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2장 - 던전 북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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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북.
종류가 제법 다양했지만 결국 용도 자체는 모두 동일했다.
‘책을 펼친 자를 던전으로 이동시킨다.’
이동한 던전이 가상현실 게임처럼 아예 가상의 공간일 때도 있었고, 실존하는 던전일 때도 있었지만, 크게 보면 결국 텔레포트용 열쇠라고도 할 수 있는 셈이었다.
유더는 천천히 눈을 떴다.
눈앞을 가득 채운 것은 새하얀 빛도, 좁고 어두운 고해실의 광경도 아닌 검은 하늘과 하얀 바닥- 정확히는 새하얀 천으로 뒤덮인 넓은 공간이었다.
‘제대로 왔구나.’
은막의 신 바루나의 신전에 숨겨져 있는 작자미상, 제목미상의 던전 북.
영웅전기2에서 이 던전을 공략한 건- 아니, 입장이라도 해본 것은 아웃복서009가 유일했다.
‘10년이 넘도록 버티는 이유가 있다니까.’
영웅전기2의 세계는 계속해서 성장한다.
이게 무슨 소리냐 하면, 빅데이터를 이용한 AI가 계속해서 세계관을 확장시킨다는 이야기이다.
인물들 각각의 사연, 그로인해 발생하는 각종 퀘스트, 생각지도 못 하게 이어지는 NPC들간의 인간관계 등등.
덕분에 아웃복서009나 노란폭풍 같은 썩은물들이 넘쳐나는 게임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영웅전기2는 완벽하게 해명된 게임이 아니었다.
‘나도 모르는 요소들이 아직 남아 있을 테니까.’
물론 영웅전기2 속인지, 아니면 영웅전기2와 같은 세계인지 모를 이곳에서 ‘미지’의 영역이 있다는 사실은 매리트보다는 디매리트에 가까운 터라 마냥 기뻐할 일은 아니었다.
어찌되었든 지금 중요한 것은 유더 자신이 던전에 들어왔다는 사실이었다.
‘노란폭풍은?’
“으으, 머리 아파. 텔레포트 멀미 같은 건가?”
마치 대답이라도 하듯 등 뒤에서 코델리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빙글 돌아서니 머리를 싸매고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코델리아가 보였다.
“노폭, 괜찮아?”
“으··· 안 괜찮아. 넌 괜찮아?”
“어, 괜찮아.”
“왜 괜찮아.”
“넌 왜 안 괜찮은데.”
“그러게.”
멀미 때문인지 약간은 바보처럼 답한 코델리아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무튼, 후··· 여기가 던전 북 속 던전이라는 거네. 보아하니··· 가상 던전 쪽인가?”
가상 던전과 진짜 던전 사이의 가장 큰 차이는 역시 죽음의 유무였다.
가상 던전일 경우 던전 안에서 죽어도 진짜로 죽는 것이 아니었다. 고통은 고스란히 느끼지만 결국 책 밖으로 추방될 뿐 부상조차 남지 않았다.
물론 고통 외에도 패널티가 있기는 했다.
‘리트라이 불가.’
한 번 추방된 자는 다시 가상 던전으로 돌아올 수 없다.
‘죽는 것보다야 훨씬 낫지만.’
애당초 유더가 지금 단계에서 바루나의 던전 북을 선택한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하나는 코델리아에게 밝혔듯이 보상이 좋아서였고, 다른 하나는 목숨의 위험 없이 실전을 경험해보기 위함이었다.
‘영웅전기2는 결국 싸우는 게임.’
대소환제를 저지하기 위한 여정 역시 전투를 동반할 수밖에 없었다.
“후우.”
다시 한 번 마음을 정리한 유더는 코델리아 쪽을 보았고, 이내 작은 미소를 머금었다.
“와··· 진짜 진짜네.”
게임에서야 수도 없이 들락거린 곳이었지만 현실에서는 처음이었으니까.
신기하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주변을 돌아보는 모습이 묘하게 재미있었다.
‘아무튼 그건 그거고.’
유더는 코델리아에게 가 있던 시선을 자신의 왼손으로 돌린 뒤 다시 한 번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빙고.”
계획대로 왼손에는 커다란 가방이 들려 있었다.
책을 펼치기 직전에 일부러 손에 쥔 가방이었다.
‘게임 속에서도 던전 북 갈 때 들고 있는 템은 다 가지고 갔으니까.’
씩 웃은 유더는 가방을 열었다. 가방 크기가 크기인 만큼 안에는 제법 다양한 물건들이 들어 있었다.
“나도 가방 가지고 올걸.”
치맛단을 살짝 들어 올리며 코델리아가 말했다. 보아하니 이번에도 치마 속에 이런저런 물건들을 챙겨온 모양이었다.
“뭐 챙겨 왔는데?”
“그냥 기본적인 것들.”
유더의 물음에 답한 코델리아는 다시 주변을 돌아보더니 입술을 삐쭉이며 말했다.
“내가 말할 때까지 돌아보지 마.”
“등 돌리고 앉아 있으면 되나?”
“그럼 좋고.”
거기까지 말한 코델리아는 빙긋 웃었고, 유더는 얼른 돌아앉은 뒤 다시 가방 안의 물건들을 뒤적거리며 말했다.
“그런데 말이야.”
“어.”
“테크는 뭐 타고 있어?”
“마법?”
“마법.”
“일단은 화염계로 가려고 해.”
“엘리멘탈?”
“엘리멘탈.”
“버프나 디버프는?”
“가긴 가야지. 그래도 일단 베이스는 엘리멘탈이야. 화력이 나와야 하니까.”
“뭐랄까, 정말 노란폭풍다운 대답이네.”
깡데미지에 목숨 건 전투광.
유더의 발언에 코델리아는 작게 웃으며 답했다.
“그야 나니까. 돌아봐도 돼.”
“그럼 사양 않고.”
다시 빙글 돌아앉은 유더는 일단 눈을 한 번 크게 떴고, 이내 다시 미소를 지었다.
“역시 이래야 우리 노란폭풍이지.”
방금까지 통이 넓은 치마에 레이스가 잔뜩 달린 드레스를 입고 있던 코델리아는 지금 이 순간 그녀 나름의 전투복을 입고 있었다.
몸에 딱 맞는 블라우스와 가죽바지, 허리에 차고 있는 단검과 손에 쥔 지휘봉처럼 생긴 짧은 마법 지팡이.
신발도 구두가 아닌 가죽 장화였다.
“여기 올 줄 알고 있었어?”
“아니, 그래도 네가 날 부르는데 분명 뭔가 일이 있겠다 싶어서 치마 속에 챙겨왔지.”
“나중에 그 치마 속 좀 보여줄 수 있어? 내부구조가 궁금한데.”
“미친놈이 뭐라는 거야.”
한바탕 욕을 쏟아냈지만 코델리아는 웃고 있었다.
유더 역시 어깨만 한 번 으쓱인 뒤 가방에서 꺼낸 것들 일부를 들고 코델리아에게 다가갔다.
“자, 그럼 이것도 걸쳐.”
“응?”
“사양 말고.”
유더가 들고 온 것은 사슬이 들어간 가죽조끼와 기름먹인 가죽으로 만든 딱딱한 각반과 팔목 보호대였다.
“투구랑 방패도 있어.”
이번에도 가죽으로 만들어진 물건들이었다.
옛날 비행사 고글처럼 생긴 투구를 코델리아의 머리 위에 씌운 유더는 만족스럽게 웃었고, 어쩌다보니 손에 쥐게 된 동그란 가죽 방패를 돌아본 코델리아는 눈을 가늘게 떴다.
“아웃복서.”
“응?”
“내 눈이 틀리지 않았다면 가방 안에 갑옷 세트는 이거 하나지 않아?”
“맞는데?”
“근데 이걸 나한테 입히는 이유는?”
“그야 네가 전열이니까.”
“전열?”
“응, 전열.”
“전투할 때 앞에 서는 전열?”
“그 전열.”
“네가 무인이고 내가 마법사인데?”
“에헤이, 왜 이러시나. 나 구음절맥 걸린 남자야. 내가 지금 어떻게 전열에 서겠니. 후열에 서야지.”
“태양의 목걸이 얻었잖아.”
“열흘로 치료가 되겠니? 설사 된다 쳐도 네가 간과하는 게 있는데.”
“있는데?”
“구음절맥 빼고 봐도 유더는 아직 허약해.”
팔다리허리 모두 가는데다가 몸무게도 가볍고.
근육량도 어쩌면 코델리아보다 적을지 몰랐다.
“그래도 얼마나 양심적이야. 전열에 선다고 하나뿐인 갑옷도 입혀주고.”
유더는 방긋 웃었고, 코델리아 역시 화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씨발.”
“그래, 그래. 내가 구음절맥만 나으면 안아도 주고 덮쳐도 주고 담벼락도 넘어주고 전열에도 서줄게.”
유더가 다시 빙긋 웃으며 엄지를 세웠고, 코델리아는 중지를 세웠다.
“씨발, 야. 그래, 일단 내가 전열에 선다 쳐. 그럼 넌 후열에서 뭐할 건데.”
“나야 이걸 써야지.”
유더는 다시 가방 쪽으로 걸어가더니 안에 잔뜩 챙겨온 종이뭉치들을 꺼냈다.
“마법진?”
“우리 수준에서 쓸 수 있는 녀석들로 만들어 봤어.”
애당초 벨라스틴의 마법진이 진짜로 기동하는지 알아보기 위해 이런저런 마법진들을 잔뜩 실험해본 유더였다.
“봐봐.”
“여기 있습니다. 천천히 보시지요.”
손바닥보다 조금 큰 종이에는 제법 복잡한 형태의 도안들이 그려져 있었다.
‘미친.’
마법진들을 돌아본 코델리아는 감탄 섞인 욕지거리를 토할 수밖에 없었다.
유더가 내민 마법진의 숫자는 모두 서른 장.
1성 마법들이 그려져 있었는데, 코델리아가 욕지거리를 토한 이유는 단순했다.
‘이걸 다 외우고 있다고?’
벨라스틴의 마법진도 놀랍긴 했지만 그거야 뭐, 정말 특별한 마법진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눈앞의 마법진들은 그리 대단한 마법진들이 아니었다.
물론 그만큼 단순한 터라 외우기는 쉬울 터였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만한 숫자를 다 외우고 있었단 말인가?
“그······.”
“그?”
“아니, 아무 것도.”
순간 다른 것들은 얼마나 외우고 있는지 묻고 싶어진 코델리아였지만 꾹 참기로 했다.
‘분명 다 외우고 있을 테니까.’
그리고 너는 못 외우냐고 놀리겠지.
“노란폭풍?”
“음, 좋아. 이 정도면 쓸 만하겠네. 마법진 종류도 다양하고.”
“그래, 그러니까 마력 좀 주입해줘.”
“어?”
“아니, 마법진에 마력을 주입해야 쓸 수 있잖아.”
“네 마력은?”
“에헤이, 또 이러신다. 나 구음절맥 걸린······.”
“씨발놈, 나쁜놈, 개새끼.”
“왈왈.”
마지막은 당연히 유더였고, 이번에는 코델리아가 개처럼 으르렁거렸다.
그리고 한 시간 여.
챙겨온 마력 포션을 물처럼 마셔대며 마법진에 마력 주입을 끝마친 코델리아는 바닥에 철푸덕 쓰러졌다.
“하아··· 하아······.”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퍼지겠네.
하지만 마냥 퍼져 있을 때가 아니었다.
“시간 배속, 얼마나··· 후우, 돼?”
“일단 게임에서는 20배.”
코델리아가 헉헉 거리며 묻자 유더가 상큼하게 답하며 마법진들을 챙겼다.
20배.
즉, 이곳- 던전 북 안에서의 20분이 밖에서는 1분이란 의미였다.
“아무리 고해실 밀회라지만 30분 넘어가면 마이아랑 달리아가 걱정하겠지. 그러니 그 전에 끝내자고.”
“잠깐, 30분? 여기 공략 얼마나 걸리는데?”
“음, 글쎄. 지금 우리 수준으로는 충분한 휴식 시간까지 포함해서 대충 일고여덟 시간?”
“미친. 안에 뭐가 있길래?”
“이미 설명했듯이 B랭크 무공이랑 마법이 든 스킬북. 당연히 고생 좀 해야 하지 않겠어?”
똑 부러지는 대답에 코델리아는 눈동자를 굴리는가 싶더니 이내 눈을 꽉 감고 한숨을 토했다.
“마법 구린 거기만 해봐.”
“설마 그럴 리가.”
유유히 답한 유더는 코델리아 앞에 자리를 잡고 앉은 뒤 커다란 종이를 펼쳤다.
기억에 따라 미리 그려온 던전 지도였다.
“길은 내가 다 외우고 있지만 너도 일단 알긴 알아야 하니까. 안에서 나올 몬스터들 이야기도 좀 해야··· 왜?”
“아니, 아무 것도.”
벨라스틴의 마법진도 통으로 외우는 녀석이 뭐인들 못 외우랴.
속으로만 다시 감탄한 코델리아는 유더와 본격적으로 던전 공략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대강의 논의를 끝마친 유더와 코델리아는 아치 형태의 커다란 문 앞에 나란히 섰다.
지금 있는 장소가 안전지대라면 저 너머는 몬스터들이 출몰하는 위험지대였다.
숨을 길게 토한 유더는 코델리아를 돌아보았고, 코델리아 역시 유더를 바라보았다.
“시작할까?”
“시작하자.”
바루나의 던전 북 공략.
두 사람은 나란히 발걸음을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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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장 - 던전 북 #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