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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딩메이커-70화 (70/473)

< 제22장 - 고운눈바람 >

제22장 - 고운눈바람

홀로 바위산을 내려간 거친눈사태가 잘못된 길에 접어들 즈음.

유더와 코델리아는 적당한 야숙 장소를 찾은 뒤 쉴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바닥이 좋아야 잠을 잘 자는 법.”

스스로의 말에 호응하듯 고개를 몇 번이나 끄덕인 코델리아는 디그 마법과 마녀의 염동력을 적절히 응용해 잠자리를 만들었다.

지표에서 1미터 남짓 파로들어간 다음에 평탄화를 시켰는데, 이렇게 땅을 판 뒤 지붕을 덮고 안에서 마법으로 열기를 발하면 제법 따뜻한 밤을 보낼 수 있었다.

‘아예 평평하고 큰 돌을 묻은 다음 위에 흙을 덮을까?’

마법으로 돌만 데우면 완전 온돌 같지 않을까?

“돌침대, 돌침대. 장수 돌침대.”

아무 말이나 흥얼거리며 잠자리 작업을 하던 코델리아는 옆을 돌아보았다.

모닥불을 피운 유더가 요리를 하고 있었는데, 냄새가 제법 좋았다.

“유더야, 유더야. 오늘 저녁은 뭐야?”

“육포 죽이요, 마님.”

뜨거운 물에 잘게 썬 육포를 넣은 뒤 아껴둔 곡물을 조금 넣고 거기에 소금으로 간을 한다.

별거 아닌 요리였지만 계속 힘을 쓴 탓인지 자꾸만 침이 나오는 코델리아였다.

“맛있겠다.”

“맛있을 거야. 내가 했으니까.”

“응, 기대할게.”

유더의 뻔뻔함에도 이제는 익숙해진 코델리아였다.

흥흥 콧노래를 조금 더 흥얼거린 그녀는 새로 만든 잠자리에 적당히 방수포를 덮어본 뒤 고개를 끄덕였다.

“음, 좋아. 잘 만들어졌어.”

방수포 크기 때문에 그리 넓게 만들지는 못 했지만 두 사람이 눕기에는 충분했다.

“다 됐어?”

“응, 다 됐어. 밥은?”

“이쪽도 다 됐어.”

“신난다.”

가볍게 엉덩이를 흔들며 춤까지 춘 코델리아는 유더 곁으로 쪼르르 달려왔고, 유더는 저도 모르게 웃었다.

“왜?”

“아니, 하는 짓이 귀여워서.”

“흥, 소확행 몰라? 소확행. 사람에게는 크든 작든 낙이 필요한 법이라구.”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

북부12가문 중 하나인 체이스 백작가의 영애이자 누구나 인정하는 절세미소녀의 낙이라는 것이 그날 먹을 밥이라는 사실에는 통탄을 금치 못 하는 유더였지만, 코델리아의 이론 자체에는 동의했다.

“맞아, 소확행 중요하지.”

“응응, 바로 그거야.”

유더가 바로 동의했기 때문인지 기분이 좋아진 코델리아는 유더가 퍼준 육포 죽을 한 입 삼켰다.

“어때?”

“마이쪄.”

뜨거워서 제대로 말도 못 하는 처지였지만 코델리아는 히죽 웃었고, 유더 역시 식사를 시작했다.

“그런데 유더야.”

“네, 마님.”

“일단 붉은폭풍 아저씨는 살린 셈이잖아.”

“뭐, 당장은 그렇지. 저주가 더 악화되지는 않을 테니까.”

“그럼 이제 우리 계획은 어떻게 되는 거야?”

대충의 윤곽은 코델리아도 알았다.

거친눈사태를 설득하며 말했듯이 성난뿔소 부족의 야만족 대통일을 막는 것이 당면의 과제였다.

하지만 겨우 이 정도로는 부족했다.

구체적인 청사진이 필요했다.

“일단··· 붉은폭풍을 중심으로 한 동부 연맹을 만들어야지.”

“성난뿔소와 일곱뿔에 대항하는?”

“어, 벌써 여기까지 손을 뻗은 걸 보면 이미 서부는 어느 정도 손에 넣은 상황일 거야.”

자기 주변 정리도 안 되었는데 멀리까지 원정을 보내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코델리아 역시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다음은?”

“동부의 야생신들 역시 규합해야지. 악마의 눈은 서부의 야생신들을 죽이거나 타락시켰을 거야. 지금 생각해보니 거친눈사태도 게임에서는 적으로 나왔던 것 같아.”

“거친눈사태가?”

“어, 액트2 중반에 나왔던 언데드 곰 기억나? 넉백 공격 엄청하던.”

“어··· 아! 생각났다. 맞아. 생각해보니 좀 닮은 것도 같아.”

유더의 말마따나 언데드가 된 상태였기 때문에 문자 그대로 반쯤 썩은 모습으로 등장했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거친눈사태 같았다.

“타락한 야생신들에게 맞서기 위해서는 이쪽도 야생신들이 필요해. 더욱이 악마의 눈과 맞서야 하니까.”

“음··· 확실히. 중급 마인도 버거운데 상급 마인 나와 버리면 답 없긴 하지.”

현재 유더와 코델리아의 전력으로 상급 마인을 격퇴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러니 상대할 수 있는 자들을 우리 편으로 만든다.

‘물론 가장 좋은 건 그냥 나랑 코델리아가 강해지는 거고.’

이미 야생의 땅에 처음 들어왔을 때보다 레벨이 꽤 높아진 유더와 코델리아였다.

더욱이 유더와 코델리아 모두 아직 성장의 여지가 충분했다.

‘구천구문은 아직 이문에 불과하니까. 더욱이··· 레나를 만나 천사의 피를 구하면 코델리아를 선조회귀 시킬 수 있어.’

그럼 염원하던 코델리아 타천사 모드가 가능해질 터였다.

‘기대되네.’

유더는 잠시 타천사로 각성한 코델리아의 모습을 상상해보았고, 코델리아는 유더의 등을 찰싹하고 때렸다.

“아야! 왜?”

“아니, 뭔가 음흉한 생각을 하는 것 같아서.”

“하여간 감은.”

“뭐야? 진짜 음흉한 생각하고 있었어?”

유더는 답하는 대신 이야기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붉은폭풍은 강력한 전사인 동시에 주술사이기도 해. 저주만 어떻게 하면 일곱뿔을 상대할 수 있을 거야.”

“말 돌리기는.”

잠시 찌릿하고 유더를 노려본 코델리아였지만 잠깐뿐이었다. 이내 유더의 이야기에 동참해주었다.

“다른 부족의 전사들이나 족장들 중에도 강자들이 있겠지?”

“있겠지. 야생신들 중에서도 전투에 특화된 자들이 있을 거고.”

“그리고 레나.”

“맞아, 레나.”

영웅전기 1편의 다섯 주인공들 가운데 하나.

이미 인외의 경지에 들어선 란디우스와 카마엘 정도는 아닐 가능성이 높았지만, 그래도 그녀의 힘은 실로 강대할 터였다.

“으··· 지금 어디 있는지 알면 바로 달려갈 텐데.”

코델리아가 어깨를 늘어트리며 말하자 유더 역시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레나의 죽음에는 숨겨진 비밀이 많으니까.”

영웅전기 2편에서 레나의 죽음은 시네마틱 무비로 진행이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주인공의 스토리 진행에 맞춰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특정 시기가 되면 뜬금없이 시네마틱 무비가 나온다는 사실이었다.

‘때문에 장소와 시간 밖에 알 수 없어.’

사실 장소 자체도 불분명했지만, 영웅전기2의 수많은 고인물들이 시네마틱 무비에 나온 배경들을 기반으로 위치를 추정해 둔 것이 있었다.

‘칼날부리 협곡.’

그곳에서 레나가 죽는다.

그러니 미리 그곳에 도착해 레나의 죽음을 막는다.

“칼날부리 협곡은 야생의 땅 동부 북쪽에 있지?”

“어, 아르곤 제국하고도 가까운 곳이야.”

야생의 땅 출신 플레이어블 캐릭터 중 하나인 키라라는 게임 초반에 야생의 땅을 떠나 아르곤 제국으로 야반도주를 했는데, 그 경로 상에 칼날부리 협곡이 있었다.

“으음··· 날짜에 여유가 없는 건 아니지만 은근 빠듯하게 느껴지네.”

“동부 연맹 구축은 붉은폭풍과 거친눈사태에게 맡겨두는 수밖에 없어. 물론 우리가 목적지로 가는 와중에 만나는 동부의 부족들에게 양념은 칠 수 있겠지만.”

“약이 아니라?”

“그거나 그거나.”

“흥, 사기꾼.”

혀를 배 내밀었지만 눈이 웃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유더의 사기질에 능숙하게 맞장구를 치게 된 그녀였으니 말이다.

‘타락했구나, 타락했어. 아직 타천사도 안 되었는데 벌써부터 타락이라니.’

하지만 어쩐지 모르게 뿌듯한 기분이 드는 유더였다.

“아무튼 다 먹었으면 대충 씻고 자자.”

“목욕하고 싶다, 목욕.”

셀프 온천을 만들어 목욕한다는 발상은 역시 좀 무리였다.

때문에 코델리아는 눈을 녹여 만든 물로 얼굴과 목이나마 깨끗이 닦은 뒤 자리에 누웠다.

“하아, 오늘도 고생했다.”

“푹 쉬어.”

“응, 너도.”

거기까지였다. 코델리아는 정말 바로 깊이 잠들었고, 유더는 감탄 섞인 헛웃음을 지은 뒤 방수포로 된 뚜껑을 덮었다.

&

다음날 아침.

일찍부터 길을 나선 유더와 코델리아는 거친눈사태가 준 지도를 따라 고운눈바람의 성역이 위치한 북동쪽으로 나아갔다.

사방이 설원이다 보니 어디가 어디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코델리아였지만, 딱히 발걸음에 망설임이 있지는 않았다.

만능 유더위키가 곁에 있었기 때문이다.

“유더위키야, 방향 제대로 가고 있는 거 맞지?”

“어, 맞아.”

처음 집을 나설 때부터 이미 나침반을 챙긴 유더였다.

거친눈사태가 광야를 헤매고 있을 그때 유더와 코델리아는 꾸준히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렇게 다시 하루.

삼일 째 점심 무렵이 되었을 때 유더와 코델리아는 고운눈바람의 성역을 눈앞에 두었다.

&

고운눈바람의 성역은 커다란 분지 안에 있었는데, 사실 분지가 없더라도 알아보기가 무척이나 쉬웠다.

인근에 도착한 것만으로도 주변 환경이 변했기 때문이다.

“설원이 아니야.”

방금까지 눈밭이었는데, 마치 선이라도 그어놓은 것처럼 일정 영역부터는 눈이 없었다. 날씨도 쌀쌀하긴 했지만 그래봐야 가을 날씨 수준이었다.

포레스트 앤빌을 떠오르게 할 정도의 극한지대였던 다른 곳들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이게 야생신의 힘인가.’

야만족들이 야생의 땅에서도 살아갈 수 있는 이유.

넓게 자리한 들판 위에는 푸른 초목이 가득했다. 이곳에서라면 가축을 키우는 것은 물론이고 농사 역시 가능할 것 같았다.

갑자기 바뀐 풍경에 잠시 넋을 놓고 있던 코델리아는 어느 순간 고개를 번쩍 들었다.

“싸우고 있어.”

그녀의 말대로였다.

야트막한 언덕을 올라가니 넓은 들판 너머에 자리한 분지의 입구가 보였다.

어림 세어도 수백은 될 법한 인원들이 성벽을 사이에 두고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유더와 코델리아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세를 바짝 낮춘 뒤 전장의 상황을 파악했다.

머리에 뿔 투구를 쓴 자들이 마물들과 뒤섞여 성벽을 공격하고 있었는데, 공격 측의 병력이 수비 측의 세 배는 족히 됨직했다.

“오래 못 버틸 거야.”

코델리아의 말대로였다. 수비 측이 제법 잘 버티고 있었지만 힘겨워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한 시간만 늦게 도착했어도 이미 무너진 성벽을 보았을 터였다.

하지만 어찌할 것인가.

단 둘이서 수백에 달하는 병사들에게 돌진이라도 할 것인가?

“생각이 있어.”

유더가 말했고, 코델리아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

악마의 눈의 중급 마인 마드가는 차가운 눈으로 전장을 바라보았다.

성난뿔소 부족의 전사들이 지옥에서 불러낸 마물들과 함께 맹공을 펼치고 있었다.

하라겐에게 받은 벨리알의 비보인 타락의 창 덕분에 고운눈바람은 제대로 된 힘을 쓰지 못 했다.

용맥에 꽂힌 타락의 창이 고운눈바람의 성스러운 힘을 억압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쪽 역시 타락의 창에 전력을 다하느라 전사들에게 이렇다 할 지원을 펼칠 수 없었지만 애당초 필요 없는 일이었다.

고운눈바람을 모시는 부족은 그 숫자가 적었다. 하나하나가 강병들이긴 했지만, 성난뿔소 부족은 야생의 땅 전체에서도 가장 강력한 전사들의 집합체였다.

벨리알의 힘에 의해 강화까지 되었고, 숫자는 고운눈바람 부족의 세 배에 달했으니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시간문제로군.’

그간 잘 버텼지만 이제 끝이었다.

성벽을 부수고 고운눈바람의 부족을 몰살시킨 뒤 야생신을 포획한다.

“부숴라! 죽여라! 파괴하라!”

짐승의 뼈를 투구 대신 머리에 뒤집어쓴 마드가의 말에는 힘이 있었다.

주술사인 그녀의 몸에는 색색의 도료로 그린 문양이 가득했고, 손에 든 해골지팡이에서는 사악한 힘이 요동쳤다.

마드가는 눈을 감고 미소를 머금었다.

마치 진미를 맛보듯 작금의 상황 자체를 음미했다.

‘멍청한 자라쿨 놈과는 다르다.’

모시는 부족 하나 없는 거친눈사태를 포획하는 임무를 실패했다지.

머저리 같은 놈.

하지만 싫지는 않았다.

이미 죽었고, 대실패를 한 덕에 마드가 자신에게 공을 세울 기회가 하나 더 생겼으니 말이다.

‘상급 마인이 될 날이 멀지 않았구나.’

악마의 눈의 마인들의 목표는 모두 같았다.

벨리알에 보다 가까워지는 것.

상급 마인이 되고나면 상급 악마인 데몬프린스로의 길 역시 열릴 터였다.

아직은 먼, 하지만 반드시 쟁취할 미래를 상상하며 마드가는 미소지었다.

그리고 성난뿔소 부족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으헉?!”

“마드가님!”

경악에 찬 전사들의 외침에 마드가는 급히 눈을 떴다. 전방에는 이렇다 할 변화가 없었다.

여전히 위태로운 성벽과 피투성이가 된 고운눈바람 부족의 전사들뿐이었다.

하지만 상황이 달라졌다.

공격하는 측도, 수비하는 측도 싸우지 않고 있었다. 다들 똑같이 멍한 얼굴이 되어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모두가 보는 방향.

마드가는 돌아섰다. 그리고 볼 수 있었다.

“미친.”

들판 전체를 불태울 기세로 전진하는 불꽃의 노도를.

거대하고 거센 들불이 등 뒤를 덮쳐오고 있었다.

&

< 제22장 - 고운눈바람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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