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엔딩메이커-25화 (25/473)

< 제5장 - 악마의 손 #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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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흘렀다.

깊은 잠에서 깨어나는 사람이 으레 그러하듯 유더는 비몽사몽간에 눈을 떴다.

뿌연 시야에 천장을 비롯해 많은 것들이 들어왔지만 모두 흐릿했고, 형태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 했다.

“어으.”

신음에 가까운 목소리를 흘린 유더는 눈을 꽉 감았다 떴고, 그제야 시야에 제대로 된 상들이 비치기 시작했다.

“하아.”

몇 초.

어쩌면 십여 초.

마침내 잠에서 온전히 깨어난 유더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잘 꾸며진 고급스러운 침실- 유더 자신이 묵고 있는 고급 숙소가 분명했다.

“도련님! 깨어나셨어요?!”

바로 그때 마이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불안과 기쁨이 뒤섞인 비명에 가까운 목소리였다.

“마이아.”

“도련님.”

본가에서는 얼음여왕이란 이명으로 불릴 정도로 냉랭한 표정을 곧잘 짓는 마이아였지만 유더 앞에서는 곧잘 미소를 짓고는 했다.

그런데 지금은 미소가 정도가 아니었다.

마이아는 지금 울면서 웃고 있었다.

“도련님.”

“괜찮아, 마이아. 마이아는 안 다쳤어?”

유더에게 가족이나 다름없는 마이아였지만, 바이엘 백작가 밖에서는 결국 전속 메이드에 불과했다.

억지로 연회에 참석시켜봐야 마이아만 불편할 뿐이었던 터라 유더는 그녀를 일찌감치 숙소로 돌려보냈었다.

물론, 이번 습격 사건을 예견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말이다.

“전 괜찮아요. 애당초 숙소에만 있었는 걸요. 그보다 도련님이··· 아······.”

마이아가 다시 왈칵 눈물을 쏟자 유더는 어쩔줄 모르겠는 얼굴로 안절부절못하다가 어설프게 손을 뻗어 마이아를 안아주었다.

“괜찮아. 이렇게 무사한 걸.”

“도련님.”

그리고 몇 분.

한창 격해있던 마이아가 슬슬 진정하는 것 같자 유더는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물었다.

“마이아, 코델리아 양은?”

“무사하세요.”

훌쩍이며 눈물을 닦은 마이아는 숨을 고르고 자세를 정돈하더니 옅은 미소를 그리며 말을 이었다.

“너무 무리하셔서 아직 누워계시긴 하지만 의식은 도련님보다 조금 일찍 돌아오셨어요. 의사들도 너무 지쳤을 뿐 건강에는 지장이 없을 거라 했고요.”

“하아.”

반사적으로 안도의 숨을 토한 유더는 어깨를 늘어트렸다.

이러나저러나 걱정했으니 말이다.

“도련님, 괜찮으시면 코델리아 아가씨를 보러 가실래요?”

마이아가 방긋 웃으며 말하자 유더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할게.”

“네, 도련님.”

마이아의 도움을 받아 일어난 유더는 대충이나마 씻고 몸단장을 한 뒤 방을 나섰다.

애당초 층 하나를 통으로 함께 쓰고 있었기 때문에 사이에 놓인 응접실만 지나면 코델리아의 침실이 나왔다.

“코델리아 아가씨, 유더 공자께서 오셨습니다.”

코델리아의 침실 앞을 지키고 있던 체이스 백작가의 기사가 무척이나 반가운 얼굴로 유더를 맞이하더니 곧장 방문 소식을 전했다.

그러자 오래 기다릴 것도 없이 코델리아의 침실 문이 활짝 열렸다.

“유더 공자님.”

마이아처럼 얼굴에 운 자국이 선명한 달리아가 웃는 얼굴로 유더를 맞이했다.

그리고 방안에는 레슬링을 해도 좋을 정도로 커다란 침대에 파묻히듯 누워있는 코델리아가 있었다.

“코델리아 양.”

유더의 부름에 코델리아는 대답하는 대신 그저 고개만 한 번 끄덕였다.

상태만 보면 유더보다 훨씬 안 좋아보였는데, 그렇지 않아도 하얀 얼굴이 혈색 하나 없어 창백한데다가 눈에 힘이 하나도 없는 것이, 금방이라도 쓰러져 잠들 것 같았다.

“달리아, 미안하지만 잠시만 단 둘이 있어도 될까요?”

“네, 공자님. 아가씨를 부탁드려요.”

흔쾌히 수락한 달리아는 코델리아에게 눈인사를 보낸 뒤 마이아와 함께 방을 나섰다.

그리고 몇 초.

방문이 완전히 닫히자 코델리아가 말했다.

“뒤질 것 같아.”

“그래, 나도.”

비틀비틀 힘없는 걸음으로 침대 맡까지 다가간 유더는 달리아가 앉아있던 것으로 추정되는 의자 위에 털썩하고 앉았다.

“상태가 많이 안 좋네?”

“마력을··· 너무 썼어. 머리 막 무겁고 깨질 것 같아.”

“어··· 숙취랑 비슷한 감각인가?”

“숙취?”

“어, 숙취.”

“어··· 아, 아마도?”

어쩐지 모르게 어색하게 답한 코델리아는 다시 어깨를 축 늘어트리며 말했다.

“아무튼 아파, 힘들어, 뒤질 것 같아.”

“음, 진짜 상태가 안 좋아 보이네.”

아웃복서 앞에서는 대놓고 우는 소리를 하는 노란폭풍이 아니었으니까.

“야, 그래도 기분 좋지 않아? 레벨도 잔뜩 오른데다가··· 너도 타이틀 뜬 거 봤지?”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자?”

방금까지도 힘들어 죽겠다며 축축 쳐져있던 코델리아의 얼굴에 꽃처럼 미소가 피어났다.

정말로 좋은지 헤헤헤 바보처럼 웃기까지 한 그녀였다.

“영웅전기담 완전 뒤집어질 텐데.”

“채팅창 놈들도 난리나겠지.”

“막 히어로 소프트에서 연락오고 그럴까?”

“아마도?”

있을 수 없지만, 그렇기에 즐거운 이야기.

코델리아는 새삼 숨을 길게 토한 뒤 말했다.

“달리아가 말해줬는데, 비올라랑 펠릭스도 무사하대. 쌍둥이 형제도 그렇고.”

본래라면 악마의 손 습격에서 죽거나 납치되었을 이들.

그들이 죽지 않았다.

납치되지도 않았고, 멀쩡히 잘 살아있었다.

“괜히 신난다.”

타이틀도 좋았고 메인 시나리오를 뜻대로 비틀었다는 성취감도 좋았지만, 어쩐지 12가문의 자제들을 비롯한 많은 이들을 구했다는 사실이 더 기쁜 코델리아였다.

“아이고 우리 노폭이 착한 거 봐. 기특해서 어째.”

유더가 흐뭇하게 웃으며 코델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자 그녀의 눈이 바로 가늘게 변했다.

“뒤진다? 어딜 쓰다듬고 지랄이야.”

“이래야 우리 노란폭풍이지.”

만족스럽게 웃은 유더는 의자 등받이에 등을 묻으며 말했다.

“아무튼 한 고비 넘겼네.”

“그럼 이제 어떡하지?”

“어떡하긴, 메인 시나리오를 비틀었지만 그래도 메인 시나리오를 따라가야지.”

코델리아의 메인 시나리오.

악마의 손 습격 이벤트에서 코델리아는 무슨 짓을 해도 일단은 납치될 운명이었다.

납치된 상황에서 탈출하는 것이 두 번째 미션이랄까?

탈출에 성공하면 생존 루트가 열리고, 실패하면 제물이 되어 게임 오버가 되는 형태였는데, 생존 루트는 다음과 같았다.

“어딘지 모를 악마의 손 지부에서 탈출한 코델리아는 추적자들과 몬스터들을 피해 깊고 어두운 숲을 헤매고··· 운명에 이끌리듯 마녀의 영혼을 만나게 된다.”

유더가 영웅전기담에 올라와 있는 스토리 요약문을 그대로 외우자 코델리아는 헛웃음을 지었다.

‘진짜 뭐하던 애··· 아니, 사람이지?’

사람이 어떻게 저 많은 것들을 다 기억하고 있는 걸까.

썩은물이고 나발이고 유더의 기억력은 상식적인 수준을 아득히 벗어나 있었다.

‘물어볼까?’

물어보면 의외로 순순히 답해줄지도.

코델리아가 잠시 고민할 즈음, 유더는 그런 그녀의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말을 계속해서 이었다.

“악마의 손에 납치되는 일 자체를 저지했으니 코델리아가 숲을 헤맬 일은 없지만··· 그래도 가긴 가야지. 마녀의 영혼을 만나야하니까.”

마녀의 영혼과의 만남은 문라이트 획득 이벤트처럼 숨겨진 이벤트 같은 것이 아니었다. 게임을 계속 진행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메인이벤트 가운데 하나였다.

‘스펙 업을 해야 하니까.’

이러나저러나 영웅전기2는 결국 싸우는 게임.

사냥과 별개로 메인 이벤트를 착실히 따라가면 절로 강해지게 되어 있었다.

“어··· 그 숲이 아마 랑게스트에서 북쪽에 있었지?”

“어, 그러니 우린 북쪽으로 가야 해.”

비단 코델리아 때문만이 아니었다.

아직 시작되지 않은 유더의 메인 시나리오는 북방 쪽에 몰려 있었다.

“으음, 어쩌지.”

“왜?”

“아니, 아까 달리아가 말해준게 있는데, 일단 우리가 정신 차린 게 근 하루 만이거든? 아직 각자 집에 소식이 다 전파되지는 않았지만 호위기사들끼리 방침을 정했나봐.”

“어떤 방침인데?”

“추가적인 습격이 있을 수 있으니 각각 본가에서 데리러 올 사람이 오기 전까지는 랑게스트에서 한 데 모여 대기한다. 더불어 이따 저녁에 다 같이 모여서 이번 사건에 대한 정보를 교환한다는 모양이야.”

“흠.”

악마의 손 습격 사건 자체는 막았으니, 이제 남은 문제는 각종 준비나 어제 있었던 싸움에 대한 해명이었다.

‘청사자 건도 있고.’

유더가 청사자 단장 바루아 경을 움직이기 위해 한 거짓말- 바이엘 백작의 개입에 관한 부분 역시 수습할 방도가 필요했다.

일이 이 정도로 커졌으니 바이엘 백작의 귀에도 악마의 손 습격 사건과 그 전에 있었던 청사자 기사단의 지부 기습 작전에 대한 이야기가 들어갈 터이니 말이다.

“아무튼 진짜 어쩌지? 집에 돌아가지 않고 북부로 가려면 뭔가 핑계가 필요하지 않을까?”

뒷수습과 별개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방책 역시 필요한 상황이었다.

코델리아의 물음에 유더는  팔짱을 끼며 답했다.

“일단, 생각해 둔 방법들이 있긴 해.”

“어떤?”

“일단 너랑 내가 입을 맞춰야··· 야, 그런 의미 아니거든? 아무튼 주변에서도 좀 도와줘야겠지만.”

“주변이라면 누구?”

“그야 루카··· 잠깐.”

돌연 말을 멈춘 유더는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기울였다.

무언가 중요한 일 하나를 완전히 잊고 있는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뭐지?’

마인 미노스를 잡았다.

납치 사건은 불발로 끝났고, 유더 자신과 코델리아는 무사하다.

‘루카스 녀석도 당연히 무사할 테고.’

코델리아 말에 따르면 비올라와 펠릭스, 쌍둥이 형제 역시 무사한 모양이다.

그럼······.

“아!”

유더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고, 그 순간 코델리아 역시 눈을 크게 떴다.

두 사람이 동시에 같은 것을, 똑같은 사람을 기억해냈기 때문이다.

““실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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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아앙! 어뜨케, 어뜨케 날 이저··· 이저머거··· 으앙······.”

이제는 사건 현장이 된 연회장 구석의 비밀방.

만 하루 동안 구덩이 안에 갇혀 있던 실비아가 코델리아 품에 안겨 서러운 울음을 터트렸다.

“언니, 미안해요. 진짜진짜 미안해요.”

아직 얼굴에 병색이 완연한 코델리아였지만 실비아를 마주 안고 연신 사과를 거듭했다.

“무서워써··· 캄캄하고··· 아무 소리도 안 나고··· 킁!”

유더가 타이밍 좋게 내민 손수건으로 코까지 푼 실비아가 연신 훌쩍였다.

도도하고 아름다운 절세미녀가 아이처럼 서럽게 울며 속내를 다 드러내는 것을 보니, 지난 하루 동안 정말 무서웠던 모양이다.

‘일처리를 너무 잘했네.’

비밀방 안의 구덩이는 만약을 위한 패닉룸으로 쓰기 위해 이래저래 공을 들였다.

혹여나 소리 때문에 들킬까봐 구덩이 안쪽에 사일런스 마법진까지 그려놨는데, 덕분에 실비아는 빛 하나 없는 완벽한 침묵 속에서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르고 벌벌 떨어야만 했다.

“언니, 언니 미안해요.”

노란폭풍이기 이전에 코델리아였으니까.

아름답고 우아한 실비아를 평소 흠모하고 있던 코델리아였던 터라 진심으로 미안해하고 있었다.

‘루카스 이 자식은 대체 뭘 한 거야?!’

코델리아 자신과 유더는 졸도한 상황이었으니까.

애당초 코델리아 자신이 졸도하기 직전에 뒷일을 부탁한다고도 하지 않았던가.

‘나중에 뒤졌어!’

코델리아가 결연히 다짐하는 그때, 유더는 코델리아의 옷자락을 살짝 잡아당겨 실비아와 거리를 벌리게 했다.

크로스벨 백작가의 기사들에게 실비아를 맡겨야 했으니 말이다.

“아가씨, 가시죠.”

“흐윽, 네에.”

무척이나 순종적이 된 실비아는 기사들과 함께 방을 나섰고, 유더와 코델리아가 반사적으로 한숨을 토하자 달리아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죄송해요. 두 분 모두 안정이 필요하신 상태 같아서 실비아 아가씨의 실종 소식은 전하지 못 했어요.”

“아냐, 괜찮아. 달리아 잘못이 아닌걸. 전부 루카스 탓이지.”

이까지 으득 간 코델리아는 다시 전의를 불태우듯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하지만 유더는 그런 코델리아에게 동참할 수 없었다.

‘적당히 말려야겠군.’

북부로 가기 위해서는 루카스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했으니까.

유더가 세운 계획은 다음과 같았다.

루카스의 본가인 흐레스벨그 백작가는 변경백 가문답게 과거 바이엘 백작가가 머물렀던 북방 최전선- 야만의 땅과 경계를 맞대고 있는 썬더둠 요새 인근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엔 극양의 기운을 품고 있는 태양화초가 있지.’

구음절맥을 낫게 할 여러 수단 가운데 하나였다.

이미 태양의 목걸이를 얻어 구음절맥을 치료 중인 유더였지만, 완치된 상태는 아니었다.

‘태양화초를 얻어 구음절맥 치료를 앞당긴다는 핑계로 북부로 향한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루카스에게 태양화초에 대한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전달함과 동시에 북부로 초대한다는 이야기를 이끌어내야만 했다.

“잠깐, 야, 잠깐.”

숙소에 돌아와 유더의 설명을 듣던 코델리아는 미간을 좁혔다.

루카스에게서 원하는 이야기를 끌어내야 한다는 미션이나, 나날이 만능의 무언가로 진화 중인 구음절맥은 둘째 치고, 유더의 이야기에는 지금 중요한 부분 하나가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 나는?”

유더야 병 치료한다고 북부에 간다 치고, 코델리아는 무슨 핑계로 북부에 간단 말인가.

코델리아의 물음에 유더는 한 차례 헛기침을 하더니 시선을 피하듯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야.”

“그야?”

“에이, 알면서.”

코델리아가 유더를 따라갈 방안.

순간 울상이 된 코델리아는 한숨을 길게 내쉬더니 유더에게 가운데 손가락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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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유더 공자님과 함께 가고 싶어! 떠, 떨어질 수 없어!”

< 제5장 - 악마의 손 #6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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