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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일행 출신 사제의 우울-132화 (132/137)

〈 132화 〉 22. 짐승들의 왕

* * *

22. 짐승들의 왕(5)

와그작! 으적, 으적..

뚜둑! 뿌득...

"나, 나는.. 난.. 더는... 이. 잃고싶지.. 않아..."

콰드득! 꽈득!

투두둑! 뚝...!!

"빼앗기고 싶지.. 않아..."

소녀가 용사를 따라잡았을 때, 그는 지하의 좁은 복도에 우두커니 멈춰서서 통로 옆으로 난 방 하나의 안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앞의 광경을 보고도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흔들리는 눈동자로,

"난... 나는.. 어. 어째서..."

시선을 따라 다다른 곳에는 피웅덩이안에 주저앉은 거구의 뒷모습이 어둠 속으로 어렴풋이 보인다.

그곳에는 피칠갑을 한 커다란 두 손으로 하염없이 바닥을 쓸어 자신의 아가리 안쪽으로 밀어 넣고 있는 짐승이 있었다.

꽈득... 꽈드득...

칼날보다도 단단하고 날카로운 이빨 사이에서 분쇄되어가는 뼈들이 내는 꺼림칙한 비명소리,

뚜두둑...! 툭...

질긴 근육과 살점이 완력에 의해 뜯겨 나가는 끔찍한 소리.

후두둑... 투둑.... 툭..

입가에서 흘러넘친 피가 바닥의 피웅덩이를 넓혀나가는 그 소리에는 소녀 역시도 두 다리가 굳어지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비참한 광경이라고, 소녀는 생각했다.

지크프리트.. 그는 분명 위협적인 적이었다.

몇 번이고 자신과 에단을 벼랑 끝으로 내몰았던 용서할 수 없는 적이다.

강의 급류에 몸을 맡긴 것만 같은 이 꿈꾸는 듯한 감각이 검을 휘두를 수 있도록 도와주지 않았다면 자신은 분명 상대조차 될 수 없었을 거다.

그만큼이나 힘겨운 싸움이 계속되었다.

검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온몸이 망가졌다 고쳐지는 고통은 분명히 학습되었고, 계속 검을 휘두르는 것으로 얻게 될 고통에 대한 공포심으로 손과 발을 주저하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오로지 저 사악한 이로부터 에단을 지켜야 한다는 일념하나만으로 끝까지 포기하지않고 눈 앞의 적에게 검을 휘둘렀다.

그러니 그는 끝까지 최악이자, 최흉의 적이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가 영문모를 혼잣말을 중얼거리기 시작했을 때부터는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저 모습은.. 그저 두려움에 떨며 상대를 위협하려 큰 울음소리를 내는 상처 입은 짐승의 모습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터벅.. 터벅..

장검의 끝을 비스듬히 아래로 세운 채 소녀는 천천히 앞으로 걸어나갔다.

"잠깐..?"

이에 놀란 노아가 뒤늦게 내뻗은 손은 예상보다 좀 더 아래에 있던 소녀의 어깨를 붙잡지 못했고, 그녀는 끝내 주저앉은 짐승의 곁으로 다가섰다.

뚝... 투둑..

"... 아.."

떨어지고 있던 것은 핏물만이 아니었다.

짐승의붉은눈에서는마치 그의 눈에 스며든 핏기를 씻어내주려는 것처럼끊임없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물론 이 죄가 그리 쉽게 씻길 리는 없었다.

"... 지크."

툭...!

철벅.

다 삼켜내지 못한 살점이 그의 손가락 사이로 떨어져 핏물을 튀긴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반응해 고개를 돌린 지크프리트는 붉게 물든 시야 속 어린 늑대 수인 소녀를 보았다.

"..."

소녀는 무언가 말을 건네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순혈자의 위압에 두려워져서..?

수많은 악행을 저지르고 만 그가 혐오스러워서...?

아니었다.

"...."

가슴이 먹먹해질 정도로 무겁게 물기를 머금은 슬픔의 냄새가 지금 눈앞의 이 덩치만 커다란 청년에게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소녀는 그의 앞으로 어지럽게 흩어진 신체의 잔해들을 바라보았다.

동포라고 불리던 이들의 냄새가 어렴풋이 남아있다.

... 그는 마지막까지 잘못된 길을 선택하고야 말았다.

소녀가 지크프리트에게 품은 것은 동정심, 그리고.. 인상이 찌푸려질 정도의 안타까움.

그때와 같았다.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게 없기 때문에, 아무런 말도 해줄 수가 없는 것이었다.

"... 어린.. 도.. 동포야."

그때, 지크프리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여전히 두 붉은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을 떨어뜨리면서도, 거칠게 뛰는 심장과 끓어오르는 피의 본능에 목소리를 덜덜 떨면서도 그는... 다름 아닌 눈앞의 어린 소녀에게 자신의 마지막 부탁을 맡겼다.

"나. 나를.... 쓰러뜨려... 주지않겠.. 나..."

"...!!"

뿌드드득...! 꾸드득!!

자신을 쓰러뜨려 달라는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부탁이 전해진 것과 동시에 일전까지의 싸움으로 너덜너덜해져 있었을 지크프리트의 육신이 갑작스레 빨라진 속도로 재생한다.

마지막 남은 두 동포의 뼈와 살점, 그리고 피를 삼켜 최후까지 항전할 준비를 마친 것이었다.

카앙...!!

그대로 앞으로 휘둘러진 지크프리트의 두꺼운 팔이 소녀를 으스러뜨리려던 것을 노아가 아슬아슬하게 튕겨낸다.

가죽과 검날이 맞부딪혔다고는 생각하기 어려운 소리다.

자신을 쓰러뜨려주기를 바란다면서도, 그는 순순히 목을 내놓을 생각따위는 없어 보인다.

동포들의 목숨과 수없이 많은 죄업이 쌓여 그의 발밑을 받치고 있다.

이제와서 용서받을 수도 없으니.. 마찬가지로 포기할 수도 없는 것이겠지.

'... 나를 먹어라, 지크.'

"그르르르륵.."

'네게서 마지막 한 명까지 앗아가는 나를.. 절대 용서하지 마라. 그래도 이걸로.. 너는 더 이상 뒤를 돌아보며 싸우지 않아도 되겠지.'

"크르르르... 이제.. 내, 내겐.. 지켜야 할 것도... 잃어버릴 것조차도.. 남지 않았.. 구나..."

남은 것이라고는 고귀한 피를 저주로 더럽힌 비루한 몸뚱이, 그리고 텅 빈 복수 뿐이다.

꽈광....!!!

넋두리와 같은 혼잣말을 중얼거린 끝에 지크프리트는 양 팔을 높게 들어올린 후 그대로 바닥을 내려찍었다.

쿠구구구구구구구구구....!!

바닥에 발붙이고 있던 모두가 한순간 허공으로 떠올랐을 만큼이나 어마무시한 충격에 단단한 돌바닥이라고 버틸 수 있을 리는 만무했다.

쿠구구구구궁...!!!

바닥이 큰 구멍을 만들어내며 허물어져 내리고 아래쪽에 있던 커다란 공동으로 용사와 소녀, 그리고 지크프리트가 떨어져 내린다.

투기장 지하의 최하층.

과거 검투사들의 훈련장으로 쓰였던 장소로 보이는 이곳이 바로.. 이들이 결착을 짓게 될 장소였다.

깜빡... 깜빡..

마침이라고 해야 할지, 용사와 소녀의 손에 들려있던 검에서 제 본분을 끝마친 여명의 빛이 끝내 희미해져 사라진다.

완전한 어둠이 내려앉는다.

이 칠흑 속에서는 붉은 안광 한 쌍과, 진은색의 안광 한 쌍만이 자연스럽게 서로를 마주한다.

....!!

용사가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기 전에 이 서로 다른 안광은 저마다 다른 형태의 선을 그리며 어지럽게 뒤섞였다.

*

카앙...!

캉!!

"허억... 헉.."

실비아와 노아는 괜찮은 걸까.

무언가 폭발한 것만 같은땅의 흔들림과굉음을 쫓아 발걸음을 서두른 나는 이곳저곳이 금가 내린 좁은 통로를 따라 벽에 손을 짚고서라도 잘 움직이지 않는 무거운 몸뚱이를 앞으로 이끌었다.

까가가각...! 카앙...!!

점차 소리가 선명해진다.

캉...!!!

복도의 끝에서 더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을 찾아 내려간 끝에, 나는 드디어 찾던 이의 모습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지크프리트의 발톱과 소녀의 검이 서로 맞부딪혀 날을 긁어내리며 만들어진 불똥에 드문드문 드러나는 둘의 모습만이 어둠 속 잔상으로 남는다.

노아는 눈먼 검에 소녀를 베는 것을 우려해 내가 도착할 때까지 섣불리 움직이지 못 한 모양이다.

"에단 씨 오셨군요. 어서 은총의 빛을, 저도 싸우겠습니다."

"..."

당장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입안에 맴돌았지만, 이것은 이 싸움이 끝난 다음에나 이야기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에단 씨..?"

".. 그래, 부탁한다."

화아아악....!!

어둠을 밝혀내자 드디어 실비아와 지크프리트의 모습이 제대로 눈에 들어온다.

"하악... 하악.. 학..."

"그르르륵... 그흑... 그윽..."

순식간에 주변이 밝아지자 눈을 적응시키기 위해서라도 잠시 물러난 둘은 모두 가쁜 숨을 내쉬며 언제든지 다시 달려들 수 있게끔 서로의 이빨을 겨누고 있다.

지금까지는 호각이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노아가 다시 합류하게 되었으니 판도는 바뀔 것이다.

어디까지나.. 실비아가 조금만 더 버텨줄 수 있을 때의 이야기지만 말이다.

처음에는 이를 위해 시간을 끌려는 목적으로 지크프리트가 도망친 줄로 알았지만.. 어째서 이런 도망칠 곳 없는 지하 공동을 결전의 장소로 삼은 것인지 의문이다.

"그르르륵.. 그흑.. 에단, 드.. 드디어 왔.. 군..."

그리고 지크프리트의 목소리가 공동 안을 울리기 시작했다.

"나.. 나는... 악이니, 너희... 들은.. 선이겠지.."

피처럼 붉은 눈은 처음에 소녀를 한 번, 그리고 다음으로는 나를 똑바로 향해왔다.

그 시선을 마주하자 이유 모를 떨림이 온몸을 지배해 꼼짝 못 하게 옭아매 온다.

"선으로 행하고자 하는.. 정의라는 것이... 정말로 악을 이길 수 있는 것인지.... 내 선택이 틀린 것인지.. 깨닫게 해주기를.. 그륵..! 이 더럽혀진 마음으로나마 깊이... 바라겠다."

"...!"

그렇게 놈의 말이 끝난 시점에서 나는 눈앞으로 거대한 어둠이 닥쳐드는 것을 보았다.

아니, 그것은 은총의 빛에 의해 지크프리트의 뒤로 늘어져 있던 그림자가 일순 크기를 불린 것을 내가 착각한 것에 불과했다.

눈 깜짝할 사이 광원에, 즉 은총의 빛을 들고 선 내 쪽으로 지크프리트가 몸을 가까이 날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의 목적은 내가 아니었다.

까강....!!

"... 크윽..?!"

방금전까지도 싸우고 있었던 실비아를 내버려 두고 곧바로 이쪽으로 몸을 날려온 이 불시의 기습에도 반사적으로 검을 휘둘러 막아낸 노아였지만, 지금 그의 손에는 검이 한 자루밖에 들려있지 않다.

충분히 힘을 싣지 못하고 튕겨나간 검을 노아는 끝까지 놓치지 않았지만, 비어버린 몸 쪽을 방어할 수단이 없다.

"노아..!"

푸화악...!!

소름끼치는 파육음, 그리고 몸통에서 올라오는 뜨거운 통증과 함께 눈앞에는 내 것으로 보이는 선홍색의 피가 요란하게 흩뿌려지는 것을 보았지만 이것으로 한순간을 벌었다.

실비아를 위해서라도 내가 끝까지 정신을 붙잡고 있어야만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지만, 지금 용사가 쓰러지면 실비아가 위험에 처하는 것은 마찬가지였기에 나는 몸을 날려 지크프리트의 후속타를 막아설 수밖에 없었다.

"에단 씨..!"

"에다안!"

털썩!

마침 서있기도 버거웠던 몸을 옆으로 내던지듯 쓰러뜨리며, 나는 내가 가져온 한순간을 둘이 어떻게 낭비없이 사용하는지를 보았다.

"크아아아아악....!!"

비록 한 손에만 검을 들고 있었다지만 눈으로 좇기조차 힘든 검격으로 지크프리트의 상반신을 그 짧은 사이 도륙 내는 노아와, 뒤를 잡고 민첩하게 뛰어올라 그의 양쪽 어깨를 깊게 베어내고, 목덜미에 장검을 박아 넣은 실비아는 상대의 거친 몸부림을 피해 검자루를 놓고 한 걸음 물러선다.

재빨리 단검으로 바꿔들고 다음 공격을 준비하려던 것으로 보이던 소녀였지만, 짓궂은 저주는 가장 오지 않기를 바란 순간 썰물처럼 순식간에 밀려들어왔다.

땡그랑...!

털썩..

"컥... 쿨럭.."

검은색의 단검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심장을 부여잡고 주저앉은 소녀는 그 짧은 순간만에 안색이 하얗게 질려 식은땀을 흘리더니 입에서는 재차 검은 피를 쏟아내고 만다.

이전보다도 쏟아낸 피의 양이 많았기에 나는 찢어진 폐가 재생하자마자 핏물을 머금고 소리쳤다.

"실비아...! 더 무리해서 움직여선 안돼!"

내가 이렇게 경고한 것과는 별개로 움직이고 싶어도 움직일 수 없을 거다.

늦기 전에 은총에 의한 정화와 해주를 시작해야 했지만 당장 눈앞에는 이전보다는 느리더라도 상처의 재생을 해나가고 있는 지크프리트가 막 자신의 목덜미에 박혀있던 검을 뽑아들어 부러뜨린 참이었다.

챙강....!

"하필 이런 때.. 그렇다면,"

전세가 뒤바뀔 수도 있다는 것을 직감한 노아는 무언가 결심한 눈동자로 한 자루의 검을 단단히 쥐고 자세를 잡는다.

"흐읍..!!"

양쪽 어깨의 재생이 끝나자마자 어째서인지 이번에도 눈앞의 무방비한 소녀가 아닌 용사를 향해 다시 한 번 달려든 지크프리트는 이번에야말로 끝장을 보려는 것처럼 그의 검 끝을 향해 몸을 내던져 왔다.

푸우욱...!

아직도 재생이 덜 끝난 가슴팍에 용사의 검이 다시 한번 쑤셔 박히면서도 그는 필사적으로 두 팔을 휘둘렀다.

애초에 깊게 찔릴 것을 각오하고 달려든 움직임이었다.

검을 놓지 않는다면 이대로 찢어발겨지는 결과를 피할 수 없다.

"... 그륵..?! 이건?"

그러나 그 순간, 용사의 전신이 찬란한 금빛으로 물드는가 싶더니 마치 지크프리트가 느려진 것만 같은 착각이 들 만큼이나 빠르고 간결한 용사의 몸동작이 이어졌다.

두꺼운 가죽을 뚫고 질긴 몸뚱이에 박혀들어간 검을, 믿기 힘든 완력과 속도로 정확히 한 바퀴를 휘둘러 가로로 갈라버린 것이었다.

지크프리트가 팔을 휘두르기도 전에, 헤집는 것이 최대였던 저 튼튼한 거구를 마치 생선 살처럼 잘라내 버렸다.

저것이 무엇인지 용사일행이었던 나는 알고 있었다.

체내의 모든 마력을 쥐어짜내어 대가로 확실한 일격을 보장받을 수 있는 용사의 권능, 홀홀 단신으로도 거대한 악에 대항 할 수 있게끔 축복이 부여한 규격 외의 힘.

숨겨둔 비수와도 같이 변수로 사용할 수 있는 그야말로 용사의 일격이었다.

"이.. 걸로... 윽."

털썩.

당연하겠지만 위기를 극복해낼 만큼의 커다란 힘을 사용하는데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 그 한 번의 휘두름을 끝으로 용사의몸 주변을 짙게 감싸던 의문의 금빛 기운은 곧바로 흩어져 사라져버렸고,소녀와 마찬가지로 힘없이 주저앉아버리고 만다.

하지만.. 그 힘조차 부족했던 것일까?

아니라면 한 자루의 검에 미처 힘을 다 담아내지 못 했던 것일까?

"... 그륵, 크으윽.... 그윽.."

꿈틀... 구르륵..

꿀럭..

목숨을 끊어놓기 위한 마지막 일격이었다.

도망친 시점에서 놈의 몸안에 뿌리내린 저주의 기운은 충분히 약화되어 있었으니 방금 전의 저 몸이 양단되는 치명상에 버틸 수 있을리가 없었다.

그러나 깔끔하게 떨어져 나갔어야 할 지크프리트의 몸을 붙잡고 늘어지는 피의 형체가 보인다.

외팔의 성인 남성과.. 그것보다는 조금 왜소한 체구에 비슷하게도 양팔이 없는 여성의 형상을 한 짙은 피가 잘려나간 몸뚱이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으려 하고 있다.

절망스러운 광경이었지만.. 동시에 내 눈에는 보였다.

잘려나간 단면 사이로 여전히 맥동하고 있는 놈의 심장이 말이다.

"... 놈의 심장을.. 쿨럭... 노려야.."

마력, 그리고 은총.

게다가 용의 저주까지도.

이 모든 것은 심장에 그 뿌리를 두고 피와 함께 전신을 맴돈다.

노아의 일격 덕분에 당장 놈의 심장이 밖으로 드러났다. 이만한 기회는 더 없었다.

잘게 조각을 냈을 때에도 곧바로 재생을 해내던 놈이었지만, 이젠 정말 한계라는 것처럼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 위로 혈관과 근육이 들러붙어 재생해나가고 있다.

지금 저곳에 확실한 타격을 해낼 수만 있다면... 재생의 속도가 더는 피해를 감당할 수 없게 될 거다.

"... 크으윽.."

그러나 지금 이 자리에서 움직일 수 있는 이는 없었다.

무리에 무리를 거듭한 내 몸은 말할 것도 없고, 실비아와 노아 역시 좀처럼 몸을 일으키지 못하고 있다.

정말 다 왔는데, 이제 단 한 걸음만이 남았는데... 상대의 몸이 재생하는 걸 기다리며 가만히 보고만 있어야 한다.

심장의 두꺼운 혈관이 재생을 마치는 대로 먼저 떨어져 나간 몸을 원래대로 이어붙일 테고.. 이후에는 모두가 저항 한 번 하지 못하고 놈의 신체수복을 위한 양분이 될 것이다.

더는 놈을 막을 수 있는 이가 없어지게 된다.

이번과 같은 참사가 앞으로도 또 다시... 그것만큼은 막아야 한다.

"끄으으..!"

나는 꿈틀거리며 바닥을 기어가 놈이 일전에 부러뜨린 장검의 칼날 부분을 손에 쥐었다.

날이 손의 살갗을 파고들어 핏물이 흘렀지만 지금 내가 흘리는 피는 내가 놈을 막지 못 했을 때 앞으로 이 땅에 흐르게 될 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이걸... 놈의 심장에.. 쑤셔 넣기만 한다면...

챙강...!

털석..!

"커헉... 쿨럭."

... 틀렸다.

숨이 헛 돌고,더는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멋대로 팔에 힘이 풀리더니 기껏 잡은 칼날까지 놓쳐 떨어뜨리고 말았다.

이 중요한 때에.. 무방비한 상대의 심장에 칼날을 쑤셔넣기만 하면 될 뿐인 이 쉬운 일조차 해낼 수 없다니.

.. 이는 분명 내가 바라지 않는 죽음이라는 생각에 좌절하며 고개를 떨군 그 순간이었다.

푸욱..!

"...!"

날카로운 무언가가, 막 재생되어 혈관과 살점으로 다 뒤덮어가던 좁은 틈 사이로 정확히 심장을 찔러 깊이 파고들어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힘없이 떨구고 있던 고개를 다시 들어 올렸을 때, 나는 볼 수 있었다.

".. 하악.... 하악... 학.."

여전히 주저앉은 채였지만, 한 쪽 팔을 앞으로 힘겹게 내뻗고 있는 소녀의 모습을.

투척술.

이전에도 이브의 목숨을 구했던 그 실력으로 기력을 짜내어 단검을 던진 것이었다.

꿈틀...! 울컥..!

"... 이런..?"

그러나 조금 힘이 부족했던 것일까, 제대로 심장에 박혀들어갔을 단검의 칼날이 조금씩 조금씩 뒤로 밀려나가고 있다.

희비가 수시로 교차하며 숨통이 괴롭게 조여드는 기분이었지만, 이때 소녀는 비적비적 몸을 일으켰다.

분명 움직일 수 없을 텐데... 온몸이 지독한 독에 잠식된 것처럼 숨만 쉬어도 끔찍한 고통이 올라올 게 분명한데.

"내가... 할 수 있는 걸.. 쿨럭."

그럼에도 소녀는 아주 느린 발걸음을 앞으로 뻗는다.

이는 용사와 같은 민첩한 몸놀림도 아니었으며,

저주에 의지하여 미지의 힘을 빌린 그 이전의 영웅과 같은 발돋움도 아니었다.

내가 지금껏 곁에서 지켜봐온 어리고 연약한 수인 소녀가 천천히 주변을 보고 배우며 자신의 주관을 확립해나가던 것처럼, 아주 느리지만 분명한 방향을 정한 발걸음으로 한 서글픈 짐승을 쓰러뜨리기 위해 나아가고 있다.

"지금, 나만이.. 할 수 있는 걸...!"

타닥..!

비틀거리며 앞으로 쓰러질 것만 같던 움직임으로 끝내 마지막 모든 기력을 쥐어짜내 발돋움한 소녀는 높이 날아올랐다.

그리고,

깍지 끼어 쥔 작은 두 주먹이 놈의 심장으로부터 거의 다 빠져나와 있던 단검의 손잡이에 그대로 직격한다.

푸욱...!

오로지 소녀 자신의 의지와 부족한 완력으로 해낸 최약의 일격이었지만, 도약을 통해 몸무게를 싣은 이 공격에 칼날은 지크프리트의 심장에 다시금 깊숙이 틀어박힌다.

그 최후의 일격에 지크프리트의 두 몸뚱이가 한차례 크게 요동친다.

작은 정 하나로 바위를 두드려 깨부수는 광경을 보는 듯했다.

"... 아아.."

또한, 자신의 손에 쥔 단 하나의 작은 힘으로 불합리한 악에 저항하여 끝끝내 승리해낸 저 모습은...

마치 신탁의 용사를 보는 듯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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