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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딩메이커-8화 (8/473)

< 제2장 - 던전 북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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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 뒤 오후.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통이 큰 치마를 입은 코델리아는 달리아와 함께 체이스 백작가를 나섰다.

따각따각.

마차를 끄는 말이 발소리를 내었고, 마차 바퀴가 굴렀다. 그리고 그에 맞추듯 달리아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잔뜩 상기된 얼굴만 보면 코델리아가 아니라 달리아가 데이트를 하러 가는 것 같았다.

‘아니, 데이트가 아니지. 데이트가 아니야.’

어디까지나 업무적 만남에 불과했다.

어디까지나 업무적 만남에 불과했다.

중요하기 때문에 두 번 반복한 코델리아는 달리아의 하이텐션을 애써 외면하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바루나의 신전이 위치한 곳은 변경도시 전체로 보면 외곽 지대에 속하긴 했지만 사람도 건물도 모두 많은 곳이었다.

바루나의 신전은 세일룬 왕국뿐만 아니라 대륙 어디를 가도 사람- 정확히는 유동인구가 많은 곳에 세워져 있었는데, 이유는 단순했다.

나무를 숨기려면 숲에 숨겨라.

비밀을 숨기는 가장 좋은 방법은 사람들이 비밀에 관심 자체를 갖지 않게 만드는 것이었으니까.

오가는 이들이 많으면 바루나의 신전을 찾는 이들도 절로 감춰지기 마련이었다.

“아가씨, 거의 다 왔어요. 이제 만나실 수 있어요.”

“그, 그래······.”

억지 미소를 지은 코델리아는 마차가 빨리 도착하기를 바랐다.

유더를 만나고 싶다기 보다는, 빨리 이 거북한 공간과 달리아의 들뜬 시선에서 탈출하고 싶어서였다.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마차가 정차했다.

마부의 묵직한 음성에 안도한 코델리아는 안도의 숨을 토했고, 달리아는 이번에도 혼자만의 오해를 이어나갔다.

‘긴장하셨구나. 귀여우셔라.’

초롱초롱한 눈빛만 봐도 달리아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게 된 코델리아였지만 이번에도 애써 외면했다. 지금 당장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아무튼··· 가자!”

“네, 아가씨!”

달리아와 함께 마차에서 내린 코델리아는 주변을 살펴보았다. 아무래도 오후 시간이다 보니 바루나의 신자들이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안녕하세요! 누나가 코델리아 체이스 님이세요?”

신전 구석에 쪼그려 앉아 있던 아이 하나가 쪼르르 달려와 물었다.

이제 대여섯 살이나 됨직한 어린 아이였는데, 손에는 작게 접은 쪽지를 들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근래 들어 영 이상한 모습만 보이기는 했지만 명색이 체이스 백작가의 호위무사인 달리아였다.

반사적으로 아이의 접근을 차단한 뒤 낮은 목소리로 묻자 겁을 먹은 아이가 우물쭈물하다 답했다.

“이, 이거요! 엄청 잘생긴 형이 이걸 전해드리라고 했어요!”

아이가 불쑥 내민 것은 역시 들고 있던 쪽지였다.

수상하기 짝이 없는 물건이었지만 순간 달리아의 얼굴이 풀렸다. 쪽지 겉면에 유더의 이름이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아가씨.”

“응.”

코델리아가 허락하자 달리아는 아이에게서 쪽지를 넘겨받았다.

“그럼 전 갈게요. 분명히 전해드렸어요!”

달리아 때문에 겁을 꽤 먹은 탓인지 아이는 쪽지를 전하자마자 신전 밖으로 달려나갔다.

하지만 코델리아는 물론 달리아까지도 이미 아이에게는 관심이 사라진지 오래였다.

“어서 열어보세요. 어서.”

“으, 응.”

달리아의 재촉을 받으며 쪽지를 펼치자 이번에도 담백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고해실에서 뵙겠습니다.

고해실.

비밀의 신인 바루나가 컬트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는 이유 가운데 하나.

바루나의 신전에는 그 어떠한 비밀도 털어놓을 수 있는, 다시 말해 어떠한 비밀도 지켜주는 고해실이 존재했다.

사실 비밀을 털어놓는다고 바루나가 무슨 기적 같은 것을 내려주는 것은 아니었지만 비밀의 무게에 짓눌려 살던 사람들에게는 비밀을 털어놓을 수 있는 장소가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위안이 되기 마련이었다.

“어머나··· 고해실에서 사랑의 밀회인가요? 후훗, 귀여우셔라.”

코델리아는 순간 달리아의 뇌가 잘못된 것은 아닐까, 이제는 뭐든 간에 일단 사랑을 갖다 붙일 수밖에 없는 몸이 된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었지만 입 밖에는 내지 않았다.

“아무튼 가자.”

“네, 아가씨.”

바루나의 신전이라면 노란폭풍의 기억을 각성하기 전에도 몇 번 와본 기억이 있었다.

코델리아가 고해실이 있는 신전 동쪽 구역으로 이동하자 고해실 담당으로 보이는 중년의 신관이 다가와 길을 안내해 주었다.

“안에 계십니다.”

주어는 말하지 않았지만 누가 있는지는 뻔한 이야기였다.

신관은 웃으며 물러섰고, 달리아는 생글생글 웃더니 문 앞에 멈춰 섰다.

“저는 여기 있겠습니다.”

그리고 찡긋.

참으로 도움이 되는 배려였지만 뭐랄까, 점점 수렁에 빠져드는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다녀올게.”

“네, 아가씨. 잘하고 오세요.”

“그, 그래.”

어색하게 답한 코델리아는 도망치듯 고해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여, 오랜만.”

작은 책상과 의자 두 개가 놓여 있는 고해실 안에는 예상 그대로 유더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쪽은 갖은 오해 때문에 고생이란 고생은 다 했는데, 어째 저쪽은 얼굴이 훤한 것이 잘 먹고 잘 산 느낌이었다.

“하아, 앓느니 죽지.”

“노란폭풍?”

코델리아는 답하는 대신 유더에게 물었다.

“여긴 어떻게 빌린 거야?”

“응?”

“신전 고해실. 신관 약점이라도 잡은 거야?”

길거리 NPC들의 대소사까지 꿰고 있는 것이 아웃복서009였으니까.

신관이 아예 마중까지 나온 걸 보면 꽤 대단한 약점을 잡은 모양이었다.

코델리아의 물음에 유더는 눈을 한 번 깜박이더니 이내 가볍게 웃었다.

“약점은 무슨, 돈이야.”

“돈?”

“응, 돈. 돈 주니까 빌려주던데?”

굳이 약점을 잡아 협박할 이유가 뭐란 말인가.

돈이 있는데.

“자꾸 잊는 거 같은데, 나 이래봬도 백작가 아들이야.”

그것도 북방 12가문 중 하나인 바이엘 백작가의 아들.

예전보다 세가 약해졌다고는 해도 여전히 잘 나가는 가문 중 하나였다.

“뭐래, 나도 백작가 딸이거든?”

“그러게.”

뻘쭘해진 코델리아가 괜히 퉁퉁 거리자 유더는 작게 웃으며 자리를 권했고, 유더의 맞은편에 자리한 코델리아는 눈을 살짝 가늘게 뜨며 물었다.

“구음절맥은 좀 어때?”

“조금씩이지만 회복되고 있어.”

“흐음.”

이야기를 들어서 그런지 유더의 혈색이 전보다 좋아진 것 같았다.

“너는? 성취 좀 있어?”

“조금만 더 하면 2성 법사가 될 것 같아. 지난번에 레벨 업을 쏠쏠히 했으니까.”

라이제강과의 싸움(?)을 떠올린 코델리아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마음 같아서는 한 번 더 하고 싶었지만 애석하게도 벨라스틴의 마법진은 일회용이었다. 억지로 다시 라이제강을 불러내면 이번엔 정말 봉인에 이상이 생길 수도 있었다.

“아무튼 왜 부른 건데? 여긴 뭐 없잖아.”

“없긴 왜 없어. 있지.”

“응? 있다고?”

“어, 있어. 히든 이벤트.”

유더의 대답에 코델리아는 눈을 깜박였다.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럴···리가 없는데. 공략 사이트에도 아무 것도 없었는데.”

평범한 공략 사이트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었다.

노란폭풍을 비롯한 수많은 썩은물들과 고인물들이 모여 만든 사이트인 ‘영웅전기담’을 이야기한 것이었다.

코델리아 자신이 기억을 못 하는 것일까?

하지만 아니었다.

노란폭풍의 기억은 정확했다.

문제의 원인은 노란폭풍이 아닌 아웃복서009에게 있었다.

“없는 게 당연하지.”

“응?”

“나밖에 못 찾았으니까.”

발견했을 때 최초 발견 알림이 떴었다.

그리고 유더는 이 이벤트를 자기 마음속에만 담아두었다.

아니, 뭐하러 힘들게 알아낸 히든 이벤트 정보를 공략 사이트에 올린단 말인가.

“잠깐, 너 영웅전기담에 공략 안 올려?”

“올리긴 올리지, 남들 다 아는 것들만.”

비밀은 비밀로 지켜질 때 비로소 가치를 갖는 법이었으니까.

“뭐야, 그럼 넌 그냥 다 올려? 진짜로?”

코델리아는 답하지 않았지만 얼굴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래, 그러니까 네가 2등이지. 어쩐지 맨날 2등만 하더라.”

“씨발, 나쁜놈. 어쩐지 이상했어. 암만 해도 따라잡을 수가 없더만.”

“우리 노폭이 순진하기도 해라. 설마 밑천 다 털고 있는지는 상상도 못 했네.”

하지만 사실 짐작은 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다는 덧글들 보며 희희낙락하는 게 공략 글에 고스란히 묻어났으니까.

“아무튼 그래서 뭔데, 여긴 뭐가 숨겨져 있는 건데? 또 네 꺼야?”

코델리아가 입술을 삐쭉이며 묻자 유더는 웃음을 감추며 말을 이었다.

“내 것도 있고, 네 것도 있어. 던전 북은 알지?”

“알지. 설마 여기 던전 북이 숨겨져 있어?”

“숨겨져 있어. 보상도 꽤 짭짤하고.”

던전 북은 이름 그대로 던전에- 정확히는 책속에 구현되어 있는 가상 던전에 들어갈 수 있는 책이었다.

“보상이 뭔데?”

“나는 무공. 넌 아마도 마법.”

“스킬북?”

“스킬북.”

스킬북을 이용하면 따로 배우는 과정 없이 단숨에 해당 스킬을 습득할 수 있었다.

구미가 당긴 코델리아가 유더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물었다.

“구체적으로 어떤 무공이랑 마법인데?”

“무공은 보법인데, 마법은 몰라.”

“왜 몰라.”

“마법사로는 아직 안 깨봤거든.”

“과연.”

타당한 설명이었다. 깨봐야 아는 것이었으니까.

“랭크는? 초장에 도전할 수 있는 거면 그리 높지 않을 테고.”

“B랭크.”

“B랭크?”

“B랭크.”

코델리아의 동공이 확장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B랭크였으니까.

물론 영웅전기2 전체로 보면 B랭크는 그렇게까지 대단한 랭크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 막 시작한 입장에서 B랭크는 그야말로 하늘 위의 랭크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본래라면 이쯤해서 얻을 수 있는 건 보통은 E나 D, 잘해봐야 C- 정도였으니 말이다.

“저기저기, 그럼 마법도 B랭크겠네?”

“아마도?”

코델리아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좋아! 그럼 빨리 해결하자! 어디에 있는데? 어디 숨겨져 있는데?”

“여기.”

“응?”

“여기. 이미 찾아놨어.”

신전 도서관 깊은 곳에 위치한 비밀방 안에 자리하고 있었지만, 오전 중에 와서 찾아냈다.

애당초 코델리아를 오후에 보자고 한 것도 그 때문이었고.

“시간은 금이잖아?”

씩 웃으며 말을 맺은 유더는 품안에 넣어두었던 얇은 책을 꺼내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바루나의 던전 북.

빨간 책의 표지를 가만히 바라보던 코델리아가 고개를 들며 물었다.

“지금 바로?”

“지금 바로.”

더 이상의 협의는 필요하지 않았다.

유더는 책을 펼치며 주문을 외웠고, 순백의 빛이 고해실 안을 가득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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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장 - 던전 북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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