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엔딩메이커-35화 (35/473)

< 제7장 - 만월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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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전기 시리즈는 매 편마다 스케일을 키워나가는 구성이었다.

1편의 플레이어블 캐릭터는 총 다섯.

이야기의 무대도 세일룬 왕국과 아르곤 제국 사이에 놓인 작은 소국에 한정되었다.

‘악마 추종자들에게 세뇌된 파라곤 왕국의 왕비는 왕자를 제물로 바쳐 악마를 소환하게 되는데······.’

소환된 악마- 데몬프린스 바이카젤은 국왕을 살해하고 왕궁 전체를 악마의 소굴로 만들어버린다.

영웅전기1편은 다섯 주인공 중 하나가 되어 파라곤 왕국을 점령한 바이카젤을 쓰러트리는 이야기였다.

“2편은 세일룬 왕국과 아르곤 제국에서 일어나는 이야기고······.”

“3편은 아마겟돈으로 인해 황폐화된 세계에서 악마들과 천사들 모두와 결판을 짓는 이야기지.”

덜컹 거리는 마차 안.

노던 자작령으로 향하는 이두 마차 안에는 임시로 만들어진 침상 위에 유더와 코델리아가 나란히 누워 있었다.

물론 한 침대에 누운 것은 아니었고, 둘 사이에는 낮게나마 칸막이가 존재하고 있었다.

마녀의 숲에서 무리를 한 두 사람을 위해 루카스가 급히 준비한 마차였다.

“적염의 란디우스.”

“1편의 다섯 주인공들 가운데 하나. 검귀 카마엘과 함께 사실상의 진주인공이라 불리는 인물. 압도적인 피지컬로 적을 분쇄하는 태양의 전사. 파라곤 왕국 기사단장의 아들로, 바이카젤을 쓰러트린 후에는 모든 일의 원흉이 된 악마 추종자들을 찾아 대륙을 떠돌고 있다.”

“잘했어, 유더위키.”

코델리아가 짝짝짝 박수까지 치자 어쩐지 모르게 머쓱해진 유더가 마저 말을 이었다.

“일단 원작에서는 누구로 플레이하냐에 따라 바이카젤을 쓰러트린 영웅이 달라지지만··· 정사대로면 바이카젤을 쓰러트린 건 란디우스와 카마엘이야.”

“카마엘 검색, 엔터.”

코델리아는 허공에 타이핑 하는 시늉을 하며 말했고, 유더는 눈을 가늘게 떴지만 이내 다시 입을 열어 말했다.

“검귀 카마엘. 바이카젤에게 살해당한 파라곤 국왕의 사생아. 1편의 진주인공이자, 2편에서도 생존해서 활동하는 유일한 1편의 인물.”

이미 강해진 1편의 주인공들이 2편에서 활약하면 새로운 주인공들이 나서기 어렵기 때문인지 1편의 다섯 주인공들은 2편에 와서 대부분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어··· 란디우스는 마인에게 살해당하지?”

“어, 실제로 이벤트가 등장하진 않고 설정 상으로만 존재하는 이야기지만··· 악마의 손의 최고간부인 마인 듀크에게 살해당해.”

사실 이것도 완벽하게 전후 사정이 밝혀진 것은 아니었다.

마인 듀크가 란디우스의 검인 ‘솔라 블레이드’를 들고 다니기 때문에 유저들이 추측한 사항이었다.

“어찌되었든 아직 안 죽었다 이거네?”

“그래, 중요한 건 바로 그거지.”

란디우스가 아직 죽지 않았다.

사실 원작대로라면 유더든 코델리아든 란디우스를 만날 일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두 사람이 악마의 손의 납치 음모를 분쇄함에 따라 지금과 같은 상황이 만들어졌다.

루카스는 납치되지 않았고, 흐레스벨그 백작가는 루카스를 데려가기 위해 자신들과 연이 있는 란디우스에게 부탁을 하였다.

그리하여 본래는 만날 수 없는 1편과 2편 주인공들의 만남이 성사되려 하고 있었다.

“우리가··· 구할 수 있을까?”

상체를 일으켜 유더 쪽을 돌아본 코델리아가 기대에 찬 눈으로 물었다.

란디우스를 구한다.

1편의 주인공들 가운데서 피지컬 하나만큼은 최강인 그의 죽음을 막아 2편에서도 활약하게 만든다.

“구할 수 있어. 아니, 구해야만 해.”

유더와 코델리아의 목표는 궁극의 해피엔딩을 만들어내는 것이었으니까.

란디우스 정도의 강자는 살아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악마 추종자들에게 있어 재앙이 될 수 있었다.

그러니 살려야 했다.

이번 만남으로 어떻게든 란디우스 생존 루트를 만들어내야만 했다.

“신난다.”

작게 말한 코델리아는 다시 털썩 자리에 눕더니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란디우스 살리고 싶었는데.”

“좋아하나봐?”

“응, 1편 주인공들 중에서 두 번째로 좋아해.”

“제일 좋아하는 건? 레나?”

“응, 레나.”

1편의 다섯 주인공들 가운데 홍일점인 마법사 아가씨.

파라곤 왕국 왕실마법사의 제자인 그녀 역시 2편에서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레나도 살릴 수 있을까?”

“살려야지. 레나는 비교적 언제 어디서 죽는지도 명확한 인물이니까.”

아직 코델리아에게 구체적으로 이야기한 적이 없어서 그렇지 애당초 유더의 머릿속에는 레나를 구하는 시나리오가 대충이나마 짜여있는 상태였다.

‘북쪽에서는 해야 할 일이 정말 많으니까.’

구음절맥 완치를 위한 태양화초 이벤트.

유더의 메인 시나리오인 ‘북방 야만족의 대공습’의 완벽한 저지.

1편의 주인공들 중 하나인 레나의 구출.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란디우스의 구명’이라는 임무가 추가되었다.

“란디우스는 강하니까, 듀크 놈 약점만 알려줘도 생존확률이 확 올라갈 거야.”

“그럴 가능성이 높겠지.”

고개를 끄덕이며 답한 유더는 그대로 말없이 코델리아를 바라보았고, 코델리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아니, 루카스 만날 때랑은 온도차가 큰 거 같아서.”

“그야 란디우스는 멋있으니까.”

“루카스는 멋없고?”

“음··· 걔는 뭐랄까, 귀여운 쪽이지?”

“그래도 이젠 싫지는 않나보네.”

“귀여우니까.”

강아지 같다고 해야 할까.

코델리아의 평가에 유더는 쓰게 웃고는 다시 시선을 천장으로 돌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코델리아가 다시 상체를 일으켜 세우더니 유더 쪽으로 머리를 기울이며 입을 열었다.

“저기, 그런데 유더.”

“왜?”

“나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

코델리아가 살짝이지만 아양까지 섞자 흠칫한 유더는 저도 모르게 몸을 빼며 물었다.

“뭔데, 뭘 물어보려고 그러는 건데?”

“아니, 뭐··· 대단한 건 아니고······.”

말꼬리는 조금 흐린 코델리아는 칸막이에 몸을 기대며 말을 이었다.

“저기, 너 말이야.”

“어, 내가, 뭐.”

“그러니까··· 어··· 음··· 에잇! 야, 너 뭐하던 사람이야?”

“어?”

“뭐하던 사람이냐고. 아웃복서 직업 말이야, 직업. 설마 진짜 복서는 아니었을 거 아냐.”

이래저래 어찌 말해야 하나 고민하던 코델리아가 더는 모르겠다는 듯 아예 지르듯 물었다.

“갑자기 내 직업은 왜?”

“그야 이상하잖아. 아니, 궁금하잖아.”

상체를 벌떡 일으켜 세운 코델리아는 손가락을 꼽아가며 말을 이었다.

“일단 기억력이 말도 안 되게 좋고.”

“네가 나쁜 게 아니라?”

“야, 지나가는 사람 백 명을 붙잡고 물어봐라. 내가 정상인지 네가 정상인지.”

흥하고 코웃음을 코델리아는 마저 손가락을 꼽았다.

“걷다 말고 흙이 바뀌었다고 하는데, 편집증도 정도껏이지 숲 들어갈 때 흙 확인하고, 걷다말고 흙 성분 바뀐 걸 알아채는 사람이 어디 있어.”

“여기 있지.”

“자꾸 말 끊을래?”

“그래, 그래. 아무튼 그리고 또 뭐?”

“사기 치면 된다는 발칙한 발상에, 엄청난 위조 솜씨, 입술에 침하나 바르지 않고 늘어놓는 능숙한 거짓말까지. 어떻게 봐도 정상이 아냐.”

스스로의 말에 도취라도 되듯 고개까지 끄덕인 코델리아는 다시 유더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어차피 전생이잖아. 그러니 괜찮아. 다 이해할게. 너 사기꾼 맞지? 응?”

“아니거든? 세금 잘 내는, 심지어 지방세에 국민연금에 건보료 까지도 꼬박꼬박 잘 내는 모범시민이었거든?”

“지방세? 건보료?”

“왜? 넌 안 냈어? 너야말로······.”

“아, 아니거든? 나도 알거든? 아니, 나도 냈거든?”

허둥거리며 답한 코델리아는 주먹을 불끈 쥐더니 칸막이를 탕 두드리며 말했다.

“아무튼! 사기꾼이 아니었으면 뭐였는데? 응? 알려줘. 응?”

“이게 어디서 아양이야.”

“아잉.”

“아우, 씨발.”

저도 모르게 욕지거리를 토한 유더는 흠칫하며 물러섰고, 코델리아는 그런 유더에게 얼굴을 가까이했다.

그리고 유더는 저도 모르게 식은땀을 흘렸다.

코델리아는 절세미소녀였으니까.

그녀의 아양은 상상 이상의 파괴력을 갖고 있었다.

“후우, 어쩔 수 없지.”

“와! 알려주는 거야?”

“나는······.”

“너는?”

“I used to be a spy. Until....”

갑작스러운 영어에 눈을 동그랗게 뜬 코델리아였지만 이내 깜짝 놀라 되물었다.

“스파이? 첩보원?!”

유더는 대답하지 않고 코델리아를 가만히 보았고, 코델리아는 아! 하는 탄성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성이··· 있어!’

예전에 본 스파이 드라마 주인공도 그랬다.

위장 신분을 유지하기 위한 뛰어난 연기력.

각종 서류를 위조하기 위해 갈고 닦은 위조 실력.

뛰어난 암기력과 집중력, 관찰력 등등.

“오오, 오오오.”

스스로 납득한 코델리아가 눈을 빛내자 유더는 픽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스파이는 무슨. 야, 아니야. 아니니까 이상한 망상 하지 마.”

“씨발! 그럼 진짜 뭐였는데?”

“그러는 넌 뭐였는데?”

“응?”

“너. 너는 뭐였냐고. 기브 앤 테이크 아냐? 일단 너부터 알려주면 나도 알려줄게.”

“치사해.”

“야, 그냥 나만 알려달라고 하는 게 치사한 거 아냐?”

“칫.”

논리만 따지면 유더의 말이 맞았지만, 그렇다고 자신에 대해 털어놓기는 싫은 코델리아였다.

‘오빠라 불러야 할지도 모르잖아!’

유더의 직업이 뭔지는 몰라도, 일단 연상 같기는 했으니까.

지금이야 서로 모르니, 더욱이 환생해서 동갑까지 되었으니 그냥 넘어가지만 일단 입 밖에 내어서 명시화되면 기분이 묘해질 터였다.

입술을 삐쭉인 코델리아는 다시 자리에 누우며 말했다.

“저기 있잖아, 그러면 딱 하나만 알려주면 안 돼?”

“직업 하나만 알려달라는 거면 안 돼.”

“그거 말고. 너 기억력.”

“내 기억력?”

“응, 네 기억력. 그거 진짜 말도 안 되잖아. 그거만 가르쳐줘. 어떻게 된 거야?”

코델리아가 칸막이 위로 다시 슬쩍 얼굴을 내밀며 묻자 유더는 미간을 살짝 좁히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건 가르쳐줄게.”

“오, 역시 뭔가 비밀이 있었네?”

코델리아가 신난다는 듯 칸막이 위로 다시 몸을 내밀었다.

유더는 자기 머리 위로 쏟아지는 코델리아의 머리칼에 어푸푸 거리다 옆으로 몸을 빼며 말했다.

“두 가지가 있어.”

“어떤?”

“일단, 난 머리가 좋아.”

“씨발.”

그게 무슨 비밀이라고.

반사적으로 욕지거리를- 아니, 감탄사를 토한 코델리아였지만 부정은 하지 않았다.

유더 머리가 좋다는 건 아웃복서 시절에도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니 말이다.

“그리고··· 너 기억의 궁전이라고 알아?”

“기억의 궁전? 어··· 아! 나 그거 알아. 셜록이 쓰는 거지?”

“맞아, 고대 그리스 시절부터 전해져온 기억법이지.”

기억의 궁전.

머릿속에 구상한 가상의 공간에 기억들을 차곡차곡 보관해둔 뒤 필요할 때마다 해당 장소로 이동해 기억을 살펴보는 기억법으로, 기록 수단이 변변찮던 고대에 개발된 방법이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은 기억의 궁전을 통해 연설문이나 책의 내용을 통으로 암기했다고 하는데, 얼핏 듣기만 하면 마치 초능력처럼 보이는 능력이었지만  일반인들도 훈련을 통해 얼마든지 습득할 수 있는 기술이었다.

“물론 개인차가 있고, 내가 좀 많이 특별한 경우에 속하지만, 일단 기억의 궁전을 사용하고는 있어.”

“와··· 그럼 너도 막 셜록에 나온 것처럼 도서관 같은 거 머릿속에 넣고 있는 거야?”

“비슷해. 내껀 좀 더 고풍스러운 느낌이지만.”

“신기하다.”

코델리아가 순수한 감탄을 담아 유더를 보았고, 어째 머쓱해진 유더는 헛기침을 토했다.

“너도 가르쳐줄까?”

“진짜? 나도 할 수 있어?”

“반복학습이 필요하긴 하지만. 그리고 코델리아는 머리도 좋을 거 아냐.”

“그야 물론이··· 야, 노란폭풍도 머리 좋거든?”

“그랬겠지.”

유더가 작게 웃은 그때였다.

“꺅?!”

순간 마차가 크게 덜컹거렸고, 칸막이 너머로 몸을 내밀고 있던 코델리아가 중심을 잃고 유더 쪽으로 넘어지고 말았다.

“컥. 야, 괜찮아?”

“어, 응.”

졸지에 유더 가슴에 머리를 박게 된 코델리아가 끙끙 거리며 답할 때였다.

“두 분 모두 괜찮··· 음, 괜찮으시군요. 좋은 시간 보내시길.”

급히 마차 문을 열었던 루카스가 빨개진 얼굴로 물러났고, 유더와 코델리아는 성질을 내는 대신 한숨을 토했다.

“뭐랄까, 소설이든 만화든 꼭 이런 장면이 나오더라?”

“그러게.”

둘은 다시 각자의 침상에 자리를 잡고 누웠고, 마차는 계속 덜컹거렸다.

그렇게 한 시간 남짓.

마차가 노던 자작가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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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7장 - 만월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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