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엔딩메이커-12화 (12/473)

< 제3장 - 체이스 백작가 >

제3장 - 체이스 백작가

대륙 최강대국의 자리를 놓고 아르곤 제국과 패권을 다투는 세일룬 왕국은 전영토가 크게 셋으로 나뉘어 있었다.

혹한과 야만의 땅인 북부 미개척 지대와 이어진 북방.

대륙 제일의 곡창지대라 불리는 실라테스 평원을 가진 중앙.

내해와 외해 양쪽으로 두루 세력을 펼치고 있는 남방.

오랜 세월 미개척 지대 너머의 야만족들로부터 세일룬 왕국은 물론 대륙 전체를 수호한 북방은 세일룬 왕국 내에 존재하는 또 하나의 왕국이나 다름없었다.

세일룬 국왕은 대대로 북방의 통치와 수비를 북부 변경백에게 일임하였고, 북부 변경백은 북방의 명가들과 협력해 국경을 지켜냈다.

변경백의 자리가 바이엘 백작가에서 흐레스벨그 백작가로 넘어갔듯이, 북방을 지키는 명가들 역시 그 숫자나 구성을 세대마다 달리하였는데, 당대에는 열두 가문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무의 명가 바이엘 백작가.’

지금은 그 세가 쇠락하여 변경백 자리를 흐레스벨그 백작가에 넘기고 말았지만, 그렇다 해도 여전히 무시할 수 없는 저력을 가진 가문이었다.

특히 가주인 바이엘 백작은 세일룬 십대 검호 가운데 한 명이자, 북방 사강의 일원으로 ‘검장’의 칭호를 가진 강자였다.

‘마법명가 체이스 백작가.’

체이스 백작가는 북방 12가문 가운데 가장 작은 영지를 가지고 있었다.

붉은 여명 탑.

북방에 존재하는 다섯 개의 마탑 가운데 하나.

당대 체이스 백작은 북방에도 단 셋 밖에 존재하지 않는 7성 마법사로, 붉은 여명 탑의 탑주를 겸하였다.

‘그 외 열 개 가문.’

하나하나 나열하면 너무 길었으니까.

어찌되었든 사실상 영지가 없는 것이나 다름없는 체이스 백작가는 변경도시인 바일룬에 저택을 짓고 터를 잡았는데, 변경백 자리에서 물러난 바이엘 백작가가 본거지인 바일룬에 돌아옴에 따라 한 영지에 두 개 가문이 존재하는 작금의 상황이 만들어졌다.

“후우, 후우, 후우.”

숨을 크고 빠르게 토하며 유더가 연병장을 달렸다.

온몸이 땀투성이인데다가 얼굴까지 붉었지만 비틀거리지도, 금방이라도 죽을 사람처럼 숨을 거칠게 쉬지도 않았다.

연병장 열 바퀴.

열흘 전만 하더라도 거의 목숨을 건 도전에 가까웠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냥, 그냥 존나 힘들다.’

머릿속이 멍한 것이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땀을 너무 흘린 탓에 상의고 하의고 완전히 젖어 물에라도 빠진 것 같았다.

하지만 호흡이 규칙적이었다.

팔다리 역시 아프긴 했지만 끊어질 것 같진 않았다.

“크하.”

달리기를 멈춘 유더는 일단 숨부터 크게 토했다.

그대로 드러눕는 대신 상체를 숙인 채 숨을 골랐고, 천천히 호흡을 안정시켰다.

‘성과가 있어.’

체력이 늘었다.

그것도 많이.

‘기초 체력이 워낙 저질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는 것은 는 것이었다.

눈에 보이는 성장은 의욕을 고취시키기에 충분했다.

‘이 녀석도.’

어느 정도 호흡을 안정시킨 유더는 허리를 곧이 세운 뒤 눈을 감고 의식을 집중했다.

마나연공법.

다른 말로 내공심법을 운용하기 위함이었다.

영웅전기2의 내공심법은 보통 무협지에 나오는 내공심법과는 다소 차이가 있었다.

상중하 세 개의 단전을 사용하는 것은 똑같았지만, 운용 중에 움직이지 못 한다거나, 특정 자세를 고수해야 하거나 할 필요는 없었다.

굳이 따지면 동공에 가깝다고 해야 할까.

유더는 빅터에게 배운 F랭크 기초공을 운용해보았다.

‘느껴져.’

하단전에 똬리를 튼, 비록 콩알만하지만 따스하며 생기 넘치는 기운이 느껴졌다.

더욱이 맑았다.

극한과 극양의 기운이 만나 만들어진 정결한 기운은 순수의 결정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래도 여전히 빡세구나.’

아직 구음절맥이 완치된 것은 아니었으니까.

세맥뿐만 아니라 대맥에도 막히거나 비좁은 곳이 많아 제대로 된 운공이 힘들었다.

하지만 유더는 서두르지 않았다.

체력이 늘고 있는 것처럼 구음절맥 역시 착실히 호전되고 있었으니까. 애당초 체력이 는 것부터가 구음절맥이 치료되고 있다는 증거였다.

‘기대되네.’

제대로 된 무공을 사용할 때가.

조금 유치한 생각이긴 했지만, 솔직히 무공을 제대로 한 번 써보고 싶었다.

경공을 써서 반쯤 날아다닌다거나, 내공을 이용해 강력한 기파를 날려본다거나.

마치 히어로 영화의 초인들 같지 않겠는가.

‘새삼 신기하단 말이지.’

무공뿐만 아니라 마법 역시도.

그 모든 것들이 가능한 이 세계 자체도.

레벨이 있고, 레벨 업이 있다.

상태창이 없을 뿐 타이틀 역시 존재한다.

하지만 게임이 아니다.

현실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유더 자신은 살아 숨 쉬고 있다.

‘그래, 중요한 건 그거겠지.’

살아있다는 사실.

살아가려 한다는 사실.

영웅전기2의 세계 속에 들어온 이유나, 영웅전기2와 같은 현실세계가 존재하는 이유 같은 건 고민해봐야 답이 나올 문제가 아니었다.

때문에 유더는 당장 눈앞의 현실에 집중하기로 하였다.

“훌륭합니다.”

흡족함 그 자체인 목소리에 유더는 눈을 뜨고 시선을 돌렸다.

유더의 체력 훈련 담당인 노기사 빅터 크롬웰이 얼굴 가득 미소를 짓고 서 있었다.

“하루가 다르게 체력이 늘고 있습니다. 이대로 계속하면··· 백작님이 돌아오실 즈음에는 바로 바이엘 가의 무공을 익히실 수 있을 겁니다.”

빅터는 마치 자기 일처럼 기뻐하며 말했다.

사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유더가 태어나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자라온 과정 모두를 지켜봐온 그였으니까.

구음절맥이란 저주로 인해 항상 고통 받고 좌절하던 아이가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고 있으니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호랑이 새끼는 호랑이인 법.’

빅터는 유더의 태도 역시 마음에 들었다.

평범한 사람보다 훨씬 더 체력이 약한 유더 기준에서는 그야말로 힘겨움 그 자체일 훈련을 요령 하나 피우지 않고 성실하게 수행했으니 말이다.

‘바이엘 가의 복이로다.’

진정 그러했다.

성실하고 또 성실한 유더가 재능까지 출중하였으니까.

태양의 목걸이를 얻어 구음절맥을 치료하기 시작한 지 겨우 스무날이 되었을 뿐인데 유더는 단순히 체력만 는 것이 아니었다.

근력, 민첩성, 유연성 등등 거의 모든 신체 기능이 몰라보게 달라졌다.

‘그야 레벨 업을 했으니까.’

그것도 1렙이 11렙이 되었으니, 몰라보게 달라지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어찌되었든 는 것은 는 것이었고, 좋은 것은 좋은 것이었다.

빅터의 감탄 섞인 시선 역시 즐거웠고 말이다.

“도련님은 재능이 있습니다. 그러니 무공의 입문 시기가 늦다 하여 좌절하거나 실망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 말 아시겠죠?”

“예, 빅터 경. 명심하겠습니다.”

유더가 이번에도 긍정적으로 답하자 빅터는 기쁨과 안타까움이 모두 섞인 미소를 지었다.

유더의 나이가 이제 열일곱이니, 무공을 입문하기에 늦은 나이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리 밝은 모습이시라니··· 올곧구나··· 아니, 무공을 배울 수 있다는 기쁨에 잠시 현실을 잊으신 것인가······.’

빅터의 검푸른 눈동자에 다시 진한 감정이 어렸지만, 사실 유더의 생각은 단순했다.

‘천무지체인데 당연히 쩔지. 나이가 무슨 상관이야.’

천무지체.

주인공을 주인공답게 만들어주는 사기급 재능.

“도련님, 힘내십시오. 도련님은 꼭 해내실 겁니다.”

“네? 아, 네. 힘내겠습니다.”

빅터와 유더가 서로 동상이몽을 나누는 그때였다.

“도련님! 유더 도련님!”

다급한 부름에 유더와 빅터의 시선이 동시에 돌아갔다.

유더의 전속 메이드인 마이아였다.

그런데 평소와 분위기가 달랐다. 항상 냉정 침착하던 그녀가 얼굴을 잔뜩 상기시킨 채 거의 뛸 것 같은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마이아?”

유더는 물론이고 빅터 역시 놀란 상태였다.

마이아의 잰걸음은 그 정도의 의미가 있었다.

“무슨 일이냐?”

빅터의 물음에 마이아는 일단 숨부터 크게 고른 뒤 유더를 보며 말했다.

“도련님, 체이스 백작가에서 서신이 왔습니다.”

“오, 체이스 백작가에서. 우리 귀여운 아가씨께서 연서라도 보내신 건가?”

빅터가 대놓고 반짝이는 얼굴이 되어 물었다.

유더와 코델리아 사이의 사랑이 무척이나 깊어졌다는 소문이 백작가에 파다했으니까.

‘허허, 우리 도련님은 재주도 좋으시지.’

코델리아 체이스는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절세미소녀였다.

그런 코델리아가 유더를 생각하며 수줍게 사랑의 말을 적는 모습을 상상한 빅터의 얼굴엔 절로 흐뭇한 미소가 그려졌다.

하지만 아니었다.

노란폭풍이 아웃복서009를 생각하며 사랑의 말을 고민하는 일 따위는 있을 수 없다는 뜻이 아니었다.

“코델리아 양이 아닙니다.”

서신을 보낸 것은 코델리아가 아니었다.

마이아의 말에 빅터는 눈을 껌벅였고, 유더는 순간 미간을 좁혔다.

지금 이 시점에서 유더 자신에게 서신을 보낼만한 체이스 백작가의 사람은 오직 둘 뿐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는 당연히 코델리아 체이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체이스 백작님의 서신입니다.”

아더 체이스.

당대의 체이스 백작.

장인어른의 소환장이었다.

&

“도련님, 너무 긴장하지 마세요. 코델리아 양의 아버님이신걸요. 그리고 약혼은 바이엘 백작님과 체이스 백작님께서 함께 정하신 바이니 두 분은 문자 그대로 공인된 관계에요. 그러니 야, 약간의 일탈 정도는 괜찮을 거예요.”

약간의 일탈.

유더와 코델리아가 둘만의 시간이 필요하다며 강행한 주간도주.

유더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긴장된다.’

무척이나.

그것도 이상할 정도로.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사위가 장인어른을 뵈러 가는 길이니 어찌 긴장하지 않겠는가.

더욱이 주간도주 사건은 바이엘 가의 사용인들 사이에서 얼음여왕이라 불리는 마이아조차도 말을 떨게 만들 정도의 일이었다.

긴장하는 것이 당연했다.

“후우, 후우, 후우.”

빨리 달리느라 평소보다 덜컹거리는 마차 안에서 유더는 침착하기 위해 호흡을 가다듬었다.

눈을 감고 의식을 집중했다.

‘아더 체이스. 체이스 백작.’

코델리아의 아버지.

북방 사강 가운데 하나이자, 세일룬 왕국에서도 손에 꼽히는 전투마법사.

사실 원작에서 그의 비중은 그렇게까지 크지 않았다.

‘코델리아 체이스’의 메인 시나리오에서도 은근 출연이 적었고, ‘유더 바이엘’의 메인 시나리오에서 역시 존재감이 작았기 때문이다.

‘유더와 코델리아의 약혼은 결국 흐지부지 되었으니까.’

유더가 구음절맥으로 골골거리는 사이에 진행되는 코델리아의 메인 시나리오로 말미암아 두 사람 사이는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만날 일이 없으니.’

같은 도시에서 시작한 두 사람이지만 메인 시나리오를 따라가다 보면 서로 활약하는 구역이 완전히 갈리게 되었다. 정확히는 둘 다 북방에서 활약을 하긴 하는데, 한 명이 동쪽에 있을 때 다른 한 명은 서쪽에 있는 식이었다.

‘코델리아 스토리에서는 약간 팔불출 같았는데.’

그외 성격적인 면에서는 크게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으··· 왜 부르는 거지? 역시 주간도주 때문인가?’

하지만 그렇다면 왜 이제야.

외출 금지 풀린 지 열흘이 넘게 지났는데.

‘침착하자, 침착하자 아웃복서009.’

평소답지 않았다.

이상할 정도로 긴장한 탓에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아니, 애당초 왜 이렇게 긴장한단 말인가.

까짓(?) 코델리아의 아버지 아닌가.

‘자, 장인어른.’

어쩐지 모를 미묘함에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른 그때였다.

“도련님, 도착했습니다.”

마이아의 말에 눈을 뜬 유더는 마차 창밖으로 보이는 체이스 백작가의 저택을 보았다.

언젠가 넘기로 약속한 담벼락이 참으로 높고 또 높았다.

바이엘 백작가의 저택이 기사의 성이라면, 체이스 백작가의 저택은 마법사의 모형정원이었다.

잘 꾸며진 넓은 정원을 지나 저택 정문에 도착한 유더는 마른침을 삼켰다.

처가댁(?)에 방문했다는 사실이 새삼 실감되었기 때문이다.

“방문을 환영합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집사의 안내를 따라 저택 안으로 들어선 유더는 바이엘 백작가의 저택과는 확연히 다른 체이스 백작가의 분위기에 감탄했다.

밝고 화사하고 화려했다.

국경의 성을 연상시킬 정도로 담백하고 칙칙한 바이엘 백작가의 저택과는 방향성 자체가 다른 느낌이었다.

그런데 막 기다란 복도에 들어섰을 때였다.

오래 전부터 미리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복도 한 곳에 서서 안절부절 못하던 코델리아와 달리아가 성큼 유더에게 다가섰다.

“노던 집사님, 잠시만 시간을 주세요.”

달리아가 웃으며 노던을 압박했고, 코델리아가 다급한 눈짓으로 복도 구석을 가리켰다.

보스방 가기 전에 작전회의 좀 하자는 눈빛이었다.

유더 역시 정보가 간절한 상황이었던 터라 마다할 일이 아니었다. 얼른 따라가니, 장식 때문에 가려진 곳에 선 코델리아가 불쑥 입을 열어 말했다.

“어떻게 할 거야?”

“따, 따님을 제게 주십시오?”

유더가 저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답하자 코델리아가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미친놈이 뭐라는 거야.”

“아니, 그전에 애당초 왜 부른 건데? 뭐 아는 거 없어?”

“없어. 그냥 갑자기 부르신 거야.”

“역시 주간도주 때문인가?”

“그건 모르겠지만 언급은 하시겠지?”

“후, 그러게 그때 왜 그렇게 오버를 해서······.”

“미친놈아, 네가 시킨 거잖아! 네가!”

“아무튼 지금은 잘잘못을 따질 때가 아니야.”

“따지고 싶다, 미친듯이 따지고 싶다.”

하지만 정말로 잘잘못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그리고 생각해보면 장인이 사위를 부른 것뿐이니, 어쩌면 딱히 큰 목적이 없을 수도 있었다.

“아무튼 잘해볼게.”

“그래, 뭘 잘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잘해봐. 화, 화이팅!”

코델리아의 소심한 응원을 받은 유더는 고개를 끄덕인 뒤 다시 노던 집사에게 다가가 안내를 부탁했다.

그리고 너무나 짧게 느껴진 1분 남짓.

“유더 바이엘 공자가 도착했습니다.”

노던 집사가 목소리를 높였고,

보스방의- 아니, 체이스 백작가의 응접실 문이 열렸다.

&

< 제3장 - 체이스 백작가 > 끝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