건데."

나쁜 건 자신이다.

이곳에서 진정으로 지옥에 떨어져야할 이가 있다면 그건 자신 이외에는 없을 터였다.

"... 미안.. 해.."

그날 살아남은 것이 헬레나 씨가 아닌 자신이라서.

그가 잘못된 길로 향해가는 것을 알면서도 제대로 말려주지 못해서.

그리고...

이렇게 또다시, 약속을 어기고 멋대로 먼저 떠나가 버려서.

하지만.. 따뜻하다.

수없이 많은 죄를 쌓아올리고도 그의 품속에서 마지막을 맞을 수 있게 된 것은 이름도 얼굴도 모를 어떤 신의 자비인 것일까.

'혼자 그러고 있으면 안심심해?'

아.. 먼 옛날의 그리운 목소리다.

다시 한 번 듣고 싶었던 그의 목소리다.

어딘가 무뚝뚝한 기색이 있지만 그럼에도 분명 다정함이 느껴지는.

'같이 놀자. 너만 옆에서 그러고 있으면 우리까지 괜히 불편하다고.'

'하지만... 나 놀아본 적이 없어서.. 너희가 재미없다고 할지도 모르고.. 실망하게 되면..'

소심하고 체력도 약한 탓에 또래의 아이들과 일찍이 어울리지 못했던 자신에게 처음으로 먼저 다가와 주었던 한 사람.

그게 설령 타인에게 부탁받은 것이라 할지라도, 한 순간의 동정이었다고 할지라도...

'그런 말은 안해. 약속할게, 앞으로 널혼자 두지 않을 테니까.'

'... 약속?'

어린 마음에 다가온 첫 약속은 기쁘고 설레었다.

'그래. 네가 아무리 재미없어도, 실망시켜도 계속 같이 놀아줄게.'

지금 이 순간 까지도.

"아..?"

발터는 자신이 붙들고 있던 그녀의 몸이 빠르게 식어가는 것을 느끼며 복부를 지혈하고 있던 천에 더욱 힘을 주었다.

후두둑... 툭... 투둑..

그러나, 이미 피를 잔뜩 머금은 천은 질척거리는 소리를 내며 핏물을 떨어뜨렸을 뿐이다.

"어째서.."

마지막까지.. 말하지 않았다.

마지막 숨을 내뱉기 전, 그녀가 덜덜떨리는 입술을 굳게 다무는 것을 보았다.

말하지 못한 것이 아니다.

그녀는 홀로 남을 자신을 생각해 끝내 그 마음을 입에 담지 않았다.

널 좋아했다고.

끝까지 죄책감을 덜어주기 위한 사과만을 계속하며, 본심을 전하지 않았다.

그녀가 아무리 어릴 때부터 함께 해온 소꿉친구라고는 해도.. 친동생마저 희생시켜가며 피로 점철된 길을 걸어온 자신에게 일말의 감정따위 남아 있을 리 없을 터였지만...

어째서 그때와 같은 욱신거림이...

상실감과 공허함이 아니라면 복수심만을 느낄 수 있었던 가슴이 왜 이렇게나 아파오는 걸까.

저벅... 저벅..

"...!"

"발..터.. 피, 피의.. 냄새가..."

그러나 이 낯설고 두렵기까지 한 감정에 대해 제대로 된 답을 내놓기도 전에, 그의 눈앞에는 금방 다시 절망이 찾아들고 말았다.

작고 가는 실금이었을 것들이 점점 그 수와 크기를 늘려간다.

"... 어째서.."

왜.. 지크가 지금 이곳에 나타난 것일까.

마치 그때와 같다고 무심코 생각해버렸기에 더더욱 절망스럽다.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결국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목이 찢어져라 내질러진 악에 받친 고함소리가 단단한 돌벽에 부딪혀 좁은 통로를 타고 크게 울려 퍼진다.

먼지 쌓인 낡은 검과 방패 따위가 아무렇지도 않게 바닥에 굴러다니고 있는 이곳은 다름 아닌 투기장 지하의 검투사 대기실.

중상을 입은 도라를 하나 남은 팔로나마 데리고 이곳으로 숨어든 발터였지만, 그는 지금 자신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거구의 이를 향해 거리낌 없이 고함을 내지르고 말았다.

"당장 돌아가..!! 네가 있어야 할 곳은 여기가 아니야...! 네 역할은 이게 아니잖아...!!"

"... 피.. 냄새가... 바. 발터... 도라.."

뚝, 뚝.. 뚝.

투쟁으로부터 도망친 순혈자는 자신이 맡은 동포의 피 냄새를 따라 이곳까지 온 모양이지만, 여전히 두 눈은 핏빛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붉은빛이 만연해 있었으며 피 섞인 침을 계속해서 뚝뚝 떨어뜨리며 힘겹게 언어를 구사하고 있는 그의 모습은 몹시 불안정해 보인다.

원초 회귀 하였을 터였다.

사지에 내몰려 제 몸에 흐르는 순수한 피에 깃든 짐승의 본능을 일깨워 모든 것을 내맡겼을 그가 이렇게 자신을 알아봐서는 안된다.

"지크...! 지크프리트..! 잘 들어, 잘 들으란 말이다..! 넌 우리들의 왕이야. 그렇게 되어야만 해! 대체 여기는 왜 찾아들어온 거냐..! 당장 그 반쪽짜리 용사와 사제를 찢어 죽이고 오란 말이다...!!!"

"나는... 난.. 더는..."

하지만 이렇게 대화를 해나가고 있다.

어째서일까.

무언가가 차츰차츰 무너져내리는 듯한 소리가 들린다.

크게 금이 가있던 곳부터 하나.. 둘.. 부서져 떨어져 나간다.

... 모든 것을 포기하고 쌓아올려온 복수의 길이.

"이제 와서... 이제 와서 더는 못하겠다는 거냐..? 그렇다면 대체 무엇을 위해 우리 동포들이 지금까지 널 위해 희생한 거지? 헥터는... 내 동생은 무엇을 위해 죽은 거냔 말이다..!"

발터는 거침없이 말을 뱉어내면서도 실은 알고 있었다.

그건 모두 자신의 짓이다.

지크에게 그 누구보다도 강하고 포악한 짐승들의 왕일 것을 강요하며 연기해나갈 수 있게끔 가까이에서 그의 보좌를 자처한 것은 자신이다.

어릴 때부터 함께 자라오며 보아온 그의 밝고 선한 심성에 잔혹과 잔악을 강요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으니까.

그가 인간들에게 품게 된 증오와 분노, 그리고 복수심을 부추기며 조금씩 선을 넘어가도록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의 등을 떠밀어왔다.

동포들을 공포와 분노로 속여 복수에 피와 심장을 맡기게 만들었다.

그러면서도.. 죽어나간 이들의 시체를 산처럼 쌓아올린 위에서 자신은 여전히 꿈을 꾸듯 먼 과거의 환상만을 좇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 어쩌면 내겐 힘이 없으니 지크와 동포들을 이용해 내 복수를 이루려는 개인적인 욕망일지도 모른다.

오히려 그쪽이 더 정답이 아닐까 최근에 와서는 늘 생각했다.

하지만 여기서 멈출 수는 없다.

지크 역시, 여기서 멈춰서는 안된다.

하나뿐인 팔의 주먹에 힘이 들어간다.

손톱이 살갗을 깊이 파고들어 피를 뚝뚝 떨어뜨린다.

철퍽...!

바닥에 고인 핏물 위로, 이미 차갑게 식은 도라의 몸이 힘없이 떨어져 내리며 둔탁한 소리를 낸다.

"도... 라.."

덜덜덜 떨리는 자신의 팔과 더욱 아프게 찔러들기 시작한 가슴께를 애써 모른척하며 발터는 몸을 일으켰다.

방금 놓아버린 것이 이런 자신마저 사랑해준 유일한 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눈앞에 있는 것이 헬렌이 소중하게 여기는 하나뿐인 동생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끝끝내, 마지막 순간까지도 무너져 내리는 길 위로 발걸음을 옮겼다.

"지크, 내 마지막 부탁을.. 들어주겠어?"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