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엔딩메이커-58화 (58/473)

< 제17장 - 계시 >

제17장 - 계시

영웅전기2의 오리지널 버전- 즉, 첫 출시버전에는 총 열한 명의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존재했다.

“세일룬 왕국이 넷, 아르곤 제국이 다섯, 야만의 땅이 둘.”

대륙의 양대 강국답게 세일룬 왕국과 아르곤 제국 출신이 많았는데, 세일룬 왕국의 경우에는 플레이어블 캐릭터들의 출신지가 북부에 몰려 있다는 특징이 있었다.

“카이사를 제외한 나머지 셋- 그러니까 유더, 코델리아, 루카스 모두 북부12가문 출신이니까.”

그렇다면 어째서 그런 것일까.

카이사는 남부 출신 인물이니 중앙에는 아예 한 명도 없는 셈인데, 차라리 북부, 중앙, 남부에 한 명씩 골고루 배치하는 게 좋지 않았을까?

“그리고 본편이 출시되자 모두들 납득했지.”

세일룬 왕국뿐만 아니라 영웅전기2 전체에 큰 영향을 끼치는 ‘북부 야만족의 대침공’ 이벤트 때문이었다.

굵직한 이벤트가 북부에 있으니 북부 출신 인물이 많을 수밖에 없다는 당연한 논리였다.

여기에 더해진 것이 야만의 땅 출신의 플레이어블 캐릭터인 붉은바람과 키라라.

둘 모두 야만족이니 자연 북부 야만족의 대침공 이벤트와는 연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플레이어블 캐릭터 열한 명 중에 절반가량인 다섯 명이 대침공 이벤트와 직접적으로 연이 있다는 거지.”

나머지 여섯 명 역시 간접적으로는 많은 영향을 받았다. 양대 강국 중 하나인 세일룬 왕국 전체를 뒤흔들 대사건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니 이 이벤트를 박살낼 수 있다면 우리가 원하는 엔딩에 보다 가까워질 수 있을 거야.”

본래는 존재하지 않는, 대소환도, 천사들과 악마들의 대전쟁도 일어나지 않는 진정한 해피 엔딩의 세계.

그러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

대침공 그 자체를 무위로 돌릴 수 있는 최중요 키퍼슨.

“붉은질풍.”

붉은바람의 아버지.

위대한폭풍 부족의 족장.

그를 살려야만 했다.

&

“야-하!”

국경을 넘고 몇 분.

그대로 질풍처럼 달려 바위산 틈바구니에 몸을 숨긴 유더는 새삼 두 팔을 높이 들며 소리쳤다.

이 기분을 무어라 해야 할까.

해방감?

살아있다는 실감?

“조금 미친 것 같아.”

바닥에 주저앉은 코델리아가 미간을 좁히며 말하자 유더는 란디우스라도 된 것처럼 껄껄 웃더니 코델리아를 돌아보며 말했다.

“아무튼 약속 지켰지?”

“약속?”

“담벼락도 넘어준다고 했잖아.”

담벼락.

국경에 세워진 대장벽도 넓게 보면 담벼락이기는 했다.

담벼락 치고는 지나치게 높고 두꺼워서 그렇지.

“가만있자, 안아도 줬고, 담벼락도 넘어줬고, 전열에도 서줬고··· 간병해주고 싶은데 아프면 안 될까?”

“네, 안 돼요.”

손가락을 꼽아가며 진지하게 말하는 유더에게 눈덩이를 던진 코델리아는 그대로 몇 번 웃더니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그대로 유더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짐승 같아.”

헉헉 거리면서 날뛰는 게.

아닌 게 아니라 뭐랄까, 지금까지의 유더가 그저 날렵하다는 느낌이었다면 방금 전투에서는 정말 짐승 같았다. 흥분해서 날뛰는 고양잇과 맹수 말이다.

코델리아의 말에 유더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는가 싶더니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마님, 쇤네가 오늘밤······.”

“뇌절 치지 말고.”

“네, 마님.”

얌전히 드립을 포기한 유더는 코델리아 앞에 쪼그려 앉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정말 힘이 넘쳐. 끊임없이 힘이 솟구치는 기분?”

“태양화초빨 제대로 받는 거야?”

“그런 것 같아. 카마엘 말마따나 천무지체도 이제야 눈을 뜬 기분이고.”

생각해보면 20년에 한 번 꽃을 피우는, 그것도 극한지대에서 피어나는 극양의 꽃을 먹었으니 이 정도 성장은 해주는 것이 예의 같기는 했다.

그리고 천무지체.

보통 날 때부터 천재인 사람들은 자신이 하는 모든 천재적인 일들이 너무나 당연게 느껴지는 터라 본인의 천재성을 실감하기 어려운 법인데, 유더는 아니었다.

전생의 기억이 있어 자기객관화가 가능한 것도 있었지만, 카마엘이 지적한 것처럼 이전까지의 천무지체는 지금의 천무지체에 비하면 가짜나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재수 없는 소리겠지만 느낄 수 있어. 유더는 진짜 천재야.”

“진짜 재수 없다.”

하지만 코델리아의 얼굴에는 생글생글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사기든, 천재든, 짐승이든 우리집 유더였으니까.

“3편 마지막 확장팩에 예정되어 있던 유더의 각성이 천무지체의 각성이었으려나?”

“그랬을지도 몰라. 원작의 유더는 태양화초도 못 먹고 카마엘도 못 만났으니까.”

하지만 지금의 유더는 달랐다.

태양화초를 먹었고, 란디우스를 만나 구천구문을 배웠다. 여기에 카마엘까지 만나 뒤틀림까지 해소했다.

‘거기에 음양지체까지.’

극한과 극양의 힘을 동시에 다루면 어떻게 될까. 어떤 경지에 오를 수 있을까.

‘극한의 카마엘과 극양의 란디우스.’

이미 둘 모두와 인연이 닿았으니, 기초 플래그는 다 뚫어 놓은 셈이었다.

“후후훗··· 후후후훗······.”

“변태같아.”

코델리아의 지적에도 유더는 웃기를 멈추지 않았다. 최강으로의 길이, 그것도 기존에는 존재하지 않던 길이 보이는데 기뻐하지 않으면 그게 어찌 썩은물이겠는가.

“아무튼 이것도 완전 각성은 아니라는 거지?”

“어, 그래서 더 신나.”

앞으로 더 대단한 천재로 각성한다는 뜻이었으니까.

“천무지체 개사기.”

“훗훗훗, 그리고 너도 선조회귀하면 개사기잖아. 마녀화도 그렇고.”

절묘한 밸런스라고 해야 할까.

코델리아는 유더나 루카스처럼 특별한 재능을 타고나지는 않았다.

카이사처럼 특이체질도 아니었고 말이다.

하지만 코델리아에게는 후천적으로 얻는 마녀화와 선조회귀가 있었다.

‘루카스도 선조회귀가 가능하긴 하지만, 코델리아랑은 달라.’

코델리아는 악마의 힘을 근원으로 하는 마녀화 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유더가 극한과 극양을 동시에 다룰 수 있는 음양지체라면, 코델리아는 천사의 힘과 악마의 힘을 동시에 다룰 수 있는 존재로 변신이 가능했다.

“타천사 모드 빨리 보고 싶다. 진짜 괴물같이 센데.”

“내껀데 왜 네가 보고 싶어 해.”

“마님은 우리집 괴물이니까?”

유더의 주장에 코델리아는 흥흥거리긴 했지만 이내 빙글거리며 웃었다. 코델리아 자신도 선조회귀 후의 자신이 기대되었기 때문이다.

“빨리 하고 싶다.”

“열심히 재료 모아서 원작보다 시기 팍팍 땡겨보자.”

“네, 아빠. 아빠만 믿어요.”

유더와 코델리아는 서로를 보며 화목하게 하하호호 웃었고, 한참을 그러다 비로소 이 자리에 한 명이 더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쿠헉··· 읍··· 웨에엑!”

저만치 구석.

유더가 놓아준 이후 계속 엎드린 상태로 헐떡이던 붉은바람이 결국 참지 못 하고 구토를 했다.

유더와 코델리아의 애정행각(?)이 역겨워서는 아니었고, 야매로 만든 도핑제의 부작용이었다.

“붉은바람! 괜찮아?”

“하악··· 윽··· 아프다. 쓰리다. 괴롭다.”

한 번 속을 게워낸 붉은바람이 우는 얼굴로 말했다. 눈물에 콧물까지 흐르는 것이 참으로 보기 안쓰러웠다.

“미안, 미안. 그래도 다 왔으니까 이제 괜찮아. 여기서 쉬었다가 가자.”

코델리아가 붉은바람을 보듬으며 말했고, 유더는 얼른 붉은바람의 토사물들을 치운 뒤 좀 더 괜찮은 쉴 곳을 찾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직후.

코델리아의 품에 안겨있던 붉은바람이 돌연 눈물을 보였다. 아까처럼 힘들어서 흘리는 눈물이 아니었다.

“붉은바람?”

“다르다. 너무 다르다.”

“응?”

“두 사람. 다르다. 너무 강하다. 나보다 훨씬.”

그래도 나름 자신의 강함에 자신이 있던 붉은바람이었다.

적어도 또래 내에서는 자신보다 강한 자가 거의 없을 것이라 믿고 있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유더와 코델리아는 붉은바람 자신과 차원이 달랐다. 한 살 연상이기는 했지만, 겨우 1년 정도로 좁혀질 차이로 느껴지지 않았다.

우물 안 개구리.

고작 이런 실력으로 아버지 병을 고치겠다며 혼자 남부로 내려갔으니 노예로 붙잡히는 것이 당연하지.

위대한폭풍께서도 오죽 한심하셨으면 외지인인 유더와 코델리아를 선택하셨겠는가.

부족원이자 족장의 딸인 자신을 제쳐두고 말이다.

“흐윽··· 흑······.”

갑자기 밀려든 서러움과 자책감,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이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을 만들었다.

붉은바람은 아예 엉엉 울기 시작했고, 코델리아는 난처한 얼굴로 유더를 돌아보았다.

‘어떻게든 해 봐!’

무리한 요구였지만 대책을 요구받은 남자들이 대개 그러하듯이 유더는 고민했다.

그리고 그 고민은 남자들이 대개 그러하듯 핀트가 살짝 어긋나 있었다.

‘일단 쩔은 안 되고.’

붉은바람이 우는 이유는 결국 까놓고 말해 약해서였으니까.

하지만 이건 어떻게 해볼 방법이 없었다.

엄밀히 말해 붉은바람은 아직 본인의 시나리오를 시작하지도 않은 상태였다.

한 마디로 쪼렙.

아직 이렇다 할 기연이나 파워 업 이벤트 하나 거치지 않은 순정상태.

그렇다고 데리고 다니면서 레벨 업을 시켜주는- 소위 말하는 쩔을 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나랑 코델리아만 되는 거니까.’

루카스와 다닐 때 몇 번인가 실험한 결과 알게 된 사실이었다.

일단 서로의 레벨 업 이펙트가 보이는 건 유더와 코델리아뿐이었다.

함께 사냥을 해도 파티로 경험치를 먹는 것 역시 유더와 코델리아뿐이었고 말이다.

‘이쪽도 강한 적을 쓰러트리면 경험치를 먹는 것 같기는 한데··· 파티플이 되는 건 나랑 코델리아 뿐이니까.’

파티 신청이란 메뉴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니, 처음부터 파티가 맺어진 상태인 유더 자신과 코델리아 외에는 제대로 된 경험치 나눠먹기 자체가 불가능했다.

‘왜 유독 우리 둘만 처음부터 파티였는지는 좀 의문이지만.’

뭔가 원인이 있기는 있을 것 같았다.

전생의 기억을 공유해서일수도 있고, 어쩌면 정말 운명의 붉은 실 같은 것이 이어져 있는 걸지도 모르고.

“흠흠.”

저도 모르게 헛기침을 토한 유더는 코델리아를 보았고, 코델리아는 다시 눈빛으로 말했다.

‘어떻게든 해보라니까!’

“음.”

유더는 다시 고민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해야 할까.

빠른 레벨 업이라는 가장 명쾌한 해결책을 쓸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 결국 차선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붉은바람, 괜찮아. 너도 이제 곧 빠르게 강해질 거야.”

유더의 말에 붉은바람이 우는 와중에도 고개를 들었다.

약하다는 것에 서러워 우는 중이었으니 강해진다는 말에 반응하는 것이 당연했다.

유더는 붉은바람 앞에 쪼그려 앉은 뒤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위대한폭풍께서 그러셨어. 붉은바람은 위대한 전사의 자질을 타고났다고. 위대한폭풍 부족에서 가장 강력한 정령전사가 될 인재라고 말이야.”

“···정말이다? 위대한폭풍께서 그러셨다?”

붉은바람이 훌쩍이며 묻자 유더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이야, 나만 들은 게 아닌 걸. 코델리아도 들었지?”

“어? 응! 나도 들었어. 분명히 그렇게 말씀하셨어.”

일단 원작 루트대로 가면 붉은바람은 강력한 정령전사가 되기는 했으니까.

더욱이 위대한폭풍 부족은 북부 야만족의 대침공 와중에 멸망하게 되어 있으니, 붉은바람은 싫든 좋든 부족 최고의 전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위대한폭풍께서······.”

붉은폭풍의 눈물이 잦아들었다. 약간이지만 미소도 보였다.

“위대한폭풍께서도 붉은바람의 성장을 기대하고 계셔.”

“응응, 많이 기대하셔. 붉은바람을 엄청 아끼시는걸.”

유더와 코델리아가 주거니 받거니 말하자 붉은바람의 얼굴에 미소가 점점 더 커져갔다.

워낙 모진 일을 많이 겪는 탓에 나중가면 염세적인 성격이 되는 붉은바람이었지만 아직은 원작 시작 전이었다. 더욱이 노예 시장에서 고초를 겪기도 전에 빠져나온 터라 아직은 맑고 순수함이 그대로 남아 있는 상태였다.

“알았다. 나 열심히 한다. 더 강해진다. 위대한폭풍님의 기대에 부응한다.”

“그래, 우리도 기대할게.”

코델리아가 붉은바람을 꼭 끌어안자 붉은바람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내 마주 코델리아를 끌어안았다.

‘훈훈하구나, 훈훈해.’

유더가 그렇게 만족할 때였다.

‘야, 그런데 괜찮은 거 맞아?’

코델리아가 눈빛으로 물었고, 유더는 똑같이 눈빛으로 물었다.

‘뭐가?’

‘아니, 막 이렇게 사칭해도 되냐고.’

‘되겠지.’

설마 위대한폭풍이 이거 가지고 뭐라고 하겠는가.

더욱이 위대한폭풍은- 아니, 야생신들은 그 실존 여부 자체가 불분명 했다.

게임에서도 야만족들의 신앙의 대상으로서 이름만 언급될 뿐, 실제로 등장하는 야생신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리고 이미 쳤잖아.’

붉은바람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열심히 위대한폭풍의 이름을 판 유더와 코델리아였으니까.

‘으음, 그렇긴 하지.’

납득한 코델리아는 다시 붉은바람에게 집중했고, 유더는 자리에서 일어나 새삼 남쪽을 돌아보았다.

‘카마엘이야 알아서 잘 빠져나갔을 거고.’

괜히 사대검사 중 일인이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솔직히 유더는 사대검사 가운데 최강을 카마엘이라 생각했다.

어쩌면 분신만으로도 솔루지아를 격파했을지도 몰랐다.

‘우리만 잘하면 돼.’

북부 야만족의 대침공 이벤트가 영웅전기 시리즈 전체에 있어 중요한 이벤트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전후사정이 완벽하게 밝혀진 것은 아니었다.

게임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대침공이었지 대침공 이전에 있는 성난뿔소 부족의 야만족 통일 전쟁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때문에 정보는 제한적이었다.

야만의 땅에 대해서도 알려진 것이 그리 많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할 수 있어.’

아니, 해내야만 한다.

마음을 굳게 먹은 유더는 북쪽을 바라보았다.

&

“여기 어디인지 알 것 같다. 이틀만 더 가면 우리 부족의 땅이다.”

해가 진 직후.

유더의 설계와 기술, 코델리아의 마법이 더해 만들어진 이글루 안에서 붉은바람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도망치는 와중에 짐을 다 버린 터라 침낭 하나 없었지만 애당초 붉은바람은 윈터 엘프의 피를 이어받은 현지인이었고, 유더와 코델리아에게는 겨울의 축복이 있었다.

여기에 서로간의 온기와 마법으로 뜨겁게 달군 돌이 더해졌으니, 얼어죽을 위험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래, 그래. 오늘은 고생했으니 일찍 자자.”

“알겠다. 코델리아도 잘 자라. 유더도.”

이번에도 작게 말한 붉은바람은 코델리아 옆에 누우며 눈을 감았다.

“잘 자네.”

“애기같아.”

눈을 감자마자 잠든 붉은바람의 이마에 쪽하고 입맞춤을 해준 코델리아는 유더 쪽을 보며 말했다.

“우리도 자자. 불침번 딱히 세울 필요 없겠지?”

“알람 마법진 있으니까.”

프로스트 앤빌에서도 알람 마법진 덕분에 이교대 불침번이라는 지옥을 피할 수 있었던 두 사람이었다.

유더는 입구 쪽을 거의 다 막은 뒤 자리에 누우며 오랜만에 말했다.

“잘 자, 내 꿈꾸고.”

“그래, 너도 내 꿈꿔.”

“야한 꿈꿔야지.”

“지랄.”

웃으며 가운데 손가락을 세운 코델리아는 다시 한 번 붉은바람의 이마에 입맞춤한 뒤 눈을 감았다.

그리고 몇 초, 몇 분.

유더 역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주변이 온통 하얀색이었다.

하얀 밤.

하얀 설원.

멍하니 걷던 유더는 어느 순간 깨달았다.

“꿈이네.”

깨달았으니 이제 자각몽이려나.

유더는 다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누가 꿈 아니랄까봐 정신 차리고 보니 엉망진창이었다.

하늘에는 해와 달이 함께 걸려 있었고, 설원 위로는 무슨 바닷 속이라도 된 것처럼 수많은 물고기들이 허공을 헤엄치고 있었다.

그리고 코델리아가 나왔다.

“어.”

헤엄치는 물고기들 사이에 서서 허둥거리고 있었는데, 눈을 휘둥그레 뜬 것이 딱 평소의 코델리아였다.

“앗! 유더다!”

꿈속의 코델리아가 이쪽을 보더니 무척이나 반가운 얼굴로 도도도 달려왔다.

그리고 유더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어쩌지, 이왕 이렇게 된 거 진짜 야한 꿈 꿔야 하나.”

“야! 다 들리거든?!”

코델리아의 로우킥이 작렬했고, 유더는 생각했다.

“과연 코델리아. 꿈속에서도 폭력적이군.”

“아직 덜 맞았구나.”

코델리아는 다시 유더의 등짝을 때렸고, 유더는 깨달았다.

“아프다?”

“아프라고 때렸으니 아파야지! 더 아파라! 더 아파라!”

진짜로 아팠다. 때문에 유더는 깨달았다.

“꿈이 아냐.”

적어도 평범한 꿈은 아니었다. 눈앞의 코델리아도 유더 자신의 꿈이 만들어낸 가짜 같은 것이 아니었다.

“어떻게 된 거지?”

서로의 꿈이 연결되었다?

정신이 이어졌다?

유더의 물음에 코델리아도 때리기를 멈추고 진지하게 말했다.

“나도 모르겠어. 그냥 잘 자다가 어느 순간 눈 떠보니 여기였어. 네가 보여서 달려온 거고.”

유더는 일단 자신과 코델리아를 번갈아 보았다.

이제 보니 옷도 평소와 달랐다. 각자 가문에 머물던 시절 입던 멋들어진 정복과 드레스 차림이었다.

“꿈.”

현실은 아니다.

정신적인 공간이다.

유더 자신과 코델리아의 정신이 이어졌다.

왜.

어째서.

그리고 누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코델리아가 돌연 고개를 번쩍 들었다. 저만치 너머, 허공.

바람이 불었다.

작고 약한 바람.

하지만 언제든지 커져 폭풍이 될 수 있는 그것.

소년이 보였다.

전신에 바람을 두른 하얀 머리칼의 소년.

마치 별처럼 빛나는 금빛 눈동자가 인상적인 소년은 그대로 유더와 코델리아를 내려다보았다. 눈을 가늘게 뜨는가 싶더니 악동 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 이름을 잘도 팔고 다녔더구나.”

아이의 목소리.

하지만 주변 일대 전체를 뒤흔드는 강렬한 존재감.

마치 신과 같은 위용.

“설마?”

유더가 말했고, 코델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감이 맹렬히 외치고 있었다.

야생신.

위대한폭풍 부족이 건재하기에, 아직 타락의 대군주 벨리알의 힘이 야만의 땅을 뒤덮기 전이기에 그 힘을 잃지 않은 존재.

“만나서 반갑구나, 남쪽의 아이들아. 나는 위대한폭풍이다.”

북방 경계 너머의 야생신.

그가 지상에 안착했다.

유더와 코델리아를 향해 다가섰다.

&

< 제17장 - 계시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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