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화 〉 백설 여왕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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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가에 모여 있는 수많은 사람들.
평소에도 사람들의 발걸음이 잦았던 장소이지만 오늘따라 그곳에는 더욱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이는 단순히 이 무덤의 주인인 마그렌 여왕을 추모하기 위함 때문은 아니었다.
그것은.. 얼마 전부터 그들 사이에 퍼진 소문,
사악한 마족들로부터 자신들을 구해주었던 마법사들이 죽은 여왕을 되살리는 의식을 거행한다는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왕폐하께서 살아나실 수 있다는 것인가?”
“나도 모르겠네, 하지만 정말로 기적이라도 일어나서 폐하께서 살아나신다면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그건 그렇지.. 아직 적당한 계승자도 찾지 못했으니까..”
자식은커녕 결혼조차 하지 않은 젊은 나이에 죽은 여왕인 만큼 여전히 후계자를 고르는 일에 신하들은 애를 먹고 있는 중이었다.
왕가의 직계 혈족이 끊어지게 되면 계승권은 자연히 방계로 넘어가지만 그렇게 되면 후계자로 선정될 수 있는 인물이 너무나도 많은 상황.
이런 와중에 여왕의 부활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는 귀족들과 백성들의 관심을 끌어 보았고, 이로 인해서 이 자리에는 각양 각색의 사람들이 다수 모여있었다.
“소문에 따르면 바로 오늘인데..”
“뭔가가 있긴 있는 듯 하군.. 저길 봐, 무덤 앞에 그 마법사들이 있어.”
칼마르 곳곳에서 마족들을 퇴치해주었던 마법사들의 모습은 이미 제법 알려져 있는 상황.
로브를 뒤집어 쓴 두 사람의 등장에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그리고.. 잠시 후, 두 사람은 재단 앞에서 지팡이를 흔들며 무언가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뭐.. 뭐지?”
“따..땅이 흔들린다!”
지진이 난 것 같이 흔들리기 시작하는 대지.
동시에 하늘에는 먹구름이 깔리기 시작했고, 곳곳에선 번갯불이 번쩍였다.
정말로 무언가가 일어날 것만 같은 분위기.
이이 그곳이 있던 이들의 마음 속에는 알 수 없는 공포와 더불어 묘한 기대감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기대감이 절정에 달한 그 순간.
“쾅!”
무언가가 폭발하는 소리와 함께 두 쪽으로 갈라진 무덤.
그리고 그 안에서 천천히 흙먼지가 걷히기 시작함과 동시에, 사람들의 눈에는 누군가의 형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서..설마…”
“설마.. 지.. 진짜로?..”
믿을 수 없는 모습에 경악하기 시작하는 사람들.
소문을 듣고 이곳에 모여들긴 했지만 대다수는 반신 반의한 심정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던 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눈앞에서 벌어진 일은 그 소문이 단순한 뜬소문이 아니었음을 입증하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 보이는 여성.
무덤에 들어갈 때 입고 있던 검은 의복 차림을 하고 있는 그녀의 등장과 동시에 마법사들, 그리고 가장 가까이에서 의식을 지켜보고 있던 신하들이 가장 먼저 무릎을 꿇었다.
“폐하!”
감격스러운 목소리로 자신의 주인을 부르는 이들.
그들 중 일부는 눈가에 눈물까지 고인 채 여왕의 부활을 기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신하들과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이 순간 모든 이들의 시선의 중심이 된 존재. 마그렌 여왕은 언제나와 같은 당당한 목소리로 사람들을 향해서 말했다.
“다시 만나게 되어 기쁘군. 이렇게 짐을 마중 나와 준 너희들에게 감사를 표하는 바이다.”
“폐.. 폐하!”
“여왕 폐하!”
익숙한 그녀의 목소리에 당혹감에 휩싸여 있던 이들 역시 동시에 무릎을 꿇었고 예를 갖추었다.
이 믿을 수 없는 사실에 기쁨과 놀라움을 느끼는 그들.
그리고.. 그렇게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보면서 마그렌 여왕의 입가에는 미소가 번져 올랐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마무리 되었다는 미소가.
*
인간의 감정은 유용한 도구가 된다.
특히 분노라는 감정은, 때로는 사람이 손익을 배제하고 행동할 수 있게 만드는 힘을 지니고 있다.
그 사실을 기반으로, 제니는 사람들의 분노를 이용해서 일을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시작은 단순했다.
그녀가 카알론에서 가져온 약.
인간을 일정 시간 동안 가사상태에 빠지게 만드는 약을 이용해서 여왕을 잠시 죽은 것으로 위장시킨다.
사전에 이 약의 효과를 입증하기 위해 여왕 앞에서 은밀히 실험을 진행한 것은 덤.
교회의 감시망을 고려해서 여왕의 최 측근을 동원해 진행된 시험으로 약의 안정성이 확인되었고, 마침 적절한 때인 부활절 연회를 기점으로 여왕은 계획에 따라 약을 복용하고 일시적으로 가사상태에 빠져들었다.
그 결과, 바람잡이 역할을 한 측근들의 선동으로 인해 헤일로와 교회 세력은 순식간에 무너지게 되었고, 적당한 시점에서 마그렌 여왕은 마법사의 의식 이라는.. 사실상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무덤에 누와 있다가 흙을 털고 일어날 뿐인 퍼포먼스를 통해 몇 주간 이어져 왔던 은둔 생활을 끝내고 다시 자신의 자리로 복귀하게 되었다.
이전에 비해서 한층 더 막강해진 권력과 강력한 동맹을 양 손에 쥔 채로..
*
“수고하셨습니다. 덕분에 모든 것이 잘 정리되었군요. 여러분들의 노고에 감사를 표하는 바입니다.”
“과찬이십니다 폐하.”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는 제니를 보며 여왕은 흡족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것으로 그녀를 방해하던 교회 세력은 완전히 힘을 잃어 버렸으며 동시에 이 나라의 족장들과 귀족들 역시 대부분 그녀의 지지세력으로 돌아서게 되었다.
조부인 발텐 4세의 실책으로 약해졌던 왕권은 이제 그 이상으로 강력해진 채 그녀의 손아귀 안에 있게 되었다.
그러나, 자신의 눈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제니를 바라보면서, 마그렌 여왕의 마음 속에는 무거운 걱정거리가 남아 있었다.
‘그만한 일들을 해주었다.. 이제는 그 값을 지불해야 할 터.. 분명 상당히 무리한 요구를 들고 올 것이 자명하겠지..’
물론 이렇게 까지 해준 사람들에게 마그렌 여왕은 가능한 많을 것을 내어줄 의향은 있었다.
하지만, 너무 무리한 요구를 할 경우 고민하고 조정해야 할 것들이 많아질 것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이를 들어줄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은 그녀에게 있어서 상당한 부담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여왕을 향해서 제니는 조용한 어조로 말하였다.
“그럼, 이제 방해거리도 없어졌으니 본격적으로 계약을 채결하고 싶습니다만?”
“물론이지요, 이만큼의 도움을 받았으니 마땅히 보답을 해야 할 터. 그대들이 원하는 조건을 말해 보십시오.”
그렇게 내심 긴장 하면서 여왕은 제니에게 말했고, 이에 제니는 천천히 그녀의 앞에 요구조건이 담긴 종아 한 장을 내놓았다.
그리고.. 그 안에 담긴 내용을 찬찬히 읽어본 여왕은 그녀가 생각했던 것과는 또 다른 종류의 당혹감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저.. 정말로.. 이게.. 전부 입니까?”
“네, 그렇습니다만. 무슨 문제라도?”
마그렌 여왕이 생각했던 요구조건과는 너무나도 다른 내용이 그 안에 담겨 있었다.
그녀가 생각했던 영지나 교역권 같은 내용은 한 글자도 적혀 있지 않았다.
그 안에 담겨 있는 것은, 마법사들의 권리에 대한 것이었다.
그것도 거창한 무언가가 아닌, 그들이 마법사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지 않으며, 재능이 있는 아이들은 마법사로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는 것.
그 대가로, 마법사들은 마족들의 손아귀에서 인간들을 보호하며, 마법사의 권리가 침해 당하는 등의 특별한 조건에 부합했을 경우를 제외하고는 인간들의 전쟁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등, 이쪽을 배려한 조항들까지 담겨 있었다.
“정말.. 이것으로 괜찮겠습니까? 더 많은 것을 요구하셨더라도 들어줄 의향이 있었을 텐데..”
미안한 기색까지 내비치며 말하는 마그렌
이에 대해서 제니는 잔잔한 미소를 담은 채 그녀에게 말했다.
“저희에게는 그것이면 족합니다. 과거의 저와 같이 마법사라는 이유 만으로 고통받는 이들이 생기지 않는 것. 그것만 지켜질 수 있다면, 저희 역시 앞으로 영원히 칼마르 연합국과 굳건한 동맹을 유지해 나갈 것입니다.”
“아..”
문득, 마그렌의 여왕의 머릿속에는 잠시 잊고 있었던 옛 이야기가 다시금 떠올랐다.
마법사라는 이유만으로 고통의 세월을 보내야 했던 제니 공주의 이야기.
그리고 그 이야기의 장본인이 눈 앞에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면서 그녀는 제니가 어째서 이런 조건만을 내걸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알겠습니다.. 당신 깨서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 어째서 이런 조건을 내거신 것인지..”
그 말과 함께 마그렌 여왕은 그 자리에서 제니가 내민 계약서에 인장을 찍었고, 이를 보면서 제니의 얼굴에는 진한 미소가 피어 올랐다.
칼마르 왕국과 마법사들을 하나로 묶는 시작점이 될 조약.
후세에 백설 조약이라 불리며 그로부터 수 백, 수 천 년간 이어져 영원히 나갈 두 세력간의 약속이자 마법사들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조약은 그렇게 체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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