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4장 - 성곤 >
제4장 - 성곤
달이 무척이나 밝아 별이 보이지 않는 밤.
검푸른 밤하늘 아래 자리한 코델리아는 마치 천사처럼 아름다운 얼굴로 말했다.
“씨발, 씨발, 씨발.”
“너무 심한 욕설은 제재 대상입니다.”
“미친놈이 뭐라는 거야.”
“그래, 감탄사라 이거지. 아무튼 빨리 결정해.”
환상적인 달빛 아래 자리한 것은 코델리아만이 아니었다.
깊은 산속.
졸졸졸 흐르는 계곡물 소리가 들려오는 곳에서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하고 있었다.
울 것 같은 얼굴이 된 코델리아가 어깨를 늘어트리며 말했다.
“야, 우리 이거 진짜 해야 해?”
“해야지. 해야만 하지.”
코델리아의 메인 시나리오는 시작부터 혹독했으니까.
악마의 손의 친목회 습격 사건을 방해하는 수준에 그치지 않고 완전히 방어해내기 위해서는 악마들과 상극의 힘을 지닌 성유물- 성곤聖棍 문라이트가 필요했다.
“노란폭풍.”
“왜.”
노란폭풍이 기운 없이 답하자 유더는 헛기침을 한 번 하더니 한 걸음을 내디뎠다. 노란폭풍의 어깨 위에 두 손을 올린 뒤 진지한 얼굴과 목소리로 말하였다.
“오직 너만이 할 수 있는 일이야. 오직 너만이 이 일을 해낼 수 있어.”
“···멋있게 말해도 본질은 그대로거든?”
“에라이, 싫으면 말든가. 이게 내 이벤트인가? 네 이벤트지.”
성곤을 얻기 위한 이벤트는 코델리아 전용이었으니까.
“씨발, 제작진 진짜 싫어.”
다시 욕지거리를 뱉은 코델리아였지만 기세가 많이 죽은 걸 보니 아무래도 저항을 포기한 모양이었다.
유더는 여러 가지 감정이 섞인 한숨을 토한 뒤 재차 코델리아의 어깨를 두드렸다.
“할 거면 슬슬 준비하자. 시간 없으니까. 기껏 했는데 타이밍 놓쳐서 이벤트 불발나면 안 되잖아?”
“하아······ 앓느니 죽지. 그래, 한다 해. 내가 아주 완벽하게 해준다.”
“그래, 이래야 우리 노란폭풍이지.”
씩 웃으며 엄지까지 세워준 유더는 한 걸음 물러서서 다시 밤하늘을 보았다.
모든 일의 발단이 된 것은 이틀 전, 랑게스트로 가는 가도 위에서의 사건이었다.
&
바이엘 백작가를 떠나고 하루.
애당초 일정이 넉넉한 터라 일행은 발길을 서두르지 않았다.
말들도 쉬게 할 겸 쉬엄쉬엄 나아갔는데, 어디 한 곳에 정차해 쉴 때면 마이아와 달리아는 꼭 마차 밖으로 나가 휴식을 취했다.
답답한 마차를 벗어나 신선한 공기를 쐬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유더와 코델리아에게 둘만의 시간을 만들어주기 위함이었다.
“뭐랄까, 우리 참 배려심이 좋죠?”
“정말 잘 어울리는 한쌍이시니까요. 막 응원하고 싶어지는?”
달리아의 자화자찬에 마이아가 웃으며 답했다.
두 사람의 마음은 똑같았으니까.
애당초 마차가 쉴 때마다 밖으로 나와 둘 만의 시간을 만들어주자는 약속도 미리 이야기가 오간 것이 아니었다.
자연스럽게 일어난, 그야말로 주인을 생각하는 메이드와 호위무사의 배려심이 맞물린 결과였다.
나무 그늘에 앉아 마이아가 내민 찻잔을 받아든 달리아는 우후후 웃으며 말을 이었다.
“본래도 선남선녀라 잘 어울리시긴 했지만··· 지난달부터 갑자기 정말 사이가 좋아지셨죠?”
“네, 특히 주간도주··· 아니, 두 분만의 시간을 나누신 뒤로요.”
“하, 정말이지 여기서만 하는 이야기지만··· 그 직전에 아가씨가 좀 아프셨거든요. 그래서 걱정을 많이 했는데, 좋은 일이 있으려는 액땜이었나 봐요.”
“어머나, 아가씨도요?”
마이아가 깜짝 놀랐다는 듯 눈을 깜박이자 달리아가 아-하는 탄성과 함께 말했다.
“그러고 보니 도련님도 그때 몸이 편찮으셨죠?”
“네, 조금······.”
사실 막 헛소리를 하고 난리가 아니었지만 아무리 약혼녀의 호위무사라 해도- 아니, 오히려 그런 위치의 사람이기에 밝힐만한 내용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은 달리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코델리아도 한 달 전 아팠을 때는 헛소리를 잔뜩 늘어놓았을 뿐만 아니라 듣는 이들 모두가 깜짝 놀랄 정도로 폭풍같은 욕설을 쏟아냈었으니까.
‘그때는 정말 뭐였을까······.’
인형처럼 예쁜 아가씨의 입에서 그런 상스러운 욕들이 쏟아져 나오다니.
정말이지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광경이었다.
“그래도 정말 잘 되었어요. 도련님도 몸이 좋아지고 계시고, 이렇게 함께 친목회도 가시고요.”
“그러게요.”
서로를 보며 우후후 웃은 메이드와 호위무사는 다시 마차 쪽을 바라보았다.
저 안에서 두 사람은 어떤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까.
상상만 해도 귀여운 웃음이 나오는 두 사람이었으니 분명 달달한 사랑의 말을 나누고 있지 않을까?
“야, 우리 인간적으로 n빵 하자니까?”
“에헤이, 아버님이 나 주신 건데 왜 n빵을 해.”
“우리 아버지가 나 맛있는 거 사주라고 주신 돈이니까.”
“그래, 내가 적절히 예산편성해서 맛있는 거 사줄게.”
여행을 떠나기 직전 체이스 백작이 찔러준 돈 주머니를 놓고 시답잖은 대화를 나누던 코델리아와 유더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기지개를 펼쳤다.
마법이 걸린 마차라 가도 위를 달리고 있음에도 편안한 승차감을 자랑했지만, 계속 안에만 있으니 답답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모두 앞에서 약혼자 연기를 하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조금 답답하긴 해도 이렇게 단 둘이 있는 쪽이 훨씬 편하고 좋았다.
“아무튼··· 이제 슬슬 생산적인 대화를 해보자.”
“뭐? 앞으로의 일정 같은 거?”
“어, 일정. 특히··· 앞으로 일어날 일이 정말로 일어나는가···에 대해 말이야.”
아웃복서009의 기억을 각성하고 한 달.
유더는 이 세계가 영웅전기2와 거의 동일한 세계임을 이미 몇 번이나 확인하였다.
하지만 지금까지 확인한 것은 세계의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뿐이었다.
인물이나 지형, 역사나 물건 같이 그저 존재할 뿐인 것들 말이다.
‘이야기 자체가 영웅전기2와 똑같이 진행될 것인가.’
물론 진행된다 해도 초반만일 터였다.
유더 자신과 코델리아가 이것저것 개입하다보면 나비효과로 말미암아 스토리 자체가 달라질 터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일어날 일이 일어난다’는 굉장한 의미를 가졌다.
“일단 우리 출발일은 원작에서 코델리아가 출발한 날짜와 거의 같아.”
“게임과 똑같이 진행된다면······.”
“지금 가고 있는 가도 앞쪽의 다리가 무너져서 길이 막히지.”
원작에서는 두 가지 선택지가 존재했다.
길을 우회해서 산길을 이용하든가, 아예 남하해서 도강을 위한 배를 구하든가.
코델리아의 메인 시나리오에서 처음 마주하게 되는 이지선다 선택지였다.
그리고 대부분의 고인물들은 여기서 산길 우회 루트 쪽을 택했다.
“그래야 숨겨진 이벤트를 수행할 수 있으니까.”
“으윽.”
유더가 말한 그때 코델리아는 약간은 싫은 표정을 지었다.
숨겨진 이벤트의 내용 때문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도련님, 전해드릴 사안이 있습니다. 잠시 괜찮으시겠습니까.”
마차 밖에서 젊은 기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이엘 백작가에서 이번 여행의 호위로 붙여준 ‘준’이라는 이름의 기사였는데, 첫 출전이었던 이번 원정에서 제법 혁혁한 공을 세운 인물이었다.
“예, 괜찮습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유더가 응답하자 준이 마차 문을 열었다.
얌전히 마주 앉아 있는 유더와 코델리아를 잠시 바라본 그는 다시 유더를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가도를 이용하던 이들이 돌아오고 있기에 물어보니 다리가 무너져서 길이 막힌 모양입니다. 아무래도 우회로를 택해야 할 것 같습니다.”
‘역시.’
일어날 일이 일어났다.
유더는 슬쩍 코델리아를 돌아보았고, 코델리아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산길 쪽을 이용하는 건가요?”
“예, 근방 지리를 알고 계시는군요.”
“첫 여행이다 보니 예습을 좀 했습니다.”
“아··· 과연. 예, 도련님 말씀대로 산길 쪽을 이용할 생각입니다. 일정이 하루 정도 늦어질 것 같지만··· 지금으로서는 최선인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하죠. 애당초 일정에는 제법 여유가 있으니 서두르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유더가 점잖고 친절하게 나오니 처음에는 제법 딱딱한 표정을 짓고 있던 준의 얼굴이 풀렸다.
아무래도 유더가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예정에서 벗어난 길을 이용하게 되었지만 두 분의 안전에는 조금의 문제도 없도록 하겠습니다.”
기사답게 당당히 선언한 준은 유더와 코델리아에게 재차 예를 표한 뒤 마차 문을 닫았다.
그리고 직후.
유더가 코델리아에게 말했다.
“일어났네.”
게임에서처럼 길이 막혀 우회로를 택하게 되었다.
이번 일이 가지는 의미는 꽤 컸지만, 국소적으로 보자면 일단 숨겨진 이벤트를 수행할 기초 조건이 갖춰진 셈이었다.
코델리아가 어깨를 늘어트리며 말했다.
“저기, 그런데 말이야.”
“어.”
“게임에서는 그··· 산길로 가서 특정 지역에 가면 자동으로 이벤트가 발생하잖아?”
“발생하지.”
“그런데 여기서는 특정 지역 간다고 해도 이벤트가 자동으로 발생하지 않겠지?”
“당연히 발생하지 않겠지.”
영웅전기2는 자유도가 무척이나 높은 게임이었지만, 그래도 결국엔 ‘스토리 RPG’에 속했다.
즉, 특정 이벤트가 발생하면 캐릭터들이 플레이어들의 조작에서 벗어나 정해진 행동을 하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현실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특정 지역에 갔다고 갑자기 몸이 제멋대로 움직이며 정해진 대사를 읊는 일 따위는 있을 수 없었다.
‘있으면 그건 그거대로 문제지만.’
어찌되었든 중요한 것은 이벤트를 발동시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게임에서 있었던 이벤트를 발동시키고, 똑같은 보상을 얻을 수 있을까.
사실 단순한 이야기였다.
유더와 코델리아 모두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이벤트를 재현해야지.”
영웅전기2에서 보았던 대로 특정 장소에서 정해진 행동을 한다.
마치, 연극을 하는 것처럼.
“좋은 연기 부탁한다, 노란폭풍.”
유더가 찡긋 윙크했고, 코델리아는 가운데 손가락을 세웠다.
그리고 이틀 뒤.
마침내 약속의 시간이 당도했다.
&
“씨발, 씨발, 씨발.”
“너무 심한 욕설은······.”
“시으발, 시으발, 시으발.”
“그래, 내가졌다. 욕하는 걸로 마음이 풀리고, 그로인해 연기에 집중할 수 있다면 좋은 게 좋은 거겠지.”
산길 루트를 택하면 지나칠 수 있는 계곡 근처.
코델리아를 등지고 선 채 되도 않는 흰소리를 늘어놓던 유더는 떠나기 전 게일에게 받은 회중시계를 열어 시간을 헤아려보았다.
‘이벤트가 발동하는 건 자정.’
달리아의 불침번 시간은 오후 11시부터 새벽 1시까지였고, 이 2시간이 유더와 코델리아가 단 둘이 있을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마이아는 메이드라 애당초 불침번에서 빠졌고, 다른 기사들에게 둘 만의 시간을 달라고 해봐야 씨알도 안 먹힐 터였으니 말이다.
‘현재 시각은 11시 50분.’
이벤트 발동까지 10분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준비 됐어?”
“기, 기다려! 돌아보면 죽인다?”
“어차피 옷 다 입고 있잖아.”
“씨발. 됐어, 돌아봐도 돼.”
코델리아의 허락이 떨어지자 유더는 빙글 돌아섰고, 저도 모르게 감탄을 토했다.
“와.”
솔직히 말해서 놀랐다.
예쁜 건 진즉부터 알고 있었지만, 새삼 다시 깨달았다고 해야 할까?
유더의 눈앞에는 커다란 수건 한 장만 걸친 코델리아가 머리를 푼 채 맨발로 서 있었다.
‘물론 수건 속에 옷 다 입고 있겠지만.’
어찌되었든, 뭐랄까.
환상적인 달빛 아래 머리를 푼 채 자연태로 선 코델리아는 아름답다 못 해 신비하기까지 했다.
“웃으면 죽인다. 눈 돌려도 죽인다. 자꾸 쳐다봐도 죽인다.”
물론, 입을 열지 않았다면 말이다.
“야, 그럼 대체 어딜 보라는 건데?”
“몰라, 아무튼 이제 시작할 테니까 잘 숨어 있어. 알았지?”
“알겠습니다, 마님.”
마지막으로 눈빛을 교환한 두 사람은 숨을 크게 삼킨 뒤 각자 정해진 위치로 이동했다.
이벤트의 시작은 이러했다.
산길을 이용하게 된 코델리아는 여정 도중 계곡을 발견하고, 땀을 씻기 위해 사람들의 눈을 피해 자정 즈음하여 계곡에서 목욕을 한다.
‘뭐··· 서비스 이벤트라고 해야 하나.’
사실 유더에게도 비슷한 이벤트가 하나 있기는 했으니까.
어찌되었든 목욕을 하던 코델리아는 달빛의 아름다움에 반해 노래를 부르게 되는데······.
“아흑, 물 존나 차갑네. 미친 거 아냐? 여름도 아니고 가을 중엽에 뭐하러 계곡 물에 들어가.”
수면에 발을 살짝 담근 코델리아가 몸서리를 쳤고, 수풀에 숨은 유더는 참담한 심정이 되어 사인을 보냈다.
대충 노래하라는 사인이었다.
“하, 진짜. 코델리아 완전 미친 거 같아.”
자아비판 아닌 자아비판을 한 코델리아는 부들부들 떨며 물속에 들어간 뒤 달을 쳐다보며 입술을 열었다.
사실, 이쯤 되니 코델리아가 왜 노래를 불렀는지 알 것도 같았다.
캄캄한 야밤에 혼자서 넓은 계곡물에 들어가니 유더가 쳐다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섭기 짝이 없었다.
막 물속에서 뭔가 튀어나올 것 같다고 해야 할까?
노래라도 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 할 것 같았다.
“반짝반짝 작은 별~ 아름답게 비치네~”
코델리아가 소심하게 노래하기 시작하자 유더가 다시 사인을 보냈다.
원작에 나온 노래를 부르라는 신호였지만, 노란폭풍은 아웃복서009가 아니었다. 이벤트에 잠깐 나온 노래를 어떻게 외우란 말인가.
‘대충 별 나오는 노래인 건 같으니 되겠지.’
그리 생각하며 노래를 이어간 지 얼마나 지났을까.
저만치 너머, 환상의 달빛 아래.
노랫소리에 반응하는 자들이 있었다.
&
< 제4장 - 성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