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화 〉 슈타인의 인간 1
* * *
어둠이 깔린 밤.
한 남성은 시종들의 도움을 받아 화려한 의복을 걸치고 있는 몸에 장신구를 하나하나 착용하였다.
하나같이 값비싸고 구하기 힘든 귀금속으로 만들어진 물건들.
그렇게 언제나와 같이 자신의 부와 지위를 과시해주는 작은 부속들을 착용하면서 남성은 그의 얼굴에 남아있던 지루함 이라는 감정을 지우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다 되었습니다 전하.”
“수고했다. 그만 물러가도록”
치장을 마친 신하에게 명령을 내리면서, 얼굴에 남아있던 마지막 감정일 지우는데 성공한 남성.
바에른 지역을 다스리는 군주 빅터 슈타인 대공은 그렇게 완벽하면서도 흐트러짐 없는 모습으로 스스로를 꾸민 채 다른 이들이 기다리고 있는 장소로 향하였다.
그렇게 그가 도착한 곳은 성내에 위치한 대 연회장.
그곳에는 수많은 귀족들과 그들의 시종들이 소란스럽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중이었다.
“아.. 드디어 오늘의 주인공께서 오셨군.”
“어서 오십시오 대공전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직 젊은 나이인 슈타인 대공에게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는 중년의 귀족들.
언 듯 어색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모습이었지만, 대공은 이를 익숙한 태도로 받아들였다.
“만나게 되어서 반갑소 백작. 나의 승리를 기념하는 자리에 이렇게 와주다니 참으로 기쁘군.”
“하하. 그야 당연히 와야 할 자리이지 않습니까. 이번 일로 대공 전하의 영지가 더울 넓어졌는데 그런 대단한 성과를 축하하는 자리에 제가 빠져서야 되겠습니까.”
고개를 연식 숙이며 이야기하는 백작.
이에 슈타인은 이 틀에 박힘 아첨에서 느껴지는 지겨움을 애써 내색하지 않으며 그에게 가볍게 인사를 한 뒤 다음 사람들에게로 다가갔다.
“축하하오 대공. 정말 대단한 성과를 내었소.”
“황제 깨서도 분명 기뻐하실 것이오. 이번 일로 저 제멋대로인 북부의 영주들도 조금은 잠잠해지지 않겠소?”
연이어서 들려오는 칭찬과 아부가 뒤섞인 이야기들.
계속 듣는 입장에선 슬슬 짜증이 날 정도였지만, 이 정도는 이미 각오하고 온 만큼 슈타인은 그저 미소로서 이를 넘기고 있을 뿐이었다.
신성제국의 중심부에 위치한 바에른 지역.
이곳은 북부와는 달리 대대로 황제의 힘이 제법 강하게 미치고 있는 장소였지만, 황제의 친인척인 그에게 이는 오히려 그의 권력을 한층 강화할 수 있는 수단에 불과했다.
그렇게 황제의 이름을 등에 업은 채 주변 지역에 영향력을 뻗쳐온 슈타인 대공.
그리고, 이번에 그가 한 일은 바에른 북부 지역에 위치한 영주들의 영토를 처서 이를 빼앗는데 성공한 것이었다.
명분은
황제의 명을 어기고 멋대로 주변 지역에 침략행위를 벌인 것.
북부에 위치한 다수의 영주들은 얼마 전 북부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 중 하나인 브레멘을 점령하기 위해서 대대적으로 연합을 구축해 침략을 감행했다.
명분은 이들이 교회의 신성한 법을 어기고 마법사들과 결탁을 했다는 것이었지만, 애초에 이를 구실로 침략을 결정한 영주들은 물론이고 주변에서 이 상황을 관전하는 이들 중에서도 이를 믿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대공 역시 침략전의 구실 치고는 참 어설프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엉성하기 짝이 없던 이야기.
하지만, 북방의 칼미르 연합국이 강성해지면서 그와 교역을 하는 브레멘의 힘 역시 급속도로 팽창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그런 구실로라도 전쟁을 벌여야 했던 영주들의 다급함이 느껴지는 내용이기도 했다.
황제의 영향력이 적은 덕분에 독자적인 세력을 일구어 나가던 그들에게 있어서, 자신들의 힘을 압도하는 새로운 강자가 바로 옆에 생긴다는 것은 결코 그냥 두고 볼 수 없는 일이었을 태니까.
그러나. 그 결과는 예기치 못한 완벽한 패배로 종결되었다.
양 옆에서 동시에 공격을 받았음에도 브레멘은 끝내 이를 막아내었으며, 동시에 기묘한 소문까지 함께 퍼뜨리면서 북부 영주들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전투 도중. 갑작스럽게 주력 부대가 악마의 저주를 받아 자신들끼리 전투를 벌이다가 자멸했다는 소문..
그리고, 이렇게 생각지 못하게 제국 북부의 힘이 약해진 순간을 슈타인 대공은 놓치지 않았다.
그는 패전으로 인해 허약해진 북부 지역을 신속하게 공략해 나가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서 바에른의 영역을 한층 더 확장하는데 성공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맛보게 된 달콤한 승리의 미주에도 불구하고 대공의 기분은 그다지 좋지는 않았다.
누구나 부러워할 성과를 내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막강한 권력을 쥔 채 이 일대를 다스리는 대공으로서 책임을 다하기 위한 행동이었을 뿐이다.
전쟁과 정치. 그런 것은 어릴 때부터 그의 곁에 늘 붙어있던 것이었지만 그는 한번도 이를 즐겁게 생각한 적이 없었다.
‘시시하군…’
자신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그의 권력의 단물을 빨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
그러나 슈타인 대공은 그들의 그런 행동에 일말의 관심조차 두지 않고 있었다.
보다 편하게 영토를 운영하기 위해서 일단은 웃으면서 상대를 해줄 뿐. 그의 마음은 이 순간에도 다른 곳에 가있었다.
그때. 그의 귓가에 익숙하면서도 지금까지와는 다른 느낌을 주는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눈치가 없는 사람들이라니까요. 이쪽 기분을 살피지도 않고, 자기 할말만 떠들고 있으니..”
그나마 지금까지 들었던 이야기 중 가장 그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말에 대공은 처음으로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미소를 지으며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보았다.
“과연.. 라벤더 당신의 눈은 못 속이겠단 말이야. 대단해,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걸 인식하다니.”
“지금까지 하루 이틀 봐온 사이가 아니니까 말이지요.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볼 텐데 당연히 이정도 눈치는 있어야겠지요?”
엘리 라벤더.
슈타인 대공의 약혼녀로 황제의 측근인 요한 라벤더 장군의 딸이었다.
비록 그녀와 슈타인이 약혼을 하게 된 계기는 황제의 주선에 의한 정략결혼의 성격이 있긴 했지만, 그런 사실과 별개로 슈타인은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었다.
다른 이들은 알지 못하는 자신의 마을을 헤아려줄 수 있는 유일한 여인.
이런 사람을 약혼녀로 맞이하게 된 자신의 행운에 대해서 슈타인은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었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이 숨막히는 정치판의 공기를 견뎌내기가 한층 더 피곤했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아버님깨서 한번 찾아 뵙기를 요청하셨어요. 결혼 전에 사위가 될 사람 얼굴 한번 은 봐야 하지 않겠냐 면서 말이지요.”
“응당 그래야겠지. 결혼식까지 앞으로 몇 달 안 남았으니 가까운 시간에 날을 잡도록 하겠어.”
“고마워요. 아 그리고..”
그 말과 함께 슬쩍 주변의 눈치를 살핀 뒤, 엘리는 조용히 슈타인의 볼에 자신의 입술을 맞추었다.
따스하면서도 황홀한 감촉.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이런 감각을 느끼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했던 슈타인 대공인 이제는 이를 익숙한 느낌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오늘은 손님들이 많아서 이정도 까지만..”
“아쉽지만.. 다음에는 조금 더 이어가도록 하지.”
약혼녀의 귀여운 얼굴을 보며 대공은 가볍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렇게 약혼녀가 자리를 뜬 뒤, 대공은 조금 완화된 갑갑함 속에서 조용히 음료를 들이키며 화장을 둘러보았다.
하나같이 익숙하면서도 지루하기 짝이 없는 장면.
마치 보았던 3류 연극을 끝없이 되풀이 해서 보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슈타인 대공은 잠시 바람이라도 쐬러 가볼까 하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때..
“응?..”
문득, 슈타인 대공의 시선이 한곳에 멈추었다.
연회장의 구석에 위치한 기둥.
그곳에는 한 여성이 서 있었다.
하급 귀족들이 입는 수수한 느낌이 드는 예복차림을 하고 있는 여성.
그러나, 슈타인 대공이 의아함을 느낀 것은 그녀의 복장 때문이 아니었다.
‘누구지? 저 사람은..’
슈타인 대공은 이 자리에 참석한 주요 귀족들의 얼굴을 모두 외우고 있었다. 자주 보아왔던 사람들이기도 하고, 혹 새로 참석한 인물이라 할지라도 다른 이들의 소개를 통해 기본적인 정보는 머리 속에 담아두고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그의 눈에 보이는 여성에 대한 정보는 그의 머리 속에 존재하지 않았다.
다른 귀족의 하인 같은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 치면 그녀가 모시고 있는 주인의 모습이 보여야 했는데 그런 것 조차 없었다.
‘내가 소개받지 못한 사람인가?.. 그렇다 해도 저 사람이 나에게 인사를 했던 기억조차 없는 것은..’
주최자 입장인 만큼 손님이라면 응당 그에게 먼저 인사를 하는 것이 예의였다.
그러나, 그 기억 속에서 조차도 그녀에 대한 것은 전무한 상황.
만약 일반적인 귀족이었다면 이에 대해서 그 정체불명의 손님에게 불쾌함을 표했겠지만
슈타인 대공은 오히려 그녀에게 묘한 호기심을 느끼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상당한 지루함을 느끼고 있었던 차였기에, 이런 식의 작은 차이는 그에게 약간의 신선함을 느끼게 해주고 있었다.
‘이 지역의 예법을 잘 모르는 귀족인가?.. 혹 그렇다면 집 주인으로서 간단히 설명을 해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그렇게 생각하며 슈타인 대공은 천천히 그 여성에게 다가갔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보다 또렷하게 보이기 시작하는 얼굴.
멀리서 봤던 대로 아는 얼굴이 아니었으나, 이에 대공은 더욱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녀가 다른 이들에 비해서 확연하게 눈에 띌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
슈타인 조차도 한 순간 두근거릴 정도로 절색의 미모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귀족들은 그녀에게 일말의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었으며, 슈타인 역시 어째서 이제서야 그녀의 존재를 인식하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때.. 기둥에 몸을 기대고 있던 그 여성은 대공을 향해서 천천히 다가온 뒤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정돈된 느낌이 드는 인사.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곧바로 예를 표하는 그녀의 행동에 대공은 조금 멋쩍은 기분을 느끼기 시작했다
‘설마.. 예법을 모르는 게 아니라 단순히 이제서야 날 발견한 건가?’
생각했던 것과는 조금 다른, 싱거운 느낌을 받은 그때, 그녀는 조용히 입을 열어 스스로를 소개했다. 그 외모만큼이나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대공 전하. 제 이름은 자미엘이라 합니다.”
처음 듣는 익숙치 않은 이름. 더군다나 성 구분 없이 단순히 이름만 대를 방식에 대공은 또 다른 의문을 느끼기 시작하며 일단은 이를 받아주었다.
“반갑소, 자미엘양, 처음 보는 것 같은데 혹 그대가 어디에서 왔는지 말해줄 수 있겠소?”
“송구합니다. 그 부분에 대해선 차후에 말씀을 드리겠지만, 오늘은 때가 아닌 것 같군요.”
“무슨…”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는 여성.
이에 슈타인의 의문이 한층 더 증폭되려던 그때였다.
“제가 방문한 것은, 저의 주인님의 뜻에 따라 대공께 전해드릴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부디 주인님의 성의를 거절하지 말아주시길 바랍니다.”
그 말과 함께 품속에서 책 한 권을 꺼내는 자미엘 이라는 여성.
이에 슈타인은 약간의 경계심이 들기 시작했으나, 어째서인지 그의 몸은 그대로 손을 뻗어 그 책을 받았다.
“이게 무슨..”
위화감이 드는 의사소통에 슈타인이 그녀에게 명확한 설명을 요구하려던 그때였다.
“아 여기에 있었군요. 찾았습니다.”
“에?”
다음 순간, 갑자기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이에 대공이 고개를 돌린 그곳에는 약혼녀인 엘리가 서 있었다.
‘이런.. 공연한 오해를 살 지도 모르겠는데..’
딱히 잘못한 것은 없지만, 모르는 여성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약혼녀 입장에서 썩 보기 좋은 모습을 아닐 것이라 생각하며 대공은 일단 상황을 설명하려 하였다.
“아.. 미안, 내가 모르는 손님이 있어서 인사를 조금 나누느라…”
“손님.. 이라니요?”
슈타인의 말에 의문을 표하는 엘리.
이에 슈타인은 의아함을 느끼며 다시금 기둥 쪽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어?”
그러나, 슈타인이 고개를 돌린 그곳에는 아무도 서있지 않았다.
마치 방금 전 자신이 본 것이 허상이었던 것만 같이.
그러나.. 여전히 그의 손에는 그 자미엘이라는 여성이 주었던 책 한 권이 들려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