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6장 - 겨울꽃 #3 >
&
솔루지아는 유더와 코델리아가 뛰어내린 낭떠러지 위에 서서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녀의 손아귀 안에서는 까마귀의 검은 깃털이 뭉개지고 있었다.
“검귀 카마엘.”
본신일 가능성은 낮았다.
세일룬 왕국 남부에서 놈의 본신이 발견된 것이 고작 보름 전의 일이었으니까. 아무리 신출귀몰한 놈이라 해도 겨우 보름 만에 왕국 최남단에서 최북단으로 달려오지는 못 하리라.
“포기하지 마라. 아직 잡을 수 있다.”
지부장인 자신까지 나선 마당에 아무런 소득 없이 돌아갈 수는 없었다.
스스로에게 말한 그녀는 엉망진창으로 뭉개진 까마귀 깃털을 바닥에 던지며 생각했다.
‘코델리아를 붙잡는다.’
더불어 조직의 우환이자 성십자수호단의 주요 전력 중 하나인 카마엘의 분신을 제거한다.
이 정도면 상당한 공적이 될 수 있었다. 아직 포기하기에는 일렀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이었다.
“까악!”
날카로운 까마귀 소리에 솔루지아가 즉각 고개를 쳐들었다. 저 멀리서 까마귀 떼가 날아오고 있었다.
마치 자신을 유인하듯이, 도발하듯이.
“재미있구나, 카마엘.”
눈을 부릅뜬 채 까마귀 떼를 노려보던 솔루지아가 눈빛을 날카로이 했다.
솔루지아는 저 까마귀 떼를 그냥 보낼 수 없었다.
코델리아가 함께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었으니까.
검귀 카마엘의 분신을 그냥 고이 보내줄 수 없었으니까.
“놓치지 않는다.”
솔루지아의 머리에 사슴의 그것처럼 화려하고 거대한 뿔이 돋아났다. 동시에 그녀의 등 뒤로 악마의 날개가 펼쳐졌다.
상급마인의 악마화.
그것만으로 주변 일대의 대기가 뒤흔들렸다. 솔루지아의 전신에서 불꽃처럼 일어난 보랏빛 사기가 하늘과 땅을 오염시켰다. 설원의 눈들이 거짓말처럼 녹아내렸다.
솔루지아가 날아올랐다.
까마귀 떼를 추적하며 그녀는 생각했다.
‘너였구나.’
프로스트 앤빌에서 시시오트를 쓰러트린 것이.
마인들과 몬스터들을 초토화시킨 것이.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랑게스트에서 보여주었던 유더와 코델리아의 전력으로 시시오트를 쓰러트리는 것은 불가능했으니까.
함께 보낸 하급 마인들조차 상대할 수 없는 둘이었으니까.
실제로 흐레스벨그 백작가의 기린아로 명성이 자자한 루카스조차 하급 마인과는 상대조차 제대로 할 수 없지 않던가.
‘이제 막 무공을 배우기 시작한 애송이 따위.’
유더는 사실상 전력으로도 치지 않는 그녀였다.
그나마 경계할 것은 코델리아였지만, 그녀도 결국 경험이 미천한 풋내기 마법사에 불과했다.
그런 두 사람이 악마와 마인들을 연속해서 격파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카마엘 너였어.’
네가 두 사람을 미끼로 악마의 손을 사냥하고 있던 것이었어.
솔루지아의 의심은 곧 확신이 되었다. 그리고 그녀의 추적은 보다 빠르고 날카로워졌다.
보랏빛 사기로부터 수십 개의 빛의 칼날이 솟구쳐 까마귀 떼를 급습했고, 까마귀 떼는 허공에서 화려하게 춤추더니 이내 지상에서 하나가 되었다.
수십 마리의 까마귀들 사이로 검귀가 모습을 드러냈다.
“카마엘.”
솔루지아 역시 지상에 안착했다. 허공에서 마검을 뽑아들었고, 카마엘은 담담한 얼굴로 그런 솔루지아를 마주하였다.
“혼자인가? 어리석구나. 네가 나를 붙잡아두면 코델리아가 도망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냐?”
솔루지아 자신은 혼자 오지 않았다. 지부의 병력 가운데서도 정예만을 모아 이곳에 왔다.
카마엘도 알았다. 여기까지 날아오는 와중에 주변 곳곳에 흩어져 있는 솔루지아의 부하들을 보았으니 말이다.
북방을 지키는 갈까마귀들은 국경 너머를 경계하는 자들이지 국경 내부를 살피는 자들이 아니었다.
더욱이 이곳은 인적이 드물다 못 해 사라진 곳이니 갈까마귀들의 도움을 받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러니 오직 유더와 코델리아의 힘만으로 악마의 손의 포위망을 뚫어야 한다.
불가능하다.
그런 일 따위 있을 수 없다.
고작해야 어린 애 둘이서 무얼 한단 말인가.
솔루지아의 주장은 통상적으로 보면 틀리지 않았다.
올바른 이야기였다.
하지만 카마엘은 담담한 표정 그대로 답했다.
“그렇다더군.”
“뭐?”
“도망칠 수 있다고 하더군.”
아니, 겨우 그 정도가 아니었다. 유더는 분명 돌파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태양화초의 뒤틀림을 바로잡던 중 알게 된 중대한 사실.
“음양지체.”
극한의 힘을 사용하는 카마엘 자신과 극양의 힘을 사용하는 란디우스의 힘을 모두 이어받을 가능성을 지닌 존재.
거기까지였다. 카마엘은 더 이상 시간을 끌지 않았다.
마치 란디우스와 함께할 때처럼 옅은 미소를 머금었고, 그대로 검을 뽑아들었다.
솔루지아를 향해 도발하듯 말했다.
“와라.”
상대해 줄 터이니.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 같은 눈빛에 솔루지아가 노성을 터트렸다. 카마엘을 향해 돌진했다.
&
유더는 달렸다.
두 발로 지면을 박차 앞으로 나아가는 단순한 동작.
하지만 달랐다.
지금까지와는 느낌 자체가 달라졌다.
손발의 자유.
자신의 몸을 진정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에서 오는 쾌감.
그것만이 아니었다.
전신에 힘이 넘쳐흘렀다.
기의 순환이 빨라졌다. 지금까지 사용하던 무공은 모두 가짜라는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츄-파-하!”
의미불명의 외침을 토하며 유더가 진각을 밟았다. 환하게 미소 지으며 질풍이십사보를 펼쳤다.
진정한 질풍이십사보를!
파앙-!
대기가 터졌다.
열 개도 넘는 선풍이 사방으로 퍼져나갔고, 그 사이에서 유더가 질풍이 되었다. 거침없이 눈앞의 적들을 향해 휘몰아쳤다.
쾅! 쾅! 쾅!
뇌성이 터졌다.
질풍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있던 헬하운드들의 머리가 깨지고 목이 부러졌다. 그리고 어김없이 황금빛 선풍이 일어 주변을 휩쓸었다.
코델리아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마법사인 그녀의 눈으로는 유더의 동작을 정확히 관측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정면으로 치닫는다.
헬하운드를 마주한다.
헬하운드가 유더를 물어뜯으려 하지만 무리다. 마치 바람처럼 헬하운드의 공격을 지나친다. 동시에 일어난 황금빛 선풍이 헬하운드의 움직임을 방해한다.
뇌성이 터진다.
벼락같은 칠연격이 헬하운드의 전신을 부순다.
쾅!
소리가 터졌다.
유더가 뒤를 돌아보았다. 코델리아와 붉은바람을 확인했고, 다시 질풍이 되어 정면으로 치달았다.
“짐승.”
코델리아가 저도 모르게 그리 말했다. 마녀화 상태로 질주하며 유더가 쓰러트린 적들에게 마법의 칼날을 날려 막타를 쳤다. 동시에 모여드는 추적자들을 파악했다.
“하악! 학!”
붉은바람은 그저 유더의 등만 따라 달렸다.
각종 물약을 뒤섞어 만든 금단의 비약 덕분에 어찌어찌 유더와 코델리아의 속도를 쫓아 달리는 것은 가능해진 그녀였다.
하지만 역시나 아직은 쪼렙. 그저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숨이 벅찰 지경이었다.
“하아!”
유더가 달리며 정면을 향해 성십자 지르기를 날렸다.
이전보다 두 배 이상 커진 거대한 황금 십자가가 정면을 향해 뻗어나갔다. 마치 마녀의 숲에서 술식으로 펼친 성십자를 연상케하는 공격이었다.
태양화초로 증폭된 내공이 빛을 발한 덕분이었다.
더욱이 유더는 느낄 수 있었다.
이게 아니다.
아직 더 효율성을 추구할 방법이 있다. 더 강하게, 더 빠르게 성투기를 사용할 수 있다.
천무지체.
하늘이 내린 무의 재능! 무의 화신!
콰가가강!
눈앞을 막아선 몬스터가 성십자와 충돌해 박살이 났다.
북구 국경지대에 곧잘 출몰하는 자연적으로 발생한 스노운 골렘이었다.
유더는 부서지는 놈의 몸을 뚫고 달렸다. 등 뒤에서 코델리아가 소리쳤다.
“양 옆에서 달려오고 있어! 7시! 2시!”
나무에 가려진 곳들.
하지만 마녀화 상태에 돌입한 코델리아의 감각은 거의 레이더나 다름이 없었다.
유더는 코델리아의 말을 바로 알아들었다. 방향까지 지목해주었기에 손쉽게 대처했다.
선풍.
이어지는 질풍.
그리고 다시 한 번 터지는 뇌성!
“야하!”
유더가 소리쳤고, 코델리아는 다시 한 번 생각했다.
‘맨날 짐승, 짐승 하더니 지가 더 짐승이야!’
하지만 좋았다. 코델리아도 어쩐지 모르게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웃지 못 하는 것은 붉은바람뿐이었다. 하지만 쫓아가기 급급한 그녀도 알 수 있었다.
두 사람의 힘이 또래가 가질 수 있는 힘을 훌쩍 뛰어넘는다는 사실을.
위대한폭풍께서 두 사람을 선택하신 이유를!
“거기까지다!”
정면에서 날카로운 일갈이 날아왔다.
보랏빛 피부와 거대한 덩치를 가진 거한의 외침이었다.
유더와 코델리아는 동시에 그를 보았다. 그리고 파악했다.
“바라스!”
“악마가 아닌 마물을 사용해 만든 합성 마인!”
“특기는 돌진!”
“속성은 불꽃! 하지만 속성 공격은 안 하니 무시해도 됨!”
“직선 공격 밖에 못 해! 측면을 공략하는 것이 정석!”
“마법 방어력이 비정상적으로 높아!”
“참격에 약함!”
“악질적인 살인마!”
주거니 받거니 소리쳤고, 바라스는 순간 혼란에 빠졌다.
“어, 어떻게!?”
자신을 만난 적이 있던가?
아니, 만났다 하더라도 어찌 저리 소상히 안단 말인가!
바라스가 당황한 그때 유더와 코델리아는 이미 바라스에 대한 공략을 마쳤다. 서로 눈빛을 교환하였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바인드!”
“그리스!”
유더와 코델리아가 번갈아 외쳤다.
바인드 마법이 바라스의 발목을 묶었고, 순간 균형을 잃은 놈이 그리스로 미끄러워진 바닥에 나자빠졌다.
마법 방어력이 높다는 것은 마법 타격에 강하다는 것이지, 마법 자체를 방해한다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바인드도, 그리스도 충분히 통할 수 있었다.
“억!”
그리고 연이어졌다.
코델리아가 놈을 스쳐 달리며 손을 뻗었다. 마녀의 힘으로 푸른 염동력을 발해 미끄러운 바닥 위의 놈을 뒤집어 버렸다.
“컥!”
빙판 위를 구르듯 바라스가 뒤집어졌다. 물론 마물의 힘을 가진 합성 마인답게 그냥 당하지 않고 바로 힘을 발해 바인드를 박살냈다. 연이어 마력으로 전신을 감싸 방어력을 높였다.
유더가 그런 놈을 그냥 지나쳤다.
공격이 연이어질 거라 생각했던 바라스는 당황 속에 몸을 일으켜 세웠고, 그제야 볼 수 있었다.
자신 앞에 멈춰 서 있는 유더를.
아직 채 가시지 않은 선풍을 두른 채 검을 뽑아든 그의 모습을.
펼치는 것은 하나.
동방무사의 검이 기억하는 일격필살의 검.
‘혈랑지옥참.’
동방무사의 검이 포효했다. 동시에 코델리아가 바라스를 보았다. 한 쪽 눈을 감은 채로 마비의 마안을 사용해 놈의 움직임을 방해했다. 정확히 눈을 맞춘 상태도 아니었고, 반발을 우려해 약하게 사용한 터라 정말 방해하는 수준에 그쳤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거대한 붉은 참격이 바라스의 가슴을 갈랐다.
합성 마인 특유의 검은 피가 솟구쳐 올랐고, 유더와 코델리아의 가슴께에 새하얀 빛의 고리가 떠올랐다.
“허억··· 헉······.”
붉은바람이 두 사람을 따라잡은 그때 쿵 소리를 내며 바라스가 쓰러졌고, 코델리아는 정면을 보았다. 저만치에 10미터는 족히 될 장벽이 보였다.
“다 왔어!”
국경이다.
이제 저 벽을 넘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어떻게.
생각할 틈 따위 없었다. 유더가 이미 움직였으니까. 한 팔에 붉은바람을 다시 한 팔에 코델리아의 허리를 끌어안고 질풍이십사보를 펼쳤으니까.
“안아준다고 했지?”
“흥.”
코델리아가 코웃음 쳤고, 붉은바람은 민망함 속에 얼굴을 붉혔다. 하지만 유더도 코델리아도 붉은바람은 보고 있지 않았다. 유더가 다시 지면을 박찼다. 코델리아가 유더의 목을 끌어안았고, 선풍이 길을 인도했다. 질풍이 10미터나 되는 벽을 단숨에 타고 올랐고, 끝에 가서는 비상하듯 높이 도약했다.
허공.
유더와 코델리아는 보았다.
장벽 너머로 넓게 펼쳐져 있는 야만의 땅을. 압도적인 대자연의 위광을.
“가자.”
새삼 말한 유더가 장벽을 박찼다.
북부 야만족의 침공 시나리오를 박살내기 위해 국경을 뛰어넘었다.
&
< 제16장 - 겨울꽃 #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