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엔딩메이커-50화 (50/473)

< 제14장 - 환상의 커플 >

* 이전 화에서 일부 수정이 있었습니다. 앞뒤 맥락을 맞추기 위해 시시오트에게 병사들이 죽는 장면을 겁에 질려 꼼짝도 못 하는 상황으로 수정했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양해 부탁드립니다.

제14장 - 환상의 커플

시시오트를 쓰러트린 이후의 이야기는 유더의 예상대로 진행이 되었다.

일단 성십자수호단과 흐레스벨그 백작가가 이곳에 있는 이유.

성십자수호단은 악마의 각성을 감지해 병력을 급파했고, 흐레스벨그 백작가는 유더의 예상대로 1차로 파견한 레인져들이 전멸한 이후 파견된 2차 병력들이었다.

“태양화초를 얻기 위해 프로스트 앤빌에 들어갔다가 악마의 손의 습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놈들에게서 악마의 진명과 구속술식을 얻을 수 있었고요. 악마를 제어하기 위해 놈들이 가지고 있던 것들입니다.”

어떻게 진명과 구속술식을 알고 있었느냐는 죠안의 물음에 물 흐르듯이 답한 유더는 흐레스벨그 백작가 역시 잊지 않았다.

“흐레스벨그 백작가에는 이래저래 폐를 많이 끼치게 되어 송구스럽습니다. 태양화초를 구해 제 병에 차도도 있었으니, 직접 흐레스벨그 백작가에 찾아가 그간의 일에 대해 말씀드리고 용서를 구할 생각입니다.”

이번에도 청산유수 같은 이야기에 필 라이너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딱히 무어라 할 이야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애당초 나랑 코델리아 찾아 헤맨 건 다른 기사였을 테니까.’

필의 입장만 보자면 유더와 코델리아는 갑자기 툭 튀어나와 자신들을 구해준 은인이었다. 감사하면 감사했지, 이렇다 할 유감은 없었다.

그러니 그냥 적당히 마무리 짓고 썬더둠으로 돌아갈 생각뿐, 딱히 유더를 어떻게 해야겠다는 마음은 없었다.

하지만 죠안은 생각이 다른 모양이었다.

“유더 공자, 저희와 함께 가시지 않겠습니까?”

성십자수호단으로의 초대.

원작에서도 성십자수호단과 몇 번 얽히면 발생하는 이벤트였는데, 유더는 일단 고개를 가로저었다.

‘성십자수호단도 좋지만 일단 북방 야만족 이벤트부터 어떻게 해야 하니까.’

레나 역시 구해야 했고.

“일단 흐레스벨그 백작가에 먼저 찾아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얻은 구속술식은 넘겨드릴 터이니, 성십자수호단에 방문하는 일은 차일로 미뤘으면 합니다.”

“···알겠습니다. 저희 측에서 다시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못내 아쉬운 얼굴로 죠안이 말하자 어느 정도 일단락이 되었다.

“그럼 전 다시 약혼녀인 코델리아 양을 돌보러 가겠습니다. 출발은 모레 아침이라 하셨지요?”

“네, 그럴 예정입니다. 이미 말씀해주신 것들도 있지만··· 그래도 저희가 직접 조사해보긴 해야 해서요.”

“이해합니다. 그럼 전 물러갈 터이니 좋은 밤들 되시기를.”

빙긋 미소 짓는 것으로 말을 마친 유더는 필의 막사를 나왔다.

‘음··· 모레 아침이라.’

나쁘지 않았다. 아니, 딱 좋은 시기라 해도 좋았다.

홀로 고개를 끄덕인 유더는 잠시 진지 내부를 돌아보았다.

기존에 세워져 있던 커다란 천막 몇 개에 새로 더해진 천막이 하나.

‘그래도 다행이야.’

병사들 가운데 죽은 자가 없어서.

비록 성십자수호단에서 희생자가 나오긴 했지만, 냉정하게 말해 굉장히 선방했다고 해도 좋을 상황이었다.

물론,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미 희생이 상당하기는 했다.

특히 성십자수호단의 경우 처음 시시오트의 움직임을 봉하는 와중에도 죽은 자가 많아 결과만 놓고 보면 아홉 가운데 여섯이 죽고 겨우 셋만 살아남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다행이라는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원작에서 시시오트가 날뛰었을 때는 수십 명도 넘는 성십자수호단과 백 명 가까운 숫자의 병사들이 죽었으니 말이다.

“후우.”

하지만 인명을 숫자로 헤아리는 것은 역시 씁쓸한 일이었다.

잠시 옛날 생각이 난 유더는 한숨을 한 번 내쉰 뒤 코델리아가 기다리고 있을 천막으로 향했다.

“아빠 왔어요?”

천막 안에 들어가자마자 코델리아의 귀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간이침대 위에 누워있었는데, 눈에는 붕대를 감은 상태였다.

반사적으로 주변을 둘러본 유더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야야, 나 아니면 어떡하려고 그러냐.”

“어떡하긴, 약혼녀한테 아빠라 부르게 하는 변태라고 소문나는 거지.”

“저기, 서로의 명예를 위해 그건 안 좋지 않을까?”

“농담이야, 농담. 너인거 알고 한 거야.”

“어떻게?”

“어··· 그냥 감으로?”

“퍽이나 위로가 되는 말이군.”

유더가 뚱한 얼굴로 말하자 코델리아는 까르르 웃음을 흘렸다.

“아무튼 이야기는 잘 했고?”

“잘 했지. 그보다 괜찮은 거 맞아?”

“괜찮아. 괜찮을 거야. 아까 성십자수호단에서도 봐주고 갔는데, 그냥 좀 무리해서 그런 거래.”

백사의 마안.

프로스트 앤빌에서 코델리아가 새로이 손에 넣은 힘.

비록 하급이라고는 하나 한창 날뛰고 있던 악마를 제압할 정도로 강력한 힘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나중가면, 코델리아의 마력이 더 강해지면 무리 없이 쓸 수 있을 거라 해도 지금은 무리였다.

더욱이 다른 곳도 아닌 눈에 무리가 가는 기술이었으니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너무 남용하지는 마.”

“어머나, 걱정해주는 거야?”

“걱정하는 거 맞아.”

유더의 목소리가 진지해지자 코델리아는 순간 입술을 움츠리더니 이내 코웃음을 쳤다.

“흥,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겠네.”

“야, 너 지금 얼굴 빨갛거든?”

“아닌데, 하나도 안 빨간데.”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슬쩍 자기 뺨을 만져보는 코델리아였다.

유더는 다시 작게 웃은 뒤 코델리아 곁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인기척을 느낀 코델리아가 돌연 몸을 일으켜 앉더니 허공을 더듬으며 말했다.

“저기 유더야.”

“응?”

“이쪽으로 와서 내 손 좀 잡아봐.”

“손을?”

“어, 손을.”

갑자기 무슨 일일까.

하지만 코델리아의 표정이 꽤나 진지했기에 유더는 두말없이 다가간 뒤 코델리아의 손을 잡았다.

“잡았어.”

“그래, 잡았다. 이놈.”

돌연 목소리를 높인 코델리아는 유더의 손을 잡아당기더니 비어있는 왼손으로 유더를 마구 때리기 시작했다.

“야야! 아파! 아파!”

“아프라고 때리는 거거든? 야, 내가 모를 줄 알았어? 막타 네가 쳤지? 응?”

“아, 아닌데!”

“아니긴 개뿔이!”

눈이 안 보이는 와중에도 전투에 대한 감각만은 여전한지 정확히 때린 곳을 또 때리는 코델리아였다.

“어, 어떻게?”

“감이 애매했거든.”

“감?”

“어, 막타 쳤을 때 특유의 손맛이 있는데, 그게 없었어.”

코델리아의 말에 유더는 멍한 얼굴이 되었다.

감이라니.

막타 쳤을 때 특유의 손맛이 없어서 알아차렸다니.

“코델리아 너.”

“나 뭐.”

“짐승이지? 사람 아니지?”

“왈왈!”

코델리아는 개짖는 소리를 내며 유더를 더 때렸고, 유더는 확신했다. 다른 건 몰라도 감 하나만큼은 진짜 짐승 수준인 코델리아라고 말이다.

“하아, 아무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하나야.”

한참을 때리다 지쳤는지 어깨를 살짝 늘어트린 코델리아가 유더의 손을 놓으며 말했다.

반사적으로 손을 얼른 뺀 유더가 물었다.

“뭔데?”

“앞으로는 그러지 마. 그리고 혹여나 막타를 양보해야겠다는 생각도 하지 말고.”

“코델리아?”

“목숨이 걸린 진짜 싸움이니까. 적을 확실히 쓰러트리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니까. 알았지?”

“···그래, 알겠어.”

생각도 못한 어른스러움에 유더가 고개를 끄덕이자 코델리아가 다시 빙긋 웃었다.

“물론 그렇다고 막타 뺏길 생각은 없지만. 스스로의 손으로 쟁취해주겠어.”

씨익 웃으며 주먹을 움켜쥐는 모습이 무척이나 매력적이었다.

유더가 저도 모르게 멍하니 바라보자 이번에도 특유의 감으로 눈치라도 챘는지 코델리아가 잰 척하며 말했다.

“왜? 새삼 또 반할 것 같아?”

“아니, 애당초 반한 적이 없거든요?”

“네, 아빠. 그러시겠죠.”

까르르 웃은 코델리아는 그대로 자리에 누운 뒤 말을 이었다.

“아무튼 다녀온 일은 어떻게 됐어?”

“모레 아침에 출발한다고 하더라고.”

“그럼 늦어도 내일 밤에는 튀어야겠네?”

“바로 그거지.”

필 앞에서야 이래저래 감언이설을 늘어놓았지만 지금 흐레스벨그 백작가로 돌아갈 수는 없었으니까.

‘북방 야만족의 대침공······.’

유더의 메인 시나리오 시작 시점까지는 아직도 두어 달 정도 남은 상황이었지만, 그때까지 기다려서는 늦었다.

유더와 코델리아는 유더의 메인 시나리오인 북방 야만족의 대침공을 근본부터 뒤틀어버릴 생각이었으니 말이다.

‘할 수 있어.’

지금 시점이라면 아직 개입이 가능했으니 말이다.

원작의 전개는 다음과 같았다.

갈까마귀들이 지키는 국경선 너머에 존재하는 야만의 땅.

그곳에 자리를 잡고 살아가는 야만족들은 사실 하나가 아니었다.

수십 개의 크고 작은 부족들로 나뉘어 있었는데, 그중 성난뿔소라는 부족이 있었다.

딱히 약한 것도 아니고 강한 것도 아닌 딱 중간쯤 되는 세력을 가진 부족.

눈보라가 몰아치던 날 누더기를 걸친 예언자 하나가 성난뿔소 부족을 방문해 말했다.

“성난뿔소에서 위대한 왕이 나올 것이다. 왕이 될 자여, 위대한 분의 힘을 받아 세계를 휩쓸지어다.”

신비한 힘을 지닌 예언자의 말을 옳게 여긴 성난뿔소 부족의 족장은 예언자의 요구대로 의식을 준비해 위대한 분의 힘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강해진 성난뿔소 부족이 야만족들을 일통한 뒤에 밑으로 밀고 내려오는 스토리였지?”

“맞아, 예언자는 악마 추종자였고, 성난뿔소 부족을 시작으로 북부 야만족 모두가 악마의 힘에 타락해버리는··· 그런 스토리지.”

영웅전기2 전체로 봐도 무척이나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 침공으로 인해 세일룬 북부 국경이 무너지고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을 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악마 추종자들이 난립했으니 말이다.

“악마의 눈.”

예언자의 배후에 자리한 악마 추종자 집단.

악마의 손이 음욕의 대군주 아스모데우스를 모신다면, 악마의 눈은 타락의 대군주인 벨리알을 모셨다.

“예전부터 생각했는데, 조직 이름을 너무 대충 지은 거 같지 않아?”

“좀 그런 감이 없잖아 있기는 하지.”

악마의 손과 눈만이 아니었으니까.

앞으로 등장할 악마 추종자 집단 중에는 악마의 입과 악마의 뿔도 있었다.

“어찌되었든 제일 좋은 방법은 침공 자체를 못 하게 하는 거야. 즉-.”

“야만족 통일 자체를 못 하게 한다?”

“맞아, 바로 그거야.”

일단 야만족을 통일해야 침공도 있는 법이었으니까.

그리고 야만족의 침공을 막는 방법은 간단했다.

“성난뿔소 부족과 대적할 대항마를 만드는 거지.”

“퍽이나 간단하겠다.”

“뭐, 아예 0부터 시작하면 솔직히 시도 자체가 어려운 일이겠지만, 너도 알잖아? 비운의 영웅이 있다는 사실을.”

“붉은바람의 아버지.”

플레이어블 캐릭터 중 유일한 야만족인 붉은바람.

그녀의 아버지이자 위대한폭풍 부족의 족장인 붉은폭풍은 악마의 유혹에도 끝까지 타락하지 않은 걸출한 영웅이었다.

원작에서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하는 그는 아직 살아 있었다.

그러니 그를 계속 살아있게 한다.

타락한 야만족에 맞설 야만족의 영웅으로 우뚝 서게 만든다.

“성공하면 원작의 흐름을 크게 바꿀 수 있을 거야.”

“신난다.”

상상만 해도 즐거운 일이었다.

더욱이 이번에는 제법 필사적인 이유도 붙어 있었다.

‘원작대로면 아버지도, 아버님도 대침공 때 죽음을 맞이하시니까.’

바이엘 백작과 체이스 백작.

잠시 두 사람의- 특히나 체이스 백작의 얼굴을 떠올린 유더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살려야 한다.”

“맞아, 살려야 해. 살릴 수 있을 거야.”

코델리아가 환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유더가 돌연 코델리아의 손을 다시 잡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일이 있어.”

“뭐, 뭔데. 손잡아야 할 수 있는 일이야?”

“아니, 그건 아니고.”

다시 손을 놓은 유더는 대신이라도 되듯 얼굴을 가까이하며 말했다.

“붉은폭풍을 살리기 위해서는 우리가 국경 넘어 야만족의 땅으로 가야만 해.”

“알아, 그러려면 붉은폭풍의 병을 고칠 약을 찾아 몰래 내려온 붉은바람을 만나야 하고.”

코델리아가 슬쩍 머리를 뒤로 빼며 답하자 유더가 바로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여길 빠져나가야 하고.”

이쯤 되니 코델리아도 눈치를 챌 수밖에 없었다.

유더가 말하고자 하는 것.

아니, 지금 유더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

“잠깐, 잠깐잠깐잠깐.”

“어, 잠깐.”

“지금 편지 필요하다는 거지?”

“그냥 휑하니 사라질 수는 없으니까? 태양화초 먹고 건강해졌다는 이야기 정도는 남겨야 하고.”

“오케이, 좋아. 거기까지는 이해해. 그럼 이번에는 꼭 내가 남길 필요 없겠네?”

“음 그건······.”

“또 전과 어쩌고 하면 뒤진다?”

“흠흠, 마님 말씀대로입니다.”

코델리아 말마따나 굳이 코델리아가 편지를 남길 필요는 없었다.

“이미 거의 기정사실로 굳혀지기도 했고.”

“응? 뭐가?”

“아니, 아무 것도.”

유들유들한 미소를 흘린 유더는 고개를 갸웃하는 코델리아에게 말했다.

“아무튼, 그럼 이번엔 내가 쓸까?”

“응, 네가 써. 네가 꼭 써야 해. 알았지?”

“뭐··· 그렇다면야. 이번에는 제가 쓰도록 하죠.”

“헤헤, 신난다.”

너도 한 번 당해보시지.

코델리아는 너무나 밝게 웃었고, 유더는 어쩐지 알 수 없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모레 새벽.

계획대로 흐레스벨그 백작가의 진지를 벗어난 두 사람은 인적 없는 설원 위에서 잠시 멈춰 섰다.

“좋아, 좋아. 이제 조금 있으면 사람들이 편지를 발견하겠지?”

“하겠지.”

유더가 쓴 편지.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친애하는 루카스 공자, 목숨보다 사랑하는 코델리아 양과의 밀월여행을 조금만 더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태양화초를 먹어 건강해지기도 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제멋대로인 행동 때문에 흐레스벨그 백작가에 폐를 끼치게 되어 정말 죄송합니다.  추신. 지금 정말 행복합니다.”

유더가 참담한 얼굴로 편지 내용을 읊조리자 코델리아가 제자리에서 방방 뛰었다.

“너무 좋아, 너무 좋아 죽겠어.”

“그렇게 좋아?”

“그렇게 좋아!”

“음, 네가 날 그렇게 좋아할 줄은 몰······.”

“미친놈이 뭐라는 거야.”

“뭐, 아무튼. 마님께서 만족하셨다면 이 돌쇠는 기쁠 따름이옵니다. 갈 길이 머니 서두르시죠.”

거기까지 말한 유더는 연극풍으로 멋들어진 예까지 한 번 표한 뒤 앞장서기 시작했다.

그리고 코델리아는 그런 유더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뭔가 이게 아닌데.”

코델리아 자신이 기대한 것은.

“안 와?”

“가!”

벌써 멀찍이 앞서 나간 유더에게 소리친 코델리아는 입술을 한 번 삐쭉인 뒤 발걸음을 서둘렀다.

&

< 제14장 - 환상의 커플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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