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6장 - 겨울꽃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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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하면 검과 마법을 떠올리듯, 영웅전기의 세계인 플레이아데스에는 수많은 검사들이 존재했다.
전체 등장인물들의 반수 이상이 검을 사용했고, 플레이어블 캐릭터들 역시 검사의 비율이 높았다.
특히 각 편의 진주인공이라 할 수 있을 1편의 란디우스와 카마엘, 2편의 막시밀리언, 3편의 루이첼 네 사람 모두가 검을 주력으로 사용했으니, 진주인공이라 불리는 인물들은 죄다 검을 사용한 셈이었다.
“그러니 사대검사야 말로 영웅전기를 대표하는 강자들이라 할 수 있지.”
그 많고 많은 검사들 가운데서 유저들이 선정한 사대검사.
설정상으로 존재하는 칭호는 아니었고, 흔히 말하는 사천왕, 사대장처럼 일종의 밈이었지만 워낙 널리 쓰이다보니 영웅전기담에서는 사실상 공식 설정 취급하는 칭호였다.
“카마엘, 막시밀리언, 루터, 스칼렛.”
넷 중 누가 가장 강하느냐는 말이 많았지만, 어찌되었든 적과 아군을 통틀어 꼽히는 사대검사 가운데 일익을 당당히 차지하는 카마엘이었다.
‘영웅전기 시리즈 전체에 출연하는 유일한 인물이기도 하고.’
그래서 혹자는 카마엘이야말로 영웅전기 시리즈의 진정한 주인공이라 했다.
‘1편부터 등장해서 팬도 많은 편이니까.’
유더 자신도 란디우스를 더 좋아하긴 했지만, 전체 등장인물들 중에서 순서를 매기면 카마엘이 순위권에 들었으니 말이다.
‘어찌되었든 카마엘.’
검귀.
모든 것이 베일에 싸여 있는 수수께끼의 수장 엘렌디아를 제한다면 성십자수호단에서 가장 강한 자.
사대검사의 일인이며, 영웅전기 7대 명검 가운데 하나인 극한마검 알마스의 주인.
10년 사이에 충격적인 비쥬얼 변화를 겪은 란디우스와 달리 카마엘은 2편에 출연한 인물답게 익숙한 모습 그대로였다.
머리까지 눌러 쓸 수 있는 후드가 달린 검은 옷과 순백의 머리칼.
중성적인 매력이 물씬 풍기는 아름다운 얼굴과 차갑기 그지없는 보석 같은 푸른 눈동자.
1편부터 함께한 란디우스와 함께 있을 때 외에는 작은 미소조차 짓지 않는다는 설정답게 딱딱하게 굳어 있는 표정.
그는 유더를 가만히 바라보더니 이내 다시 입을 열어 말했다.
“란디우스의 부탁으로 너희의 동향을 살피고 있었다.”
카마엘의 말에 유더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란디우스는 호방한 것이지 어리숙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제자를 그냥 방치해두고 떠날 사람이 아니었다.
“북쪽에 있다- 사실 이 정도로 그치려 했지만 그럴 수 없게 되었다. 솔루지아가 움직였기 때문이다.”
악마의 손의 여섯 지부장 중 하나인 솔루지아였다.
상급 마인의 힘은 성십자수호단 단장들과 필적할만 했으니, 성십자수호단으로서도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다.
“솔루지아의 행적을 추적하던 중 너희를 발견해 구한 것이다.”
대충 납득이 되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이렇게 소개고 나발이고 들입다 설명부터 하는 것이 참으로 카마엘다웠다.
기본적으로 란디우스와 1편의 동료들 외의 타인에게는 관심이 없는 그였으니 말이다.
“너희는 어딜 가고 있었던 거지? 계속 북상하면 국경 밖에 나오지 않을 터인데.”
낮지만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유더는 코델리아의 뒤에서 우물쭈물하고 있는 붉은바람을 가리키며 말했다.
“위대한폭풍 부족의 일원인 붉은바람입니다. 그녀의 아버지에게 걸린 병을 고치기 위해 국경 너머··· 야만의 땅으로 향하던 중이었습니다.”
붉은바람이 듣는 와중이었기에 야만 운운하기가 꺼려지는 유더였지만 당장 다르게 부를 용어가 없었다.
유더의 설명에 카마엘이 미간을 찌푸렸다.
“북부12가문의 자제들과 야만족 소녀가 어떤 연관이 있다는 것이지?”
“야생신인 위대한폭풍의 계시가 있었어요.”
코델리아가 앞으로 나서며 말하자 카마엘의 눈에 호기심이 어렸다.
“야생신의?”
“네.”
코델리아가 다시 한 번 답한 뒤 슬쩍 유더에게 시선을 보냈다. 도와달라는 뜻이었기에 유더 역시 말을 보탰다.
“위대한폭풍은 위대한폭풍 부족을 보살피는 바람의 야생신입니다. 그리고··· 붉은바람의 아버지인 붉은질풍의 병이 악마들의 힘과 연관된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유더의 말에 붉은바람이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고, 반대로 카마엘의 눈은 가늘어졌다.
“과연, 조사해볼 가치가 있겠군.”
국경 너머 야만의 땅에 뿌리내린 악마 추종자들에 대해서는 카마엘도 아는 바가 별로 없었다.
하지만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악마 추종자들을 박멸하겠노라고 용의 맹세를 선언한 카마엘이었다. 지금까지 무심하기만 하던 그의 눈동자에 처음으로 감정이란 것이 어렸다.
“알겠다, 너희의 목적은 국경을 넘는 것이겠군. 란디우스의 얼굴을 생각해 거기까지는 도와주겠다.”
“그 전에 카마엘님,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지?”
“악마의 손의 움직임에 관해서입니다. 혹시 적들에게 예지 능력자가 있는지요.”
일단 유더 자신이 아는 한도 내라면 악마의 손에 예지 능력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악마의 손은 아군이 아닌 적이었다.
자연 게임에서는 그 실체를 완벽하게 파악할 수 없었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나타났어.’
악마의 손의 헬하운드들.
프로스트 앤빌 때야 장소가 특정되었고, 유더가 태양화초를 찾아 프로스트 앤빌로 갈만한 분명한 동기가 있었으니 단서를 모아 추적해오는 것이 가능했다.
하지만 지금 이 곳은 인적이 드물다 못 해 아예 사라진 설원지대였다.
흔적을 좇아오는 것은 가능해도, 어디로 갈지 예측해 매복해 있는 것은 불가능했다.
유더의 물음에 카마엘은 제법 흥미롭다는 듯 유더를 살피며 되물었다.
“예지 능력이라 생각하는 이유는?”
“천리안 계통의 능력이라 해도 매복을 설명해줄 수는 없으니까요. 그리고··· 제 추측이지만 놈들의 예지 능력은 불완전한 것 같습니다.”
카마엘의 반응으로 보아 악마의 손에 예지 능력자가 있기는 한 것 같았다.
하지만 다행히도 불완전한 능력일 가능성이 높았다.
유더의 말에 카마엘은 마치 학생을 시험하는 선생 같은 얼굴이 되었다.
“불완전한 이유는?”
“헬하운드가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예지 능력이라면 그 자리에 있는 것은 헬하운드가 아닌 솔루지아- 하다못해 마인들이어야 했다.
그런데 나타난 것은 헬하운드들이었다.
여기서 유추할 수 있는 것은 하나.
놈들의 예지는 불완전하다. 완벽한 예지가 아니기에 병력을 넓은 범위에 걸쳐 풀어놓았고, 그 중 하나가 일행과 조우했다.
유더의 가설에 카마엘은 아주 엷게나마 미소짓더니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과연, 란디우스의 제자인가.”
란디우스와 추리력 사이에 대체 무슨 연관이 있는지 의문이었지만, 그리고 코델리아가 왜 돌연 잘난 척을 하듯 흥흥 소리를 내었는지 의문이었지만- 홀로 납득한 카마엘은 다시 딱딱한 표정이 되어 말했다.
“정답이다. 악마의 손에게는 불완전한 예지 능력을 가진 카노스라는 중급 마인이 있다. 지금까지의 조사에 따르면 대강의 장소 외에는 예지하지 못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나마도 횟수가 잦지 않은 것으로 보아 예지 자체를 마음대로 컨트롤하지 못 하는 것 같다.”
“과연 그렇군요.”
불완전한 예지.
그렇게 생각하니 프로스트 앤빌에서의 일도 이해가 되었다.
놈들은 유더와 코델리아가 프로스트 앤빌에 간다는 사실 자체는 알았지만, 언제, 어떤 루트를 통해 간다는 사실 자체는 알지 못 했다.
그리고 그랬기에 1층에 터를 잡고 기다리는 우를 범한 것이었고 말이다.
‘카지노와 경매장에서 너무 운이 좋았던 대가인가.’
운의 총량 법칙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지만, 마음대로 컨트롤 할 수 없는 예지가 연속으로 성공했다고 하니 자연 미치게 된 생각이었다.
‘어찌되었든.’
예지능력자가 적측에 있다면 이래저래 거슬릴 수밖에 없었다. 국경을 넘어가면 악마의 손의 영역을 벗어나니 당장은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없을 터였지만 나중에 돌아왔을 때는 반드시 해결을 봐야 할 터였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코델리아가 돌연 유더의 소맷자락을 당기더니 슬쩍 눈빛을 보냈다.
‘이상해.’
‘뭐가?’
‘그냥 좀 이상해.’
카마엘이 이상하다.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였지만 코델리아의 말이다 보니 신경이 쓰였다.
그리고 이런 둘의 교환에 카마엘이 다시 옅은 미소를 지었다.
“감이 좋군, 소녀.”
“···코델리아에요.”
누가 란디우스 친구 아니랄까봐 말투도 비슷한 구석이 있는 카마엘이었다.
그는 다시 유더를 돌아보며 말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은 나의 분신이다.”
성십자수호단의 비술로 만들어진 분신.
영웅전기2에서도 몇 번 등장한 바 있기에 유더 역시 놀라긴 했어도 이내 납득했다.
‘아니, 잠깐. 분신이면 문제인데.’
사대검사 가운데 하나인 검귀 카마엘의 강함은 다른 성십자수호단의 단장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솔루지아 같은 상급 마인도 둘로는 부족하고 셋이 모여야 대적할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분신이라면 이야기가 조금 달랐다.
‘솔루지아와 대적은 가능하겠지만.’
그야말로 가능한 수준일뿐. 제대로 싸우면 솔루지아가 승리할 가능성이 높았다.
“본신은 지금 솔루지아를 치기 위해 북상 중이다.”
성십자수호단은 세일룬 왕국에서만 활동하지 않았다. 대륙 전역에 걸쳐 활동하니 카마엘 역시 항상 세일룬 왕국에 머물지 않았다.
‘애당초 분신을 쓰는 이유이기도 하고.’
“너무 걱정하지 마라. 야생신의 계시까지 받은 너희를 방치하지는 않을 터이니. 국경까지 내가 너희를 보호할 것이다.”
유더의 표정이 심각해지자 카마엘이 반듯하게 말했다.
하지만 유더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따로 움직이는 것이 나을것 같습니다.”
카마엘과는 동행하지 않는다.
유더의 말에 붉은바람은 눈을 깜박거렸지만 코델리아는 아니었다. 유더의 본의를 이해했기 때문이다.
“솔루지아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카마엘님 뿐입니다. 반대로 저쪽 역시 카마엘님을 막기 위해서는 솔루지아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래서?”
정말로 궁금하다기보다는 이번에도 시험하는 눈빛이었다.
때문에 유더는 발표하는 학생처럼 상세하게 설명했다.
“카마엘님이 모습을 드러내면 솔루지아는 움직일 수밖에 없습니다. 본신으로 착각해 바로 꼬리를 말아버리면 그것으로 좋고, 분신인 걸 알아차린다 해도 나쁘지 않습니다. 솔루지아는 카마엘님을 방치할 수 없을 테니까요. 물론, 카마엘님이 있는 곳에 우리 역시 숨어 있을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고요. 정 안되면 카마엘님이 솔루지아를 치시면 됩니다.”
서로의 가장 강한 패를 교환한다.
반상위의 하얀 여왕과 검은 여왕이 서로 맞물려 움직이지 못 하게 한다.
카마엘도 이제는 유더의 진의를 알았다. 그렇기에 보석 같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할 수 있겠느냐.”
유더의 말이 의미하는 바는 간단했다.
솔루지아만 아니면 된다.
그 외의 적은 모두 자력으로 뚫고 지나갈 수 있다.
그렇다면 최대 위험 요소인 솔루지아를 미리 떼어놓는다. 전장에서 솔루지아 자체를 제거하고 움직인다.
“우리 둘이 함께라면 할 수 있습니다.”
유더가 코델리아의 손을 잡으며 말하자 코델리아 역시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둘이 함께라면 할 수 있다.
그 선언에 끼지 못 한 붉은바람이 등 뒤에서 잠시 우울한 표정을 지었지만, 카마엘은 유더와 코델리아만을 보았다. 그리고 이내 미소지었다.
“란디우스가 생각나는군.”
둘이 함께라면 할 수 있다- 파라곤 왕국의 환란 속에서 란디우스가 말버릇처럼 하던 말이었으니까.
그리고 실제로 카마엘과 란디우스는 해냈다.
그렇기에 카마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네 작전에 맞춰 움직여주마. 하지만 그 전에······.”
말끝을 흐린 카마엘은 유더를 향해 똑바로 걸어가더니 한 걸음 앞에서 멈춰 섰다. 그대로 유더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물었다.
“태양화초를 먹었다고 들었다. 그런데 혹여 섭취하던 중에 문제가 있지 않았나?”
카마엘의 물음에 유더는 약간의 망설임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이었으니까.
코델리아를 구하기 위해 태양화초를 흡수하던 중에 한 번 끊고 전투에 나섰던 유더였다.
하지만 유더는 코델리아를 돌아보지 않았다. 혹여 코델리아가 마음의 부담을 느낄까 걱정이 되어서였다.
코델리아가 유더와 맞잡은 손을 꼼지락 거렸다.
카마엘이 다시 말했다.
“과연, 흡수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전부 흡수하지 못 한 것이 아니라··· 네 몸에 완벽히 정착하지 못 했다. 덕분에 구음절맥도 치료되다 말았군.”
거기까지 말한 카마엘은 유더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그대로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지금 당장 완치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흡수 중에 끊긴 흐름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뒤틀림은 바로잡을 수 있다.”
카마엘의 말에 코델리아의 얼굴이 확하고 밝아졌다.
“정말요?”
“그래, 정말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란디우스의 제자였으니까.
다른 이였다면 흡수를 제대로 했든 말든 무시했을 카마엘이었다.
“뒤틀림을 바로잡아주마. 그리하면 천무지체가 좀 더 제대로 된 힘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
“잠깐, 제대로 된 힘이요?”
코델리아가 다시 물었다.
아니, 그럼 지금까지 받던 천무지체 빨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천무지체는 하늘이 내린 무의 재능. 작금의 뒤틀림을 바로 잡는 것만으로는 온전한 힘을 발휘하게는 할 수 없다. 구음절맥으로 인해 천무지체가 억압받아온 세월이 너무나 길다.”
한마디로 지금의 천무지체는 제대로 된 천무지체가 아니었다는 소리였다.
심지어는 카마엘의 치료 후에도 말이다.
‘천무지체 완전 개사기네.’
코델리아가 어이가 없다는 눈으로 유더를 보았지만 이내 다시 얼굴이 밝아졌다.
유더는 남의 사기가 아니라 우리집 사기였으니까.
“시간이 없다. 지금 바로 시작해도 되겠나?”
“네, 부탁드립니다.”
기연을 마다할 유더가 아니었다.
아니, 애당초 1편 주인공 만났는데 이 정도 기연은 있어야지.
유더가 동의하자 카마엘은 그답지 않게 약간이지만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죽을만큼 아플 거다.”
“네?”
거기까지였다.
극심한 고통이 유더의 전신을 엄습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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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6장 - 겨울꽃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