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2장 - 무기고 >
제12장 - 무기고
고대 드워프들은 작금의 드워프들보다 여러 가지 면에서 우월했는데, 특히 체격 면에서 현저한 차이가 존재했다.
“고대 드워프들은 키가 제법 컸으니까.”
“키라기보다는 그냥 덩치가 큰 거 아냐?”
“뭐··· 어쨌든 크긴 큰 거니까.”
작금의 드워프들이 건장한 성인도 130~140센티미터 정도의 키인 반면, 고대 드워프들은 평균 신장이 170cm에 달했다.
‘코델리아 말처럼 키가 크다기 보다는 덩치가 큰 거였지만.’
무슨 말인가 하면, 고대 드워프들의 체형 자체는 작금의 드워프와 동일했기 때문이다.
짧은 팔다리와 넓은 어깨, 제법 큰 머리.
체형은 그대로인데 키는 커지다보니 전반적으로 다른 부분들 역시 다 커졌다고 해야 할까.
손도 크고 발도 크고 머리도 크고.
어찌되었든 지금의 유더와 코델리아에게는 제법 유용한 사실이었다.
무기고의 문을 여는 패널의 위치가 인간이 사용하기에 딱 좋은 높이에 위치했기 때문이다.
“흠.”
“왜?”
“아니, 좀 큰 거 같아서.”
“크다니? 키 말이야?”
“어, 구음절맥 낫고 있어서 그런가?”
시작 시점을 기준으로 했을 때 코델리아의 키는 160 중반이었고, 유더의 키는 160 후반이었다.
때문에 키 차이가 나도 딱히 올려다볼 정도는 아니었는데, 지금은 나란히 서면 제법 고개를 들어야 눈을 맞출 수가 있었다.
“뭐··· 구음절맥이 성장을 방해하던 것도 있으니까. 애당초 유더 나중에는 거의 180까지 자라잖아. 그러니 나도 자라겠지.”
“흠, 180이라.”
코델리아는 새삼 한 걸음 물러서더니 품평하듯 유더를 위 아래로 살펴보았다.
“뭐, 나쁘진 않겠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마님.”
“네, 엄마. 아무튼 문이나 여세요.”
“엄마보다는 아빠가 낫지 않아?”
“아빠라고 불리고 싶어? 앞으론 파파라고 불러줄까? 알았어요, 파파. 취향이 독특하시네요.”
“그냥 엄마라고 부르렴.”
실없는 대화를 주고받으며 유더는 벽면에 부착된 패널에 쌓인 먼지들을 털어냈다.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숫자 키 패널이었는데, 아홉 자리의 암호를 입력해야만 문이 열리는 구조였다.
원작에서는 암호를 알아내기 위해 일단 5층 어딘가에 숨겨져 있는 ‘건망증 심한 관리인’의 수첩을 찾아야 했지만 이번에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빨리 열어, 빨리. 뚜 루루 뚜루.”
“기다려, 기억 좀 더듬고.”
코델리아의 콧노래를 흘려들으며 유더는 기억의 궁전을 살폈다.
그렇게 다시 몇 분.
무사히 암호 입력이 끝나자 덜컹하는 소리와 함께 무기고의 커다란 강철문의 봉인이 풀렸다.
“막 두근거려.”
“나도.”
코델리아에게 답한 유더는 옆으로 열리는 강철문을 힘껏 밀어 무기고를 개방했다.
“원작이랑 똑같아.”
작게 말한 코델리아는 뺨을 발갛게 상기시킨 채 무기고 안을 둘러보았다.
각 면의 길이가 10미터 쯤 되는 정사각형 방이었는데, 지금까지 밀폐되어 있어서 그런지 서늘하기는 해도 프로스트 앤빌의 다른 방들처럼 아예 꽁꽁 언 냉동고 상태는 아니었다.
“진짜배기는 더 안쪽에 있지?”
“어, 그 전에 이쪽도 좀 살펴보자.”
유더가 벽면에 자리한 선반들을 가리키자 코델리아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맞아. 게임 할 때 맨날 엄청 챙기고 싶었어.”
획득 가능한 오브젝트가 아닌 터라 늘 그림의 떡이었는데 이제는 아니었다.
“기본적인 방어구 세트인가?”
코델리아가 선반에 달려가 살펴보니 장갑과, 신발, 조끼, 동그란 투구 같은 것들이 한 벌씩 세트로 갖춰져 있었다.
“음, 그런 거였군. 역시 온전한 무기고라기 보다는 장구류 보관소인가.”
“왜? 뭐라고 적혀 있는데?”
“아니, 그··· 작업복들이야.”
“작업복?”
“어, 프로스트 앤빌은 지하도시였고, 계속해서 채굴 및 확장 공사를 하고 있던 곳이니까. 안전모랑 안전화, 안전장갑··· 뭐 그런거?”
하지만 그렇다 해도 고대 드워프들의 유산이었다. 더욱이 애당초 작업복이라면 튼튼하고 단단할 터이니 방어구로 쓰기 딱 좋았다.
“근데 너무 크다.”
고대 드워프들 기준으로는 딱 평균 사이즈인 안전모였지만, 코델리아가 쓰니 커다란 냄비를 뒤집어 쓴 꼴이 되고 말았다.
유더는 새어나오려는 웃음을 애써 참은 뒤 마찬가지로 선반을 뒤적거리며 말했다.
“잘 찾아봐. 작업복이긴 해도 일단 안전 세트니까 아동용도 있을 거야. 장갑이랑 신발은 자동으로 사이즈 조절이 될 거고.”
유더의 말마따나 선반 구석을 보니 아동용 안전 세트가 몇 벌 준비되어 있었다.
“푸흣, 무슨 병아리 같아.”
“야, 너도 나랑 같은 옷 입고 있거든?”
안전모와 안전화, 안전장갑, 조끼 모두 노란색이었으니까.
작업복인 만큼 눈에 잘 띄게 만든 모양이었다.
“전투복은 없나?”
“있어도 안 맞지 않을까.”
전투복까지 아동용이 있지는 않을 테니까.
“거기다··· 이것만 해도 충분히 좋은 것 같은데?”
고대 드워프들의 장비답게 장갑과 신발 모두 마법이 걸려 있었다.
“장갑에는 근력 강화고··· 신발은 거기에 민첩성 증가인가?”
코델리아가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뛰며 말했는데, 과연 효과가 있는지 평소보다 훨씬 더 높이까지 뛰어올랐다.
“좋아, 마음에 들어. 한동안은 이걸로 충분하겠어.”
내친김에 보법까지 한 번 밟아본 유더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자신의 발을 내려다보았다.
안전화가 보통 튼튼한 게 아니니 앞으로는 발차기 공격력도 훨씬 더 강화될 터였다.
“안쪽도 빨리 열어보자.”
원작에서 거대한 백사를 쓰러트리기 위해 사용한 파워 스피어는 진정한 무기고라 할 수 있을 두 번째 문 뒤에 보관되어 있었으니까.
“알았어, 잠깐만.”
유더는 바로 두 번째 문의 숫자 패널을 조작해 문을 열었다.
그러자 이번에도 원작대로의 이벤트가 발생했다.
[무기고 담당인 자무입니다. 제 이야기를 들어주십시오.]
문 바로 앞에 반투명한 고대 드워프가 나타나 중후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령이 아닌 홀로그램 영상으로, 자기 말마따나 무기고를 관리하는 일종의 인공지능이었다.
“딱히 물리력은 없으니까 지나가자. 어차피 하는 이야기도 그냥 일반적인 무기고 이야기가 다니까.”
그렇게 말한 유더가 자무를 그냥 지나치려 할 때였다.
“잠깐, 잠깐만.”
유더의 손을 붙잡은 코델리아는 잠깐 고민하는 얼굴로 자무를 쳐다보더니 이내 다시 유더에게 말했다.
“그러지 말고 이야기를 들어보자.”
“이야기를?”
“어, 마녀의 숲 때도 그랬잖아. 다 안다고 그냥 스킵했다가 개고생했던 거 기억하지? 거기다 파워 스피어 얻는 이벤트도 시네마틱 무비 나왔었잖아. 이번에도 영상으로는 알 수 없던 무언가가 있으면 곤란하지 않을까?”
제법 타당한 이야기였다.
때문에 유더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성이··· 있어!”
“야, 그거 내 꺼라고 했지?”
“아무튼 그럼 들어보자. 어차피 시간도 제법 넉넉하니까.”
마음을 정한 유더는 아예 선반에 있던 조끼 하나를 펼쳐 자리까지 만들었다.
“마님, 앉으시죠.”
“네, 아빠.”
유더 옆에 쪼그리고 앉은 코델리아는 그대로 자무를 올려다보았고, 유더가 운을 떼었다.
“자무, 이야기를 들려줘.”
[이야기를 해도 되겠습니까?]
“그래, 네 이야기를 듣고 싶어.”
유더의 말에 자무가 꽤나 감동한 표정을 지었다.
인공지능이지만 어느 정도 감정과 자아가 존재하는 모양이었다.
[흠흠, 알겠습니다. 제 이야기에 관심을 보이시다니 훌륭한 안목을 지니신 분이군요.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제가 처음 무기고에서 눈을 뜬 프로스트 앤빌 004년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자무가 서두를 뗀 그때, 코델리아는 저도 모르게 유더를 돌아보았고, 유더는 코델리아를 돌아보았다.
어쩐지 모르게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 서두에서 불길한 기운이 감지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섯 시간.
두 사람의 예상은 현실이 되었다.
&
“귀에서 피 나는 것 같아······.”
장장 다섯 시간에 걸쳐 자무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코델리아가 다 죽어가는 얼굴로 말했다.
중간에 졸기라도 하면 그 부분부터 자무가 이야기를 다시 반복한 터라 강제로 집중까지 해야 한 그녀였다.
울 것 같은 얼굴로 머리를 기대는 코델리아를 돌아본 유더는 깜짝 놀라 말했다.
“야! 진짜 귀에서 피나!”
“지, 진짜?”
“나겠냐?”
유더가 끌끌끌 혀를 차자 코델리아는 어디서 힘이 났는지 유더의 등짝을 마구 때리기 시작했다.
“아파! 아파!”
“전에도 말했지? 아프라고 때리는 거거든? 때린 데 또 때릴 거거든?”
어찌되었든 덕분에 잠이 깬 두 사람은 기지개를 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결국 아무 의미 없는 잡담이었네.”
“아니, 뭐··· 아주 도움이 안 되는 건 아니었어.”
무기고 안에 보관중인 무기들의 대략적인 사용법을 들었으니까.
“더욱이··· 자무도 만족한 것 같고.”
“그러게.”
유더의 말마따나 자무는 천년 묵은 한이라도 푼 것처럼 무척이나 상쾌한 표정으로 눈을 감고 서 있었다.
인공지능이 아니라 유령이었으면 바로 승천이라도 할 것 같았다.
“아무튼 빨리 가자. 나 졸려.”
“그래, 무기만 챙기고 오늘은 일단 그만 쉬자.”
하품을 하며 진짜 무기고 안에 들어선 두 사람이었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우와··· 파워 스피어가 다섯 개나 있어.”
“이건 우리도 쓸 만하겠는데?”
벽면에 나란히 세워져 있는 파워 스피어를 보며 코델리아가 감탄했고, 유더는 단검들을 살펴보며 말했다.
“이것 봐, 너클도 있어. 손에 맞는지 한 번 껴봐.”
“너클이라기 보다는··· 파워 피스트 같은데?”
팔등까지 덮는 건틀렛을 팔에 껴본 유더는 몇 번인가 주먹을 쥐었다 펴 보았다.
담백한 맛이 있는 고대 드워프들답게 이렇다 할 장식은 없었지만, 장착하는 순간 살상병기 특유의 묵직한 느낌이 드는 것이 처음으로 총을 잡았을 때가 생각났다.
“어때? 쓸 만한 거 같아?”
“어, 좋아. 왼팔도 있어?”
“여기.”
코델리아가 도토리 챙기는 다람쥐처럼 쪼르르 달려가 반대쪽 파워 피스트도 들고 왔다.
“음, 좋아. 이거면 파워 스피어를 쓰기도 편할 거야.”
“그치? 공격력은 몇이나 오른 거 같아? 근력은 한 1.2배 되었나? 옵션은 어때?”
“뭐랄까··· 참 썩은물답구나.”
“칫, 지는 석유인 주제에.”
툴툴 거린 코델리아였지만 이내 방긋방긋 웃으며 다시 무기고 안을 둘러보았다.
아무래도 전사들이 많은 고대 드워프들인 터라 마법사인 코델리아가 쓸만한 것은 별로 없었지만, 유더가 쓸 장비를 찾는 것만으로도 기쁜 눈치였다.
‘RPG에서 동료 캐릭터 아이템 갈아 끼워주는 느낌이려나.’
피식 웃은 유더는 무기고의 존재 이유라 할 수 있을 파워 스피어를 살펴보았다.
긴 창대 끝에 커다란 창날이 달려 있는 단순한 구조였는데, 겉모습만 그럴 뿐 내부 구조는 상당히 복잡한 편이었다.
‘창날을 통해 충전해둔 사이오닉 에너지를 발산한다.’
출력 역시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었는데, 최대 출력으로 발사하면 사실상 창이라기보다는 빔포라 할 수 있는 물건이었다.
‘사실상 1회용이지만 다섯 개나 있으니까.’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유더는 파워 스피어들을 챙겼고, 코델리아는 끙끙 거리며 망치와 메이스, 대검 같은 것들을 챙겼다. 당장 쓸 사람도 없었지만 그냥 버려두고 나오자니 너무 아까웠기 때문이다.
“진짜 다람쥐 같다.”
“응? 나?”
“어. 햄스터 같기도 하고.”
나중에 먹겠다며 입 안 가득 먹을 거 물고 있는.
“뭔가 칭찬은 아닌 거 같으니까 일단 한 대 때릴래.”
“에헤이, 일단 오늘은 여기서 쉬고, 내일 아침에 밥 챙겨 먹고 바로 태양화초가 피는 동력실로 가자.”
“거기도 비밀통로 있었지?”
“있었지.”
원작에서의 흐름은 다음과 같았다.
7층에서 거대한 백사와 조우한 주인공 일행은 격렬한 전투 도중 우연히 비밀통로를 발견하게 된다.
일단 백사를 피하기 위해 비밀통로에 들어간 일행은 죽은 고대 드워프들의 시신으로부터 무기고에 관한 단서를 얻은 뒤 비밀통로를 이용해 무기고에 진입, 백사를 쓰러트릴 파워 스피어를 확보한다.
“그러니까 비밀통로 이용하면 바로 백사와 태양화초가 있는 동력실로 갈 수 있다 이거지.”
“하지만 비밀통로 안 쓰고 3층까지 올라갔다가 정공법으로 내려갈 거지?”
“당연하지.”
백사를 잡으면 레벨이 몇 개나 오를 텐데, 그러면 3층부터 6층 사이에 자리한 잡몹들의 경험치 효율이 안 좋아질 테니까.
영웅전기의 경험치 시스템은 절대치와 상대치가 다소 혼합되어 있었다.
기본적인 절대치에 레벨 차이로 인한 보정이 조금씩 들어가는 형태였기 때문에 플레이어의 레벨이 낮으면 낮을수록, 몬스터의 레벨이 높으면 높을수록 더 많은 경험치를 얻을 수 있었다.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따질 건 따져야지.”
“맞아, 맞아.”
찰떡같이 마음이 맞는 두 사람이었다.
“더욱이 급한 것도 아니니까. 3층부터 쓸고 내려가도 백사는 아직 동면중일 거야.”
백사는 이름 그대로 하얀 뱀.
정확히는 프로스트 앤빌을 파멸로 몰고 간 고대의 대군주 리바이어 던의 마수였지만, 어찌되었든 놈이 뱀이라는 사실만은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뱀은 변온 동물이지.’
애당초 프로스트 앤빌이 냉동고가 된 이유부터가 사실 백사에 있었다.
‘백사를 프로스트 앤빌에 가두기 위해 온도를 극도로 내려버렸지.’
저 사악한 마수를 밖으로 내보낼 수는 없다.
놈을 이곳에 가두어야 한다.
이름 모를 고대 드워프가 내린 영웅적인 결단이었다.
천 년의 세월 동안 제대로 된 영양을 섭취하지 못 해 약해진 상태에서도 괴력을 발휘한 마수였으니, 전성기 시절이라 할 수 있을 프로스트 앤빌 침공 때는 그 힘과 위용이 실로 무시무시했으리라.
“평소에는 잠들어 있던 백사가 태양화초가 개화하며 발생하는 막대한 양기를 받아 잠시 잠에서 깨어난다-라는 설정이지?”
“그래, 그러니 지금은 잠들어 있겠지.”
게임에서야 태양화초가 피고 하루 뒤에야 7층에 도달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며칠 전에 도착한 상황이었으니까.
“동면중인 놈 머리에다가 파워 스피어 박고 쾅!”
몸길이만 수십 미터에 달하는 괴수면 뭐하겠는가, 동면중인데.
“와, 진짜 날로 먹네.”
“그래서 싫어?”
“아니, 완전 좋아. 날먹 최고야. 매일 날먹하고 싶어. 날먹하게 해주세요.”
“나도.”
서로를 보며 활짝 웃은 유더와 코델리아는 콧노래를 부르며 무기고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사흘 뒤 아침.
3층부터 6층 사이에 존재하는 몬스터들을 모조리 쓸어버린 두 사람은 7층에 도달하였고, 먼 옛날- 프로스트 앤빌 전체를 공포에 빠트렸던 거대한 백사는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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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2장 - 무기고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