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화 〉 눈의 마왕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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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7일.
드디어 줄곧 고대해 왔던 대로 방앗간에 정착하는 데에 성공했다.
큰아들인 카이는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해안가 쪽이 더 좋았다며 여전히 징징거리고 있지만 녀석은 모를 것이다.
이만한 방앗간이면 나는 물론이고 카이 녀석이 어른이 된 뒤에도 먹고 사는 데에 걱정이 없을 것이다. 그래도 딸아이인 게르다는 곡물 냄새가 나서 좋아하고 있고, 마누라도 기뻐하고 있어서 다행이다.
3월 15일
방앗간이 슬슬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브레멘에서 수입한 곡물들을 가공해 주고 그 대가로 받는 수익이 제법 짭짤하다.
카이 녀석은 여전히 바다로 가서 어부가 되고 싶다는 철 없는 소리만을 하고 있지만..
근래 들어서 게르다가 밤 중에 우리 침대로 오는 일이 잦아졌다.
밤마다 무언가 두드리는 들린다던가. 괴물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린다던가.
아무래도 새로운 곳에서 완전히 적응아기란 쉽지 않은 것 같다.
3월 30일.
소식에 따르면 걱정하고 있던 브레멘과의 전쟁이 승리로 끝났다고 한다.
하얀 전사인가 뭔가가 대단한 활약을 벌였다 들었는데 자세한 것은 모르겠고, 중요한 것은 이걸로 곡물이 끊길 일은 없어졌다는 것이다.
기분이 좋아서 간만에 친구들과 질펀하게 한잔 했는데,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아이들이 들려들어 무섭다고 징징거리기 시작했다.
방에서 무슨 소리가 들린다고.
게르다 뿐만 아니라 카이까지 같은 소리를 하는 것으로 봐선 단순히 불안감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지하실에 큰 쥐라도 사는 걸까?
4월 3일
읍내로 가서 쥐덫을 사왔다.
이걸로 쥐가 잡히면 아이들이 걱정할 일은 없겠지.
혹시나 하는 생각에 나도 아이들의 방에 가봤는데 내 귀에도 벽을 긁어내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기묘한 울음 소리 같은 것이 낮게 들리는 것으로 봐선 아마도 제법 큰 쥐들이 돌아다니는 것 같았다.
4월 4일.
쥐덫에 무언가가 걸리지 않았을 까 하는 생각이 든다.
커다란 치즈를 얹어 두었으니 아마 쥐가 맞다 면 먹이를 물었겠지.
오늘은 일 때문에 제법 피곤하기도 한 만큼 빨리 확인하ㄱ…ㄱㅁㅇㄴㅇ!
*
소년 카이는 본래 뱃사람이 꿈이었다.
거친 파도를 해치고 나아가 거대한 물고기를 잡아오는 어부들을 동경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가 방앗간을 구매하면서 카이와 아버지의 사이가 틀어지고 말았다.
아버지는 카이에게 어부가 될 생각 하지 말고, 방앗간 일에나 집중하라고 엄하게 말했다.
커다란 배를 타고 미지의 바다로 나아가 팔팔 뛰는 물고기를 잡아 오는 어부에 비해서 한참 초라해 보이는 일.
그러나 아버지는 자신이 아직 철이 없어서 그런 말을 한다 말했고, 자신의 꿈을 이해해 주지 못하는 아버지에게 카이는 단단히 화가 나 있었다.
“아버지는 나약한 겁쟁이야! 사내라면 이런 방앗간이 아니라 파도가 넘실거리는 바다로 나가야지!”
아버지와 대판 싸운 후, 카이가 입버릇처럼 했던 말.
그리고, 그날 아침까지도 카이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바다가 무서워서 이런 곳에 숨어 지내는 한심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소피아! 카이를 데리고 어서 피해!”
“쿠워어어어어어!!!”
갑자기 눈 앞에 나타난 흰 피부를 가진 괴물.
강철로 된 커다란 곡괭이를 든 채, 기괴하게 뒤틀린 얼굴을 하고 있는 그것의 등장에 카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짐승 같은 시선 만으로도 팔 다리를 얼어붙게 만드는 무시무시한 생물.
저것은 이야기 책에서나 봤던 악마의 저주를 받은 괴물. 트롤이 분명했다.
마왕의 부하로 알려져 있는 괴물이자, 인간이 대적할 수 없는 힘을 지닌 존재.
그리고.. 그런 괴물들의 앞에는 그의 하나뿐인 소중한 여동생 게르다가 쓰러져 있었다.
녀석들이 지하 창고 문을 부수고 나올 때 그 충격으로 기절해 버린 동생.
그러나, 그런 위급한 상황에서도 카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괴성을 내지르며 거대한 곡괭이를 휘두르는 그것의 모습에 카이는 그저 공포에 질린 채 덜덜 떨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제길! 받아라 이 괴물아!”
곡식을 짓이길 때 쓰던 절굿공를 집어 던지는 그의 아버지.
하지만 트롤은 그런 것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곡괭이를 휘둘러 이를 가볍게 처내었다.
아버지의 혼신을 다한 일격은 그렇게 허망하게 끝나 버리는 듯 했으나..
“아.. 아버지!”
절굿공에 트롤의 시선이 쏠려있는 틈에 쓰러져 있던 게르다의 몸을 빼내는 데 성공한 아버지의 모습.
“크워어어어!!”
그러나, 방금 전 행동에 트롤은 한층 더 분노한 울음 소리를 내질렀다.
자신의 먹잇감을 빼앗아 갔다는 듯, 그것은 거칠게 곡괭이를 휘두르며 천천히 이쪽을 향해서 다가오기 시작했다.
“제길.. 여기는 내가 막을 테니 너희들은 어서 도망쳐!”
“하.. 하지만 여보!”
“빨리! 이대로 있다간 다 죽는다고!”
그 말에 어머니는 카이와 게르다의 몸을 끌고 출구를 향해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카이의 시선은 아버지에게로 고정되었다.
평소 겁쟁이라 생각했던 아버지.
그러나, 지금 그에게서 그런 기색은 전혀 느껴지지 않고 있었다.
사냥에 썼던 녹슨 창을 들고 트롤의 앞을 막아서는 아버지.
그의 뒷모습에서는 어던 뱃사람에게 서도 보지 못했던 용맹함이 느껴졌다.
“크아아아아!”
그러나, 자신의 앞을 막아선 아버지를 보며 트롤은 가소롭다는 듯, 거대한 곡괭이를 빠르게 휘둘렀다.
한방에 절굿공을 박살 냈듯이, 사람 따위는 가볍게 짓이길 수 있는 흉악한 힘이 담긴 물건.
아버지의 힘으로는 피할 수 없을 것이라 여겨지는 일격이었다.
그때..
“쾅!”
다음 순간,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폭발음.
이에 카이는 물론이고 어머니와 아버지 조차도 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떻게 보면, 방금 전 창고 문을 때려 부수고 집안으로 들어왔을 때보다 더한 충격이 그들을 덮쳤다.
“이… 이건.. 또 뭐야…”
자신의 앞에서 트롤을 마주보고 있는 존재.
그것은 외형만 따지면 트롤보다도 더욱 무시무시한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들개 같이 네 다리로 바닥을 디디고 있으며 등에는 거대한 뿔 한 쌍이 돋아나 있었다.
얼굴은 마치 지옥에서 기어 나온 짐승을 연상시키는 흉악하고 뒤틀린 모양.
여기에 녀석의 몸에서는 악마의 불길과 같은 검은 불꽃이 이글거리고 있었으며, 입에서는 용암과 같이 증기가 나는 침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흉측하고 무시무시한 외모에도 불구하고, 녀석은 이쪽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은 채, 눈 앞에 있는 트롤에게만 신경을 쓰고 있었다.
방금 전, 녀석이 갑자기 튀어나오면서 가한 일격에 제법 피해를 입은 듯, 트롤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런 트롤을 보면서 괴물은 마치 분노한 사냥개를 연상시키는 듯 낮게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그러자..
“끄웨에에! 끄에에에엑!”
“어?”
다음 순간, 마치 고양이 앞의 생쥐와 같은 울음소리를 내면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나는 트롤.
녀석은 자신이 나왔던 창고 문을 통해서 순식간에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렇게
가족들의 목숨을 위협하던 트롤은 달아나버렸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이와 그의 가족들은 절대로 안심할 수 없었다.
그들의 눈 앞에는, 단순한 위협 만으로 그 트롤을 쫓아낸 괴물 남아 있었으며 녀석은 이제 천천히 고개를 돌려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중이었다.
만약 저것이 이대로 자신들을 공격 한다면 그들로서는 막을 방법이 전무한 상황
“큭…”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도 카이의 눈에는 자신들을 어떻게든 보호하기 위해서 괴물의 앞을 막아 선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설령 자신이 잘못 되더라도 가족들 만은 지키겠다는 의지나 느껴지는 모습.
그때 그런 카이의 귓가에 갑자기 익숙지 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까지. 수고했어.”
“!”
갑자기 들려오는 아름다운 여성의 목소리에 그곳에 있던 이들의 시선은 동시에 소리가 난 쪽을 향하였다.
그들의 눈에 보이는 것은 로브를 쓰고 있는 세 명의 여성.
출입문 앞에 서 있었음에도 그들이 들어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그 다음에 일어난 일이었다.
“핵! 핵! 핵!”
마치, 주인을 만난 강아지와 같이 그들을 보면서 숨을 할딱거리며 꼬리를 흔드는 괴물.
이에 두 사람 중, 보라빛 머리칼을 지니고 있는 여성은 마치 애완동물을 다루듯이 녀석의 턱을 어루만져 주었으며, 이에 괴물은 그 덩치에 맞지 않게 배까지 뒤집으면서 낑낑거리며 기뻐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잠시 강아지를 달래는 듯한 모습을 보여준 뒤, 그녀는 천천히 뒤를 돌아 보았다.
“실례했습니다. 본의 아니게 무단침입을 저질러 버렸군요.”
“네? 아… 네.. 괘.. 괜찮…습니다. 아니 그보다..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정황상 트롤을 쫓아낸 이 괴물은 이 여성이 부리는 애완동물 같은 것으로 보이는 만큼, 그들에게 있어서 여성은 생명의 은인이라 할 수 있었다.
“저. 근데… 아.. 아줌마는 누구 인가요?”
“아줌..흠..흠.. 뭐 그냥 지나가던 상인이야. 이 근처를 지나가다 기괴한 소리를 들어서 말이지..”
“아..”
어쩐지 약간 묘한 느낌이 드는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확실히 그 트롤이 내지르는 괴성이 크긴 했다.
이곳이 마을과 떨어져 있지 않았다면 아마도 금방 다른 사람들이 눈치를 채고 도와주러 왔을 정도로.
그렇다 하지만.. 이 인근은 주요 길목에서 떨어져 있으며 사람의 인적 또한 상당히 드문 장소라는 점을 고려했을 때. 이 만한 힘을 지닌 이 세 사람이 나타난 것은 가히 기적이라 할 수 있는 상황.
어찌 되었든 그렇게 간신히 목숨을 건진 가족들의 얼굴에는 짙은 안도가 깃들기 시작했고..
그런 그들의 모습을 뒤로 한 채, 세 사람의 시선은 그대로 냉기가 흘러 나오는 창고 벽으로 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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