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장 - 플레이아데스 #5 >
&
“허억··· 헉······ 크헉.”
걷기 시작한 지 얼마나 지났을까.
처음에는 척척 앞서나가던 유더가 어느 순간부터 코델리아와 나란히 걷는가 싶더니, 이제는 아예 뒤쳐져서 헐떡이고 있었다.
결국 걱정이 된 코델리아가 돌아서며 물었다.
“야, 괜찮아?”
“하악··· 흑··· 안, 괜찮아. 안 괜찮··· 허어.”
엎드려서 겨우겨우 말을 잇는데, 숫제 구토라도 할 기세였다.
온몸이 땀으로 젖은 유더의 모습에 코델리아는 약간은 멍한 얼굴로 말했다.
“진짜 약하네.”
“흐어··· 흰소리 말고··· 업어, 업어줘.”
“뭐?”
“업어, 달라고. 시간··· 안에··· 가야······ 흐아.”
아예 털썩하고 엉덩이를 깔고 앉은 유더가 좀비처럼 흐느적흐느적 손을 내뻗었다.
“허어··· 빨리.”
“후우, 진짜.”
유더가 다시 팔을 허우적거리자 코델리아는 한숨을 푹푹 내쉬며 유더 앞으로 걸어가 등을 돌리고 앉았다.
“자.”
“흐어.”
유더가 거의 쓰러지듯이 코델리아의 등에 몸을 묻었다. 땀에 절다시피한 유더인 터라 냄새며 감촉이 썩 좋지 못 했지만, 코델리아는 다른 것에 더 놀라고 말았다.
“야, 인간적으로 살 좀 쪄라. 남자 놈이 뭐 이렇게 가볍냐.”
“구음, 절맥.”
“아주 그냥 무안단물이지, 무안단물이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코델리아는 유더를 고쳐 업었다. 업혀 있는 유더가 축 늘어져 있는 상황이니, 엉덩이 쪽을 제대로 받치지 않으면 업는 것조차 힘들었기 때문이다.
“후우··· 은근슬쩍 이상한 곳 만지지 말고.”
“너야말로거든? 손 간수 잘해라?”
유더의 항의를 받아친 코델리아는 다시 성큼성큼 발걸음을 내디뎠다. 어차피 외길인 터라 딱히 안내는 필요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다시 십여 분.
저만치 먼 곳을 바라본 코델리아가 등 뒤의 유더에게 물었다.
“야, 저거 아냐? 거의 다 온 거 같은데? 졸지 말고.”
“응? 어··· 맞아, 저기야 저기. 게임에서 본 거랑 거의 똑같네.”
절벽 옆에 난 구불구불한 길 끝에는 사람 두어 명이 들어갈 만한 크기의 동굴 입구가 있었는데, 비바람에 쇠하긴 했지만 누가 봐도 사람의 손길이 닿은 구조물이었다.
“빨리 가자 노란폭풍아. 이랴, 이랴.”
“이게 진짜.”
낮게 으르렁 거린 코델리아였지만 일단 발걸음 자체는 서둘렀다. 입구가 보이니 어서 빨리 들어가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태양신의 신전······.”
“여기도 이백 년 전에는 성기사들이 지키고 있었겠지?”
“그랬겠지.”
지금으로부터 이백 년 전.
항상 악마들과의 전투에 앞장섰던 태양신 교단은 대악마 앙그리우스에게 궤멸적인 타격을 입어 사실상 와해되고 말았다.
덕분에 붉은 달의 라이제강이라는 강력한 악마를 봉인하고 있는 신전조차도 지금은 이렇게 잊혀 지키는 이 하나 없는 폐허가 된 상황이었다.
“이제 내려줘.”
“안으로 제법 더 들어가야 할 텐데?”
“그 정도는 괜찮아.”
“그렇다면야.”
유더를 등에서 내린 코델리아는 라이트 마법을 시전한 뒤 한 발 먼저 동굴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오··· 느껴져?”
코델리아가 유더를 돌아보며 물었고, 유더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고개를 끄덕였아.
“어, 느껴져. 너두?”
“어, 나두.”
동굴 입구를 통과한 순간 주변의 공기가 변했다.
정확히는 ‘신성한 힘’이 동굴 안을 채우고 있는 기분이었다.
‘이런 느낌이었구나.’
게임에서는 ‘태양신의 신성력이 느껴집니다.’ 한 줄 나오고 끝이었는데, 실제로 느껴보니 겨우 그 정도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마음이 정화되는 것 같아.”
코델리아가 반짝이는 눈으로 주변을 돌아보며 말하자 유더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게임이랑 똑같을 것 같네. 몬스터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아.”
태양신의 신성력에는 마에 속하는 몬스터들을 쫓아내는 힘이 있었다.
유더가 그러했듯이 단번에 동의한 코델리아가 다시 앞장서기 시작했다.
“여기서부터는 나도 길 아니까 내가 앞장설게.”
“그래도 혹시 모르니 조심하고.”
“그래, 너도 발밑 조심하고.”
동굴 안쪽은 생각 이상으로 넓었는데, 곳곳에 태양신의 신수들이 조각되어 있어 유더와 코델리아를 깜짝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시, 신수라는 것들이 왜 다 무섭게 생겼어.”
앞장서던 코델리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어두컴컴한 동굴 안이라 무서운데 예기치 못 한 곳에 무시무시한 신수의 조각들이 자리하고 있으니 귀신의 집에라도 들어온 기분이 들어서였다.
“힘내, 거의 다 왔으니까.”
더욱이 그냥 조각상인 신수들과 달리 붉은 달의 라이제강은 진짜 악마였다. 봉인에 갇힌 상태라고는 해도 그 무서움이 신수 조각상과 비할 바가 아닐 터였다.
“다 왔다.”
구불구불한 외길을 지나 도착한 곳에는 제법 커다란 반구형의 방이 있었다.
붉은 달의 라이제강이 봉인된 봉인지.
신기하게도 다른 곳과 달리 방 전체에 은은한 빛이 감돌고 있어 조금도 어둡지 않았다.
“방 전체가 봉인을 위한 시설이야.”
코델리아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아무래도 마법사이다보니 초상적인 기운을 감지하는 능력은 작금의 유더보다 훨씬 뛰어난 그녀였다.
하지만 유더에게는 영웅전기2에서의 경험이 있었다. 한차례 고개를 끄덕인 뒤 천장과 바닥에 새겨져 있는 마법진을 살펴보았다.
“좋아, 게임에서 봤던 거랑 똑같아.”
사실 여기까지 오긴 왔지만 솔직히 불안한 구석이 없잖아 있는 유더였다.
마법진을 설치하고 악마를 불러낸다.
인간관계나 지형을 확인하는 것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위험하고 특수한 일이었으니 말이다.
‘자신감을 갖자. 여기까지 오는 와중에 이미 여러 가지로 확인했잖아? 더욱이 노란폭풍은 지금 바로 옆에서 마법을 사용하고 있어. 그러니 할 수 있어. 이 세계에는 마법이 실존하니까.’
스스로에게 타이르듯 말한 유더는 마음을 굳힌 뒤 코델리아를 돌아보았다.
“노란폭풍, 준비물.”
“잠깐만 저쪽 보고 기다려.”
준비물들은 전부 치마 안쪽에 있었으니까.
유더가 새삼 어색한 동작으로 돌아서자 코데리아는 아예 치맛단 자체를 분리한 뒤 허벅지며 종아리에 묶어 두었던 물건들을 바닥에 늘어놓았다.
“다 됐어.”
“와, 이걸 다 치마 속에 숨겨온 거야? 무슨 도라에몽 주머니 같네.”
“힘들었으니까 감사하라고. 진구처럼 은혜도 모르지 말고.”
흰소리를 주고받은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새로 마법진을 더할 준비를 하였다.
“제일 좋은 건 아예 천장하고 바닥에 새기는 거지만 그것까지는 힘들어. 그러니 촉매를 섞어 만든 마법약물로 마법진을 그리자.”
“자, 마법약물.”
코델리아가 넓적한 종이 그릇에 붉은 액체를 쏟아부었다. 얼핏 보면 피 같았지만, 각종 약재를 섞어 만든 순수한 마법약물이었다.
‘코델리아가 마법명가 출신이라 다행이네.’
그렇지 않았다면 약물을 만들 재료를 구하는 것부터가 난항이었으리라.
“펜 줘.”
“아버지꺼 몰래 들고 나온 거니까 망가지면 안 돼. 알았지?”
“알았어.”
새삼 확인한 코델리아가 그리폰의 깃털로 만들어진 펜을 내밀었다.
‘확실히 유더와 코델리아구나.’
노란폭풍이 코델리아 몸에 빙의한 것이 아니었다. 코델리아가 노란폭풍의 기억을 떠올린 것이었다.
당장 아버지께 혼날까봐 걱정하는 코델리아의 모습이 그것을 증명했다.
“안 받아?”
“받아야지.”
유더는 코델리아에게 직접 그려보라 놀리는 대신 순순히 펜을 받았다.
노란폭풍 놀리기가 아무리 재미있어도 때와 장소를 가려야 하는 법이었다.
“시작할게.”
“그래, 파이팅.”
이제부터는 유더의 독무대였으니까.
응원하듯 작게 주먹을 흔든 코델리아는 저만치 구석에 쪼그려 앉아 유더가 하는 모양새를 구경했다.
거의 바닥 전체를 써야 하는 커다란 마법진을 그려야 했으니 방해해선 안 되었다.
그렇게 한 시간여.
땀을 뻘뻘 흘려가며 마법진 그리기를 마친 유더가 코델리아에게 손짓했다.
“시작할게. 이쪽으로 와.”
“응? 아, 응!”
유더의 부름에 코델리아가 퍼뜩 놀란 얼굴이 되어 쪼르르 다가왔다.
“왜?”
“아니, 그냥.”
사실 그냥이 아니었다. 코델리아는 유더에게- 정확히는 아웃복서009에게 새삼 감탄하고 있었다.
‘역시 아웃복서009.’
여기까지 왔으니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긴 했지만, 그래도 정말 벨라스틴의 마법진을 통으로 암기하고 있었을 줄이야.
“왜? 새삼 존경심이라도 들어? 역시 이래야 우리 1등이지 같은?”
“아니거든? 나도 할 수 있거든? 너가 너무 놀고 먹길래 부려먹으려고 물러나 있던 거거든?”
“그러시겠지.”
유더는 씩 웃었고, 코델리아는 어쩐지 모르게 뻘쭘해져 입술을 삐쭉였다.
“어찌되었든 시작하자. 다시 네 도움이 필요해. 아무래도 내 피에는 마력이 별로 없을 테니까.”
“후, 알았어. 저기다 떨어트리면 되는 거지?”
“응, 많이는 필요 없으니까 상처 너무 크게 내지는 말고. 흉터 남을라.”
“흥, 웬일로 걱정이래?”
“그러게.”
사실 유더나 코델리아나 극도로 긴장한 상태였다.
붉은 달의 라이제강은 중후반부에나 쓰러트릴 수 있는 강력한 몬스터였으니까.
아무리 게임에서 몇 번이나 해본 일이라고는 하나, 현실에서 똑같은 일을 하려니 손발이 다 떨릴 지경이었다.
평소보다 잡스런 말이 많아진 것도 그 때문이었다.
“아무튼 해보자.”
“그래, 해보자. 할 수 있을 거야.”
마음을 굳게 먹은 코델리아는 유더가 새로 그린 마법진의 ‘입구’에 해당하는 곳에 선 뒤 대바늘을 꺼내 손가락을 콕하고 찔렀다.
“기동하라, 벨라스틴의 마법진이여.”
낮게 읊조린 코델리아가 피를 떨어트리자 바로 반응이 있었다.
유더가 그린 마법진이 붉게 빛났고, 봉인지 안의 공기 전체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노란폭풍! 물러나!”
크게 소리친 유더는 봉인지 중심을 돌아보았고, 코델리아 역시 뒷걸음질 친 뒤 봉인지 중심을 노려보았다.
봉인이 열리고 있었다.
유더가 그린 마법진뿐만 아니라 봉인지의 바닥과 천장에 그려진 마법진 역시 빛나기 시작했다. 태양을 연상시키는 찬란한 황금빛이었다.
“아웃복서! 물러나!”
이번엔 코델리아가 외쳤다. 봉인지의 마나 밀도가 급격히 높아졌기 때문이다. 마을사람A보다도 못한 지금의 유더에게는 봉인지 안의 공기가 독이나 다름없을 터였다.
하지만 괜히 썩은물 아웃복서009가 아니었다.
애당초 지금 같은 상황을 예견하고 있던 유더는 얼른 집에서 준비해온 마스크를 꺼내 입과 코를 가렸다.
비행기 같은 곳에 비치되어 있는 간이 산소 호흡기와 비슷한 물건이었는데, 몬스터들과의 전투가 잦은 바이엘 가문에도 몇 개 없는 물건이었다.
“온다!”
유더가 소리쳤다.
그리고 동시에 봉인지 중심의 공간이 깨지기 시작했다. 허공에 균열이 생겼고, 이내 눈부신 빛과 함께 거대한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붉은 달의 라이제강.
언데드- 그 중에서도 뱀파이어들을 부리는 강대한 피의 악마!
박쥐의 머리와 날개를 가진 붉고 거대한 존재가 유더와 코델리아를 향해 붉은 안광을 뿌렸다.
&
< 제1장 - 플레이아데스 #5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