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3장 - 태양화초 #4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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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라고트는 프로스트 앤빌의 출입구가 오직 그레이트 게이트 하나뿐이라 생각했지만 실상은 아니었다.
몇 개나 되는 개구멍이 존재했다.
그리고 그중에 하나.
환기구를 통해 밖으로 나온 순간 유더와 코델리아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짙은 혈향에 이어 썩은 내가 코끝을 찔렀다.
그레이트 게이트 앞- 설원을 뒤덮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많은 몬스터들의 시신.
그나마 기온이 낮은 프로스트 앤빌 근방이라 다행이지, 다른 곳이었다면 시체 썩는 냄새 때문에 숨조차 쉬지 못 했으리라.
그리고 악마가 서 있었다.
그레이트 게이트 앞을 지키듯 칼날로 된 두 팔을 늘어트린 채 선 시시오트.
바짝 마른 몸 위에는 새카만 껍질들이 연이어져 마치 갑옷 같은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놈은 선채로 잠든 것처럼 고개를 살짝 숙인 채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악마의 손의 수장이 걸어둔 구속술식이 해제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놈이 완전히 자유를 찾은 것은 아니었다.
악마의 손에 의해 망가진 의식이 회복되기 전까지는 그레이트 게이트 주변을 서성이며 마주하는 이들 모두를 죽음으로 이끌 터였다.
그리고 건너편.
유더의 예상대로 아군이 될 이들이 존재했다.
“봉인··· 펼치고 있는 거지?”
코델리아의 물음에 유더는 고개를 끄덕였다.
얌전히 선 시시오트로부터 십여 미터 남짓 떨어진 곳에 성십자수호단의 로브를 입은 마법사 여섯 명이 봉인진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 벌이에 불과했다.
더욱이 그 시간조차 얼마 남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흐레스벨그 백작가의 깃발이야.”
코델리아의 목소리를 따라 시선을 돌리니 저만치에 세워진 작은 진채가 보였다.
흐레스벨그 백작가의 기사 넷과 서른 명 남짓한 병사들.
유더는 무어라 말하는 대신 한 차례 눈을 감았다.
흐레스벨그 백작가와 성십자수호단의 일반 편제를 고려했을 때, 역시 예상한 대로 이미 상당한 피해를 입은 것 같았다.
“합류하자.”
코델리아의 말에 유더는 고개를 끄덕였다.
엄밀히 따지면 유더와 코델리아 때문에 악마의 손이 이곳에 온 것이었다.
물론 두 사람 역시 피해자인 상황이니 잘못한 게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하여 책임감에서 아예 자유로운 것은 아니었다.
악마를 사냥한다.
쓰러트린다.
완벽한 해피엔딩을 이끌기 위해 어차피 지나야 하는 길.
그리고 바로 그 순간이었다.
“깨진다.”
코델리아가 불현듯 말했다.
순간 느껴진 미세한 마력의 변화를 직감한 탓이었다.
그리고 직후.
유더가 코델리아를 덮쳤다. 옆으로 쓰러트려 눕게 했고, 동시에 대기가 울부짖었다.
코델리아의 표현은 정확했다.
마치 유리가 깨지듯 시시오트와 성십자수호단 사이의 공간이 무너졌다. 보이지 않는 벽이 파괴된 그 순간 시시오트가 팔을 휘둘렀다.
일참.
거대한 참격이 공간을 갈랐다.
“엎드려!”
성십자수호단의 누군가가 외쳤다. 기사들도 무어라 외치며 움직였지만 모두가 반응한 것은 아니었다.
시시오트와 가까이에 있던 성십자수호단 가운데 둘이 머리를 잃었다. 병사들은 그나마 거리가 멀었던 덕분에 목숨을 잃은 자는 없었지만 대부분이 겁에 질려 꼼짝도 하지 못 했다.
성십자수호단의 봉인이 깨졌다.
시시오트가 다시 활동을 시작했다.
하필이면 이 타이밍에.
아니, 차라리 다행이었다.
유더와 코델리아가 나타나기 전이었다면 남은 것은 몰살뿐이었을 테니까!
“간다!”
유더가 자신 아래 놓인 코델리아에게 말했다. 코델리아가 응답했고, 유더가 질풍이 되었다.
질풍이십사보.
선풍과 함께 나아가는 유더를 뒤따르며 코델리아가 마녀의 힘을 발산했다!
“아아아!”
코델리아가 노래했다.
목소리를 토했다.
마를 멸하는 마의 힘에 시시오트가 반응했다. 두 번째 참격을 날리려던 놈이 코델리아를 돌아보았고, 질풍이 그런 놈에게 몰아쳤다.
악마 시시오트.
마인 파라고트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 육체 능력은 실로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시시오트가 유더를 보았다.
노란 눈동자 사이로 고양이과 동물 같이 길게 찢어진 동공이 유더를 포착했다.
“헤이스트!”
코델리아가 외쳤다. 시시오트가 휘두른 두 번째 참격을 유더가 지근거리에서 피했다. 어찌나 빠른지 코델리아의 헤이스트가 없었다면 아무리 유더라 해도 피하지 못 했을 터였다.
“헤이스트!”
코델리아가 연달아 헤이스트를 펼쳤다.
중첩사용은 독이었다.
유더의 몸에 상당한 부담을 줄뿐만 아니라, 유더 역시 다른 이들처럼 너무나 빨라진 속도에 적응하지 못 할 가능성이 있었다.
그리고 그대로 되었다.
유더는 코델리아가 아니었다.
즉각적으로 빨라진 속도에 적응하는 것은 무리였다.
그래서 유더는 계산했다.
스스로의 몸을.
움직임을.
속도를.
자신이 그리게 될 궤적을!
유더가 위태롭게 시시오트의 공격을 피했다.
시시오트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고, 코델리아가 다시 소리쳤다.
“구경만 하지 마!”
외침과 동시에 마법이 발동했다.
십여 발의 매직 미사일들이 시시오트를 향해 폭풍처럼 몰아쳤고, 코델리아의 외침에 성십자수호단이 정신을 차렸다. 저들끼리 돌아보더니 무어라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천무지체가 빛을 발했다.
유더의 계산에 힘입어 조금씩 빨라진 속도에 적응했다.
작전은 단순했다.
거리를 좁힌다.
코델리아 혹은 성십자수호단이 어떻게든 시시오트의 움직임을 늦춘다.
그리고 유더 자신이 구속술식을 놈의 몸에 때려박는다.
“카하하하하하!”
시시오트가 날카로운 웃음을 터트리더니 양팔을 동시에 휘두르기 시작했다.
유더는 일부러 그레이트 게이트를 등졌고, 열 개도 넘는 참격이 유더가 머물렀던 공간을 가르고 그레이트 게이트와 충돌했다.
카카칵!
어찌나 날카로운지 그 두껍고 단단한 그레이트 게이트에 몇 개나 되는 깊은 선이 그어졌다.
유더는 숨을 멈추었다. 숨을 내뱉고 토하는 동작조차 지금의 유더에게는 사치였다.
집중하고 또 집중했다.
구천구문 이문의 개방과 함께 깨어난 오성이 보다 넓고 예민한 감각을 유더에게 부여했다.
시시오트의 무서운 점은 공간단열참의 범위가 무척이나 방대하다는 사실이었다.
때문에 거리를 벌리는 것은 오히려 좋지 못 했다. 놈이 연달아 공간단열참을 날려대면 오히려 회피가 불가능한 상황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지근거리에서 붙어 싸운다. 놈의 참격을 한 번에 하나씩만 피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든다.
성십자수호단의 주문이 완성되었다.
금빛 사슬 수십 개가 시시오트를 향해 뻗어나갔다.
다시 한 번 공간단열참.
시시오트가 몸을 회전시키며 몇 번이나 공간을 갈랐고, 금빛 사슬들 역시 갈라졌다.
하지만 효과는 충분했다.
시시오트가 돌아섰으니까. 유더가 아닌 다른 곳에 참격을 날렸으니까.
그야말로 찰나.
너무나 짧고 짧은 시간.
하지만 그것을 파고드는 것이 가능한 자가 있었다.
코델리아의 검은 칼날이 공간을 가로질렀다.
정확한 타이밍에 맞춰 뻗어나간 그것이 시시오트의 사각을 파고들었다.
그리고 폭발했다.
코델리아가 아니었다. 시시오트가 전신을 에워싼 마력을 폭발시킨 결과였다.
공기가 뒤흔들렸다. 코델리아의 검은 칼날은 분쇄되었고, 멀리 서 있던 성십자수호단과 병사들은 여파를 견디지 못 하고 나자빠졌다.
코델리아는 이를 악물었다.
검은 칼날이 분쇄되는 순간 전해져온 마력의 리바운드를 견뎌내며 또 하나의 마법을 완성했다.
백사의 마정석을 흡수함에 따라 손에 넣은 힘.
상대와 눈이 마주친 순간에만 사용할 수 있는 그것.
눈이 마주쳤다.
시시오트는 검은 칼날을 분쇄했으니까.
악마의 마력감지로 누가 검은 칼날을 날렸는지 파악했으니까.
바란대로였다.
시시오트와 눈이 마주친 그 순간 코델리아의 푸른 눈동자가 마침 뱀의 그것처럼 변했다.
그 옛날 백사가 가졌던 마안의 힘을 발동시켰다.
“아악!”
코델리아가 비명을 질렀다. 두 눈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하지만 코델리아는 눈을 감지 않았다. 억지로 견뎌냈다.
그리고 그 결과.
시시오트가 정지했다.
아주 짧은 순간.
하지만 참격을 날리기 위해 돌아섰던 순간에 비하면 한 없이 긴.
선풍.
질풍이 일었다. 술식이 새겨진 종이를 덧씌운 파워 피스트에서 황금빛 섬광이 일었다.
“융카테르고 시시오노 지르반스톤.”
유더가 말했다. 길고 긴 진명을 외우는 그때 유더의 주먹이 시시오트의 가슴에 닿았다.
코델리아가 결국 눈을 감았다. 양손으로 두 눈을 덮으며 무너지듯 쓰러졌다.
하지만 시시오트는 참격을 날리지 못 했다.
넋이 나간 얼굴로 유더를 보았다.
어떻게.
“이렇게!”
되도 않는 대답을 내놓으며 유더가 손바닥을 펼쳤다. 시시오트의 가슴에 새겨진 구속술식의 황금빛에 손바닥을 올리며 다시 한 번 소리쳤다.
“융카테르고 시시오노 지르반스톤!”
“아아악!”
시시오트가 비명을 질렀다. 황금빛이 놈을 집어삼켰고, 놈이 전신에 두르고 있던 무시무시한 마력이 순식간에 쪼그라들었다.
유더는 숨을 삼켰다. 주먹을 당기며 소리쳤다.
“코델리아!”
성십자 지르기가 작렬했다. 구속술식이 걸린 직후였기에 시시오트는 제대로 반응하지 못 했다. 놈의 턱이 돌아갔고, 유더는 연달아 뇌성박을 펼쳤다. 놈의 전신을 두드리며 다시 한 번 소리쳤다.
“코델리아!”
부름이었다.
그리고 코델리아가 응답했다.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손을 뻗었다. 마녀화 상태인 코델리아의 마력 감지 능력은 아직 개발이 덜 된 지금조차 하급 악마에 필적했다.
마력을 감지한다.
그곳에 마력을 찔러넣는다.
검은 칼날이 다시 한 번 공간을 가로질렀다. 엉망진창으로 얻어맞고 있는 시시오트의 등을 파고들었다.
“크아악!”
시시오트가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유더는 양주먹을 당겼다.
성십자 지르기에 이은 기술.
양손에 성십자를 만든다.
두 개의 성십자를 겹쳐 두 배 이상의 위력을 자아낸다.
쌍십자 지르기.
좋았다. 하지만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코델리아와 마찬가지로 유더 또한 새로 얻은 힘을 활용하였다.
음과 양.
오른손의 성십자가 음기를 발했다.
왼손의 성십자가 양기를 발했다.
“우오오!”
유더의 양주먹이 시시오트의 가슴에 꽂혔다. 두 개의 십자가가 놈의 육신을 파고들었고, 그 안에서 서로 맞물려 폭발했다.
콰가가가가강!
마누엘라의 극대소멸주문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음과 양의 두 기운이 서로 충돌하며 쌍십자 지르기 이상의 파괴력을 만들어냈다.
“커허!”
유더 역시 멀쩡하지는 않았다. 양팔이 화상이라도 당한 것처럼 붉게 달아올랐고, 입술을 따라 한줄기 선혈이 흘렀다.
하지만 충분했다.
시시오트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유더와 코델리아의 가슴께에 새하얀 빛의 고리가 생겨났다.
“잡았어? 내가 막타 쳤어?”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주저앉아 있던 코델리아가 허공을 더듬으며 물었고, 유더는 입가에 피를 닦으며 빛의 고리를 세었다.
유더 자신이 다섯, 코델리아가 넷.
하지만 유더는 선의의 거짓말이라는 것을 할 줄 아는 남자였다.
“어, 쳤어. 네가 잡았어.”
“나이스! 막타다! 막타야!”
좋아하니 된 거겠지.
기쁜 얼굴로 픽 쓰러지는 코델리아의 모습에서 묘한 기시감을 느낀 유더는 다시 시선을 돌렸다.
마음 같아서는 새로 얻은 타이틀을 지긋이 감상하고 싶었지만 일단 우선적으로 처리해야 할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성십자수호단과 흐레스벨그 백작가의 기사들.
예상 그대로의 얼굴을 하고 있는 그들을 마주하자 넋이 나가있던 흐레스벨그 백작가의 기사 가운데 하나가 새삼 소리쳤다.
“유더 바이엘! 코델리아 체이스!”
유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대로였으니까. 일단은 정체를 밝히고 이야기를 이어나갈 생각이었으니까.
하지만 기사의 말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환장의··· 아니, 아니! 환상의 커플!”
“헉! 진짜로?”
“저들이 바로 그 환장의 커플?!”
“환상, 환상. 도련님이 조심하라고 했잖아.”
“아, 환상. 그래, 환상.”
저게 대체 무슨 대화란 말인가.
그리고 도련님은 루카스를 말하는 것일까?
‘루카스?’
대체 무슨 말을 하고 다닌 거니.
그리고 환장의 커플이라니. 그건 또 뭐고?
조심하라고 경고한 건 너도 자주 헷갈린다는 거니?
“흠흠, 전 흐레스벨그 백작가의 기사 필 라이너라고 합니다.”
기사들 가운데 수장으로 보이는 자가 앞으로 나와 말했고, 그러자 퍼뜩 정신이 들었는지 성십자수호단 쪽에서도 여인 한 명이 나와 말했다.
“성십자수호단의 죠안입니다.”
필 라이너는 삼십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덩치 큰 기사였고, 죠안은 단발인 게 아쉬울 정도로 멋진 황금빛 머리칼을 가진 20대 후반의 여인이었다.
“···아시다시피 유더 바이엘입니다. 일단 제 약혼녀부터 챙긴 뒤에 이야기를 했으면 합니다.”
성십자수호단 쪽에도 희생자가 있는 상황이었다. 양쪽 모두 일단은 수습할 시간이 필요했다. 유더는 코델리아를 향해 달려갔고, 그 모습을 보던 기사들 가운데 하나가 다시 말했다.
“역시 서로 죽고 못 사는 세기의 커플······! 도련님 말씀대로군. 도련님 말씀대로야.”
루카스. 대체 무슨 말을 하고 다닌 거니.
유더는 뒤를 돌아보고픈 충동을 억누르며 앞만 보았고, 이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온몸으로 민망함을 표출하고 있는 코델리아를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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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3장 - 태양화초 #4 (수정)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