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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딩메이커-61화 (61/473)

< 제18장 - 위대한 폭풍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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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다.”

“크네.”

유더와 코델리아는 높이가 5미터는 족히 되는 커다란 정문 앞에 서서 말했다.

위대한폭풍 부족의 마을은 생각 이상으로 거대했다. 이 정도면 마을이 아니라 도시라 불러도 되는 게 아닐까 싶은 수준이었다.

“사람이 만 명도 넘는다.”

유더와 코델리아의 반응에 어쩐지 기분이 좋아진 붉은바람이 웃는 얼굴로 말했고, 유더는 납득했다.

‘악마의 눈 놈들이 일부러 신경을 쓸 정도의 집단이니까.’

붉은질풍 자체가 대단한 영웅이라 그런 것도 있었지만, 위대한폭풍 부족의 힘 자체를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누구냐!”

“붉은바람?!”

경계하는 목소리와 반가워하는 목소리가 정문 너머에서 동시에 들려왔다.

붉은바람은 쓰게 웃더니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목소리를 높였다.

“붉은바람이에요! 지금 돌아왔어요! 아버지를 뵙고 싶어요!”

대륙 공용어야 서툴지만, 당연히 야만족의 언어에는 능통한 그녀였다.

“지금 뭐라는 거야?”

“어··· 돌아봤다고 하는 거 같은데? 붉은질풍을 보고 싶다고 하는 거 같고.”

코델리아가 작게 묻자 유더 역시 작게 답했다.

야만족들의 언어로 읽고 쓰기가 가능한 유더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자연스럽게 회화를 할 수 있을 정도로 능통한 것은 아니었다. 애당초 게임에 나온 문자를 들입다 외우기만 한 유더였으니 말이다.

‘그러고 보면 신기하단 말이지.’

유희를 위한 게임인데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언어가 몇 개나 등장했으니까.

물론 반지의 제왕이나 스타트렉처럼 가공의 언어가 등장하는 창작물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손으로 꼽는 게 가능할 정도로 극소수였으니 말이다.

‘진짜 신기한 건 따로 있지만.’

영웅전기 시리즈와 동일한 이 세계.

정말로 게임 속에 들어왔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게임과 동일한 세계가 어딘가에 존재하고, 그 세계에서 다시 태어났다는 쪽이 그나마 더 현실적이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동일한 것일까.’

영웅전기 시리즈와 이 세계가 똑 닮은 이유.

영웅전기 제작진이 이 세계를 모방한 것일까? 아니면 다른 무언가가 있는 것일까.

흥미로운 지적 유희였지만 생각을 이어갈 수는 없었다. 정문이 열렸기 때문이다.

“붉은바람!”

“푸른물결!”

정문을 열고 나타난 푸른머리 소녀가 두 팔을 크게 벌리자 붉은바람은 얼른 달려가 소녀를 끌어안았다.

“나 쟤 알아.”

코델리아가 작게 말하자 유더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붉은바람의 ‘귀향’ 이벤트에 등장하는 소녀였다.

완전히 얼어붙어 얼음 조각상이 된 그녀의 시신을 끌어안고 오열하는 붉은바람의 모습이 머릿속에 선명했다.

“잘 됐다. 정말 잘 됐어.”

원작처럼 되지 않아서.

서로 살아있을 때 만나 저렇게 웃을 수 있어서.

코델리아는 눈시울을 붉히더니 이내 유더를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완전히 바꿔 버리자.”

두 사람의 운명을.

멸망이 예정된 위대한폭풍 부족의 미래를.

“그래, 완전히 바꿔 버리자.”

이미 많은 미래를 바꾼 유더와 코델리아였다. 그에 따라 점점 더 자신들이 모르는, 전혀 알 수 없는 미지의 상황들이 늘어났지만, 그에 따라 위험 역시 늘어났지만 멈출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소개할게, 내 친구들이야. 날 구해줬어.”

붉은바람이 유더와 코델리아를 가리키자 푸른물결은 경계어린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활짝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붉은바람의 친구는 내 친구야. 우리 마을에 온 것을 환영해. 족장님께서 너희가 올 거라 이야기하셨어.”

코델리아는 눈을 깜박였고, 유더는 열심히 머릿속으로 해석을 하였고, 붉은바람이 웃으며 말했다.

“푸른물결 너희 환영한다. 아버지께서 너희 올 거라 하셨다.”

위대한폭풍이 손을 써둔 모양이었다.

“좋아, 그럼 빨리 가자. 병의 진행을 막아야지.”

코델리아가 재촉하자 붉은바람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애당초 아버지인 붉은질풍의 병을 고치기 위해 마을을 나섰던 그녀였다.

“가자!”

붉은바람이 힘차게 외쳤다.

그리고 20여분 뒤.

붉은바람은 엉엉 울음을 터트렸다.

“잘못했어요! 잘못! 으앙!”

붉은질풍을 끌어안고 흘리는 감동의 눈물이 아니었다.

부끄러움이 20%, 아픔이 80% 쯤 섞인 울부짖음이었다.

철썩철썩! 팡! 팡!

붉은질풍은 엉덩이를 맞고 있었다.

좀 더 정확히 묘사하자면 붉은질풍의 무릎 위에 엎드린 채로 손바닥으로 엉덩이를 맞고 있었다.

남이 보든 말든 바지까지 내리고 때리는데, 엉덩이에 새빨간 손바닥 자국이 선명했다.

“저러니까 집을 나가지······.”

집을 나간 것은 전혀 다른 이유였지만 어쩐지 모르게 설득력이 넘치는 코델리아의 말이었다.

“···아픈 거 맞아?”

붉은바람을 때리고 있는 붉은질풍.

일단 거대했다.

란디우스 정도는 아니었지만, 아니- 손바닥이 붉은바람의 엉덩이보다 훨씬 큰 데다 무릎 위에 올려놓은 붉은바람이 무슨 인형처럼 보일 정도니 란디우스에 필적할지도 모를 어마어마한 덩치였다.

그리고 덩치만 큰 것이 아니었다.

란디우스처럼 근육으로 똘똘 뭉친 사내였는데, 팔뚝 굵기가 코델리아는 물론이고 유더 허리보다도 두꺼워 보였다.

‘쓸데없이 잘생긴 것도 비슷해.’

윈터 엘프의 피를 이은 것은 붉은질풍 역시 마찬가지였으니까. 수염 하나 없이 매끈한 얼굴은 란디우스보다는 카마엘에 가까운 느낌이 드는 중성적인 매력을 풍겼는데, 덩치가 덩치다보니 란디우스보다 괴리감이 심했다.

코델리아가 혼자서 응응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와중에 징벌을 마친 붉은질풍이 손을 거두었다.

“앞으로 한 달간 외출 금지다.”

어쩐지 익숙한 말에 유더와 코델리아가 반사적으로 흠칫했지만 다행히(?) 붉은바람에게만 집중하고 있는 붉은질풍이었다.

무척이나 엄숙하게 말한 그는 구석에 대기하고 있던 푸른물결에게 턱짓을 했고, 푸른물결은 다람쥐처럼 도도도 달려와 얼른 붉은바람을 수습했다. 엉덩이를 하도 맞아서 제대로 걷지도 못 하는 붉은바람이었다.

“흐윽··· 아빠 미워!”

“흥! 데려가라.”

마을을 뛰쳐나간 것에 그치지 않고 국경까지 넘어간 붉은바람이었으니까.

일반적으로는 돌아오지 못 하는 것이 정상이었다. 실제로 노예 경매장에 붙잡혀 있던 붉은바람이었고 말이다.

폭력이 좋은 것은 아니었지만, 호되게 혼내는 붉은질풍의 심정이 이해가 되는 유더였다.

“하아······.”

푸른물결과 붉은바람이 퇴장하자 일단 한숨부터 내쉬는 붉은질풍의 얼굴에는 걱정과 안도가 뒤섞여 있었다.

일단 건강한 것 같기는 하지만, 국경 너머에서 어떤 고초를 겪었을지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딸에 대한 걱정을 이어갈 때가 아니었다.

붉은질풍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정말 고맙다. 딸을 구해줘서. 위대한폭풍께서 말씀해주셨다. 몸이 불편해 일어나지 못 하는 것을 이해해 달라. 정말로 감사한다.”

다소 투박한 공용어 발음이었지만 알아듣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유더가 웃으며 화답했다.

“위대한폭풍께서 인도해주신 덕분입니다.”

“나는 위대한폭풍의 전사. 그대들도 위대한폭풍의 전사. 그대들 도우라 위대한폭풍께서 말씀하셨다.”

붉은질풍은 앉은 상태로 팔을 걷어 오른쪽 상완에 자리한 황금빛 문장을 보여주었다.

“저도 있어요. 유더는 은색이지만.”

코델리아가 바로 희희낙락하며 자기 문장을 보여주었고, 유더는 굳이 팔을 걷는 대신 이야기를 빠르게 진행시켰다.

“위대한폭풍께서 말씀하셨겠지만, 족장님께서는 지금 병이 아닌 저주에 걸리신 상태입니다. 이 목걸이가 저주의 진행을 막아줄 겁니다.”

유더가 태양의 목걸이를 건네자 붉은질풍은 무척이나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대의 병을 고치기 위해 필요한 물건이라 했다. 이런 귀중한 것을 넘겨주어 정말 감사하다.”

“괜찮습니다. 일이 해결될 때까지 빌려드리는 것뿐이니까요. 나중에 돌려주시면 됩니다.”

증여가 아닌 대여임을 다시 한 번 밝힌 유더는 계속해서 말했다.

“재촉하여 죄송하지만 출발 준비를 서둘렀으면 합니다.”

“음! 알겠다. 위대한폭풍께서 그대들을 도우라 하셨다. 우리 부족의 물건이라면 무엇이든 가져가도 좋다. 하지만 조건이 있다. 오늘 하루는 그대들을 환영하고 싶다. 지금부터 준비하고, 출발은 내일 아침에 해라.”

낯선 이방인이었지만 딸의 은인인 동시에 부족의 수호신인 위대한폭풍께서 전사로 삼으신 자들이었다.

더욱이 속수무책이던 붉은질풍 자신의 병에 대한 해법까지 내놓았으니, 낯설든 말든 이미 위대한폭풍 부족의 친우인 유더와 코델리아였다.

악마의 눈의 간부인 하라겐이 붉은질풍을 제거하려 한 것은 그가 강력한 전사이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올곧고 바른 인성에서 비롯된 인간적인 매력과 야생신들과의 끈끈한 유대는 그를 야만족들의 구심점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알겠습니다. 그리하겠습니다.”

“좋다. 하얀서리가 안내할 거다.”

말을 마친 붉은질풍이 손뼉을 몇 번 치자 문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청년이 들어섰다.

이름처럼 하얀 머리칼을 가진 잘생긴 청년이었다.

“물자 저장소로 안내해라. 그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내주어라.”

“그리하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붉은질풍에게 답하자마자 유더와 코델리아에게 말한 하얀서리가 앞장섰고, 유더와 코델리아는 설레는 마음을 안고 물자 저장소로 향했다.

그리고 다시 30여분.

“우왕, 신기한 게 많아.”

“야만족 무기는 영웅전기 시리즈에도 드물었으니까.”

대부분이 처음 보는 장비들이었다.

“일단 방어구부터 싹 바꾸자.”

“응응, 드워프제는 너무 눈에 띄니까.”

프로스트 앤빌에서 챙긴 고대 드워프들의 작업복은 성능은 좋지만 색이 문제였다.

앞으로 하얀 설원 위를 미친 듯이 돌아다녀야 할 터인데, 노란색은 너무 눈에 띄었다.

“대부분 뼈나 모피로 만들어졌네.”

“몬스터 헌터에 나오는 장비들 같아.”

겨울의 가호 덕분에 추위에는 비교적 자유로운 두 사람이었던 터라 무겁게 껴 입는 것보다는 기동성을 고려하며 장비들을 골랐다.

그렇게 다시 십여 분. 코델리아가 돌연 활기찬 목소리로 말했다.

“이거! 이거야! 이게 좋겠어!”

“뭔데 그래?”

무심코 돌아본 유더는 순간 헙하고 숨을 삼켰다.

“어때요, 아빠? 귀엽죠? 너무 귀여워서 숨도 못 쉬겠죠?”

코델리아가 잔망스럽게 말했고, 유더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정말로 귀여웠으니까.

코델리아는 머리에 하얀 토끼 귀를 달고 있었다.

정확히는 머리띠였는데, 끝에 토끼 귀가 달린 형태로, JRPG 같은 곳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귀여운 장신구였다.

“야만족들은 동물형상의 장비로 샤머니즘 파워를 이끌어낸다더니 진짜인가 보네. 토끼 세트를 장비하면 민첩성이 높아지는데다가 점프력까지 강해져. 좋은 선택이야.”

“말 돌리지 말고. 여기 네 것도 있어.”

코델리아가 히히 웃으며 토끼 귀를 하나 더 내밀었다.

“나도?”

“어, 너두.”

유더가 망설이자 코델리아는 끌끌끌 혀를 차며 말했다.

“괜찮아, 괜찮아. 유더는 미소년이니까. 어울릴 거야.”

“전생에도 잘생겼었거든?”

“그러시겠지.”

적당적당히 넘긴 코델리아는 우물쭈물하는 유더의 머리 위에 토끼 귀 머리띠를 씌웠다.

“와, 어울려. 완전 어울려. 우리 유더 너무 예쁘다.”

“웃겨 죽을 것 같은 표정으로 그런 말을 하면 설득력이 없거든?”

“그래도 푸힛 성능은 큭큭 좋잖아?”

맞는 말이기는 했다. 조금 수치스러워서 그렇지.

“괜찮아요, 아빠. 저도 하고 다닐게요. 둘이 함께하면 부끄럽지 않아요.”

“그러시겠지.”

뚱하게 답한 유더는 다른 것들을 좀 더 찾아봤지만, 불행히도 토끼 세트보다 좋은 장비를 찾을 수 없었다.

“방어구는 이쯤하고 무기나 챙기자.”

“동방무사의 검보다 좋은 게 있을까? 야만족들은 검 잘 안 쓰잖아.”

검보다는 도끼나 창 같은 대형 병기를 선호하는 야만족들이었다.

당장 붉은바람도 주특기는 창술이었고, 붉은질풍도 설정대로면 거대한 도끼창을 사용했다.

“그래도 공짜잖아.”

“그러네, 뭐라도 찾아봐야겠네.”

역시나 대형 병장기가 주였던 터라 주력무기로 쓸만한 물건은 찾을 수 없었지만 대신 쓸만한 단검과 손도끼를 여럿 챙긴 유더와 코델리아였다.

“난 천무지체니까.”

“네네, 몸으로 하는 건 뭐든 잘하는 천무지체 아저씨. 마지막으로 이거나 장비하시죠.”

코델리아가 내민 것은 하얗고 동그란 털복숭이였다.

“이게 뭔데?”

“토끼 꼬리.”

토끼 세트의 화룡점정.

유더의 얼굴이 어두워졌고, 그에 반하듯 코델리아의 얼굴은 환하게 밝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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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의 일정은 순조로웠다.

위대한폭풍의 제단에 가서 날개바람의 화살을 챙긴 유더와 코델리아는 붉은질풍이 연 소박한 연회에 참여했고, 다음날 아침 위대한폭풍 부족의 마을을 나섰다.

“화염 정령술을 익히면 좋을 거야. 위대한폭풍께서도 그쪽이 네 적성에 맞을 거라 하셨어. 창술도 좋지만 궁술도 연습해봐. 성과가 있을 거야.”

영웅전기담의 수많은 랭커들이 각종 실험을 한 결과 만들어진 붉은바람의 최강 테크트리.

유더와 코델리아의 당부에 붉은바람은 알겠다며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십여 분.

유더는 문득 제자리에 멈춰서더니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코델리아 양.”

“네, 아빠.”

“왜 자꾸 뒤쳐져서 걷는 거죠?”

“그래야 아빠 꼬리가 잘 보이거든요.”

유더의 표정이 굳어지자 코델리아는 깔깔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알았어, 알았어. 한동안은 내가 앞장설게. 내 꼬리 보고 마음 풀어.”

“됐거든요?”

“됐다면서 왜 내 뒤로 오는데?”

“공평함을 위해서?”

“지랄.”

결국 두 사람은 평소처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었다.

위대한폭풍에게 부여받은 임무는 거친눈사태의 성역을 조사하는 것.

하지만 두 사람에게는 한 가지 목적이 더 있었다.

“역시 거길 가는 거지?”

“거길 들려봐야지.”

영웅전기 시리즈에는 야만의 땅을 여행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그나마 가능한 것은 키라라의 시나리오 초반과 붉은바람의 귀향 파트였는데, 귀향 파트에서조차 갈 수 있는 곳이 한정되어 있었다.

‘마지막 확장팩에서는 모든 지역이 개방된다고 했지.’

그리고 그렇기 때문인지 갈 수는 없지만 뭔가 있는 것은 분명한 지역이 몇 개나 존재했다.

유더와 코델리아가 신경 쓰는 곳은 그 중에 하나.

붉은바람의 귀향 파트에서 아예 ‘뭔가 있는 것 같다.’라는 대사까지 나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볼 수 없는 지역.

마침 거친눈사태의 성역으로 가는 길 근방이었으니, 일단 그곳부터 들를 생각이었다.

‘내 짐작이 맞다면··· 솔라리의 유적이 있을 테니까.’

태양신 솔라리의 유적.

대륙 곳곳에 자리한 솔라리의 유적에는 일정한 규칙이 있었고, 유더가 세운 가설에 따르면 야만의 땅에도 몇 개나 되는 솔라리의 유적이 존재했다.

그리고 너무나 당연하게도, 게임에서 갈 수 없었던 장소와 유더가 솔라리의 유적이 있을 것이라 예상한 장소는 지도상에서 동일한 위치에 자리했다.

“빨리 가자.”

“네, 아빠.”

하지만 두 사람은 걷는 시늉만 하고 발걸음을 내딛지 않았다. 양쪽 모두 뒤에서 걸을 속셈이었기 때문이다.

“생각하는 수준하고는.”

“너나 나나 그게 그거거든?”

결국 두 사람은 이번에도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었다.

그리고 같은 시각, 전혀 다른 장소.

마찬가지로 옥신각신하는 남녀가 한 쌍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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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뭐라고 했습니까?”

“국경을 넘은 게 분명해요.”

숙소 마당에서 아침 수련을 하고 있던 게일 앞에 나타난 아델리아가 흥분한 얼굴로 말했다.

“신호가 계속 멀어지고 있어요. 지금 이 순간에도 북쪽으로 이동하고 있어요.”

게일과 아델리아는 지금 흐레스벨그 백작령의 입구라 할 수 있을 베르드폴니르에 있었다.

유더와 코델리아가 랑게스트에서 베르드폴니르 까지 오는데 보름 가까이를 소모한 것을 생각하면, 실로 엄청난 빠르기였다.

하지만 부족했다. 유더와 코델리아는 아직도 너무나 먼 곳에 있었다.

그런데 여기에 한 술 더 떠서 아예 국경을 넘었다니.

“유더와 코델리아 양이 야만의 땅으로 넘어갔다는 말씀입니까?”

“그렇다니까요! 벌써 몇 번을 말해요!”

크게 소리친 아델리아는 숨을 한 번 크게 고르더니 가슴을 펴며 말했다.

“이것저것 따질 때가 아니에요. 우리도 국경을 넘어야 해요.”

세일룬 왕국 내를 돌아다니는 것과 국경 너머 야만의 땅을 거니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존재했다.

야만의 땅.

미개하고 잔혹한 야만인들의 땅.

벌써 수백 년이나 야만족들과 싸워온 세일룬 왕국이었다.

‘유더 이 나쁜 놈!’

데리고 다닐 거면 좋은 곳만 다녀도 모자를 판에 그런 생지옥으로 코델리아를 끌고 가?

아무리 생각해도 용서할 수 없었다. 코델리아가 반대하든 아버지께서 반대하시든 잡으면 반드시 파혼이었다.

“저 혼자서라도 갈 테니까 그렇게 아세요.”

“서두르죠.”

“네?”

“서두르자고 했습니다.”

게일은 말만으로 끝내지 않았다. 바로 자기 방으로 돌아가더니 몇 분도 채 되지 않아 짐을 다 챙겨서 내려왔다.

“일단 유더와 코델리아 양이 국경을 넘었다는 사실은 비밀로 해야 합니다. 우리도 국경을 넘으려 한다는 것을 알면 흐레스벨그 백작가가 어떻게든 방해를 할 테니 말입니다.”

흐레스벨그 백작가는 국경을 지키는 변경백 가문이었다.

갈까마귀들의 수장이 국경을 넘는 것을 쉬이 허락할 리 없었다.

“잠깐, 몰래 넘자고요?”

“그럼 대놓고 넘을 생각이었습니까?”

게일의 되물음에 아델리아는 순간 말문을 잃고 눈을 깜박였다.

게일의 말대로였으니까.

국경을 합법적으로 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절차가 필요했다. 더욱이 이미 유더와 코델리아 덕분에 망신살이 뻗친 흐레스벨그 백작가에서 순순히 새로운 골칫덩이를 만들려 할 것 같지는 않았다.

게일과 아델리아 자신이 국경 너머에서 뭔가 사고라도 나면 결국 국경을 넘도록 허락해준 흐레스벨그 백작가에도 크든 작든 타격이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래도 아델리아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괜찮겠어요?”

“아, 국경을 넘을 방법 말씀입니까? 그거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바이엘 백작가는 북부를 가르는 벽에 관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알고 있습니다. 몰래 국경을 넘을만한 루트라면 일단 제가 아는 것만 해도 열 개는 됩니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그냥 옆집 담벼락을 넘는 게 아니었다.

국경을, 그것도 야만의 땅과 경계한 북부의 장벽을 넘자는 이야기였다.

요 며칠 함께 여행하며 아델리아가 느낀 게일은 바르고 성실한 남자였다.

여행 중에도 매일 아침 수련을 빼먹지 않고, 아무리 힘들어도 힘든 기색을 내지 않는, 남들이 보든 말든 매사를 정해진 규칙대로 해결하는 성실 그 자체의 남자.

그런데 그 남자가 국경을 몰래 넘자고 하고 있었다.

그것도 바이엘 백작가가 알고 있는 비밀 루트를 통해서.

“그럼 뭔가 다른 문제라도 있습니까?”

“그··· 아뇨, 아무 문제없어요.”

당연히 반대할 줄 알았다.

아니면 흐레스벨그 백작가에 도움을 청하자고 하든가.

“그럼 바로 출발합시다.”

어느새 마구간에서 말까지 내오게 한 게일이었다. 어어어 하던 아델리아는 어느새 말 위에 올라타서 게일을 따라 달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의외의 추진력.

마냥 성실하기만 한 것은 아닌 남자. 아니, 성실하지만 일의 경중을 구분할 줄 아는 남자.

“루겐부스트에서 말을 바꿀 겁니다! 미리 연락해 두었으니 시간을 지체하지 않아도 될 테고요!”

거기에 준비성까지 철저한 남자.

‘듬직하네.’

약간 오라버니를 닮았을지도.

게일에 대한 평가를 조금이지만 상향 조정한 아델리아는 저도 모르게 작게 웃더니 이내 다시 승마에 집중했다.

북쪽을 향해 말을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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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8장 - 위대한 폭풍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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