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3장 - 태양화초 #3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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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랴, 이랴! 달려라, 달려!”
유더의 등에 업힌 코델리아가 발랄하게 외치자 유더의 눈이 가늘어졌다.
“마님.”
“왜, 돌쇠야.”
“양심적으로 당근은 좀 주고 달리라고 하지 그러세요.”
“당근은 개뿔. 그보다 채찍질은 어때? 나 잘할 거 같지 않아?”
코델리아의 말에 유더는 잠시 채찍질을 하는 코델리아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복장이 좀 엄하긴 했지만, 절세미소녀답게 꽤 어울리는 느낌이었다.
“야, 이상한 상상하고 있지?”
“그럴 리가. 그보다 우리 공주님, 아빠는 우리 애를 그렇게 키운 적이 없어요.”
“그럼 어떻게 키웠는데?”
“프린세스 메이커처럼?”
“축하합니다. 여왕님 엔딩이에요. 채찍질을 아주 잘하는 여왕님이에요. 딸내미 알바 시킨 돈으로 호사를 누린 벌을 받을 때가 왔어요.”
“다 왔다.”
“다 왔네.”
언제나처럼 흰소리를 주고 받다보니 어느새 동력실이었다.
유더는 새삼 코델리아를 고쳐 업은 뒤 물었다.
“설 수 있겠어?”
“있긴 있는데, 이왕 여기까지 온 거 숙소까진 업어줘.”
“그래.”
발랄하게 말하고 있지만 코델리아의 안색이 창백했다.
이래저래 무리를 한 탓이었다.
유더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자 코델리아는 빙긋 웃더니 재차 유더의 등을 두드렸다.
“얼른 가자, 이랴.”
“히히힝.”
장단을 맞춘 유더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그리고 다시 1분 남짓.
간이침대에 드러누운 코델리아는 돌연 어설픈 웃음을 흘렸다.
“왜?”
“아니, 고작 며칠 머문 것뿐인데 집에 온 것처럼 안심되어서.”
“집순이 맞구나. 아주 타고났어.”
“지는.”
킥킥 웃은 코델리아는 몸을 한 번 더 늘어트린 뒤 감기려는 눈을 억지로 부릅떴다.
편히 잠들기에는 당장에 닥친 사건이 너무 심각했기 때문이다.
“시시오트.”
“칼날의 악마. 바람 속성. 근접전 전문이지만 봉인이 풀리면 무지막지한 검기를 날려대는 괴물.”
본래라면 게임 중반부, 악마의 손과 직접적으로 대결을 펼치던 도중에 만나게 되는 악마였다.
하지만 지금은 아직도 게임 초반.
냉정하게 보면 여전히 파라고트보다도 능력치 면에서 처지는 유더와 코델리아가 상대할 수 있는 적이 아니었다.
“산 넘어 산이네.”
백사 좀 쉽게 잡았다했더니 파라고트에 이어 시시오트라니.
유더는 코델리아를 위로하듯 쓰게나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도 일단 진명과 봉인식··· 정확히는 구속제어술식을 아니까 승산이 있긴 있어. 더욱이 내 예상이 맞다면 문 밖에는 아군도 있을 거야.”
“흐레스벨그 백작가.”
“맞아, 정황상 파라고트가 그레이트 게이트의 봉인을 파괴했을 테니까.”
그레이트 게이트에는 흐레스벨그 백작가가 설치해둔 커다란 봉인이 있었다.
원작에서도 대부분의 몬스터들은 봉인과 그레이트 게이트 때문에 프로스트 앤빌 내부로까지는 침투하지 못 했다.
샛길이나 숨겨진 길을 발견한 일부가 들이닥치는 정도였다.
그런데 이번엔 원작과 상황이 달랐다.
본래라면 프로스트 앤빌에 오지 말아야 할 악마의 손이 나타났고, 그치들이 그레이트 게이트의 봉인을 완전히 파괴해버렸다.
“그 정도 봉인이 깨지면 술사가 알 수밖에 없어. 거기다 그 정도 봉인이니까. 분명 무슨 일이 생긴 건지 조사하기 위해 병력을 보낼 거야.”
더욱이 이번에는 유더와 코델리아의 사랑의 도피라는 사건까지 끼어 있었다.
흐레스벨그 백작가 입장에서는 유더와 코델리아가 그레이트 게이트의 봉인을 파괴했을 가능성 역시 고려할 터이니, 이러나저러나 병력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유더의 말에 코델리아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흐레스벨그 백작가와 다시 얽힐 것을 우려해서가 아니었다.
“조사차원에서 레인저 몇 보내는 정도로는 오히려 피해만 늘 거야.”
상대는 악마 시시오트였으니까.
코델리아가 혹시 모를 희생자들을 걱정하자 유더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괜찮아. 흐레스벨그 백작가도 몬스터들의 이상 이동 자체는 파악했을 테니까. 일정 규모 이상의 병력을 보냈을 거야.”
“그럴···려나? 그럼 다행이고.”
한시름 놓았다는 듯 코델리아가 미소를 짓자 유더는 따라 웃었지만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했다.
‘이미 피해가 상당하겠지.’
일정 규모 이상이라고 해봤자 레인저 열댓 명을 함께 보낸 정도일 터였다.
그리고 그 정도 규모로는 결코 시시오트를 상대할 수 없었다.
합리적으로 추측하면 이미 열 명 이상의 희생자가 발생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레이트 게이트 밖에서 흐레스벨그 백작가의 병력을 만난다면 1차 파견 부대가 아닌 2차 파견 부대이리라.
하지만 유더는 이러한 생각을 속으로 삼켰다.
굳이 코델리아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싶지 않아서였다.
“어쨌든, 당장 우리가 할 일은 하나야.”
유더가 짐짓 경쾌하게 말하자 코델리아 역시 웃으며 말을 받았다.
“구속술식 만드는 거?”
“그것도 해야지. 하지만 그 전에 파워 업부터 마저 끝내야 해.”
아직 태양화초의 정기를 모두 흡수하지 못 했으니까.
유더의 말에 코델리아는 누운 상태로나마 자기 가슴을 탕탕 두드리며 말했다.
“이번에도 잘 지켜줄게. 누나만 믿어.”
“그래, 그런데 이번엔 너도 해야 해.”
“응? 나도? 나도 태양화초 먹어?”
코델리아가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깜박이자 유더는 충동적으로 코델리아의 뺨을 꼬집은 뒤 말했다.
“아니, 넌 다른 거.”
대체 무얼 말하는 것일까.
코델리아는 일단 자기 뺨을 꼬집는 유더의 손부터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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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사의 마정석이야. 굳이 이름을 붙이면 스네이크 하트?”
“스네이크 하트하면 어쩐지 약해 보이니까 그냥 마정석하자.”
“그래.”
유더와 코델리아는 거대한 백사의 시신의 1/5 지점쯤- 그러니까 머리에 가까운 몸통 부분에 자리한 심장 앞에서 붉은 돌을 바라보고 있었다.
심장에서 꺼낸 백사의 마정석이었다.
“천 년 동안 저장해둔 마력을 거의 다 써서 남은 건 별로 없지만··· 그래도 리바이어 던의 마수가 품고 있던 마정석이야. 지금 수준의 코델리아에게는 거의 기연급 도움이 될 거야.”
“근데 이거 원작에서는 못 쓴다고 나오지 않나?”
“맞아, 악마의 마정석이니까.”
루카스뿐만 아니라 누구로 진행해도 백사의 마정석은 얻을 수가 없었다.
“악마의 마력은 평범한 인계의 인간에게는 독이나 다름 없습니다. 흡수했다가는 몸에 큰 이상이 생기거나··· 최악의 경우에는 마인화하여 악마의 하수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언제봐도 신기하단 말이지. 저걸 어떻게 다 외울까.”
“아무튼 동행하는 동료A의 대사처럼 마정석은 일반적으로는 흡수할 수 없어. 그래서 아예 아이템으로도 나오지 않았고. 하지만 내 생각이 맞다면 코델리아 넌 흡수할 수 있을 거야. 왜나하면······.”
“마녀화가 있으니까.”
유더의 말을 완성한 코델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 요즘 들어 생각하는 일 자체를 유더에게 떠넘기는 일이 잦은 그녀였지만, 그렇다고 아예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마녀화의 근원이라 할 수 있을 마녀의 힘은 결국 악마들로부터 비롯된 것.
마녀화 상태라면 마정석의 기운을 흡수하는 게 가능할 것 같았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이상하다 싶으면 바로 끊고. 알았지?”
“네, 아빠. 걱정하지 마세요.”
대답에 이어 고개까지 끄덕인 코델리아는 사람 머리통만한 크기의 붉은 돌에 조심스럽게 손을 대어보았다.
안에서 맥동하는 거친 마력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좋아, 지금 당장은 힘들지만 마녀화 가능해지면 바로 시도해볼게.”
“그래, 그럼 난 숙소로 돌아가서 태양화초의 기운을 마저 흡수할게. 아마 내 예상대로면··· 내일 아침에나 다시 눈을 뜰 거야.”
“그럼 이번에야말로 구음절맥 완치되는 거야?”
“나도 그러고 싶긴 한데, 아마 안 될 거야. 중간에 한 번 끊었다 다시 흡수하는 거니. 기세 타고 한 번에 뚫었어야 하는데 그걸 못 했다고 해야 하나.”
“으으, 아쉽네.”
“뭐, 그래도 거의 완치나 다름없는 상태에 가까워질 거야. 그러니 덮쳐지고 싶어도 조금만 참아요, 공주님.”
“미친놈이 뭐라는 거야.”
코델리아는 유더의 엉덩이를 걷어찼고, 유더는 질풍이십사보로 가볍게 회피했다.
“그럼 내일 아침에 다시 만나자.”
“강해져서 돌아오렴.”
“네, 마님.”
빙긋 웃은 두 사람은 각자의 일에 돌입했다.
그리고 그날 밤.
아니, 새벽.
아침이 다가오는 시간.
가부좌를 틀고 앉아 구천구문의 구결을 외우며 태양화초의 정기를 흡수하던 유더는 어느 순간 번쩍하고 눈을 떴다.
이해했다.
당장 할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였다.
태양화초의 기운 가운데 오할.
덕분에 구음절맥으로 인해 막혀있던 대맥과 세맥의 칠할 이상이 개통되었고, 단전 역시 몇 번이나 덩치를 키워 이전보다 근 세 배에 달하는 내공을 소유하게 되었다.
그리고 여기에 더해진 하나.
타이틀을 얻을 때처럼 머릿속에 들려온 목소리.
“음양···지체?”
영웅전기2에는 몇 가지 특이체질들이 존재했다.
하늘이 내린 무의 화신인 천무지체.
루카스와 카마엘이 가진 검귀의 재능인 절대검감.
진주인공 막시밀리언이 타고난, 이름은 이상해도 성능 자체는 미쳤다고 밖에 표현 못 할 만병의 이해자인 만병신체.
플레이어블 캐릭터들 중에서 음양지체라는 체질을 타고난 자는 없었다.
하지만 플레이아데스 전체로 넓혀보면 음양지체를 타고난 자가 한 명 더 있었다.
‘대사교 마누엘라.’
란디우스의 목표이자 영웅전기 시리즈 전체에 걸쳐 강력한 영향력을 끼치는 강력한 적.
마누엘라는 본래라면 동시에 사용할 수 없는 상극의 힘들을 자유로이 다뤘다.
특히 극음과 극양의 힘을 동시에 다뤄 쌍소멸을 일으키는 극대소멸주문은 마누엘라의 상징이자, 영웅전기 시리즈에서 손꼽히는 최강의 마법 가운데 하나였다.
‘음양지체.’
극음과 극양의 힘을 자유로이 다룰 수 있는 신체.
당장은 감이 오지 않았고,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도 연구가 필요할 것 같았지만 입가에 자꾸만 미소가 번졌다.
‘어쨌든 최종보스급 적이 가지고 있는 특성이니까.’
그리고 최종보스급 적들의 특성은 개사기인 것이 RPG의 불문율이지 않던가.
“좋아.”
천무지체에 음양지체.
루카스에게는 조금 미안했지만, 태양화초 이벤트를 획득한 보람이 있는 성과였다.
‘코델리아도 잘 되었을라나?’
궁금해진 유더는 얼른 반대편에 놓인 코델리아의 간이침대를 돌아보았지만, 어제와 다름이 없었다. 아예 밖에서 밤을 보낸 모양이었다.
“코델리아?”
이름을 부르며 밖으로 나선 유더는 바로 코델리아를 발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연이어 이름을 부르는 대신 멍한 얼굴이 되어 그저 바라보았다.
태양화초가 피었던 자리.
코델리아가 마치 태양화초를 대신하듯 아름답게 자리하고 있었다.
검은 머리칼이 물결처럼 넘실거렸고, 은은하고 푸른빛이 코델리아의 전신을 감쌌다.
옅은 미소를 띤 편안한 얼굴.
어쩐지 모르게 마녀의 영혼과 페어리 퀸을 연상케하는, 평소의 코델리아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여신 같은 우아함.
유더가 그렇게 바라본 지 몇 초나 지났을까.
여신이 눈을 떴다.
우아하지 않지만 대신에 발랄한 목소리로 말했다.
“깼어?”
“어, 깼어.”
유더가 다소 어눌하게 답하자 고개를 갸웃한 코델리아였지만 이내 빙긋빙긋 웃으며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리고 그 순간 마녀화가 풀렸다. 머리칼의 색이 선명한 붉은 색으로 돌아갔고, 전신을 감싸고 있던 푸른 빛 역시 흩어졌다.
평소와 같은 코델리아.
아니었다.
유더는 차이를 느낄 수 있었다.
“맞아, 달라졌어.”
코델리아도 말했다. 유더는 그녀가 서 있던 자리에 뒹굴고 있는, 색이 바란 마정석의 모습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잠깐, 설마 다 흡수한 거야?”
“어, 처음엔 좀 어려웠는데, 하다보니까 쑥쑥 잘 들어오더라고.”
코델리아가 배시시 웃으며 말하자 유더는 다시 눈을 깜박였다.
“왜?”
“사기캐를 보는 기분이라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이거든?”
유더의 기억력은 아무리 봐도 치트였으니까.
하지만 유더의 말도 틀린 것이 아니었다.
코델리아는 전투에만 재능을 타고난 것이 아니었다.
아니, 보다 엄밀히 말하면 전투 재능은 코델리아의 전생인 노란폭풍 홍유희의 것이었다.
이번 생의 코델리아가 타고난 것은 압도적인 마력감응 능력.
이 둘이 더해진다 생각하니 유더 역시 파라고트와 비슷한 상상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는 대체 얼마나 괴물이 되는 거지?’
물론 괴물이 되면 될수록 좋았지만.
‘코델리아는 우리 괴물이니까.’
새삼 납득한 유더가 홀로 고개를 끄덕이자 코델리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상한 상상하는 것 같으니까 묻진 않을게. 그보다 언제 출발할 거야?”
“아침 먹고 조금 쉬었다가 바로.”
“구속술식은?”
“아침 먹고 그릴 거야.”
유더의 대답에 이번에는 코델리아가 마뜩찮은 표정이 되었다.
“왜?”
“사기캐를 보는 기분이라서.”
마법사인 코델리아이기 때문에 알 수 있었다.
유더가 일상처럼 그려대는 마법진이 단순히 암기력만 좋아서는 그릴 수 없는 물건들이라는 것을.
암기와 함께 필요한 것은 이해.
마법사도 아닌 주제에 유더는 그 복잡한 마법진의 수식들을 모두 이해하고 있었다.
“뭐, 사기캐면 사기캐일수록 좋은 상황이지만.”
작게 중얼거린 코델리아가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유더는 픽하고 웃었다.
“왜?”
“아니, 그냥. 아무튼 밥부터 먹자.”
“네, 아빠.”
그리고 그날 오후.
프로스트 앤빌에서의 마지막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1층 로비에 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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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3장 - 태양화초 #3 (수정)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