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엔딩메이커-19화 (19/473)

< 제4장 - 성곤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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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흘렀다.

유더와 코델리아는 눈을 떴고, 두 사람은 페어리들의 연회장 대신 한밤중의 계곡에 자리했다.

“엣취!”

잠시 멍해있던 유더가 재채기를 하자 퍼뜩 정신을 차린 코델리아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계곡? 돌아온 건가? 연회 끝난 거 맞지?”

대놓고 필사적인 느낌이 묻어나는 멘트에 유더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계곡이야. 연회가 끝났어. 끝났다고!”

“와! 끝났어! 끝났다고!”

물속에서 펄쩍펄쩍 뛴 코델리아는 유더를 와락 끌어안았고, 유더 역시 코델리아를 얼싸안으며 감동과 안도를 동시에 느꼈다.

12시간.

페어리 퀸과의 만남 이후 유더와 코델리아가 페어리들의 연회장에서 보낸 시간이었다.

“아오, 씨발. 내가 다시는 작은 별 부르나봐라.”

코델리아가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몸을 부르르 떨며 말했다.

대여섯 번도 아니고, 무려 수십 번을 불러재꼈으니까. 더욱이 작은 별만 부른 것이 아니었다.

“노란폭풍.”

“왜?”

“너 동요밖에 모르지?”

반짝반짝 작은 별에 이어 부른 것은 곰 세 마리였으니까.

코델리아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아니거든? 다른 노래도 많이 알거든? 페어리들 수준에 맞춰준 거거든?”

“그래, 뭐 귀엽긴 하더라.”

사실 유더 자신도 완창 할 수 있는 가요라면 겨우 손에 꼽을 정도에 불과했으니까.

유더가 히죽 웃으며 넘어가자 코델리아는 얼싸안고 있던 유더를 세게 밀어낸 뒤 툴툴거렸다.

“아무튼 진짜 죽는 줄 알았네. 게임에서는 ‘시간이 흘렀다.’하고 슥 지나가서 몰랐는데, 이거 완전 사람 할 짓이 아니야.”

“동의.”

수십 명이나 되는 페어리들과 놀아주는 것은 뭐랄까, 비글 수십 마리를 동시에 보살피는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끝도 없이 노래를 부른 코델리아도 코델리아였지만, 유더 역시 잘생긴 걸 좋아하는 페어리들 사이에서 모진 고생을 다해야 했다.

“페어리 퀸도 역시 페어리는 페어리였어.”

“그러게.”

유더 옷을 벗기려드는 페어리들을 보며 우아하게 웃으며 부추기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했다.

직접 나서주지 않은 것만 해도 감지덕지랄까.

“하아.”

“후우,”

거의 동시에 한숨을 내쉰 유더와 코델리아는 이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피식하고 웃었다.

“어찌되었든.”

“미션 클리어.”

짝 소리가 나게 손바닥을 마주친 두 사람은 각자 자신의 전리품을 돌아보았다.

코델리아가 손에 넣은 것은 성곤 문라이트.

달빛을 마력으로 전환해 충전할 수 있는 아이템으로, 만성 마력부족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마법사들에게 있어서는 무척이나 유용한 장비였다.

‘나름 필살기도 내장되어 있고.’

사실 유더가 문라이트를 반드시 챙기려 한 이유가 바로 그 필살기에 있었으니까.

악마의 손과의 싸움에서 크게 활약할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요정의 발걸음.’

오른손 검지에 낀 은색 반지를 바라보고 있자니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현재 유더의 레벨로는 1일 1회가 한계였지만, 그것만 해도 감지덕지였다.

사실상 목숨 하나를 더 얻은 셈이었으니 말이다.

“헤헷, 바이콘도 잘 있겠지?”

“잘 있겠지.”

페어리들의 연회장에서 12시간이 지날 동안 현실에서는 고작 수십 초가 지났으니까.

유더와 코델리아는 바이콘이 쓰러져있을 방향을 돌아보았고, 물에 반쯤 떠 있는 바이콘의 시신에 기쁨과 어색함이 반쯤 섞인 표정을 지었다.

단순한 이유였다.

“음··· 저기서 뽑아내야 하는 거겠지?”

코델리아의 물음에 유더는 고개를 끄덕였다.

“게임처럼 드랍이 안 되니까.”

하지만 그래서 좋은 점 역시 있었다.

바이콘을 잡으니 뿔 두 개가 나온다.

너무나 당연한 이 일이 게임에서는 일어나지 않을 때가 비일비재했으니까.

‘잡았는데 뿔이 없거나 하나만 있거나 하는 일이 대다수니.’

반면 현실에서는 뿔뿐만 아니라 다른 것들까지 모조리 다 얻을 수 있었다.

“너무 걱정 마. 채집이야 기사들이 해주겠지.”

“그러게. 우리 백작가 자식들이었지?”

코델리아가 새삼 권력의 단맛을 느낄 때였다.

“아가씨! 도련님!”

“어디 계십니까! 도련님!”

“아가씨!”

멀리서 기사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지막지한 빛에 굉음까지 쾅쾅 터트려댔으니 눈치 채지 못 하는 것이 이상했다.

“아가씨! 어디 계세요! 코델리아 아가씨!”

“유더 도련님!”

달리아와 마이아의 목소리가 점점 다가왔고, 코델리아는 울상을 짓더니 유더를 돌아보며 말했다.

“우리······.”

“어, 우리.”

“많이 혼나겠지?”

“혼나겠지.”

안 혼날 리가.

단 둘이 몰래 빠져나가는데 그치지 않고 아예 물에 빠져서 난리까지 쳤으니.

“걱정하지 마, 코델리아.”

“응? 혹시 뭔가 혼나지 않을 묘안이라도 있어?”

“아니, 그냥······.”

“그냥?”

“포기하면 편해.”

유더가 상큼하게 웃었고, 코델리아는 가운데 손가락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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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더와 코델리아는 실제로 많이 혼났다.

일행의 여정을 책임지고 있는 체이스 백작가 출신의 기사 지벡 경은 바이엘 백작과 체이스 백작의 위임장을 내세우며 유더와 코델리아에게 ‘마차외출금지령’을 내렸다.

“그렇게 둘만의 시간이 필요하시다면 만들어드리겠습니다.”

무척이나 진지하게 말하는 지벡 경 앞에서 유더와 코델리아는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하지만 사실 그리 나쁜 일은 아니었다.

애당초 랑게스트로 가는 여정 사이에 굳이 밖으로 나가야 할 일은 이제 더 이상 없었으니까.

오히려 이렇게 둘만 마차에 있는 쪽이 앞으로의 계획을 의논하기에 좋았다.

‘달리아한테는 좀 미안하지만.’

호위무사의 본분을 잊고 또 두 사람을 위험에 노출시켰다며 지벡 경에게 크게 혼이 난 달리아는 아예 감봉조치까지 당했다.

코델리아가 열심히 변호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그나마 여론이 호의적인게 다행인가.’

여기서 여론이란 바이엘 백작가와 체이스 백작가의 기사들을 이야기했다.

사실 지난번 주간도주 이후로 유더와 코델리아가 서로를 얼마나 깊이 사모하는지야 소문이 다 났기 때문에 이번에 새삼 계곡가에 놀러간 일도 그렇게까지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기사들이 주목한 것은 유더와 코델리아가 함께 바이콘을 잡았다는 사실이었다.

“도련님, 정말 강해지셨군요.”

“크, 도련님께도 역시 백작님께 물려받으신 무재가 있었습니다.”

바이엘 백작가의 가신들인 기사들의 기억 속에서 유더는 항상 빌빌 거리며 바깥출입조차 자유롭게 못 하는 병자였으니까.

그랬던 유더가 이제는 제법 건강해졌을 뿐만 아니라 고블린도 아니고 바이콘을 때려잡았으니 감격하는 것이 당연했다.

특히 준의 경우에는 급히 백작가에 보낼 편지까지 쓸 정도로 기뻐했다.

체이스 백작가의 기사들은 약간 다른 의미로 기뻐했는데, 코델리아가 유더와 함께 바이콘을 쓰러트린 사실 보다는 ‘유더가 강해졌다’는 사실에 좀 더 집중했다.

코델리아는 체이스 백작가의 모든 이들이 사랑해 마지않는 집안의 꽃이요 막내였다.

그런 코델리아가 시집 갈 유더가 늘 빌빌 거리는 병자였으니, 대놓고 말하는 이는 없었지만 다들 우려와 걱정, 불만이 많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랬던 유더가 제법 믿음직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니 어찌 기쁘지 아니하겠는가.

지벡 경 역시 유더와 코델리아를 열심히 혼낸 뒤에는 곧장 체이스 백작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다.

“이제 좀 마음에 듭니다.”

짧고 굵은 평이었고, 실제 지벡 경의 마음이었다.

어찌되었든 어느 정도 정리가 되고 다시 한나절.

유더는 마차 안에서 시름시름 앓고 있었다.

“감기네.”

코델리아가 짧게 평한 것처럼 유더는 감기에 걸렸다.

가을밤에 계곡물에 빠져 허우적 거린 것도 문제였지만, 젖은 상태로 돌아다닌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으으······.”

마차 의자에 길게 누운 뒤 담요를 덮어 쓴 유더는 머리에 젖은 수건까지 올린 채 비몽사몽했고, 코델리아는 끌끌끌 혀를 찼다.

“난 안 걸렸는데.”

그래서 어쩌라는 걸까.

유더가 무어라 반격을 해야 하나 아픈 머리로 고민할 때였다.

“수건 갈아줄게.”

코델리아는 손수 유더의 수건을 갈아준 뒤 이마와 목처럼 보이는 부분의 땀을 닦아주었다.

“고··· 고마······.”

“그래, 그래.”

“내가··· 구음절···맥···만 나으면······.”

“응응, 안아도 주고 덮쳐도 주고 담벼락도 넘어주고 전열에도 서주고 병간호도 해주는 거지?

코델리아가 청산유수처럼 말하자 유더는 멍한 표정을 지었고, 코델리아는 이내 작게 웃었다.

“전부 기억하고 있으니까 각오하라고?”

아무래도 나름 유더에게 반격한 게 무척 기쁜 모양이었다.

“일단은 아무 생각 말고 잠이나 자.”

수건을 정리하고 다시 자리에 앉은 코델리아는 책을 펼쳤고, 유더는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다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늦은 오후.

겨우 눈을 뜬 유더는 맞은편에 앉아서 졸고 있는 코델리아를 흔들어 깨웠다.

“야, 야. 일어나봐. 침 좀 그만 흘리고.”

“으어?”

퍼뜩 고개를 든 코델리아가 질질 흘린 침을 닦으며 허우적거렸다.

‘예쁘긴 예쁘네.’

침 흘리고 허우적거리는 것도 예쁘니.

잠시 잡생각을 한 유더는 마차 창밖을 돌아본 뒤 말을 이었다.

“슬슬 일 이야기 좀 해보자.”

“어으, 우. 후··· 몸은 괜찮고?”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어 정신을 차린 코델리아가 수통의 뚜껑을 열며 물었다.

“어, 한숨 푹 자고 났더니 괜찮아진 것 같아. 이 녀석 효험도 있고.”

목에 건 태양의 목걸이를 슬쩍 들어 올리자 코델리아는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구음절맥2네 무슨.”

“응?”

“무안단물이라고.”

흰소리를 어느 정도 늘어놓고 나니 둘 모두 이야기할 정신이 되었다.

유더는 다시 자리에 앉은 뒤 자기 수통의 뚜껑을 열며 말했다.

“아마 이대로 가면 삼일 뒤에는 랑게스트에 도착할 거야.”

쉬엄쉬엄 간다고 해도 마차로 며칠이나 달려야 하는 거리였으니 둘 모두 고향인 바일룬에서 꽤나 멀리까지 나온 상황이었다.

코델리아는 손가락을 꼽으며 날짜를 헤아리더니 눈을 깜박이다 말했다.

“어··· 그럼 대충 이벤트 시작하기 사일 전인가?”

“아마도.”

현재 유더와 코델리아는 메인 시나리오 속 코델리아보다 하루 정도 앞선 일정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랑게스트에서의 이벤트.

크고 작은 것들을 모두 헤아리면 열 개도 넘었지만, 지금 코델리아가 말하는 이벤트는 하나밖에 없었다.

코델리아의 메인 시나리오의 첫 번째 메인 이벤트인 ‘악마의 손 습격 사건’.

원작에서의 전개는 이러했다.

상업도시 랑게스트에 북방 12가문의 미성년 자제들이 모인다.

애당초 유더가 불참할 예정이었던 것처럼, 12가문의 자제들 모두가 모이는 행사는 아니었다.

미성년 자제가 없다든가, 본가의 일이 바쁘다든가 하는 이유로 불참하는 가문이 꽤 되었다.

코델리아의 메인 시나리오 상 참여하는 가문의 숫자는 딱 절반인 여섯.

여기에 유더가 더해졌으니 이제 일곱 가문이 모이게 된 셈이었다.

“랑게스트는 12가문의 영지 중 어디에도 속해있지 않아.”

그리고 그렇기에 12가문 자제들의 친목회 장소로 선정이 된 것이었다.

북방 12가문이라 하여 모두 사이가 좋은 것은 아니었다.

결국 북부에서 가장 강한 12가문이란 것뿐이지, 서로 간에 대단한 유대나 결속이 있는 것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위치한 지역에 따라서는 경쟁자, 심하면 아예 적대 관계를 구축하고 있는 12가문도 있을 정도였다.

‘우리가 예외인 거지.’

12가문 간의 약혼이야 정략 결혼인만큼 흔했지만, 바이엘 백작가와 체이스 백작가처럼 정말로 사이가 좋은 가문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어찌되었든 너도 알겠지만 이번 이벤트는 처음부터 엄청 빡세. 애당초 당하는 스토리··· 그러니까 지라고 만든 시나리오니까.”

결론만 놓고 말하자면 악마의 손의 습격은 성공한다.

놈들은 북방 12가문의 자제들 가운데 몇을 죽이고 몇은 납치한 뒤 악마 소환의 제물로까지 써먹는 만행을 저지른다.

영웅전기2의 세계는 아마겟돈을 향해 나아가는, 한마디로 말해 막장을 향해 나아가는 세계였는데, 그 시발점 가운데 하나가 바로 악마의 손 습격 사건이었다.

유더가 말을 이어나가자 코델리아의 안색이 점점 어두워졌다.

“이거 진짜 막을 순 있는 거야?”

조금 이상한 이야기였지만, 코델리아는 코델리아를 좋아했다.

즉, 노란폭풍 시절 코델리아를 여러 번 플레이 했다는 이야기였다.

때문에 노란폭풍은 악마의 손 습격 사건의 혹독함을 알고 있었다. 당장 습격을 위해 동원되는 인원의 숫자만 해도 일백을 우습게 넘겼으니 말이다.

오늘을 위해 문라이트까지 챙기긴 했지만, 과연 유더와 자신의 힘만으로 이번 이벤트를 저지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냥 행사 자체를 취소시키는 게 낫지 않아?”

“어떻게?”

유더가 되묻자 코델리아는 입술을 벌렸지만, 이내 다시 다물고 말았다. 딱히 생각나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유더와 코델리아가 함께 악마의 손 습격 사건에 대해 이야기해봐야 믿어줄지 의문이었다.

그렇다고 다른 핑계를 대고 친목회 자체를 깽판 놓자니, 그것 역시 무리였다. 오히려 유더와 코델리아만 친목회에서 쫓겨나는 결과가 나올 가능성이 높았다.

악마의 손의 습격 사건이 있을 거란 명백한 물증이 없었으니까.

더욱이 어설프게 해산시켰다가는 오히려 일이 꼬일 가능성이 있었다.

악마의 손이 12가문의 자제들을 개별적으로 습격할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으으.”

코델리아가 머리를 싸매고 괴로워하자 유더는 끌끌끌 혀를 차더니 종이를 펼쳤다.

“내게 생각이 있어.”

“어떤 생각?”

“좋은 생각.”

“씨발?”

코델리아가 발끈하자 유더는 키득 웃더니 종이 위에 펜을 놀리며 말을 이었다.

“일단, 이렇게 해보자.”

유더 자신과 코델리아- 이 세계에서 오직 두 썩은 물만이 할 수 있는 방법.

유더가 설명을 시작했고, 집중해서 듣던 코델리아는 눈을 크게 떴다.

환한 미소를 머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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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4장 - 성곤 #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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