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장 - 플레이아데스 >
프롤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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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만고양이 : 오, 고인물 왔다.
아웃복서009 : 같이 썩어가는 처지에 고인물은 개뿔이. 니들은 왜 아직도 이거 하고 앉았냐? 나온 지 10년은 더 된 게임인데.
코와붕가 : 일단 거울보고 물어봐.
모니터 너머에서 들려온 대답에 아웃복서009- 임진호는 키득 웃었다.
영웅전기2.
나온 지 벌써 10년이나 지났을 뿐만 아니라 아예 후속편인 3편까지 나왔지만 아직도 파고드는 골수 유저들이 있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고전명작이었다.
10년도 더 된 게임을 왜 하느냐.
‘재미있으니까.’
게임하는데 다른 이유가 뭐가 또 필요할까.
사실 결정적인 이유가 하나 더 있기는 했지만.
임진호는 영웅전기2의 골수 유저들 중에서도 고인물- 아니, 아예 썩은물이라 불리는 최상위 랭커였다.
그리고 이 채팅방에는 임진호 못잖은 썩은물이 한 명 더 있었다.
노란폭풍 : 복서 왔냐? 2등으로 내려올 준비는 됐고?
아웃복서009 : 아해야, 아직도 꿈을 꾸느냐? 아서라, 오르지 못할 나무를 쳐다보지도 않는 법이니.
노란폭풍 : 지랄. 이번엔 내가 꼭 1등하고 만다.
아웃복서009 : 그래, 그래. 꿈을 꿀 자유는 누구에게나 있는 법이니까. 네 꿈을 허하노라.
남만고양이 : 둘 다 닥치고 이번 달 랭킹 뜬다.
영웅전기2는 매달마다 타임어택을 비롯한 각종 포인트를 합산해 서버 랭킹을 발표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순위표 역시 고인물대전이 된 지 오래였다.
[1위 : 아웃복서009 - 315,234,999 포인트] [23개월 연속!]
[2위 : 노란폭풍 - 315,234,125 포인트] [22개월 연속!]
[3위...]
노란폭풍 : 씨발! 시발 이ㄱㅔ 무러야! 이게 무너냐고!
AAA : 오타 터지는 거 보소. 멘붕 제대로 왔나보네.
남만고양이 : ㅂㄷㅂㄷ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정말로 부들부들 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마른 침을 꿀꺽 삼킨 임진호는 일단 안도의 숨을 토한 뒤 폐부 깊은 곳에서부터 끌어올린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아웃복서009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봤냐?
아웃복서009 : 넌 영원한 2등이야! e등! 이등이라구! 넘버 투!
노란폭풍 : sdlkghiosdghsodighsdighiofsdoighiosd
AAA : 아, 왔어요. 멘붕.
코와붕가 : 저렇게 반응해주니까 더 놀리지. 절레절레.
아웃복서009 : 아, 즐거웠다. 오늘은 꿀잠 자겠네. 너도 잘 자라, 노란 2등아. 다음 달엔 좀 더 노력해보렴.
노란폭풍 : 야! 겨우 800점 정도 차이거드는?!
아웃복서009 : 그러게. 그 874점을 왜 못 버셨나 몰라. 아, 이게 바로 1등과 2등의 차이인가?
노란폭풍 : 너무 심한 욕설은 제재 대상입니다.
노란폭풍 : 너무 심한 욕설은 제재 대상입니다.
노란폭풍 : 너무 심한 욕설은 제재 대상입니다.
노란폭풍 : 너무 심한 욕설은 제재 대상입니다.
노란폭풍 : ㅆ|발이 감탄사지 무슨 욕이라고!
아웃복서009 : 아무튼 난 자러 간다. 잘 자라. 내 꿈꾸고♥
노란폭풍 : 너무 심한 욕설은 제재 대상입니다.
그리고 몇 분.
채팅창에 새로운 대화가 출력되지 않자 한 손에 팝콘을 들고 월례행사를 구경하던 고인물들이 다시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
남만고양이 : 뭐야, 진짜 자러 간 거야?
코와붕가 : 노폭도 자러 갔나? 얘도 말이 없는데?
AAA : 만년 1등이랑 2등이 나란히구만, 나란히. 그냥 백년해로해라, 백년해로.
코와붕가 : BL소설 찐한 거 하나 나오겠네.
AAA : 아, 젠장. 상상해버렸어.
남만고양이 : 뭐지? 복서는 몰라도 노폭이면 헛소리 말라고 지랄해야 정상인데. 진짜 둘 다 자러 간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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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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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폭풍님이 로그아웃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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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호님이 플레이아데스에 입장하셨습니다.]
[홍유희님이 플레이아데스에 입장하셨습니다.]
제1장 - 플레이아데스.
바이엘 백작가.
한 때는 세일룬 왕국의 북부 변경백 자리를 독점하다시피 했던 이름 높은 무가로, 과거형에서 유추해볼 수 있듯이 지금은 한물 간 가문이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바이엘 백작가였다.
자고로 부자는 망해도 3년을 간다 했으니, 쇠락한 지금도 북부 열두 가문의 말석에나마 이름을 올릴 정도의 세는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 바이엘 백작가의 저택.
바이엘 백작가의 고뇌라 불리는 차남의 방에서 고뇌하는 자가 있었다.
“끄오어어오어오.”
기묘한 신음을 흘리며 머리를 싸매고 있는 것은 십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소년이었다.
검푸른 머리칼과 하얗고 갸름한 얼굴, 신비롭기까지 한 녹색 눈동자가 한데 어우러져 대단한 미모를 자랑했는데, 어쩐 일인지 인상을 잔뜩 쓰고 있었다.
소년.
바이엘 백작가의 차남인 유더 바이엘은 멍하니 벽 한 면에 세워진 거울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아무래도 진짜 같지?’
눈앞에 있는 모든 것들이.
유더 바이엘 자신이 유더 바이엘이란 사실이.
말장난 같은 이야기였지만, 유더는 진지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유더인 동시에 임진호였기 때문이다.
‘어떻게 봐도 영웅전기2 속 세상이야.’
유더가 임진호의 기억을 ‘각성’한 지 이틀이 지났다.
그리고 이틀이란 시간은 결코 짧지 않았다.
유더 바이엘이란 이름.
바이엘 백작가의 상황.
세일룬 왕국과 주변 정세.
어느 것 하나 영웅전기2와 어긋나는 것이 없었다.
‘플레이아데스.’
영웅전기 시리즈 전체의 배경이 되는 세계.
‘인정하자. 여긴 플레이아데스고, 나는 유더 바이엘이야.’
소설이나 만화에서 흔히 보던 것처럼 단순히 게임 속으로 들어온 것하고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그보다는 차라리 뭐랄까, 유더 바이엘로 태어나 임진호라는 ‘전생’을 기억해낸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그래서 그런지 유더가 되었음에도 위화감 같은 것이 거의 없었다.
애당초 유더인 동시에 임진호였으니 말이다.
유더는 고개를 들어 다시 거울을 보았다.
그림으로 그린 것 같은 미소년이 우수에 찬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잘생겼네.’
그냥 잘생긴 것도 아니고 좀 심하게 잘생겼다.
유더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안을 돌아보았다.
넓고, 멋지고, 깨끗했다.
임진호 시절 살던 빌라보다 더 넓은 것 같았고, 가구들은 조금 낡은 기색이 보이긴 했지만 누구도 부정 못 할 고급품들이었다.
유더는 상황을 객관적으로 고찰해보았다.
임진호 시절과 유더 시절의 차이.
일단 어려졌고, 수십 배는 더 잘생겨졌으며, 금수저 귀족이 되었다.
그야말로 상전벽해.
박수가 절로 나올 정도의 업그레이드였다.
하지만 유더는 생각했다.
‘아무래도 좆된 거 같지?’
유더 때문이 아니었다.
유더 바이엘이 영웅전기2의 인물들 중에서 제법 하자가 있는 인물이긴 했지만, 더 큰 문제는 이곳이 영웅전기2의 세계라는 사실 그 자체에 있었다.
영웅전기2의 배경은 평화로운 판타지 월드가 아니었다.
마계에서 악마들이 강림하고, 그걸 상대하겠다고 천사들도 내려와 깽판을 치는- 대륙의 모든 국가와 종족들이 전쟁에 휘말려 죽고 죽이는 대환장- 아니, 대환란의 세계였다.
한 마디로 아포칼립스가 예정된 세계라고 해야 할까.
‘그나마 3 시점이 아니라 다행이네.’
영웅전기3는 악마들과 천사들의 대전쟁의 여파로 모든 인간의 국가가 무너진 이후를 다루었으니까.
영웅전기3에 들어왔다면 지금 이렇게 앉아서 거울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마물들에게 덮쳐져 신나게 물어뜯기고 있었으리라.
‘역시 방법은 하나뿐이야.’
강해져야 한다.
대환란의 시기가 와도 견뎌낼 수 있을 정도로.
그리고 가능하면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까지 지켜낼 수 있을 만치.
임진호가 살던 현실이라면 인간이 강해져봐야 한계가 명확했지만, 이곳은 영웅전기의 세계인 플레이아데스였다.
일개 개인이 산을 부수고 하늘을 뒤흔드는 절대적 강자가 되는 것도 가능했다.
‘음··· 진짜로 될지 의문이지만 아무튼.’
잠시 가늘고 긴 자신의 팔뚝을 바라본 유더였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고 다시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해보자.’
할 수 있다.
해낼 수 있다.
유더 자신은 아웃복서009.
자그마치 23개월 동안 서버 랭킹 1위를 지킨 썩은물이 아니었던가!
유더는 일단 유더 바이엘에 대해 고찰해보기로 했다.
유더 바이엘.
바이엘 백작가의 차남.
대대로 뛰어난 무인들을 배출한 바이엘 가문 출신이지만 기초 검술 하나 제대로 익히지 못 한 이단아.
물론 플레이어블 캐릭터 중에 하나였던만큼 그냥 무쓸모인 녀석은 아니었다.
유더에게는 분명 재능이 있었다.
그것도 평범한 재능이 아닌, 그야말로 절세의 재능이.
천무지체.
이름 그대로 하늘이 내린 무의 재능.
‘하지만 여기에도 다시 함정 카드가 있어.’
유더는 전신 혈맥에 이상이 있는, 무협식으로 말하면 구음절맥을 타고난 몸이었다.
‘단명, 허약, 마나 사용 불가, 무지막지한 음기.’
대충 구음절맥의 효과(?)들이었다.
천무지체와 구음절맥을 한 몸에 타고난 비운의 천재.
그것이 바로 유더 바이엘이란 소년이었다.
‘그냥 레온이었으면 안 되는 거였니? 막시밀리언이라든가.’
다양한 플레이어블 캐릭터들이 존재하는 영웅전기2였지만 그래도 진주인공격인 인물이 존재했으니 그게 바로 레온 가드리엘이었다.
검과 마법 양쪽 모두 엄청난 재능을 타고난 치트 캐릭터.
초심자들도 엔딩을 볼 수 있도록 제작진이 준비한 소위 말하는 타이틀 주인공이었다.
‘그러고 보니 레온도 있기는 있겠지?’
레온만이 아니었다.
영웅전기2의 인물들이 모두 존재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괜히 두근거리네.’
방금까지 막장 세상에 떨어졌다고 한탄했지만, 그래도 이곳은 영웅전기2였으니까.
실체화된 영웅전기2의 인물들을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니 가슴이 마구 뛰기 시작했다.
‘좋아, 어찌되었든 구음절맥만 치료하면 돼.’
그러면 천무지체가 꽃을 피우기 시작할 테니까.
물론 구음절맥을 치료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바이엘 백작가에서 이날 이때까지 유더의 구음절맥을 어찌하지 못 한 것이 그 증거였다.
‘방법이 있기는 있어.’
영웅전기2의 썩은물 답게 구음절맥의 치료법을 몇 개나 알고 있는 유더였다. 하지만 알고 있는 것과 실행하는 것은 달랐다.
구음절맥 때문에 허약함 그 자체인 지금의 몸으로 치료책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였다.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남에게 맡길 수 있느냐하면 그것 역시 아니었다.
방법들이 다들 꽤나 복잡한데다가, 바이엘 가의 사람들이 유더 자신의 말을 믿어줄지조차 의문이었으니까.
‘아군이 필요해.’
유더 자신의 말을 믿고, 실행해줄 수 있는 사람이.
언제 어디서고 유더 자신의 편이 되어줄 사람이.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도련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문 밖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유더의 전속 메이드인 마이아의 것이었다.
‘전속 메이드라니.’
구음절맥을 타고난 몸에 대환란이 예고된 세계였지만, 역시 임진호로 살 때보다 지금이 훨씬 나은 게 아닐까.
잠깐 잡념에 빠졌던 유더는 이내 고개를 들며 말했다.
“어, 괜찮아.”
허락하니 이내 소리 없이 문을 열며 마이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푸른 머리칼을 단정하게 묶은 이십대 전반의 여인으로, 차가운 표정이 매력적인 미녀였다.
방에 들어오자마자 유더에게 약식으로 예를 표한 마이아는 바로 연이어 말했다.
“약혼녀이신 코델리아 체이스 양께서 병문안을 오셨습니다.”
“아.”
병문안.
생각해보니 올만도 했다. 임진호의 기억을 각성한 직후 ‘헛소리’를 잔뜩 늘어놓았으니까.
더욱이 평소에도 허약한 유더가 아닌가.
‘어떡하지.’
임진호의 기억을 각성했을 뿐 유더의 기억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즉, 약혼녀인 코델리아를 만난다고 해서 딱히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코델리아라.’
분홍색에 가까운 붉은 머리를 가진 절세미녀.
어째 미남미녀의 비율이 너무 높은 것 같았지만, 본래 게임이 다 그렇지 않은가.
어찌되었든 코델리아 체이스라면 임진호 역시 제법 아는 것이 많았다.
‘마법명가 체이스.’
유더의 가문인 바이엘이 검술명가라면 체이스 가문은 마법명가였다.
물론, 양쪽 모두 지금은 세가 약해진 상태지만 말이다.
어찌되었든 코델리아 체이스는 제법 출중한 마법 재능을 타고난, 쉽게 말해 법사 캐릭터였다.
유더처럼 천무지체를 타고난 것은 아니었지만 대신 구음절맥 같은 패널티도 없어서 다루기가 쉬운 편이었다.
‘떨리네.’
약혼녀를, 그것도 영웅전기2의 플레이어블 캐릭터를 만난다고 생각하니.
“도련님?”
“응? 아, 응. 괜찮아. 지금 바로 만나러 갈게.”
유더가 흔쾌히 답하자 마이아는 잠시 망설이는가 싶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섰다.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렇게 말한 마이아는 마치 안내하듯 앞장서기 시작했다.
‘진짜 귀족이구나.’
새삼스럽지만 복도에 나와보니 여기가 귀족가, 그것도 한 때 굉장한 세도를 자랑했던 가문의 저택이라는 것이 실감이 났다.
무가답게 화려함보다는 실용성을 강조한 복도였지만 워낙 크고 웅장하다보니 저택이라기보다는 커다란 성안을 걷는 기분이었다.
“도련님이 오셨습니다.”
응접실 문 앞에서 한 차례 목소리를 높인 마이아는 절도 있는 동작으로 문을 열었다.
삭막한 느낌마저 주는 복도와 달리 제법 잘 장식된 응접실이었는데, 안에는 분홍색에 가까운 붉은 머리칼의 소녀와 그녀를 호위하듯 바로 곁에 시립한 여검사가 자리하고 있었다.
‘코델리아 체이스.’
유더 바이엘의 약혼녀.
마른침을 꿀꺽 삼킨 유더는 응접실 안으로 들어섰다. 나름 자연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코델리아를 마주하였다.
하지만 직후.
코델리아와 눈을 마주친 순간.
유더는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그건 코델리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소리쳤다.
““네가 왜 여기서 나와?!””
&
< 제1장 - 플레이아데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