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21장 - 엇갈림 >
제21장 - 엇갈림
“일단 용맥에 대해 설명해주마.”
성십자수호단과 마녀의 영혼 이야기를 들은 거친눈사태는 천군만마라도 얻은 얼굴이 되었다.
너무나 절망적인 상황이라 어찌해야 하나 고민했는데, 갑자기 구원의 손길이 내려온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우선 너희도 앉거라.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
자기 옆 자리를 팡팡 두드린 거친눈사태를 엉덩이를 꼬물거려 조금 더 앉기 편한 자세를 취했다.
코델리아는 곰인형 같은 거친눈사태 옆에 앉았고, 유더는 맞은 편에 자리를 잡았다.
“용맥은 야생의 땅 전역에 흐르는 성스러운 힘의 흐름이다.”
“야생의 땅에만 있나요?”
코델리아의 물음에 거친눈사태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다. 사실 본래 용맥의 원형이 되는 지맥 자체는 대륙 전체- 아니, 이 별 전체에 퍼져 있다. 하지만 야생신들이 그 지맥 가운데 일부에 오랜 시간 힘을 부여하여 지금의 용맥을 만들어냈지.”
한 마디로 본래 있던 인프라 중 일부를 떼어 업그레이드를 시켰다는 이야기였다.
코델리아가 다시 물었다.
“용맥이 야생신들의 힘의 근원 같은 건가요?”
“온전히 그렇지는 않단다. 하지만··· 우리 야생신들이 용맥과 교류하며 힘을 키워나간 것은 사실이란다. 용맥이 흐르는 땅은 우리의 성역이니, 성역을 벗어나면 용맥과의 연결이 끊어져 우리의 힘 역시 약해진단다.”
“어··· 아무튼 용맥 없으면 꽝이다 이거네요?”
“완전 꽝은 아니다. 완전 꽝은··· 아예 용맥에 의존하지 않으면서도 강한 야생신도 있고······.”
하지만 말하는 투로 보아 일단 거친눈사태는 용맥 없이는 꽝에 속하는 야생신인 모양이었다.
“아무튼 엄청나게 중요한 거네요, 그럼.”
“그렇다. 자랑은 아니지만 야생의 땅에서 모두가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우리들 야생신들이 가꾸고 보살피는 성역의 존재 덕분이다. 그런데 용맥이 망가지면 성역이 망가지고, 그렇게 되면 결국 야생의 땅은 죽음의 땅이 되어버릴 것이다.”
유더는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게임 속에서 나온 야생의 땅은 사람 하나 살 수 없는 불모의 대지였다.
“그런데 내 생각에는 놈들이 더 심한 짓을 하려는 것 같다.”
“죽음의 땅으로 만드는 것보다요?”
“그래, 놈들은 용맥을 오염시키려 했다. 망가트리기 보다는 뭐랄까··· 용맥을 악용하려는 것 같았다.”
“맞아요, 그러고 보니 아까 그러셨죠? 용맥이 오염되어 타락하면 거친눈사태님도 타락하신다고요.”
코델리아의 말에 거친눈사태가 우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 심각한 와중에 유더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코델리아를 바라보았다.
항상 둘이 대화할 때는 잘 몰랐는데, 이제 보니 남의 이야기를 잘 듣고 거기에 호응도 잘 해주는 코델리아였다.
자연 이야기를 이끌어내는 솜씨 역시 좋았다.
‘생각하고 하는 것 같지는 않지만.’
그냥 천성.
‘하긴, 나도 덕분에 말이 많아졌으니까.’
영웅전기2를 처음 시작할 당시를 떠올린 유더는 잠시 옛 추억에 빠져들 뻔 했지만 이내 고개를 흔들어 잡념을 떨쳐냈다.
지금 중요한 것은 거친눈사태의 이야기였다.
“놈들이 용맥을 오염시키자 나 역시 정신이 이상해졌다.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너희가 오지 않았다면 분명 이성을 잃고 미쳐 날뛰는 괴물이 되었을 것이다.”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는 듯 거친눈사태가 도리질을 했다.
코델리아는 그런 거친눈사태의 등을 쓸어주며 유더를 보았다.
‘대충 알겠지?’
‘어, 알 것 같아.’
영웅전기2의 스토리와 지금의 상황을 대충 맞춰보니 답이 나왔다.
자라쿨이 용맥에 주입한 것은 벨리알의 피였다.
물론 문자 그대로 벨리알의 피는 아니었고, 특별한 의식을 통해 제물들의 피에 벨리알의 힘이 깃들게 한 것이었다.
“거친눈사태님, 놈들은 용맥을 타락시켜 야생신들을 타락시키고, 그로 말미암아 야생의 땅 전체를 타락시키려는 것 같습니다.”
유더의 말에 거친눈사태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실로 무시무시한 이야기다. 반드시 막아야만 한다.”
“네, 반드시 막아야만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거친눈사태님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내 도움이?”
“네, 맞아요. 거친눈사태님의 도움이 꼭 필요해요!”
코델리아가 간절한 어조로 애원하자 잠시 당황한 거친눈사태였지만 이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그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겠다!”
“정말 감사해요!”
다시 맞장구를 친 코델리아는 유더를 돌아보았다.
‘근데 뭘 어떻게 도와달라는 건데?’
‘음··· 근묵자흑이구나.’
일단 덮어놓고 사기부터 치다니.
순수했던 코델리아를 타락시킨 기분이 들어 잠시 죄책감을 느낀 유더였지만 이내 다시 거친눈사태에게 집중했다.
“악마 추종자놈들은 성난뿔소 부족을 이미 타락시켜 수하로 부리고 있습니다. 그러니 성난뿔소 부족을 고립시켜야 합니다.”
“성난뿔소 부족을? 놈들은 야생의 땅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로 크고 강한 부족이다.”
“네, 그러니 지금이라도 막아야 합니다. 놈들의 음모는 당장 이번 사태만으로도 만천하에 드러났다 할 수 있습니다.”
“음모?”
“예, 놈들은 용맥만 타락시키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야생신님들과 성역을 타락시켜 야생의 땅에 거하는 부족들마저도 타락시키려는 겁니다.”
“뭣이?!”
“용맥이 오염되고, 성역이 망가집니다. 부족들은 살기가 어려워지겠죠. 그런데 지금까지 믿고 의지해온 야생신님들마저 이상해진 상황입니다. 기댈 곳이 없어진 부족들의 마음은 약해질 것이고, 그 약해진 틈을 놈들이 파고들 것입니다. 이미 악마의 수하가 된 성난뿔소 부족에 편입시켜 야생의 땅 전체를 악마들의 소굴로 만들겠지요!”
“마, 맙소사. 사악하도다. 진정으로 사악한 놈들이로다!”
거친눈사태가 이 얼마나 무서운 일이냐는 듯 몸을 떨었다.
유더는 그런 거친눈사태의 작고 동그란 어깨를 붙잡으며 말했다.
“네, 그러니 반드시 막아야만 합니다. 야생의 땅의 각 부족들에게 진실을 전하고 성난뿔소 부족을 고립시켜야 합니다.”
성난뿔소 부족이 세일룬 왕국 북부를 침공한 것은 이러나저러나 야생의 땅을 일통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아예 일통 자체를 못 하게 한다.
오히려 놈들을 고립시킨다.
“어떻게 해야 하느냐. 내가 뭘 해야 하지?”
“일단 위대한폭풍 부족에게 가서 진실을 전하셔야 합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야생신의 말씀입니다. 모두가 귀를 기울이겠죠.”
“으으··· 그럼 내가 성역을 떠나야 한단 말이냐?”
무너지긴 했지만 그래도 아직 반 이상 남은 바위산이었다.
이러나저러나 거친눈사태의 성역이었고 말이다.
“거친눈사태님, 정말 심각한 상황이에요. 지금 우리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건 거친눈사태님뿐이고요.”
코델리아가 눈시울까지 붉히며 간절한 어조로 말하자 거친눈사태가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야생신에게 힘의 근원인 성역을 버리고 떠나라는 것은 그냥 나가 죽으라는 것보다 아주 약간 나은 정도의 이야기였으니 말이다.
“내가 떠난 사이에 다른 놈이 이 산을 차지하면 어떡하지?”
우물쭈물 말하자 코델리아는 거친눈사태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도둑놈이 거친눈사태님의 땅을 차지하면 저희가 도와드릴게요. 같이 도둑놈을 몰아내고 산을 되찾는 거예요.”
“예, 위대한폭풍님께서도 도와주실 겁니다.”
위대한폭풍이 들었다면 ‘내가 왜?’라고 했겠지만 일단 이 자리에 없었으니 발언의 기회 역시 없는 것이었다.
“으으으··· 알겠다. 내가 하겠다. 내가 위대한폭풍 부족에게 가 성난뿔소 부족의 사악한 음모를 만천하에 알리겠다!”
“너무 멋져요. 거친눈사태님 최고!”
코델리아가 거친눈사태를 꼭 끌어안았고, 거친눈사태는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음··· 으음.”
아니, 대놓고 웃지 않아서 그렇지 좋아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미인은 세상의 보물이라더니.’
피식 웃은 유더는 바로 다음 이야기를 꺼냈다.
“거친눈사태님, 위대한폭풍 부족의 거처는 알고 계신지요?”
“대충은 알고 있다. 위대한폭풍 꼬맹이가 사는 곳을 아니 말이다.”
“다행이군요. 빠르고 안전한 여행길이 되시길 바라겠습니다.”
“그래, 고맙··· 잠깐. 되길 바란다니. 같이 가는 것 아니었나?”
거친눈사태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묻자 코델리아 역시 유더를 돌아보았다.
유더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정말 애석한 일이지만 위대한폭풍 부족에는 거친눈사태님 혼자 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럼 너희는?”
“놈들의 음모를 막을 생각입니다. 거친눈사태님, 이곳의 용맥과 이어진 야생신의 성역이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위대한폭풍님을 제하고요.”
“그··· 여기서 북동쪽으로 올라가면 나오는 분지에 고운눈바람의 성역이 있다.”
“거기로 갈 생각입니다. 놈들이 진정 용맥 전체를 타락시키려 하고 있다면 다른 성역 역시 위험합니다.”
이치에 맞는 말이었다.
더욱이 유더와 코델리아에게는 이동해야 하는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레나.’
레나가 목숨을 잃는 이벤트가 일어나는 장소에 도달해야만 했다. 아직 일정에 여유가 있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마구 낭비할 정도로 시간이 많은 것은 또 아니었다.
‘위대한폭풍 부족에 돌아가려면 이틀 남짓이 걸려.’
왕복하면 나흘이나 되었다.
유더의 생각을 대충 짐작한 코델리아가 눈빛으로 물었다.
‘괜찮을까?’
‘괜찮겠지. 오면서 딱히 위험은 없었으니까.’
더욱이 약해졌다고는 하나 거친눈사태는 야생신이었다. 설마 다른 야생신의 성역을 못 찾아가겠는가?
“거친눈사태님, 부탁드립니다.”
“으으음··· 알겠다. 위대한폭풍 부족에는 나 혼자 찾아가겠다.”
거친눈사태가 결심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자 유더는 다시 한 번 예를 표한 뒤 물었다.
“고운눈바람님의 성역 위치를 조금 더 자세히 알려주실 수 있으신지요.”
“물론이다. 예전에 챙겨둔 지도가 있다.”
거치눈사태는 다시 바닥에 앉아 땅을 팠고, 그러자 땅 속에서 지도가 나왔다.
아까 빙결석도 그렇고 거친눈사태만의 마법인 모양이었다.
“자, 가져가거라.”
“감사합니다.”
대화는 여기까지였다.
야생의 땅을 구하는 일이었으니 괜시리 낭비할 시간 따윈 없었다.
“그럼 나는 가보겠다.”
“예, 추후 다시 만나 뵐 날을 기대하겠습니다.”
“나중에 다시 만나요.”
정중히 예를 표하는 유더와 손을 흔드는 코델리아에게 마주 손을 흔들어준 거친눈사태는 서둘러 바위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코델리아는 그런 거친눈사태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다 말했다.
“괜찮을까?”
“괜찮겠··· 잠깐, 설마 감이 안 좋다거나?”
코델리아의 감이라면 신뢰할 만 했으니까.
유더가 생각 이상으로 진지하게 묻자 당황한 코델리아는 잠깐 고민하더니 이내 어깨를 으쓱였다.
“아니, 감이 안 좋은 정도는 아니고. 그냥 걱정되어서.”
“잘 가겠지. 저래 보여도 수백 년 묵은 야생신이니까.”
안도한 유더는 다시 코델리아에게 말했다.
“아무튼 오늘은 일단 여기서 쉬고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하자.”
“응응, 그런데 진짜 좀 씻고 싶다. 온천 같은 거 없으려나?”
“어··· 눈 모아놓고 파이어 볼로 녹이면 어때? 물 식을 것 같으면 그때그때 다시 파이어 볼 집어넣고.”
유더의 말에 코델리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주먹을 불끈 쥐며 콧김을 내뿜었다.
“가능성이··· 있어!”
못 할 게 뭐가 있단 말인가.
목욕을 위해서라면 그 이상도 할 수 있는 코델리아였다.
“네네, 아무튼 일단 잠잘 곳부터 찾자. 밥도 좀 먹고.”
“그러게, 배고파.”
“적당한 곳 찾으면 바로 밥해줄게.”
“또 육포 물에 불린 거?”
“우리 공주님, 편식은 안된다고 했죠?”
“아니, 씨발. 편식 좀 하게 반찬 수 좀 늘려봐. 응?”
“노력해보지요.”
“어, 정말?”
코델리아가 눈을 깜박이며 묻자 유더는 고개만 한 번 끄덕인 뒤 앞장서기 시작했다.
오늘은 둘 다 고생했으니 아껴둔 특식을 조금 풀어도 될 것 같았다.
‘음, 좋아. 이대로 가면 되겠지.’
새삼 거친눈사태가 떠난 방향을 돌아본 유더는 다시 발걸음을 서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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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1장 - 엇갈림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