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8장 - 위대한폭풍 >
제18장 - 위대한폭풍
야만의 땅 출신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둘이나 있었지만, 게임에서 실제로 야만의 땅이 무대가 되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단순한 이유였는데, 붉은바람과 키라라 모두 주활동 무대가 야만의 땅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붉은바람은 세일룬, 키라라는 아르곤.”
세일룬 왕국 북부 지역에서 탈출 노예로 시작하는 붉은바람은 중반 이후, 아버지의 복수를 하기 위해 타락한 야만족과 싸우기 전에는 쭉 세일룬 왕국에서만 활동했다.
“야만의 땅 극동에서 시작하는 키라라는 튜토리얼 끝나면 바로 아르곤 제국으로 넘어가고.”
세일룬 왕국이 아닌 아르곤 제국으로 넘어간 덕에 북부 야만족의 대침공에는 휩쓸리지 않지만, 애당초 고향을 나선 이유 자체가 도주였던 터라 아예 돌아갈 생각 자체를 하지 않는 키라라였다.
때문에 영웅전기2에서 야만의 땅이 그나마 비중 있게 등장하는 이벤트는 딱 둘 뿐이었는데, 하나는 이미 폐허가 되어버린 고향의 모습에 붉은바람이 울부짖는 ‘귀향’ 이벤트였고, 다른 하나는 ‘레나의 죽음’ 이벤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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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 성역의 위치 등등 자세한 사항은 부족민들이 전해줄 것이다.”
유더와 코델리아가 성역 조사를 맡겠다고 하자 위대한폭풍은 한시름 놓았다는 듯 한숨과 함께 말했다.
사실 티를 내지 않고 있어서 그렇지 무척이나 무리를 하고 있는 위대한폭풍이었다.
부족민도 아닌 유더와 코델리아의 정신을 하나로 잇고, 그런 둘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아직 어린 야생신인 위대한폭풍에게는 이래저래 어려운 일이었다.
“그럼 여기서 일단 정리하도록 하지. 조사가 끝나면 그때······.”
“잠시만요!”
자리를 털고 일어서려는 위대한폭풍을 코델리아가 급히 붙잡았다.
아직 해야 할 이야기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그렇지.’
위대한폭풍을 만나면 무슨 이야기를 할지에 대해 논의한 적은 당연히 없었다.
하지만 이미 야만의 땅에 오면 어떤 식으로 일을 진행할지 많은 대화를 나눈 유더와 코델리아였다.
아직 중요한 이야기가 하나 더 남아 있었다.
“위대하신 위대한폭풍이시여. 저희가 반드시 말씀드려야 할 정보가 있습니다.”
“무엇이냐.”
유더가 무척이나 진지하게 나오니 위대한폭풍도 호기심이 생긴 터라 일단 다시 자리에 앉았다.
유더는 바로 말하는 대신 한 차례 숨을 고른 뒤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붉은질풍이 걸린 병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말해 보아라.”
위대한폭풍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붉은질풍이 걸린 병이 일반적이지 않은, 일종의 저주라는 사실은 위대한폭풍 역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병- 아니, 저주의 이름은 ‘푸른 피안화’로, 과거 타락의 대군주 벨리알의 추종자들이 즐겨 사용하던 술법입니다.”
푸른 피안화는 적을 죽이기 위한 저주가 아니었다.
타락시키기 쉽도록 대상을 무력한 상태로 만드는 저주였는데, 푸른 피안화에 걸린 자는 육체와 정신 모두가 나약해져 종국에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저주를 건 자는 악마의 눈의 간부인 저주술사 하라켄.’
야만의 땅에서 제일 먼저 저주에 걸린 것은 성난뿔소 부족의 족장인 일곱뿔이었다.
성난뿔소 부족 최강의 전사였던 그는 불과 한 달 여 만에 무척이나 나약해져 고목이나 다름없는 상태가 되었고, 반년이 지나자 예언자 하라켄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그리고 일곱달 째가 되었을 때 하라켄에 의해 제물이 된 그는 벨리알의 권속으로 승천, 완전한 악마로 거듭났다.
“푸른 피안화는 저주를 건 술자와 가까이에 있을수록 그 효과가 강해집니다. 붉은질풍은 다행히 술자와 거리가 상당해 병의 진척이 비교적 느린 편이지만 결국엔 완전히 무기력한 상태에 빠지고 말 겁니다.”
“방법이 없느냐?”
위대한폭풍이 초조한 얼굴로 물었다.
부족을 보살피는 그에게 있어 부족장인 붉은질풍은 자식이나 다름이 없었다.
“저주를 풀 방법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저주를 건 술자를 죽여야 합니다.”
사실 훨씬 더 간단한 해결책이 있기는 했다.
벨리알의 저주보다 더 강력한 힘으로 붉은질풍을 정화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불가능한 일이었다.
야생신들 중에서는 제법 강한 축에 속하는 위대한폭풍이었지만 상대는 지옥을 지배하는 다섯 대군주 가운데 하나인 벨리알이었다.
비교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했다.
“족장회의에 참가했다가 걸린 것이 분명하다. 회의에 참석한 놈들 중에 범인이 있는 것이 분명해!”
위대한폭풍이 노성을 터트리자 유더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황상 족장회의에 참석한 하라켄이 통일전쟁의 장해물이 될 붉은질풍에게 저주를 걸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위대한폭풍이시여, 너무 노여워마소서. 제게 붉은질풍의 상태를 호전시킬 방법이 있습니다.”
“정말이냐?”
유더의 말에 위대한폭풍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물었다.
유더는 고개를 끄덕인 뒤 옷 속에 감춰져 있던 태양의 목걸이를 꺼내보였다.
“푸른 피안화에 걸린 자는 지옥의 한기에 끝없이 노출되게 됩니다. 그러니 양기로 한기를 몰아내면 저주의 진척을 늦추고 상태를 호전시킬 수 있습니다.”
애당초 붉은바람이 남부로 내려온 이유부터가 극양의 힘을 지닌 태양화초를 구하기 위함이었다.
‘태양화초는 피어난 자리에서 뽑아낸 순간 효력을 잃으니 애당초 병 치료에는 쓸 수 없지만.’
유더에게는 태양의 목걸이가 있었다.
지속적으로 양기를 부여하는 솔라리의 신물이라면 피안화의 저주를 막을 수 있을 터였다.
“오오··· 그럼 그 목걸이를 붉은질풍에게 주면 되겠구나.”
“네, 빌려주면 될 겁니다. 빌려주면.”
대여면 모를까, 아예 주는 것은 절대 불가였다.
더욱이 거저 넘길 마음은 조금도 없는 유더였다.
‘상황이 달라졌으니까.’
위대한폭풍이 나타나기 전이었다면 붉은질풍을 살리기 위해 무상으로 목걸이를 빌려줬을 유더였지만, 이제는 위대한폭풍이 있었다.
그렇다면 대여료를 받아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태양의 목걸이는 제가 걸린 지병을 고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물건입니다. 제게도 생명줄 같은 물건이죠.”
유더가 태양의 목걸이의 중요성을 강조하자 위대한폭풍이 미간을 찌푸렸다.
“지병? 건강해 보이는데?”
훤칠하니 얼굴도 잘생겼고.
위대한폭풍의 물음에 유더는 고개를 가로젓더니 돌연 기침을 토하며 말했다.
“아닙··· 쿨럭쿨럭. 제가 이렇게 보여도 꽤나 병약합니다. 그렇지? 코델리아?”
유더의 부름에 퍼뜩 정신을 차린 코델리아가 바로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맞아요, 우리 유더가 얼마나 허약한데요. 피부 창백한 것 좀 보세요. 핏줄 보일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제가 업고 다녔어요.”
피부가 투명하니 깨끗한 것도, 업고 다닌 것도 사실이었으니까.
“아닌데, 건강한 것 같은데······.”
“여기 팔뚝 가는 것 좀 보세요. 허리 가느다란 거랑. 완전 개미허리네, 개미허리야. 우리 유더 불쌍해서 어떡해······.”
유더와 같이 다닌 덕분인지 연기 실력이 일취월장한 코델리아였다.
가짜로 우는 것이 뻔한 상황이었지만, 아름다운 소녀의 눈물 연기는 지켜보는 이의 마음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으으음··· 하지만 난 바람의 신이다. 양기를 공급할 방법 같은 것은 없다.”
“괜찮습니다. 그럼 바람과 관련된 걸 주시면 되니까요.”
“맞아요, 유더가 약하긴 해도 목걸이 없다고 바로 죽을 정도는 아니니까요.”
유더와 코델리아가 나란히 말했고, 위대한폭풍은 결국 이 부부사기단에게 알면서 사기를 당할 수밖에 없는 처지라는 사실을 인정했다.
“···좋다, 그럼 내가 가진 신물들 중에서 가장 강력한 신물을 내리도록 하겠다.”
“감사합니다.”
“좋은 일에 잘 쓸게요. 위대한폭풍님 너무 멋져요. 잘생겼어요. 최고.”
점점 아무 말 대잔치가 되어가는 코델리아였지만, 듣기 좋은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하-하고 헛웃음을 터트린 위대한폭풍은 허공에 푸른빛이 감도는 화살을 소환했다.
“날개바람의 화살이다.”
화살 전체가 새하얀 것이 마치 얼음의 결정을 보는 것 같았다.
“사용자의 의지대로 조종이 가능하다.”
“의지대로요?”
“그래, 자유로이 허공을 누빌 수 있지.”
위대한폭풍의 말에 호응이라도 하듯 날개바람의 화살이 허공을 누비기 시작했는데, 그 속도가 실로 무시무시했다.
“와! 욘두!”
“욘두?”
위대한폭풍의 되물음에 코델리아는 그저 방긋 웃더니 유더를 돌아보았고, 유더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유더가 사용하니 유ㄷ··· 아얏!”
“아재개그 아웃!”
유더의 등짝을 후려친 코델리아는 다시 위대한폭풍에게 감사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유용하게 잘 쓸게요.”
“그래, 네게 잘 어울리는 무기일 거다. 마법사들에게 이런 원거리 무기 하나쯤은 있는 것이 좋으니까.”
“네, 맞아··· 어, 잠깐만요. 저 주시는 거예요? 유더가 아니라?”
“어, 너 줄 건데?”
위대한폭풍이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자 유더가 깜짝 놀라 말했다.
“자, 잠깐만요! 태양의 목걸이는 제 병 치료를 위한 겁니다만······?”
“그래서 뭐 어쩌라고. 내가 쟤 주고 싶다는데. 너 설마 네 약혼녀한테 준 물건을 뺏을 셈이야?”
“아니, 그건 아닌데······.”
아무리 유더라도 이렇게 나오니 할 말이 없었다.
그리고 사실 날개바람의 화살은 유더보다는 코델리아에게 더 어울리는 무기이기도 했고 말이다.
결국 포기한 유더가 어깨를 늘어트리자 위대한폭풍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마을에 가면 제단에 가도록 해라. 그곳에 올려둘 터이니.”
“···알겠습니다.”
“정말 감사해요!”
온도차 나는 유더와 코델리아의 감사를 받은 위대한폭풍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번에야말로 돌아가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아직이었다.
아직 벗겨먹을 구석이 남은 위대한폭풍이었다.
“잠깐! 잠깐만요! 아직 마지막 하나가 남았습니다!”
“왜 또.”
“정말 중요한 일입니다.”
“맞아요, 정말정말 중요해요.”
뭔지는 몰라도 일단 바람부터 잡은 코델리아는 무슨 일이냐는 시선을 유더에게 보냈고, 유더는 위대한폭풍과 코델리아 모두에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
“허억!”
“하아!”
유더와 코델리아는 동시에 번쩍하고 눈을 떴다.
하얀 이글루 안.
붉은바람은 여전히 곤히 잠든 상태였고, 입구에 난 작은 틈으로는 아침의 여명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하아.”
“후우.”
일단 숨부터 한 번 고른 유더와 코델리아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팔을 걷어 각자의 문장을 확인했다.
“진짜네.”
“역시 꿈이 아니었어.”
위대한폭풍을 만났고, 그의 전사가 되었다. 이것저것 잔뜩 뜯어내기도 했고 말이다.
“헤헤헤, 골드다 골드.”
코델리아가 자기 문장을 쓰다듬으며 말하자 유더의 표정이 자연스럽게 썩어 들어갔고, 코델리아의 미소는 더욱 짙어졌다.
“실레기. 실론즈. 심해인.”
“흠흠.”
“못 들은 척 하기는.”
“실버나 골드나.”
“네, 다음 실론즈 나오시고요.”
애당초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
깔끔하게 포기한 유더는 입구를 막고 있던 눈을 조금 부순 뒤 밖을 확인하며 말했다.
“아침 적당히 먹고 출발하자. 내일 밤까지는 마을에 도착해야 할 테니까.”
도망치는 와중에 짐은 다 버렸지만 다행히 휴대하고 있던 비상식이 있었다. 셋이서 아껴 먹으면 이틀 정도는 충분했다.
유더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코델리아는 허리춤을 뒤지며 말했다.
“빨리 가고 싶다. 상점에서 뭐 팔고 있을지 막 기대돼.”
마을에 들르면 일단 상점부터 가는 것이 RPG의 예의였으니까.
하지만 이번에 좋은 것은 장비 업그레이드에 대한 기대 때문만이 아니었다.
“공짜다, 공짜.”
유더가 위대한폭풍에게 요구한 것.
“프리패스가 필요합니다.”
“프리패스?”
“다른 말로는 블랙카드.”
위대한폭풍을 위해 싸우는 위대한폭풍의 전사에게 돈 받고 장비를 넘기는 것이 가당키나 한 말이던가?
위대한폭풍의 뜻을 받들기 위한 여정에 나서는 전사들에게 돈을 받고 보급품을 넘기는 것은 또 어떻고 말이다.
‘사실 돈이 없어서지만.’
세일룬 왕국 화폐가 야생의 땅에서 통할지도 의문이었지만, 일단 그 돈 자체를 도주하는 와중에 거의 다 잃어버린 유더와 코델리아였다.
단순히 등쳐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반드시 필요한 조치였다.
“유더 사기꾼, 벗겨먹기 제왕. 신조차 뜯어먹는 악랄한 남자.”
“그래서 싫어?”
“너무 좋아! 생활력 강한 남자 최고!”
남의 집 사기꾼이 아니라 우리 집 사기꾼이었으니까.
“아빠, 아빠. 너무 멋져요. 위기를 기회로 살리는 이 시대의 살림남이에요.”
“우리 공주님을 위해서라면 신에게도 사기 칠 수 있단다.”
하하호호 웃으며 훈훈한 속삭임을 주고받은 두 사람은 붉은바람을 깨운 뒤 출발 준비를 서둘렀다.
그리고 다음날 밤.
해가 지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세 사람은 위대한폭풍 부족의 마을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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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8장 - 위대한폭풍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