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3장 - 체이스 백작가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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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택의 다른 곳들과 마찬가지로 체이스 백작가의 응접실은 화사하고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다.
하얗고 깨끗한 대리석으로 된 바닥과 짝을 이루는 천장은 하얀 색이었고, 정원으로 이어지는 커다란 유리문이 몇 개나 달린 벽은 청록색이라 시원한 느낌을 주었다.
붉고 노란 색을 과감하게 사용해 화려한 느낌을 주는 카펫과 전체적으로 밝은 색조를 띈 고급스러운 가구들.
아름다운 귀부인들이 모여 앉아 티파티를 하기 딱 좋아 보이는 그곳에 홀로 이질적인 존재가 서 있었다.
“왔느냐.”
아더 체이스.
체이스 백작.
북방 사강의 일원이자 7성 마법사인 그는 북방을 대표하는 전투마법사 중에 하나였다.
그리고 그 사실을 온몸으로 드러내듯 그는 크고 무섭고 날카로웠다.
검으로 비유하자면 클레이모어 같은 자라 해야 할까?
‘붉은 폭풍.’
체이스 백작의 이명.
‘적법사’라고도 불리는 그는 늘 피처럼 붉은 로브를 입고 다녔는데, 지금 역시 마찬가지였다.
“유더 바이엘이 체이스 백작님을 뵙습니다.”
유더가 예를 표하자 정원 쪽을 보고 서있던 체이스 백작이 돌아섰다.
2미터에 육박하는 큰 키와 짧게 자른 붉은 머리칼.
떡 벌어진 어깨와 전장에서 다져진 것으로 추정되는 바위 같은 근육들.
여기에 상대를 꿰뚫어 보는 것 같은 날카로운 눈빛이 더해지니 그 인상이 실로 위압적이었다.
마법사라기보다는 강력한 전사를 마주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어머님 유전자가 열일하셨구나.’
코델리아를 비롯한 체이스 백작의 세 자녀들은 모두 꽃처럼 아름다운 미남미녀들이었으니까.
물론 체이스 백작이 못 생긴 얼굴인 것은 절대 아니었다. 오히려 선이 굵고 진한, 남자답게 잘생긴 얼굴이었다.
라이제강을 찾아 갈 때와 같았다. 긴장했기 때문인지 머릿속에서 흰소리가 나오고 있는 상황이었다.
“앉거라.”
체이스 백작은 이번에도 낮게 말한 뒤 상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유더는 마른침을 삼킨 뒤 체이스 백작이 권한 자리에 착석했다.
평범한 만남이었다면 이쯤해서 메이드들이 들어와 다과를 권해야 했지만, 체이스 백작과 유더 사이에 자리한 것은 오직 짙고 무거운 침묵뿐이었다.
그렇게 십여 초.
유더의 등줄기를 따라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할 즈음 체이스 백작이 다시 입을 열었다.
“몇 가지, 이야기를 들었다.”
올 것이 왔다.
체이스 백작은 꼿꼿한 자세를 유지한 채 유더를 내려다보았고, 유더는 마른 침을 꿀꺽 삼킨 뒤 그런 체이스 백작의 서늘한 시선을 마주하였다.
솔직히 무서웠다. 라이제강을 처음 봤을 때와 비슷한 감정이 가슴 속에 싹트는 것 같았다.
하지만 시선을 돌리지는 않았다. 얼마 없는 내공까지 쥐어짜며 체이스 백작의 시선을 견뎌냈다.
그러기를 몇 초.
유리알 같은 눈으로 유더를 바라보던 체이스 백작이 다시 입을 열어 말했다.
“일탈 중에 기연을 얻었다고 하더군.”
일탈.
시작부터 세게 들어오는 체이스 백작이었다.
하지만 유더는 침착함을 유지했다. 체이스 백작이 언급한 것은 일탈만이 아니었다.
“운 좋게 태양의 목걸이를 얻게 되었습니다.”
태양의 목걸이를 얻었다는 사실을 체이스 백작이 모를 리가 없었다.
때문에 유더는 그저 대답만 하지 않고 목에 건 채 옷 속에 넣어두었던 태양의 목걸이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태양의 목걸이입니다.”
“흐음.”
태양신 솔라리의 문장이 새겨진 황금 목걸이.
유더에게 집중되어 있던 체이스 백작의 시선이 태양의 목걸이로 옮겨갔다. 그는 굵고 거친 손가락으로 목걸이를 몇 번 어루만지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극양의 기운을 지속적으로 발산하는 물건인가. 대단한 기연을 얻었구나.”
태양의 목걸이는 다른 누구도 아닌 태양신 솔라리의 챔피언 가리우스가 사용하던 신성기였다.
교단의 지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물건이었으니, 체이스 백작이 감탄하는 것도 당연했다.
“어찌되었든.”
체이스 백작이 태양의 목걸이를 내려놓았다. 그는 다시 한 번 유더를 훑듯이 살펴보더니 돌연 품에서 작은 함을 꺼내며 말을 이었다.
“이건 이제 쓸모가 없겠군. 그래도 이왕 가져온 것이니 가져가거라.”
대체 무엇일까. 유더가 열어봐도 되냐는 눈빛을 보내자 체이스 백작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흥, 미리 말하지만 별 건 아니다.”
조금 애매했지만 열어봐도 된다는 뜻 같았기에 유더는 조심스럽게 함을 열었고, 이내 눈을 크게 떴다.
‘별 거잖아!’
함안에 든 것은 강력한 양의 기운을 품은 양지환이었다. 그저 함을 열었을 뿐인데 그윽한 향내가 응접실을 가득 채울 것 같았다.
태양화리처럼 단번에 구음절맥을 치료할 수 있는 물건은 아니었지만, 치료에 상당히 도움이 될 귀한 물건이었다.
“그리고.”
양지환에 대한 감사를 표하기도 전에 체이스 백작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는 다시 한 번 매서운 눈으로 유더를 보며 물었다.
“듣자하니 절벽에서 뛰어내릴 때 코델리아가 널 안았다고 들었다. 사실이더냐?”
“···사실입니다.”
“쯧, 못난 녀석.”
못마땅하다는 듯 혀까지 찬 체이스 백작은 다시 품을 뒤져 작은 함을 하나 내밀었다.
“근력을 강화시켜주는 열매다. 내 주변에 있는 건 지팡이 들 힘만 있으면 되는 마법사 나부랭이들이라 쓸모가 없으니 가져가거라.”
‘힘의 열매?!’
유더가 다시 한 번 깜짝 놀라 함을 바라보았다.
힘의 열매는 영구적으로 근력을 소폭 상승시켜주는 물건으로, 이런 종류의 아이템들이 다들 그러하듯 초반에는 구경조차 하기 힘든 물건이었다.
양지환에 이어 힘의 열매까지.
‘사, 사실 엄청 좋은 사람인 게 아닐까?’
아니, 유더 자신을 무척 좋아하는 것이 아닐까?
주간도주도 주간도주 자체보다는 코델리아가 유더 자신을 안았다는 사실에 못마땅해 하는 것 같았다.
타고난 인상이 매섭고, 표현하는 게 서툴러서 그렇지 사실은 좋은 사람.
유더는 고개를 들어 체이스 백작을 보았다.
여전히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어쩐지 모르게 아까랑은 다르게 보이는 그였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그가 운을 떼었다.
이제는 무슨 말이 나올까 두렵기 보다는 절로 기대가 되기 시작한 유더였다.
“다가오는 친목회에 코델리아와 함께 참여할 것이라 들었다.”
북방 12가문의 자제들이- 정확히는 아직 공무에 나서지 않은 미성년 자제들이 한데 모이는 친목행사.
이번에는 유더 역시 참여할 것이라고 코델리아가 언질을 준 모양이었다.
유더는 약간의 기대를 담아 대답했다.
“예, 그리할 생각입니다.”
“먼 길을 다녀오려면 체력이 필요한 법이지.”
지극히 옳은 말씀이었다.
유더는 얌전히 기다렸고, 체이스 백작은 이번에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새삼 헛기침을 토하는가 싶더니 다시 한 번 품에서 작은 함을 꺼내 내밀었다.
“내 주변에 있는 건 죄다 연구실에만 틀어박혀 있는 샌님들이라 쓸모가 없으니 가져가거라.”
‘체력의 열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체력을 영구히 소폭 상승시켜주는 물건이었다.
빈약한 체력을 가진 유더에게 있어서는 양지환 만큼이나 가치 있는 보물이었다.
“그리고.”
“예, 아버님.”
유더가 얼른 답하자 체이스 백작은 헛기침을 토하더니 다시 한 번 품안에 손을 넣으며 말했다.
“네가 여행을 나선다고 하면 바이엘 백작 그 꼰대 같은 작자가 시험이니 뭐니 허튼 짓을 하겠지. 별 건 아니지만 이게 도움이 좀 될 거다.”
이번에는 무어라 말하지 않았지만, 함의 크기로 보아 대충 짐작이 갔다.
열매 시리즈 중 하나가 분명했다.
‘아아, 아버님. 아아, 아버님.’
영웅전기2를 다시 할 수 있다면 어떻게든 체이스 백작을 파고들어 보리라.
이건 흡사 보물 고블린- 아니, 보물 아버님이 아닌가.
유더가 깊은 감사로 눈을 빛내자 다시 한 번 코웃음을 친 체이스 백작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흥, 볼 일은 끝났다. 이제 그만 나가 보거라.”
“정말 감사합니다.”
“탁자 아래에 가방이 있으니 거기에 담아 가거라.”
작게 말한 체이스 백작은 처음 들어왔을 때 그러했던 것처럼 정원 쪽으로 돌아섰다.
더 이상 할 이야기가 없다는 뜻이었다.
어찌보면 다소 무례한 행동이었지만 유더는 개의치 않았다.
가방까지 챙겨주신 보물 아버님께 더 이상 무얼 바란단 말인가.
유더가 얼른 함들을 챙긴 뒤 응접실을 나서자 기다리고 있던 이들이- 정확히는 코델리아가 잰걸음으로 다가왔다.
“야, 괜찮아? 별 일 없었고? 아버님이 뭐라셔? 많이 혼내셨어? 우, 우리 파혼하래?”
약간이지만 겁에 질린 얼굴이었다.
유더는 답하기 앞서 코델리아의 어깨 너머를 바라보았고, 저만치에 서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마이아와 달리아의 모습에 미소를 지었다.
“야, 무슨 이야기 했냐니까. 응?”
“아버님이.”
“아버님이?”
“앞으로는 내가 너 안고 다니래. 안기지 말고.”
“···엉?”
코델리아가 무슨 말이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고, 유더는 유쾌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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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이스 백작가 정원.
아름답게 꾸며진 꽃밭을 유더와 코델리아가 거닐었고, 마이아와 달리아가 나란히 서서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때문에 코델리아는 손부채로 입가를 가린 채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까, 아버님이 아이템들을 잔뜩 챙겨주셨다고?”
“어, 먹고 힘내서 너 안고 다니래. 안기지 말고.”
유더가 새삼 다시 말하자 코델리아는 얼굴을 살짝 붉히더니 코웃음을 쳤다.
“흥, 아무튼 다행이네.”
“너 아버님 딸이 맞구나. 흥흥 거리는 게”
“이게 뭐라는 거야.”
“어찌되었든 정말 잘 됐어. 아버님이 챙겨주신 것들 다 먹으면 지금보다 훨씬 상태가 좋아질 거야.”
정말 생각도 못 한 행운이었다. 구음절맥의 상태가 지금보다 호전되고, 여기에 힘과 체력- 그리고 마지막으로 챙겨주신 민첩성의 열매까지 먹으면 과장 조금보태 지금보다 1.5배 정도는 더 강해질 터였다.
‘물론 지금 상태가 워낙 안 좋긴 하지만.’
어찌되었든 1.5배는 1.5배.
가방만 봐도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런데.”
“어, 설마 너도 뭐 주려고? 사랑합니다 물주님. 언제든 불러만 주십시오.”
“아니거든? 야, 아무튼 그럼 너 이제 그거 시작하는 거야? ‘아버지의 시험’ 퀘스트?”
“아마 그렇겠지.”
아버지의 시험.
‘유더 바이엘’의 메인 시나리오에 등장하는 첫 번째 메인 퀘스트.
이름 그대로 유더 바이엘의 아버지인 바이엘 백작에게 구음절맥이 치료되어 도시 밖으로 나설 준비가 되었다는 사실을 인정받는 이벤트였다.
게임에서는 태양화리 이벤트로 구음절맥을 완치 받은 뒤 한 달에서 두 달 가량 무공 수련을 하면 도전할 수 있었는데, 첫 번째 메인 퀘스트임에도 불구하고 녹록지 않은 난도를 자랑했다.
‘유더가 비주류 캐릭터인 이유 중에 하나였지.’
그렇지 않아도 시작 시점이 다른 캐릭터들보다 늦는데 아버지의 시험 퀘스트 때문에 시간을 더 지체해야 했으니까.
더욱이 다른 퀘스트들과 달리 이렇다 할 꼼수조차 없는 퀘스트였다.
“걱정 마. 이것 때문에 천하삼십육보를 얻은 거니까. 랑게스트까지 함께 갈 수 있을 거야.”
“흥, 너랑 랑게스트 같이 가고 싶어서 그러는 게 아니거든?”
“음, 뭐랄까. 참 전형적인 대사지만 네 외모가 되니 그럴싸하구나.”
“미친놈이 뭐라는 거야.”
코델리아는 전형적인 대사를 한 인물답게 얼굴을 붉혔고, 유더는 작게 웃었다. 그리고 그런 두 사람을 멀리서 바라보던 마이아와 달리아 역시 흐뭇한 미소를 머금었다. 멀리서 보면 수줍게 사랑을 속삭이는 귀여운 한쌍이었으니 말이다.
“어찌되었든 시작이 언제인데? 일단 이쪽은 앞으로 보름 뒤에 출발할 거야.”
“아버지가 돌아오시는 건 늦어도 열흘 뒤니까··· 시간문제는 없을 거야.”
아버지의 시험 퀘스트를 통과하고 여행 준비를 갖춘 뒤 코델리아와 함께 랑게스트로 향한다.
“믿어도 되겠지?”
“여행 준비나 잘 해놔. 가는 길에도 챙겨야 할 것들이 있으니.”
이 정도면 충분했다.
썩은물답게 유더가 뭘 말하는지 바로 이해한 코델리아였다.
“그럼 낭보를 기다리고 있을게.”
“그래, 조만간 다시 보자.”
습관처럼 주먹을 맞부딪힌 두 사람은 마이아와 달리아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일주일 뒤.
바이엘 백작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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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3장 - 체이스 백작가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