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장 - 플레이아데스 #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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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더는 눈앞의 광경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잠깐이지만 숨 쉬는 법 자체를 잊고 말았다.
거대한 존재.
무릎을 꿇고 웅크린 자세임에도 불구하고 흉측한 박쥐 머리가 천장에 닿았다.
등 뒤에 돋아난 날개는 축 늘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닥 전체를 뒤덮어 그 존재감을 분명히 했다.
붉은 달의 라이제강.
피를 탐하는 데몬프린스.
게임에서 보았을 때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생긴 것 자체는 동일했지만 위압감이 달랐다.
사지가 결박된 상태였다.
유더의 허리보다 더 두꺼울 것 같은 쇠사슬이 라이제강의 전신을 뒤덮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그저 마주하고 있는 것 자체만으로 유더 자신의 존재가 짓밟히고 뭉개지는 기분이었다.
“정신차려!”
바로 그때 코델리아가 유더의 어깨를 흔들었다.
구음절맥인 터라 아예 마나 자체를 다루지 못하는 유더와 달리 그녀는 비록 1성이라고는 하나 제대로 된 마법사였다. 급하게 준비해온 목걸이를 유더의 목에 채웠다.
“괜찮아? 정신 좀 들어?”
마법 저항력을 약간 증폭시켜주는 마도구였다.
혹시나 해서 챙겨왔던 것인데, 아무래도 챙기길 잘한 것 같았다. 유더의 눈에 다시 초점이 잡히기 시작했다.
“노란폭풍?”
“그래, 나야! 정신줄 챙겨! 응?”
유더는 눈을 깜박였다. 숨을 쉬었다. 컥컥 거리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막대한 존재감에 마른침을 삼켰다.
“붉은 달의 라이제강······.”
진짜였다.
강대한 데몬프린스가 눈앞에 존재했다.
‘할 수 있어.’
유더는 생각했다. 태양신의 봉인은 여전히 작동하고 있었다. 벨라스틴의 마법진 역시 제 역할을 하고 있었다.
주어진 시간은 3분 남짓.
그 이상은 벨라스틴의 마법진이 버틸 수가 없었다.
“저기 있어. 저기, 허리 쪽에.”
코델리아가 잔뜩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라이제강의 허리춤.
정확히는 허리에 차고 있는 검의 손잡이 부분에 태양의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후우.”
한숨을 한 번 내쉰 유더는 다시 마른침을 삼켰다.
라이제강은 눈을 감고 있었다.
봉인의 시간을 견디기 위해 스스로 잠들었는데, 봉인 자체가 유지되고 있는 상황이니 일시적으로나마 밖으로 나왔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는 것 같았다.
‘기회야.’
태양의 목걸이만 챙기고 바로 다시 벨라스틴의 마법진을 해제한다. 놈을 눈앞에서 치워버린다.
‘할 수 있어. 할 수 있어.’
유더가 스스로에게 한 걸음을 내디딘 순간이었다.
“야.”
“흐억흑?!”
코델리아가 갑자기 손을 뻗어 어깨를 잡자 깜짝 놀란 유더가 기괴한 소리를 흘렸고, 그에 놀란 코델리아 역시 뒤로 펄쩍 뛰며 억누른 비명을 질렀다.
“깜짝 놀랐잖아!”
“나야말로 놀랐거든?!”
어쨌든 갑자기 왜 그런 것일까.
유더가 쳐다보자 코델리아는 팔뚝보다 조금 짧은 막대를 크게 휘둘렀다. 그러자 막대가 단숨에 다섯 배나 늘어났다.
“자.”
마법이 아닌, 애당초 안쪽으로 밀어넣는 것이 가능한 조립형 지휘봉이었다.
순간 고개를 갸웃한 유더였지만 이내 코델리아의 의도를 이해했다.
“이걸로 건지라고?”
“직접 붙는 것보다는 낫겠지?”
확실히 나았다.
유더는 진심을 담아 감사의 눈빛을 보냈고, 코델리아는 흥하고 기분 좋은 코웃음을 쳤다.
어찌되었든 이 와중에도 시간은 계속 흐르고 있었다.
지휘봉을 든 유더는 라이제강 곁으로 슬금슬금 발걸음을 옮겼다.
“간다.”
지휘봉을 쭉 뻗으니 어찌어찌 거리가 닿았다. 유더는 그대로 목걸이 줄 사이에 지휘봉을 찔러넣은 뒤 조심스럽게 들어올렸다.
“좋아, 좋아. 거의 다 했어.”
아주 작게 말했고, 코델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마른침을 꿀꺽꿀꺽 삼켰다.
그리고 직후.
마침내 목걸이를 손잡이에서 빼낸 순간!
유더는 다시 한 번 얼어붙었다. 이번에는 코델리아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두 사람은 거의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어 높을 곳을 보았다.
붉은 달의 라이제강.
놈이 눈을 뜨고 있었다.
처음 봉인에서 모습을 드러냈을 때처럼 붉은 안광을 빛내며 유더와 코델리아를 노려보았다.
그렇게 1초.
아니, 영원과도 같은 순간.
“챙겨!”
“튀어!”
코델리아와 유더가 거의 동시에 외쳤다. 유더는 지휘봉을 빠르게 당기며 뒤로 크게 물러섰다. 지휘봉을 따라 내려온 태양의 목걸이를 움켜쥐었다.
[노옴!]
라이제강이 말했다.
입을 열었고, 포효로 봉인지뿐만 아니라 동굴 전체를 뒤흔들었다.
유더가 비틀거리며 넘어졌다.
라이제강이 그런 유더를 붙잡기 위해 팔에 힘을 주었다.
카득!
하지만 쇠사슬이 있었다.
태양신의 봉인이 여전히 라이제강을 굳게 붙잡고 있었다.
“빨리!”
코델리아가 소리쳤다. 유더는 비틀거리며 일어섰고, 라이제강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유더는 또 한 번 믿지 못 할 광경을 목격했다.
작은 빛이 터졌다.
라이제강의 벌린 입 안에서.
정확히는 라이제강의 입을 향해 날아간 빛의 화살이 폭발하며.
매직 미사일.
1성 마법사들이 시작할 때부터 가지고 있는 가장 기초적인 공격 마법.
코델리아였다.
아니, 노란폭풍이었다.
라이제강이 유더를 공격하려는 순간 뼛속까지 싸움꾼인 그녀의 본능이 발동한 것이었다.
“야! 미쳤······?!”
크게 소리치려던 유더는 깜짝 놀라 눈을 깜박였다. 그리고 그것은 코델리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레벨··· 업?”
코델리아가 하얀 빛의 고리에 휩싸였다.
영웅전기2에서 수없이 본 레벨 업 이펙트가 분명했다.
“아.”
코델리아가 목소리를 냈다.
그리고 연이어 다시 한 번 소리쳤다. 이번에는 유더도 함께였다.
“아!”
이해했다.
당혹스럽기 짝이 없는 상황이었지만 고인물을 넘어 썩은물의 경지에 오른 두 사람은 단박에 현상황을 간파했다.
영웅전기2에는 레벨이 존재했다.
하지만 영웅전기2의 NPC들에게는 상태창이 존재하지 않기에 레벨 신전 같은 곳에 가야 자신의 레벨을 측정할 수 있었다.
어찌되었든 중요한 것은 레벨 그 자체가 세계관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었고, 레벨 업을 통한 강화 역시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 코델리아는 어째서 레벨 업을 했는가.
‘전투 경험치.’
적을 꼭 죽여야만 경험치를 얻는 것이 아니었다. 적을 공격하는 행동 그 자체만으로도 경험치를 얻을 수 있었다.
물론 전자에 비하면 후자는 너무나 미미했다.
하지만 코델리아와 라이제강이라면.
이제 막 시작한 1성 마법사와 게임 중후반부에나 상대할 수 있는 강대한 악마라면.
무지막지한 레벨 차이.
본래라면 공격을 시도조차 하지 못 할 상대.
그렇기에 증폭되는 전투 경험치!
[버러지 같은 것들!]
라이제강이 다시 노성을 터트렸다. 하지만 놈은 여전히 쇠사슬에 결박되어 꼼짝도 하지 못 하는 상태였다.
때문에 코델리아와 유더는 서로를 보았고, 눈빛을 교환한 순간 이해했다. 서로의 게임뇌가 돌아가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매직 미사일!”
코델리아가 경쾌하게 외치며 매직 미사일을 발사했다.
두려움 대신 희열에 찬 얼굴이었다.
펑! 펑! 펑!
연속해서 매직 미사일이 터져나갔다. 라이제강에게는 그야말로 간지러울 뿐인 미약한 마법이었지만 어찌되었든 공격은 공격이었다.
“아싸!”
3발쯤 갈기자 코델리아의 몸 주위로 다시 흰색 고리가 생겨났다.
두 번째 레벨 업이었다.
“나도, 나도 레벨 업 할 거야!”
아웃복서009의 게임뇌가 공포를 짓눌렀다. 이런 개꿀 레벨업 포인트를 놓친다는 건 아웃복서009로서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간다!”
단번에 라이제강과의 거리를 좁힌 유더가 지휘봉을 마치 검처럼 휘둘렀다.
“으헉!”
세게 휘둘렀지만 마치 강철을 두드린 느낌이었다. 오히려 반동으로 유더의 손목이 데미지를 입을 것 같았다.
‘그래도 레벨 업만 된다면야!’
이 정도 고통쯤은-
“어?”
그런데 아무 일도 없었다. 흰색 고리가 생겨나지 않았다.
“어째··· 아!”
썩은물답게 유더는 곧 문제의 원인을 파악했다.
코델리아 역시 그랬기에 환한 웃음을 터트렸다.
““너무 약해!””
그랬다.
유더는 너무 약했다.
너무 약해서 유더의 공격은 라이제강에게 공격으로조차 인식이 되지 않았다.
말 그대로 간지럽지도 않았으니까!
[잡것들이 누구 앞인줄 알고 감히 지라······.]
펑펑!
매직 미사일의 폭발음에 라이제강의 목소리가 씹혔다.
코델리아는 까르르 웃으며 연신 매직 미사일을 만들어냈다. 태양신의 봉인이 단단하다는 것도 증명이 되었겠다,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아싸! 레벨 업!”
코델리아가 다시 한 번 레벨 업을 했다.
덕분에 조급해진 유더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여기서 이렇게 뒤처질 수 없었다. 어떻게든 유효타를 만들어 전투 경험치를 얻어야 했다.
하지만 어떻게.
하지만 어떻······.
“빙고!”
습관처럼 외친 유더는 지휘봉을 던지고 태양의 목걸이의 장식 부분이 손가락 위에 올라가게 한 뒤 주먹을 쥐었다.
“위대한 태양신 솔라리의 가호가 함께 하나니, 아침을 밝히는 영광이여, 밤을 몰아내는 광명이여, 일어나라, 나의 손끝에서 불타올라라!”
태양신 솔라리의 기도문을 외우자 태양신의 목걸이가 황금빛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물론 솔라리의 신자도 아닐뿐더러 마력도 없는 유더가 외운 기도문이었기에 효과는 미미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마를 멸하고 부정을 불태우는 태양신 솔라리의 힘!
“하앗!”
도도도 달려간 유더가 라이제강의 정강이를 주먹으로 후려쳤다.
코델리아의 매직 미사일이 그러하듯이 라이제강에게는 간지러울까 말까한 공격이었지만, 어찌되었든 공격은 공격이었다.
“레벨 업!”
유더의 몸에도 순백의 고리가 생겨났다.
그리고 유더는 느낄 수 있었다.
조금이지만 강해졌다.
신체능력 전반이 상승했다.
[이 잡것들이!]
라이제강이 다시 포효했지만 유더와 코델리아는 멈추지 않았다. 레벨 업에 대한 두 썩은물의 욕망이 공포를 짓누르는 순간이었다.
“시간이 없어!”
“한 발이라도 더!”
벨라스틴의 마법진의 제한 시간은 3분.
코델리아는 마나포션을 마시는 와중에도 매직 미사일을 만들어냈고, 유더는 땀을 뻘뻘 흘리며 샌드백 치는 복서처럼 주먹을 휘둘렀다.
[크아아! 이 잡것들이! 내 너희의 얼굴을 기억해두었다! 너희의 영혼을 뇌리에 각인하였다! 내가 풀려나는 날! 너희는 죽음보다 더한 고통에 시달- 잡것들아! 들어! 들으라고!]
유더와 코델리아는 듣지 않았다. 시간이 이제 10초 남짓 밖에 남지 않았으니까.
개꿀 노가다 포인트가 지나가기 전에 한 대라도 더 쳐야만 했다.
그리고 10초.
유더와 코델리아의 허리 주위로 다섯 번째 고리가 동시에 생겨났다.
먼저 치기 시작한 것은 코델리아였지만 애당초 구음절맥이라 생 레벨1이었던 유더의 경험치 효율이 더 좋았기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어찌되었든 10초가 지났고, 벨라스틴의 마법진은 효과를 다했다.
다시 공간이 닫히기 시작하자 라이제강이 유더와 코델리아를 노려보며 울분을 토했다.
[잡것들! 반드시 다시 보게 될 것이다! 보고 말 것이다!]
“그래, 액트 7에서 다시 보자.”
“만나서 즐거웠고, 다음에 또 만나자.”
유더와 코델리아가 각기 웃으며 손을 흔들자 라이제강은 화병이라도 난 것처럼 컥컥 거리며 눈을 감았다. 손발이 자유로웠다면 뒷목이라도 잡았을 것 같았다.
그리고 다시 빛.
태양신 솔라리를 상징하는 황금빛이 봉인지를 가득 채웠고, 붉은 달의 라이제강은 다시 공간 저편으로 사라졌다.
“하아.”
“후우.”
라이제강의 막대한 존재감이 사라지자 유더와 코델리아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다시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하, 진짜. 진즉에 알고 있긴 했지만 너 제대로 미친놈이었구나.”
“그러게, 너도 제정신이 아니었고.”
아무리 봉인된 상태라고는 하지만 대악마의 경고를 무시하고 공격을 해댔으니.
유더와 코델리아는 다시 서로를 보며 유쾌하게 웃었다.
어찌되었든 이번 퀘스트는 대성공이었으니까.
“이제 구음절맥 낫는 거야?”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낫겠지.”
태양화리와 달리 태양의 목걸이로는 단번에 구음절맥을 치료할 수 없었다. 전신혈맥을 막고 있는 극음의 기운들을 태양의 힘으로 조금씩 녹여내야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것으로 족했다. 하루가 다르게 상태가 좋아질 것이 분명했다.
“낫기만 해봐.”
“그래, 그래. 나으면 안아도 주고 덮쳐도 주고, 너희 집 담벼락도 넘어줄게.”
“미친놈이 뭐라는 거야.”
작게 웃은 코델리아는 어깨를 한 번 늘어트리더니 돌연 주먹을 앞으로 쭉 내밀었다.
영웅전기2에서 퀘스트를 클리어하면 캐릭터들이 취하는 동작 가운데 하나였다.
때문에 유더는 주저앉는 대신 코델리아를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자신의 주먹을 코델리아의 주먹에 살짝 맞부딪혔다.
“파인 플레이.”
“파인 플레이.”
녹초가 되었지만 레벨도 5나 올렸고 태양의 목걸이도 손에 넣었으니 그야말로 대성공이었다.
“이제 가자.”
“많이 혼나겠지?”
“혼나겠지.”
아무리 약혼한 사이라지만 아직 결혼도 안 한 미성년 남녀가 둘만의 시간이 갖고 싶다며 야반- 아니, 주간도주를 했으니.
“으으······.”
새삼 걱정이 되는지 코델리아가 어깨를 늘어트렸고, 유더는 그런 코델리아의 어깨를 가만히 한 팔로 안았다.
“뭐냐, 뭐하는 짓이냐?”
“부축 좀 해달라고.”
많이 지쳤으니까.
순간 어이가 없어진 코델리아가 멍한 얼굴로 물었다.
“레벨 업 해도 그래?”
“업어달라고 안 하는 게 어디야.”
“그러네.”
피식 웃은 코델리아는 유더를 부축했고, 두 사람은 사이좋게 나란히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리고 그날 밤.
집에 돌아간 유더와 코델리아에게 외출금지 열흘 형이 선고되었다.
제1장 - 플레이아데스 끝, 제2장 - 던전 북으로 이어집니다.
< 제1장 - 플레이아데스 #6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