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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딩메이커-7화 (7/473)

< 제2장 - 던전 북 >

제2장 - 던전 북

바이엘 백작가.

세일룬 왕국 북부를 수호하는 북방 12가문 중 하나이자, 대대로 강력한 기사들을 배출한 무의 명가.

그런 백작가의 오랜 가신이자, 지금은 은퇴한 기사인 빅터 크롬웰 경은 눈앞의 광경에 눈시울을 붉혔다.

“허억··· 커흐··· 컥······.”

바이엘 백작가의 고뇌라 불리던 유더 바이엘이, 구음절맥 탓에 일상생활에조차 지장이 있던 병자가 연병장을 달리고 있었다.

비록 금방이라도 죽을 것처럼 숨을 헐떡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실로 하늘의 보살핌이로다······.”

약혼녀와 야반- 아니, 주간 도주를 한 곳에서 신성기를, 그것도 구음절맥 치료에 도움이 될 태양신 솔라리의 신성기를 손에 넣다니.

우연이라 하기에는 너무나 공교로운, 하지만 우연으로밖에 볼 수 없는 문자 그대로의 기연.

“아스칸토르시여, 바이엘 가를 살펴주셔 감사합니다.”

전쟁의 신 아스칸토르에게 기도를 바친 빅터는 다시 미소 띤 얼굴로 연병장을 바라보았다.

얼굴이 새빨개진 유더가 마지막 한 바퀴를 끝마치기 위해 반환점을 돌고 있었다.

연병장 열 바퀴.

평범한 기사에게는 준비 운동이나 겨우 될 법한 운동량이었지만, 유더에게는 그야말로 장족의 발전이었다.

당장 일주일 전만 하더라도 연병장 한 바퀴조차 제대로 돌지 못 했으니 말이다.

“허억··· 헉······ 커흑.”

어찌어찌 겨우 달리는 폼 자체는 유지하며 나아가던 유더는 마지막 바퀴를 마침과 동시에 거의 쓰러지듯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커허······.”

하늘이 빙빙 도는 것 같았다.

머릿속이 텅 빈 것처럼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끄어······.”

결국 드러눕고 말았다. 땀을 어찌나 흘렸는지 마치 물에라도 빠진 것처럼 온 몸이 축축했다.

“하아······.”

드러눕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어느 정도 숨이 가라앉자 다시 생각이란 것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죽겠다.’

연병장 열 바퀴.

굳이 거리를 따지면 1km 남짓일까.

그렇게까지 짧은 거리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긴 거리 역시 아니었다.

‘그래도.’

유더의 얼굴엔 어느새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조금씩이지만 몸이 좋아지고 있는 것을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태양의 목걸이.’

유더의 목에는 지금도 태양신 솔라리의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막대한 극양의 기운을 단번에 주입하는 태양화리와 달리 태양의 목걸이는 천천히, 하지만 지속적으로 극양의 기운을 공급했다.

구음절맥은 막대한 한기로 인해 전신 혈맥이 막히는 것을 의미했다.

극양의 기운으로 조금씩이지만 한기를 녹이니, 구음절맥의 증상 역시 완화되기 시작했다.

더욱이 태양의 목걸이의 효과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극양과 극한의 기운이 만나 서로를 탐하니 그로 말미암아 맑고 정순한 기운이 생성되었다.

당장은 마나연공법- 다르게 말하면 내공심법을 제대로 수련하지 못 하는 유더인 터라 생성된 정순한 기운을 어찌하지는 못 하였지만 그렇다고 그 기운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니었다.

전부 유더의 몸 안에 남아 있으니, 후일 온전히 흡수한다면 단번에 큰 성취를 이룰 수 있을 터였다.

“도련님.”

부름에 따라 눈동자를 굴리니 얼굴 한 가득 미소를 짓고 있는 빅터가 보였다.

나이 예순을 넘어 은퇴한 터라 바이엘 백작의 원정에는 따라가지 않았지만, 여전히 정정하기 그지없는 그였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목표를 달성하시는 모습 잘 보았습니다. 백작님께서 돌아오시면 무척 기뻐하실 겁니다.”

입에 발린 말이 아니었다.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사람처럼 헐떡이면서도 끝끝내 연병장 돌기를 완주한 유더가 아니었던가.

빅터는 유더의 몸이 회복되고 있는 것도 있는 것이지만, 그 강한 의지를 높이 보았다.

‘역시 바이엘은 바이엘.’

저주나 다름없는 구음절맥 때문에 드러나지 않았을 뿐, 유더에게도 무의 명가 바이엘 백작가의 정신이 이어지고 있었다.

“조금만 더 회복되시면 가문의 무공 또한 익히실 수 있을 것입니다. 도련님께서 바이엘 가의 무공을 펼치실 것을 생각하니··· 허허, 다 늙은 몸이지만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무인답게 말주변이 별로 없는 빅터였다.

하지만 어찌되었든 좋은 말이었기에 유더 역시 미소를 지어주었다.

‘바이엘 백작가의 무공.’

플레이어블 캐릭터답게 유더에게도 나름의 성장 포인트들이 주어져 있었다.

그중 하나가 바이엘 백작가의 무공.

지금이야 북방 12가문 중 말석을 겨우 차지하는 수준이지만 한때는 12가문의 수장으로서 변경백 자리를 도맡아 온 바이엘 백작가였다.

자연 대대로 이어져 온 무공 또한 그 수준이 결코 낮지 않았다.

‘무공이라.’

현실에서처럼 체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내공을 이용한 어떤 의미로는 마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초인술.

천사와 악마는 물론이고 마법까지 실존하는 세상이니 딱히 이상할 것도 없었지만, 그래도 새삼 느낄 때마다 신기한 기분이었다.

“자, 도련님. 오늘은 이 정도로 하죠. 너무 무리하면 좋지 않습니다. 충분한 휴식 또한 수련의 일부임을 잊지 마십시오.”

빅터의 솥뚜껑 같은 손을 잡고 일어선 유더는 고개를 끄덕인 뒤 다시 한 번 숨을 골랐다.

‘일주일.’

붉은 달의 라이제강으로부터 태양의 목걸이를 손에 넣은 지 일주일이 지났다.

앞으로 3일이면 외출 금지가 풀리니, 슬슬 다음을 준비할 때였다.

‘혼자였다면 꿈도 꾸지 못 했겠지만.’

태양의 목걸이 다음으로 손에 넣으려 하는 것.

유더 자신과 코델리아의 궁극적인 목적은 ‘대소환제’를 저지해 천사들과 악마들의 아마겟돈으로부터 이 세계를 지켜내는 것이었지만 그렇다고 벌써부터 대국적인 움직임을 보일 수는 없었다.

‘당장은 능력도 없고.’

운동장 열 바퀴 겨우 도는 약골과 1성 마법사의 조합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해봐야 뻔했으니까.

그러니 지금은 조급함을 억누르고 성장을 위한 기초를 다질 때였다.

‘함께라면 할 수 있어.’

의도치 않았지만 라이제강 덕분에 레벨 업도 했으니, 코델리아와 함께라면 다음 단계를 바로 진행할 수 있으리라.

‘다만······.’

코델리아에게 어떻게 연락을 할 것인가.

사실 연락 수단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부담스러울 뿐.

‘마이아가 좋아하겠군······.’

지난번 주간도주 이후 말로는 혼내도 눈빛으로는 흐뭇해하던 그녀였으니까.

‘사모하는 노란··· 아니, 코델리아 양.’

약혼녀에게 보낼 연서의 첫 구절을 떠올린 유더는 저도 모르게 참담한 얼굴이 되었다.

&

다음날 오전, 체이스 백작가.

마나하트를 키우기 위한 명상수련 중이던 코델리아는 돌연 몸을 부르르 떨며 눈을 떴다.

무언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뭐, 뭐지?’

노란폭풍이던 시절부터 감 하나는 아웃복서 뺨 때릴 정도로 좋았던 그녀였다.

명상 중임에도 불구하고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불길한 예감이라니.

하지만 오래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예감의 원인 중 하나라 여겨지는 이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아가씨.”

코델리아의 호위무사인 달리아 페이.

그녀가 수상하기 짝이 없는, 아니- 그보다는 불길하기 짝이 없는 미소를 흘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달···리아?”

왜일까.

그녀가 왜 저렇게 웃는 것일까.

사실 이유라면 대충 감이 왔다.

지난 일주일 동안 몇 번이나 보아온 모습이었고, 그녀가 저런 모습을 보일 때는 늘 ‘유더 바이엘’의 이름이 나왔으니까.

‘정숙한 처녀가 할 행동은 아니었지만, 저는 아가씨의 사랑을 응원합니다.’

외출금지 명령을 받고 시무룩해진 자신에게 달리아가 다가와 건넨 말이었다.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기억할 정도로 소름 돋던 그 말.

‘왜, 왜 또 그렇게 웃는 건데.’

이번엔 또 무슨 이상한 이야기를 하려고.

불안해진 코델리아가 어색한 미소를 짓자 달리아는 다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아가씨, 얼굴이 반쪽이 되셨군요. 이해합니다.”

“미리 말하지만 수련을 열심히 해서거든?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거든?”

“후후··· 그러시겠죠.”

말은 알겠다고 하는데 눈빛은 전혀 아니었다.

완전히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아오, 진짜.’

이게 다 유더 때문이었다.

그날 그 일만 아니었다면, 그 부끄러운 대사들만 아니었다면 달리아가 이 정도로 단단히 오해하는 일은 없었을 테니까.

사실 유더와의 주간도주로 혼이 난 것은 코델리아만이 아니었다.

달리아 역시 호위를 제대로 하지 못 했다는 이유로 감봉 조치를 받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같은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그야··· 언니 같은 사람이니까.’

유더에게 있어 마이아가 누나 같은 이라면, 코델리아에게는 달리아가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언니 같은 사람이었다.

‘아니, 생각해보니 이거야말로 보복 행위 아냐?’

코델리아가 의문을 가진 그때 달리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튼 아가씨. 시름에 빠진 아가씨께 희소식이 있답니다.”

“희소식?”

“네, 희소식.”

“뭐, 뭔데?”

“우후훗 그야 유더 공자 소식이죠.”

발랄하게 웃은 달리아는 품에서 서신 한 장을 꺼내 내밀었다.

“유더 공자에게서 온 따끈따끈한 연서랍니다.”

연서.

사랑 편지.

듣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은 코델리아였지만, 그 와중에 또 반갑기는 하였다.

어찌되었든 아웃복서에게서 근 일주일만에 온 소식이었기 때문이다.

“어서 읽어보세요.”

달리아가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재촉하자 코델리아는 복잡하고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서신의 겉봉을 뜯었다.

진정으로 사모하는 코델리아 양에게.

첫 줄부터 버틸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코델리아는 마른 침을 꿀꺽 삼킨 뒤 각오를 단단히 하였다.

어찌되었든 읽기는 읽어야 했으니까.

더욱이 그냥 연서일 리가 없었다. 무언가 숨겨진 메시지가 있으리라.

‘세로드립이라도 있겠지?’

아니면 대각선 드립이라든지.

마이아의 첨삭을 받아 달달하기 짝이 없는 문장으로 가득 찬 연서를 고통에 찬 표정으로 읽어 내리던 코델리아는 저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세로드립이나 대각선드립을 찾아냈기 때문이 아니었다.

사랑의 말로 가득 찬 연서의 마지막.

그 어떤 기교도 부리지 않고, 정직하게 적혀 있는 한 줄의 한글.

이틀 뒤 오후 2시, 바루나의 신전에서 만나자.

‘오, 머리 좀 썼는데?’

플레이아데스에서 한글을 알아볼 수 있는 건 노란폭풍 자신과 아웃복서뿐일 테니까.

이 정도면 거의 완벽한 암호라 해도 좋았다.

‘그보다 바루나의 신전?’

이틀 뒤면 외출금지가 끝나는 날이니 날짜 자체는 이해가 갔지만 바루나의 신전이 마음에 걸렸다.

은막의 신 바루나.

비밀의 수호자인 동시에 감시자.

바이엘 백작가와 체이스 백작가가 위치한 변경 도시에도 바루나의 신전이 하나 있기는 했다.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비밀’을 관장하는 신의 신전답게 고해 목적으로 찾는 이들이 제법 있는 곳이었다.

‘거기에 뭐가 있던가?’

굳이 거기서 보자는 거면 뭔가 있긴 있을 텐데.

잠시 기억을 더듬어본 코델리아였지만 퍼뜩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어찌되었든 문제는······.’

다 읽은 연서를 살짝 접은 코델리아는 달리아쪽으로 슬쩍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역시나일까.

초롱초롱 빛나는 달리아의 시선이 코델리아를 반겨주었다.

‘말하기 싫다. 진짜로 말하기 싫다.’

하지만 그래도 해야만 했다.

외출금지가 끝나든 말든 대낮에 외출하려면 달리아를 데리고 가야 했으니까.

“달리아.”

“네, 아가씨.”

“그··· 이틀 뒤에 말이야.”

“네, 아가씨. 이틀 뒤에 외출금지가 끝나는 날 유더 공자와 밀회를 가지시는 건가요?”

“어··· 응? 미, 밀회?”

“하아··· 유더 공자도 몸이 많이 달았나보네요. 외출금지가 끝나자마자 데이트를 신청하다니. 후훗, 뜨거우셔라.”

순간 정신이 멍해진 코델리아였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되었든 가긴 가야 했으니까.

오해가 좀 거슬리긴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 아무튼. 이틀 뒤에 바루나의 신전에 갈 거야.”

“오··· 장소까지 그럴싸하네요. 비밀의 신의 신전에서 밀회를 갖는다니. 이번에는 굳이 도망치지 마세요. 제가 눈치껏 두 분만의 시간을 만들어 드릴테니.”

씨익 웃으며 말을 마친 달리아가 찡긋 윙크까지 해보였다.

뭐랄까.

분명 도움이 되는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목이 졸리는 것 같은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코델리아는 일단 눈을 감았고, 아주 긴 숨을 내쉬었다. 마음의 평화를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걸 바라보는 달리아의 생각은 달랐다.

‘많이 안도하셨구나.’

사랑하는 유더 공자와 드디어 만날 수 있다는 사실에.

하기사 지난 일주일 동안 만날 수 없다는 아픔을 억누르기 위해 수련에만 매진하던 코델리아가 아니었던가.

언제 이리 사랑이 깊어진 건지는 알 수 없지만, 본래 남녀 사이는 절대적인 시간보다는 순간의 교감이 더 중요한 법이었다.

‘아가씨, 제가 많이 도와드릴게요. 파이팅이에요!’

달리아는 훈훈한 눈빛으로 코델리아를 바라보았고, 때마침 눈을 뜬 코델리아는 흠칫하며 생각했다.

‘뭐야, 쟤 왜 또 저래. 또 무슨 망상을 하는 거야!’

하지만 소리내어 묻지는 않았다.

무슨 이야기를 할지 두려웠으니 말이다.

“아, 아무튼. 이틀 뒤야. 그렇게 알아둬.”

“네, 아가씨. 이틀이 짧진 않지만, 조금만 참으세요. 아셨죠?”

귀엽게 말했지만 귀엽지 않았다.

참긴 누가 뭘 참는단 말인가.

‘앓느니 죽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인 코델리아는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

< 제2장 - 던전 북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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