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엔딩메이커-43화 (43/473)

< 제11장 - 프로스트 앤빌 >

&

플레이아데스에는 수많은 악마 추종자들이 존재했다.

오랜 옛날, 지옥의 대군주들 가운데 둘이 인계에 강림하면서부터 시작된 이들의 계보는 천년이 넘게 지난 지금까지도 끈질기게 이어지고 있었다.

‘악마 추종자들은 하나가 아니다.’

세간의 인식과 달리 그들은 모두 한통속이 아니었다.

저마다 모시는 대군주가 달랐기 때문이다.

악마 추종자들은 지옥의 대군주들이 그러하듯 서로 반목하며 경쟁하였고, 심한 경우에는 유혈 충돌도 마다치 않았다.

악마의 손.

지옥의 다섯 대군주들 가운데 하나인 음욕의 아스모데우스를 모시는 그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아스모데우스를 인계에 강림시켜 그녀의 지옥인 사바스를 지상에 구현하는 것이었다.

“제물이 독수리의 품을 떠났습니다.”

악마의 손의 총본산.

세일룬 왕국의 중심부에 자리한 그곳에 악마의 손의 핵심 간부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일부는 실체였고, 일부는 마법을 통해 나타난 영체들이었다.

육망성의 모서리마다 자리한 간부들의 시선이 세일룬 왕국 북방을 담당하는 흑발의 여인- 마인 솔루지아에게 집중되었다.

제물이 독수리를 떠났다.

코델리아 체이스가 흐레스벨그 백작가의 보호에서 빠져나갔다는 이야기였다.

“어찌된 일이지?”

낮지만 듣는 이를 편안하게 하는 여인의 목소리였다.

악마의 손의 수장인 그녀의 물음에 솔루지아는 자세한 사정을 설명했다.

“코델리아 체이스가 약혼자인 유더 바이엘과 밀월여행을 나섰습니다.”

“습격을 두 차례나 받았는데도?”

육망성의 한 축을 차지하고 있던 남자- 마인 코로스가 어이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으며 묻자 다른 간부들 역시 다소 이해하기 어렵다는 표정들이 되었다.

첫 번째 습격이야 그렇다 쳐도, 두 번째 습격은 악마의 손의 목표가 코델리아와 루카스라는 사실을 명시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놀랄 일은 아직 더 남아 있었다.

“더욱이······.”

“더욱이?”

“둘만의 도피 여행입니다. 현재 흐레스벨그 백작가는 두 사람을 찾기 위해 사방팔방으로 사람을 풀고 있습니다.”

“미쳤네.”

코로스의 감상에 다른 간부들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기운이라도 났는지 코로스가 몇 마디 말을 덧붙였다.

“사랑에 눈이 먼, 골 빈 십대들이란 건가?”

“일단은··· 그런 것 같습니다.”

약간은 힘겹게 답한 솔루지아는 다시 수장 쪽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코델리아 체이스의 목적지는 프로스트 앤빌로 추정됩니다.”

“근거는?”

“애당초 코델리아 체이스가 흐레스벨그 백작가를 방문한 목적 자체가 프로스트 앤빌에 핀다는 전설의 태양화초 때문입니다. 약혼자인 유더 바이엘의 지병을 낫게 할 특효약이기 때문이죠.”

“단 둘이 약혼자의 병을 낫게 할 약을 찾아 여행에 나섰다? 과연, 어떤 마음들로 나섰는지 알 것 같군.”

코로스가 다시 작게 말하자 솔루지아는 미간을 찌푸렸지만 부정은 하지 않았다.

솔루지아 역시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솔루지아가 인상을 찌푸린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경애하는 수장과의 대화에 코로스가 끼어들었다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그런 철없는 골 빈 십대들 때문에 이미 마인 셋과 백 명이 넘는 전투원들을 잃었다는 사실이었다.

두 번의 작전을 입안한 것은 모두 솔루지아였으니, 한 걸음 물러서서 보면 결국 철없는 십대들에게 솔루지아가 두 번이나 물을 먹은 셈이었다.

“우습게 볼 일은 아니다. 그 아이들 때문에 우리는 마인을 벌써 셋이나 잃었으니.”

마인 미노스와 바루스, 노던 자작.

셋 모두 하급 마인이었지만 그렇다 해도 마인이었다.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과 노력, 자산을 투자해야만 했다.

더욱이 노던 자작을 잃은 것은 앞의 둘보다도 뼈아팠다.

그는 마인이기에 앞서 정식으로 영지를 가진 왕국 귀족이었으니 말이다.

“철인鐵人이 아니었다면 마인들을 잃지 않았을 겁니다. 그저 운이 좋을 뿐인 녀석들입니다.”

철인 란디우스.

코로스가 약간은 투덜거리듯 말하자 수장은 온화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 분명 철인이 끼어들지 않았다면 솔루지아의 두 번째 작전은 실패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한다. 그 아이들이 미노스를 꺾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더욱이 그뿐만이 아니었다.

마녀의 영혼의 도움을 받았다고는 하나, 트레팔가 숲에 잠들어 있던 아스모데우스의 마수 역시 그 아이들의 손에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결코 녹록하게 볼 아이들이 아니었다.

“솔루지아, 그 외의 근거는 없나?”

“있습니다. 흐레스벨그 백작가가 위치한 베르드폴니르에서 프로스트 앤빌까지의 경로 상에 위치한 민간인들을 조사해본 결과 코델리아 체이스와 유더 바이엘로 추정되는 인물들을 목격한 자들을 소수나마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카노스의 예지 역시 프로스트 앤빌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마인 카노스.

예지의 힘을 가진 몇 안 되는 마인들 가운데 하나로, 사실상 솔루지아의 후계자로 내정되어 있는 인물이었다.

“카노스의 예지는 원할 때마다 얻을 수 없다는 것이 단점이지만··· 일단 한 번 한 예지는 정확한 편이지.”

솔루지아를 거들 듯 간부들 가운데 하나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르곤 제국 방면에서 활동하는 마인 네메이아였다.

푸른 머리칼을 길게 기른 수장은 한차례 눈을 감았다. 생각을 정리하듯 잠시간의 침묵을 가진 그녀는 이내 눈을 뜨며 말했다.

“솔루지아.”

“예, 수장이시여.”

“어떻게 할 생각이지?”

“지금까지의 이동 속도를 고려하면 코델리아 체이스가 프로스트 앤빌에 도착하기까지는 앞으로 이틀이란 시간이 더 필요합니다. 때문에 그 전에 프로스트 앤빌의 유일한 출입구인 그레이트 게이트에 병력을 배치하여 두 사람을 포획할 생각입니다.”

나쁘지 않은 계획이었다.

더욱이 철인 란디우스는 이미 흐레스벨그 백작령을 떠나 중앙으로 향한 상황이었다.

갑작스러운 난입은 더 이상 없을 터였다.

“솔루지아, 다시 한 번 너를 믿겠다.”

“감사합니다, 반드시 기대에 부응하겠습니다.”

수장의 허락에 솔루지아가 깊이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조금이지만 눈물까지 섞인 목소리에 코로스는 코웃음을 쳤지만, 기실 그를 포함한 간부들 모두가 수장에게 깊이 심취해 있는 상황이었다.

아마 같은 상황이었다면 코로스 역시 비슷한 반응을 보였을 터였다.

“이야기가 얼추 마무리되었으니 오늘의 회담은 여기까지로 하지. 모두에게 아스모데우스 님의 총애가 함께하기를.”

“총애가 함께하기를.”

수장의 말을 잇듯 간부들이 한 목소리가 되어 말했다.

그리고 몇 초.

솔루지아는 천천히 숨을 골랐고, 눈을 뜬 그녀의 앞에는 육망성 대신 커다란 단상과 그녀의 귀환을 기다리고 있던 수하들이 자리했다.

“솔루지아 님.”

키가 무척이나 커 2미터에 육박하는 마인 카노스의 부름에 솔루지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수장께서 허락하셨다. 하지만 이번이 마지막 기회다. 전력을 총동원해 코델리아 체이스를 확보해야만 한다.”

코델리아 체이스는 분명 고위 악마를 소환할 수 있는 귀중한 제물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단순한 제물 확보의 문제가 아니었다.

수장의 신뢰를 지키기 위해, 간부들 사이에서의 위상을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그녀를 생포해야만 했다.

“마인 파라고트와 빌케일, 악마 시시오트가 이미 프로스트 앤빌 근방에 도달한 상황입니다. 아마 지금쯤 그레이트 게이트 앞에 진지를 구축하고 있을 것입니다.”

코델리아 체이스가 도착하기 전에 그레이트 게이트를 확보해야 하는 터라 이미 어느 정도 준비를 끝마친 상황이었다.

“이번에는 반드시 성공해야만 해.”

“반드시 성공할 것입니다. 프로스트 앤빌로 통하는 출입구는 오직 그레이트 게이트뿐이니까요. 더욱이 이번에는 마인 둘과 악마까지 동원하였으니··· 다시 한 번 철인이 나타나지 않는 한 놈들에게 희망은 없습니다.”

솔루지아도 동의했다.

유일한 출입구에 매복하고 있으면 놈들이 어찌하겠는가.

텔레포트라도 해서 프로스트 앤빌 내부로 들어갈 거란 말인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

천 년도 더 전에 멸망한 고대 드워프 왕국이었다.

대체 누가 그런 고대 유적으로 통하는 텔레포트 좌표를 가지고 있겠는가.

더욱이 텔레포트는 그렇게 호락호락 쓸 수 있는 마법이 아니었다.

시공간을 자유로이 누비는 전설 속의 페어리들이라면 모를까.

“실행해라. 아스모데우스 님의 총애가 함께하기를.”

“총애가 함께하기를.”

카노스가 웃으며 화답했고, 솔루지아 역시 작게나마 미소를 머금었다.

&

같은 시각, 프로스트 앤빌 1층 복도.

유더는 새삼 그레이트 게이트- 정확히는 안쪽 면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도 알겠지만, 몬스터들이 몰려들 거야.”

“태양화초 때문에 말이지?”

“맞아, 태양화초의 개화가 임박했으니까. 근방에 있는 몬스터들은 이미 거의 다 프로스트 앤빌 근처에 모였을 거야.”

태양화초로부터 풍기는 특유의 냄새.

인간의 후각으로는 제대로 맡을 수 없었지만 몬스터들은 아니었다.

더욱이 태양화초의 향기는 몬스터들을 유혹하는 힘이 있었다.

개화가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향기 역시 진해졌으니, 앞으로 며칠 뒤에는 프로스트 앤빌로 수많은 몬스터들이 돌진해올 터였다.

“제일 좋은 건 그레이트 게이트에 일부 병력을 남겨 수비하는 건데······.”

“우리 둘밖에 없으니 그건 무리지.”

“맞아, 그러니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야.”

프로스트 앤빌이 특정 층까지는 사실상 외길 구성이라는 점을 이용한다.

“함정 잔뜩 깔아놓으면 오다가 죽겠지 뭐.”

단순하지만 명확한 답.

오늘을 위해 오는 길 내내 마법진을 그려댄 유더였다.

“태양화초 캘 때 방해받으면 안 되니까 아끼지 말고 팍팍 깔자.”

“마법진에 마력 넣는 건 나인 거 알고 있지?”

“알다마다요, 마님. 그래서 마력 포션 빵빵하게 준비해뒀습니다.”

“미워 죽겠어.”

언제나처럼 옥신각신하며 1층 통로 거의 전체에 마법진을 설치한 유더와 코델리아는 1층 휴게실에서 다시 한 번 숨을 골랐다.

“이 다음부터는 개요만 보면 간단해. 태양화초가 피는 지하 7층까지 열심히 내려가기만 하면 되니까.”

“가는 길에 무기고도 들르고?”

“바로 그렇지.”

원작에서의 진행은 조금 달랐다.

태양화초를 얻기 위해 7층까지 가는 것은 동일했지만, 7층에서 조우한 강력한 보스 몬스터 때문에 일단 우회, 무기고에서 보스 몬스터를 쓰러트릴 무기를 확보한 뒤 다시 7층으로 향하는 구조였기 때문이다.

“이미 아는데 두 번 걸음 할 필요 없지.”

일단 무기고부터 들러서 고대 드워프들의 유물인 ‘파워 웨폰’들부터 확보한다.

“파워 웨폰들 기대된다.”

“원작에서는 정말 필요한 거 딱 하나밖에 얻지 못 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현실이었다.

분명 쓸 만한 물건들을 여럿 챙길 수 있으리라.

“새로운 장비는 언제나 환영이야.”

“새 마을 들어가면 쇼핑부터 하는 게 RPG의 미덕이니까.”

“올, 좀 아는데?”

“그 맛에 RPG하는 거 아니겠니.”

“네, 엄마. 엄마 말이 맞아요.”

“그래, 그러니 엄마 말 좀 잘 들으렴.”

언제나처럼 흰소리를 주고받은 두 사람은 짐을 단단히 꾸린 뒤 마지막으로 서로를 돌아보았다.

“가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말한 두 사람은 나란히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리고 다시 같은 시각, 프로스트 앤빌의 입구인 그레이트 게이트 앞.

“쥐새끼 한 마리 통과하지 못 하게 해라.”

비정상적으로 거대한 오른팔을 가진 마인 파라고트의 명에 악마의 손의 전투원들이 재빨리 움직이며 그레이트 게이트 곳곳에 함정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적발의 마녀인 마인 빌케일은 눈을 가늘게 뜬 채 남쪽을 내려다보았고, 봉인구로 전신을 옭아맨 악마 시시오트는 오싹한 웃음을 흘렸다.

그레이트 게이트에서 코델리아 체이스와 유더 바이엘을 포획한다.

‘솔루지아 님께서 기뻐하시겠지.’

그리고 이번에야말로 카노스 놈을 넘어 솔루지아 님의 총애를 독차지하리라.

나직한 웃음을 흘린 파라고트는 그레이트 게이트의 단단한 문 앞에 버티고 선 뒤 코델리아와 유더가 나타날 남쪽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사흘 뒤.

마인 파라고트 앞에 나타난 것은 절세미소녀와 절세미소년이 아닌 수많은 몬스터들의 무리였다.

&

< 제11장 - 프로스트 앤빌 > 끝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