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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딩메이커-38화 (38/473)

< 제8장 - 구천구문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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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정······ 드······아?”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뭉개져서 제대로 들을 수 없었다.

아마도 란디우스의 목소리.

흐릿한 시야에 점점 상이 잡히기 시작했고, 그 순간 머릿속에 또렷이 들리는 목소리가 있었다.

“유더? 괜찮아? 응?”

“코델리아.”

저도 모르게 말한 순간 시야가 말끔해졌다.

바로 코앞에 위치한 코델리아의 하얗고 예쁜 얼굴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이쪽을 내려다보는 란디우스의 얼굴이 동시에 보였다.

“정신이 들어? 이거 몇 개인지 알겠어?”

유더가 불쑥 말하자 숨간 흠칫한 코델이라였지만 이내 반가운 얼굴로 손가락을 흔들어댔다.

“2. 너답네.”

“뭐야?”

코델리아가 으르렁 거렸지만 눈을 보니 웃고 있었다.

유더 자신이 깨어난 것이 무척 기쁜 모양이었다.

‘오래 걸렸나?’

구천구문의 구결을 외우기 시작한 이후에는 시간의 흐름을 제대로 느끼지 못 했으니까.

그래도 코델리아의 반응을 보니 적잖은 시간이 흘렀을 것 같았다.

“소녀와 꽁냥거리는 것을 보니 멀쩡하구나.”

끌끌끌 웃음을 흘린 란디우스가 다가서자 코델리아가 슬쩍 옆으로 비켜섰다.

다시 란디우스가 말했다.

“보아하니 제대로 인지하지 못 하는 것 같다만, 네가 구결을 암기하기 시작한 지 만 하루가 지났다.”

“하루요?”

“그래, 하루. 눈 감았을 때도 밤이었는데 지금도 밤이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인 유더는 스스로를 돌아보았다.

새삼 자각했기 때문인지 온 몸에 힘이 없고 배가 고팠다.

“소녀가 온 것도 그래서다. 목숨보다 사랑하는 약혼자가 하루 내내 깨어나지 않으니 가슴앓이를 한 것이··· 왜, 아니냐? 루카스가 그러던데.”

“아뇨, 맞습니다. 맞아요.”

“어··· 네! 사랑하는 유더 공자가 하루 내내 눈을 안 뜨니 걱정이 되어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어요. 네, 맞아요.”

란디우스가 눈을 가늘게 뜨며 묻자 유더와 코델리아가 각기 얼른 답했는데, 코델리아의 답변이 문제였다. 언제나처럼 국어책 읽기였으니 말이다.

“흠, 뭐. 아무튼.”

다행히 호방한 란디우스는 사소한 일 따위 신경 쓰지 않았다.

더욱이 어찌되었든 코델리아가 유더를 걱정해 여기 있는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었으니 말이다.

“제자야, 나의 눈이 정확하다면··· 네가 일문을 연 것 같구나. 맞더냐?”

“예, 그런 것 같습니다.”

유더가 조심스럽게 답하며 하단전이 있는 아랫배에 손을 올려보았다.

일문이 설치된 장소.

코델리아는 그냥 그렇구나-하는 얼굴로 유더의 아랫배를 바라보았지만 란디우스는 조금 달랐다.

헛웃음을 짓는가 싶더니 이내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과연, 과연. 이것이 천무지체라는 것인가.”

“스승님?”

“빠르구나. 내가 일문을 여는데 걸린 시간은 한 달이 족히 넘거늘.”

그런데 유더는 단 하루 만에 일문을 열었다.

“역시··· 선인仙人의 신공은 천무지체를 위한 것이었나······.”

란디우스가 낮게 흘린 말에 유더와 코델리아 모두가 집중했다.

선인의 신공.

영웅전기1과 2 모두에서 찾아볼 수 없는 단어였기 때문이다.

“스승님, 선인이라 하심은······.”

“그래, 네겐 자격이 있으니까. 하나······.”

말끝을 흐린 란디우스의 시선이 코델리아에게 향했고, 코델리아는 움찔하다가 슬쩍 자리에서 일어섰다.

혹여 자신 때문에 이야기를 꺼리는 것이라면 자리를 피해줄 요량이었다.

‘어차피 나중에 유더가 말해줄 테고.’

하지만 그 순간 유더가 코델리아의 손을 붙잡았다.

‘왜?’

코델리아가 눈빛으로 물었지만 유더는 답하는 대신 란디우스를 보며 말했다.

“스승님, 코델리아 양과 저는 한 몸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제 몸에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코델리아 양도 알 권리가 있습니다. 함께 듣게 해주십시오.”

“흠, 하긴. 제자와 소녀는 약혼한 관계이니 한 몸이나 다름 없겠지.”

‘아니거든요? 저랑 유더는 두 몸이거든요?’

마지막 속마음은 코델리아의 것이었지만, 눈빛만 보고 그녀의 속내를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유더뿐이었다.

“좋다. 소녀에게도 이야기를 해주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어··· 감사합니다.”

얼결에 따라 인사를 한 코델리아는 일단 유더의 옆에 얌전히 자리를 잡고 앉았고, 란디우스 역시 두 사람 앞에 털썩하고 앉은 뒤 이야기를 시작했다.

“제자야, 그리고 소녀여. 혹여 지옥의 대군주들에 대해 알고 있느냐?”

“어··· 네. 지옥의 다섯 대군주들 말씀이시죠?”

코델리아가 답하자 란디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다섯 대군주. 음욕의 아스모데우스, 타락의 벨리알, 잔학의 벨페고르, 폭력의 베헤모스, 애증의 릴리스. 하지만 사실 지옥의 대군주들은 본래 다섯이 아닌 일곱이었다.”

유더와 코델리아도 대강은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영웅전기의 설정상 이야기였는데, 본래 일곱이던 대군주들 가운데 둘이 사라져 다섯만이 남았다는 이야기였다.

“오랜 옛날- 고대라 불러야 할 시대에 일곱 대군주 가운데 둘이 인간계에 강림하였다. 강대한 두 악마에 의해 수많은 인간의 나라들이 무너졌고, 몇몇 종족은 영원한 종말을 맞이하였다.”

현존하는 드워프들의 조상이자, 상위종이라 불리는 하이 드워프들은 사실상 멸종하였고, 엘프들은 대륙에서 가장 융성했던 대제국을 잃고 말았다.

“대륙에 살고 있는 모든 종족이 힘을 모아 악마에 맞섰고··· 무수한 희생 끝에 결국 승리할 수 있었다.”

여기까지는 제법 널리 알려진 이야기였다.

일반인들이야 잘 몰랐지만, 어느 정도 학식이 있는 마법사나 학자, 성직자들이라면 다들 알고 있는 이야기였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대체 누구였을까. 누가 초월적인 힘을 가진 대군주들을 쓰러트린 것일까.”

란디우스의 시선이 하늘로 향했다.

그는 유더와 코델리아가 아닌, 스스로에게 들려주듯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나는 그것이 궁금했다. 누가, 어떻게 대군주를 쓰러트렸는지 알 수 있으면 앞으로 있을 악마들과의 싸움에도 큰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성십자수호단에 들어간 검귀 카마엘과 달리 란디우스는 홀로 대륙 곳곳을 떠돌았다.

“오랜 수탐 끝에 나는 성십자수호단의 기원이 되는 고대의 유적에서 한 가지 기록을 찾을 수 있었다. 대군주들을 쓰러트린 영웅들에 대한 기록이었지.”

유더와 코델리아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마른침을 삼켰다.

두 사람 모두 처음 듣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악마도 천사도 아니지만 신과 같은 힘을 가졌던 일곱 영웅들. 정말로 화려한 구성이었다. 드워프 최강의 전사와 엘프 여왕, 태양신 솔라리의 챔피언과 대륙 최고의 암살자 등등 하나하나가 대영웅이란 칭호에 부족함이 없는 이들이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서 유독 란디우스의 관심을 끄는 존재가 하나 있었다.

“선인. 이름과 나이는 물론이고 성별조차 알 수 없는 그를 고대 수호단은 선인이라 불렀다. 그리고 그는 특별한 무공을 사용하였지.”

“그게······.”

“그렇다, 바로 구천구문이다.”

란디우스의 시선이 다시 유더와 코델리아에게 향했다.

“오직 구결만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구결 또한 완벽하지 않았지. 하지만 나는 구천구문을 포기할 수 없었다.”

불완전한 구결을 손에 넣은 란디우스는 홀로 고민하지 않았다. 검귀 카마엘을 비롯한 옛 전우들- 함께 데몬프린스 바이카젤을 쓰러트렸던 동료들에게 도움을 청하였고, 그들 각자는 구천구문과 고대의 영웅들에 대한 연구 및 조사활동을 시작하였다.

“지금의 구천구문은 카마엘과 나··· 그리고 레나가 함께 복원한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구천구문을 온전히 익히기 위해서는 특별한 재능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구태여 말할 필요조차 없었다.

천무지체.

하늘이 내린 무의 화신.

“지난 천 년 동안 천무지체를 타고난 자는 열 명이 채 못 된다. 그렇기에 나도 사실상 포기하고 있었지만··· 너를 만나게 되었다.”

통성명도 없이 다짜고짜 제자가 되라 말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생각보다 훨씬 더 스케일 큰 이야기에 가슴이 두근거린 유더와 코델리아는 서로를 돌아보았고, 코델리아가 먼저 입을 열어 말했다.

“저··· 란디우스님. 구천구문이 구체적으로 어떤 무공인 거죠?”

“영육을 보다 높은 경지에 오르게 하는 무공이다. 뭐, 쉽게 말하자면 인간을 초월한 존재- 초월자가 되기 위한 수단이지.”

란디우스의 말에 유더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문을 여는 과정에서 느낀 바와 같았기 때문이다.

“유더, 일문을 열고 어떤 변화가 생겼지?”

“영혼이··· 확장되는 느낌이었습니다. 몸도··· 좋아진 것 같고요.”

영혼 운운하다 갑자기 소박한 이야기긴 했지만, 실제로 몸이 좋아진 것 같았다.

란디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구천구문은 이름 그대로 아홉 개의 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문을 하나씩 열 때마다 초월자에 가까워지며 영육 그 자체가 강화된다. 부가효과로 여러 가지 이능이 생기기도 하지.”

“이능이요?”

“그래, 오문을 여니 투시능력이 생기더구나.”

란디우스가 말했고, 유더는 코델리아를 돌아보았으며, 코델리아는 눈을 가늘게 떴다.

“뭐?”

“아니, 그냥.”

란디우스가 유쾌하게 웃었다.

“오문을 열었을 때만 사용할 수 있어서 티가 많이 난다. 오문을 열면 전신에 붉은 기운이 불꽃처럼 솟구쳐 오르고, 투시 능력을 쓰면 아예 안광까지 이니 말이다.”

“아쉽군요.”

유더가 한숨을 쉬자 코델리아의 눈이 더욱 가늘어졌다.

“사문까지는 항시 개방이지만 오문부터는 필요할 때마다 문을 여는 형식이다. 오문 이후부터는 몸에 부담이 너무 큰 터라 오랫동안 유지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납득이 가는 이야기였다.

“나는 칠문까지 열었다. 사실 선조회귀 쪽으로 방향을 튼 것도 팔문을 열 단초를 얻기 위해서였지.”

거기까지 말한 란디우스는 돌연 호방한 미소를 짓더니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구천구문의 문을 열 수 있는 것은 문을 가진 본인뿐이다. 때문에 나는 구천구문에 대해서는 더 이상 네게 가르쳐줄 수 있는 것이 없다. 그저 약간의 조언이 가능할 뿐이지. 아, 물론 그렇다고 스승 노릇을 안 할 생각은 아니다. 네게 가르쳐줄 것은 구천구문 외에도 무궁무진하니 말이다.”

제법 긴 말을 마친 란디우스는 보란 듯이 근육을 불끈거렸고, 유더는 저도 모르게 흠칫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이성을 되찾은 유더는 마찬가지로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스승님, 말씀 드릴 게 있습니다.”

“무엇이냐? 하루 종일 앉아만 있었더니 근손실이 있는 것 같으냐?”

“아뇨, 그게 아니라··· 구천구문에 관해서입니다.”

구천구문에 반응해 진보를 이룬 천하삼십육보.

“던전북에서 우연히 얻게 된 무공입니다만······.”

유더가 천하삼십육보에 대해 이야기하자 란디우스의 눈빛이 무척이나 진지해졌다.

“구천구문에 반응했다라··· 어쩌면 네가 말한 천하삼십육보 역시 선인의 무공일지 모르겠구나.”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였다.

천둔구보와 구천구문.

존재 자체가 불분명했던 환상의 무공들.

“좋다, 그럼 어서 알려다오.”

“네?”

“천하삼십육보 말이다.”

란디우스가 한껏 흥분한 어조로 말했다. 정말 지금 당장 전수해달라는 투였다.

“어··· 알겠습니다. 다만 진퇴로와 구결 모두를 알려드리려면 시간이 걸리니 그 전에 마저 나누었으면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무엇이냐.”

유더는 바로 답하는 대신 잠시 코델리아를 돌아보았다.

‘지금 하려고?’

‘지금 밖에 없으니까.’

엿새 동안 지옥의 체력단련을 받느라 까맣게 잊고 있었지만, 애당초 란디우스를 만난 목적은 구천구문을 배우기 위함이 아니었다.

란디우스의 구명.

듀크에 대한 경고.

‘필요···할지 의문이지만.’

솔직히 지금의 란디우스를 보면 듀크를 죽이면 죽였지 죽을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만약이라는 것이 있었으니까.

말해줘서 손해 볼 것은 없었다.

“마녀의 숲에서 마녀의 영혼을 만났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페어리 퀸 다음은 마녀의 영혼.

고대의 마녀가 란디우스에 대한 예언을 남겼다는데 어쩔 것인가.

확인해볼 것인가?

어떻게?

“마녀의 영혼이 말하기를, 앞으로 저희가 만날 태양의 전사에게 큰 위험이 닥칠 것이라 했습니다. 그 위험은 붉은 전갈의 독일 가능성이 높으니, 꼭 대비책을 준비해두라더군요.”

듀크는 독을 즐겨 쓰는 자였으니까.

특히 놈이 사용하는 붉은 전갈의 독은 스치기만 해도 죽음에 이르는 맹독이었다.

“흠··· 알겠다. 해독제를 준비하도록 하지.”

독 따위 두렵지 않다며 콧방귀를 뀌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란디우스는 의외로 유더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그래, 그럼 할 이야기는 다한 것이냐?”

란디우스의 물음에 유더는 코델리아를 돌아보았고, 코델리아는 침을 한 번 꿀꺽 삼키더니 손을 들며 물었다.

“란디우스님, 저도 한 가지만 여쭤보아도 될까요?”

“물어라, 소녀.”

“그··· 본래 검을 사용하지 않으셨나요? 솔라 블레이드라든가.”

란디우스가 태양의 전사라 불리는 이유 가운데 하나인 솔라 블레이드.

코델리아의 물음에 란디우스는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지금도 사용한다. 다만 수련을 위해 굳이 꺼내들지 않을 뿐.”

“수련이요?”

“그래, 카마엘 놈이 그러더군. 이치를 깨닫게 되면 검 없이도 검술을 사용할 수 있다고.”

소위 말하는 무형검 혹은 심검의 경지였다.

하지만 뭐랄까, 지금의 란디우스는 검 없이 검술을 쓰는 것이 아니라, 그냥 권법을 사용하는 느낌이랄까?

“어··· 그래서 검을 안 쓰신다고요?”

“이것저것 시험해보는 중이다.”

“어··· 네.”

어찌되었든 의문이 풀리긴 했으니까.

말하는 투로 보아 파라곤 왕국의 비보인 솔라 블레이드 역시 여전히 가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럼 된 거겠지?’

‘일···단은?’

여기서 굳이 솔라 블레이드를 보여 달라는 것도 이상했으니까.

유더와 코델리아가 눈빛을 교환하자 란디우스는 귀여운 것을 본다는 듯 흐뭇한 미소를 짓더니 말했다.

“흠, 좋아. 이야기는 모두 끝난 것 같군. 그럼 이제 천하··· 아니다. 흥분해서 내가 중요한 것을 잊고 말았군. 나 또한 아직 부족하구나.”

말하다말고 돌연 자책한 란디우스는 유더의 전신을 훑어보며 말했다.

“일단 밥부터 먹어라. 단백질 위주로. 하루 종일 굶었으니 우선 영양부터 채우고, 천하삼십육보는 그 다음에 배우도록 하자. 굶어서 살이 빠지면 지방보다 근육이 먼저 빠지는 법이니.”

근육은 소중하니까.

란디우스의 재촉 속에 유더는 식사를 시작했다.

메뉴는 닭가슴 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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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8장 - 구천구문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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