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6장 - 겨울꽃 (수정) >
제16장 - 겨울꽃
지금으로부터 약 300년 전, 훗날 토목왕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왕이 있었다.
그는 북방 야만족의 침공을 막기 위해 북부 국경 전체를 가로지르는 대장벽을 건설하였다.
어마어마한 대공사였다.
토목왕의 치세 5년째에 시작한 공사는 30년이 넘게 이어져 토목왕의 사후 3년 째 되는 해에 겨우 마무리가 되었다.
북부의 장벽과 이를 지키는 갈까마귀들.
하지만 장벽도, 갈까마귀들도 완벽한 것은 아니었다.
국경 전체를 뒤덮다보니 장벽 전체가 균일한 높이와 두께, 방어력을 갖춘 것은 아니었다.
갈까마귀들의 숫자에는 한계가 있으니, 국경 전체를 촘촘히 지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리하여 생기는 필연적인 틈.
그저 장벽에만 방어를 맡겨놓은 지대.
“이쪽이다.”
붉은바람이 국경을 넘은 장소가 바로 그런 곳이었다.
유더는 두말없이 붉은바람의 인도를 따랐고, 아예 말까지 같이 타고 있는 코델리아는 붉은바람의 등에 머리를 묻은 채 꾸벅꾸벅 졸았다.
그렇게 다시 반시간 남짓.
인적이 드물다 못 해 아예 사라져버린 장소에서 유더는 잠시 휴식을 취하기로 결정했다.
“순찰 돌면 바로 티 나겠네.”
설원 위에 발자국이 선명했으니까.
하지만 별 수 없는 일이었다.
유더는 적당한 나무 밑에서 눈을 쓸어내 앉을 자리를 만들었다.
“코델리아, 부탁할게.”
“어? 어.”
여전히 졸린 얼굴로 반쯤 졸고 있던 코델리아가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이더니 물통에 열을 가해 차가운 물을 그나마 미지근하게 만들었다.
아무리 인적이 드문 장소라 해도 갈까마귀들의 감시 영역 안이기는 했으니까.
불을 피워 연기라도 냈다가는 바로 들킬 위험이 있었다.
“자, 육포.”
“육포 딱딱해.”
투덜거린 코델리아였지만 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아는 터라 붉은바람에게도 나눠준 뒤 질겅질겅 육포를 씹기 시작했다.
그렇게 말없이 식사를 이어간 지 얼마나 지났을까.
돌연 붉은바람이 코델리아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응? 왜?”
코델리아가 웃으며 묻자 붉은바람은 단어를 고르듯 잠시 지체하다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코델리아, 나, 궁금한 것이 하나, 있다.”
“응응, 뭔데?”
“시발? 씨발? 그게 뭔가?”
“···어?”
코델리아가 멍한 얼굴로 되묻자 붉은바람이 다시 말했다.
“코델리아, 자주, 그런다. 유더와 비밀 말을, 사랑의 말을, 나눌 때.”
대륙공용어도 아닌 무언가.
둘만이 사용하는 사랑의 밀어.
가만히 듣고 있다 보면 유독 자주 나오는 발음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씨발이었다.
“아, 아니. 잠깐, 잠깐만.”
코델리아는 당황했다. 어찌나 당황했는지 사랑의 말 운운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미치지 않았다.
‘뭐, 뭐라고 설명하지?’
오랜만에 한국어로 대화를 하다 보니 옛날 버릇이 살아난 것뿐인데.
끙끙 앓던 코델리아는 유더를 돌아보았고, 유더는 눈빛으로 답했다.
‘업보로다, 업보. 그러게 누가 그렇게 욕을 하래?’
‘욕 아니거든? 감탄사거든?’
하지만 부질없는 다툼이었다.
코델리아는 도움이 안 되는 유더 대신 다시 붉은바람을 보았고, 최대한 침착하게 말했다.
“그··· 씨발은 말이야.”
“그래, 씨발.”
붉은바람이 웃으며 말하자 코델리아는 움찔했다. 너무너무 좋아하는 붉은바람이 자신에게 욕을 하는 기분이 들어서였다.
“아···무튼 그거. 그건··· 감탄사야.”
“감탄사?”
“어··· 감탄사. 막 멋져! 굉장해! 대단해! 뭐··· 이런 거?”
되도 않는 소리이긴 했지만, 생각해보면 실제로 코델리아 자신은 그런 용도로도 사용했으니까.
코델리아의 필사적인 설명을 들은 붉은바람은 눈을 반짝반짝 빛내더니 이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코델리아 씨발. 유더 씨발. 두 사람 모두 씨발!”
해맑게 외친 붉은바람은 간질간질한 시선을 코델리아에게 보냈다.
대답을 요구하는 눈빛 같았다.
“그, 그래··· 붉은바람도 씨발.”
“코델리아 씨발, 너무 좋다, 씨발!”
붉은바람이 코델리아를 끌어안으며 욕설- 아니, 감탄사를 반복하자 결국 유더는 웃음을 참지 못 했다.
“크큭··· 큭··· 하아, 하아··· 이게 바로 업보인가.”
붉은바람의 해맑은 욕설이 충격적이긴 했지만, 이래저래 도움이 되기는 할 것 같았다.
이러면 교육문제(?) 때문에라도 코델리아 역시 감탄사 사용을 줄일 터이니 말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러한지, 반사적으로 감탄사를 연발하려던 코델리아는 입을 꾹 다물고 괴로워했다.
“아, 너무 재밌다. 너무 즐거워.”
“유더 즐겁나?”
“어, 두 사람 사이가 무척 좋아서 즐거워.”
대충 얼버무린 유더는 눈을 흘기는 코델리아를 보다 다시 붉은바람에게 말했다.
“붉은바람, 이대로 계곡으로 진입하는 거지?”
“맞다, 그런데 계곡 험하다. 비좁다. 말은 못 간다.”
붉은바람의 말에 코델리아는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지만 유더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대충 짐작하고 있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갈까마귀들의 감시가 소홀할 정도의 장소니 당연하겠지.’
“유더, 그럼 말들은 어떡해?”
생각과 동시에 코델리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더는 별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방생해야지.”
“방생한다고?”
“어, 그대로 야생마가 되거나··· 누구 운 좋은 사람이 주워가겠지.”
유더의 대답에 코델리아는 무척이나 싫은 표정을 지었지만 정말로 별 수 없는 일이었다.
“이쯤에서 방생하자. 계곡 깊이 데려가면 얘들도 나오기 힘들 테니까.”
“···알았어.”
우울한 목소리로 답한 코델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여기까지 타고 온 말의 안장을 풀었다. 그간 정이 많이 들었는지 손길 하나하나에 아쉬움이 묻어났다.
‘하여간 정이 많아요.’
흐뭇하게 바라보던 유더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말의 안장을 푼 뒤 자질구레한 짐들을 하나로 모았다.
그리고 마침내 다가온 이별의 시간.
유더와 코델리아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각자의 말의 엉덩이를 때려 앞으로 달려나가게 했다.
하얀 눈밭 위를 달리는 말이 두 마리.
“잘 가, 유더.”
“잘 가, 코델리아.”
동시에 말한 두 사람은 서로를 돌아보았고, 다시 바로 말했다.
“코델리아? 말 이름을 코델리아라고 지은 거야?”
“그러는 너는 유더라고?”
“아니, 숫말이었잖아.”
“그렇게 따지면 나도. 암말이었잖아.”
두 사람의 말에 붉은바람이 까르르 웃었다.
“마음 잘 통한다. 둘. 정말 환상적인 씨발이다.”
밝고 해맑고 예쁜 미소.
‘쟤 좀 진짜 어떻게 해봐.’
‘노, 노력해 볼게.’
눈빛 대화를 마친 유더와 코델리아는 새로 배운 어휘를 계속 써먹으려 하는 붉은바람을 만류하며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
시간이 흘렀다.
오후가 되자 몰아치기 시작한 눈보라를 헤치며 나아간 일행은 계곡 초입에 도달할 수 있었다.
“여기만 지나면 넓어진다. 조금만 고생하면 된다.”
한 사람이 겨우 지날 것 같은 좁은 길을 지나며 붉은바람이 말했고, 유더는 오늘밤 야영을 해야 할지, 아니면 밤새 이동해야 할지를 고민했다.
그리고 코델리아가 멈춰 섰다.
“코델리아?”
뒤늦게 발견한 유더가 돌아서며 물었지만 코델리아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 미간을 찌푸린 채 등 뒤를 돌아보았다.
“저기, 좀 이상한 이야기인데··· 감이 안 좋아.”
아까부터 자꾸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등 뒤에서 누군가가 창을 찔러오는 것만 같았다.
다른 이의 말이었다면 그냥 넘겼을 터였다.
하지만 코델리아의 말이었다.
‘코델리아의 감은 특별해.’
단순히 감이 좋다- 수준에서 끝날 이야기가 아니었다.
영웅전기의 세계인 플레이아데스에는 각종 이능들이 존재했다.
사실 코델리아에게 말을 하지 않아서 그렇지, 유더 자신의 기억력과 계산 능력은 구천구문 이문을 열어 오성을 깨우기 전에도 이미 지구에 있던 시절보다 강화된 상태였다.
코델리아의 감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예지에 가까운, 이능에 속하는 힘이 아닐까.
실제로 코델리아의 감은 마녀화를 습득한 이후 예전보다 훨씬 더 정확도가 높아진 상태였다.
“아무 것도 안 보인다.”
붉은바람이 말했다.
윈터 엘프의 피를 이은 그녀는 인간보다 우월한 시각을 가졌으니, 그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건 근방에 적이 없다는 이야기가 되었다.
하지만 유더는 코델리아의 감을 믿었다.
“서두르자.”
유더는 거의 달리듯 걷기 시작했고, 코델리아 역시 속도를 높였다. 두 사람이 그러니 붉은바람 역시 따라 달리는 수밖에 없었다.
좁을 길이 끝나고 넓은 길이 나왔다. 절벽에 감싸인 분지 지형이었다.
여전히 아무도 없었다. 셋 만의 공간처럼 적막하기만 했다.
하지만 코델리아는 계속해서 뒤를 돌아보았다.
불길한 기분이 점점 더 강해지고 있었다. 등 뒤를 찌르는 감각 역시 강해져만 갔다.
“커헝!”
바로 그 순간 짐승의 포효가 머리 위를 덮쳐왔다.
계곡 위.
커다란 개 세 마리가 가파른 벽을 타고 내려왔다. 검붉은 털과 노란 안광이 이는 두 눈은 평범한 야생동물의 것이 아니었다.
“헬하운드!”
악마견.
세 마리가 끝이 아니었다. 계곡 위로 더 많은 악마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달려!”
소리친 유더는 바로 매고 있던 짐을 버리고 붉은바람을 등에 업었다. 코델리아 역시 즉각 마녀화를 발동시키더니 자신과 유더에게 헤이스트를 걸었다.
“커헝!”
“컹!”
열 마리도 넘는 헬하운드들이 거의 쏟아지듯 벽을 타고 내려왔다.
유더는 이를 악물고 오직 달리는 것에만 집중했다. 다수의 적을 요격하는 것은 유더 자신이 아닌 코델리아의 특기였다.
“저리 꺼져!”
검붉은 머리칼을 휘날리며 코델리아가 마력을 발산했다. 열 개도 넘는 매직 미사일들이 마치 유도탄이라도 된 것처럼 헬하운드들의 미간을 강타했다.
실로 신묘한 솜씨였다. 헤이스트를 걸고 달리는 와중에 저 정도의 컨트롤을 보일 수 있는 자는 세일룬 왕국 전체를 뒤져도 겨우 손에 꼽을 정도이리라.
미간을 얻어맞은 헬하운드들이 아무렇게나 나자빠졌다. 코델리아는 연속해서 그리스를 광범위하게 펼친 뒤 앞서 나간 유더를 따라잡았다. 그리고 스스로가 생각해도 이상한 이야기를 내뱉었다.
“뭔가, 뭔가 하나 더 느껴져!”
스스로도 무어라 설명하기 어려운 감각.
유더는 달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스 지대 덕분에 헬하운드들의 발이 묶여 거리가 제법 벌어져 있었다.
‘저것들은 선발대.’
아무리 인적이 드문 장소라지만 헬하운드 열 마리를 처음부터 데리고 왔을 리는 없으니, 근방에서 소환한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였다.
솔루지아가 움직였다.
지부장인 그녀가 턱 끝까지 치고 올라왔다.
어떻게 된 것일까. 통상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놈들이 자신들의 목적이 국경을 넘는 것이란 사실을 눈치챘다 할지라도, 이렇게 인적 하나 없는 곳에서 마치 매복했던 것처럼 공격해오는 것은 불가능했다.
태양화초 때처럼 장소가 특정된 것도, 목적을 유추할 수 있는 단서가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뭔가가 있다. 유더 자신이 알지 못 하는 무언가가.
유더는 거기서 생각을 끊었다.
일단 중요한 것은 솔루지아가 근방에 존재한다는 사실이었다.
유더는 계속해서 달리며 생각했다.
코델리아의 감.
그녀가 느낀 또 하나.
솔루지아가 아니었다.
솔루지아는 헬하운드들과 하나의 무리라 할 수 있었으니까.
애당초 애매모호한 감이었지만 그렇다 하여 아예 카오스 그 자체인 것은 아니었다.
다른 하나.
코델리아가 느낀 것.
“까악!”
유더와 코델리아가 동시에 하늘을 보았다.
까마귀가 보였다.
그리고 그 순간 유더는 이해할 수 있었다. 코델리아 역시 직감했다.
저것이었다.
코델리아가 느낀 또 하나.
작금의 위기를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저 까마귀를 따라야만 했다.
“갈까마귀?!”
뒤늦게 까마귀를 발견한 붉은바람이 두려움 섞인 목소리를 내었다.
북방 야만족인 그녀에게 있어 갈까마귀는 흉조 중의 흉조였으니까.
하지만 아니었다.
티 하나 없이 온통 칠흑인 저 새는 갈까마귀와는 달랐다.
순수한 까마귀.
그것이 의미하는 것.
“커헝!”
그리스 지대를 간신히 빠져나온 헬하운드들이 다시 속도를 높이며 짖어댔다.
유더는 놈들을 보는 대신 하늘을 보았다. 까마귀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한 마리씩 더해지는가 싶더니 어느새 하늘을 뒤덮을 정도가 되었다. 날갯짓 소리만으로 하늘을 찢을 것 같았다.
겁에 질린 붉은바람이 몸을 움츠렸다. 더욱이 그녀의 눈에는 지금 나아가는 방향의 끝이 보였다.
“절벽이다!”
낭떠러지였다. 하지만 유더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 빠르게 달렸다. 등 뒤에서 헬하운드들의 울음소리가 요란했다.
“커허헝!”
“컹!”
유더는 코델리아를 보았다. 코델리아 역시 그러했고, 고개를 끄덕였다. 시원하게 웃었다.
이 정도로 화려한 등장씬을 가진 인물은 영웅전기 전체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에 불과했으니까.
아니, 애당초 까마귀가 상징하는 자는 오직 하나뿐이었으니까!
“안겨!”
유더가 손을 뻗었다. 코델리아는 유더에게 몸을 던졌고, 유더는 붉은바람을 등에 업은 채 코델리아를 안았다. 함께 절벽 너머로 몸을 던졌다.
“꺄아악!”
붉은바람이 비명을 질렀지만 짧았다.
수십, 수백 마리의 새들이 만들어내는 날갯짓 소리가 주변의 모든 소리를 집어삼켰다.
까마귀 떼가 유더와 코델리아를 뒤덮었다. 코델리아는 유더의 목을 꽉 끌어안은 채 눈을 감았고, 유더 역시 그러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던 날갯짓 소리가 조금씩 잦아들었다.
단단한 지면.
발을 딛고 설 수 있는 장소.
잠시 비틀거린 유더였지만 이내 균형을 잡았다. 두 팔로 꼭 끌어안은 코델리아의 존재를 확인하며 천천히 눈을 떴다.
여전히 하얀 눈으로 뒤덮인 장소였다. 하늘로 날아오른 까마귀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사라졌다.
그리고 정면.
거친 숨을 토하며 서로에게 의지해 선 유더와 코델리아를 바라보는 자.
새하얀 머리칼과 마찬가지로 하얀 얼굴, 색이 진한 푸른 눈동자를 가졌지만 그 외는 모두 칠흑인 남자였다.
검고 긴 로브를 머리끝까지 눌러 쓴 그를 유더는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한 발 먼저 그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유더 바이엘이 카마엘님을 뵙습니다.”
검귀 카마엘.
성십자수호단의 여섯 단장 가운데 하나.
란디우스와 쌍벽을 이루는 영웅전기 1편의 주인공.
“란디우스의 제자.”
부름에 화답하듯 카마엘이 낮게 말했다. 유더와 코델리아를 향해 발걸음을 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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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6장 - 겨울꽃 (수정)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