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23장 - 썩은물 >
제23장 - 썩은물
유더와 코델리아는 야생의 땅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 했다.
영웅전기2에서 야생의 땅에 가볼 수 있는 기회는 드물었고, 설사 갈 수 있다 하더라도 방문할 수 있는 지역 자체가 무척 제한적이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영웅전기2의 초반 시나리오의 중심축이라 할 수 있을 야만족 침공을 뒤틀기 위해 게임 속에서 다뤄지지 않았던 사건에 개입한 상황이었다.
때문에 아무리 썩은물인 유더와 코델리아라 한들 작금에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는 시작과 과정을 알지 못 했고, 그나마 결과마저도 본인들 스스로의 손으로 뒤틀고 있는 와중이니 사실상 미지와의 조우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썩은물인 유더와 코델리아였다.
사건은 알 수 없다 한들 인물에 대해서는 아는 그들이었다.
“비를 내리게 한 건 마드가였어.”
“악마의 눈의 중급 마인, 주술사.”
“본래는 성난뿔소 부족 출신. 대주술사였던 스승에게 한 번 내쳐졌지만 하라겐을 만나 악마의 힘을 얻었고, 강력한 악마술사가 되어 돌아온 케이스.”
“좋게 보면 진취적인 성격. 출세지향적이고 신중해. 한 번 스승에게 버림 받은 탓인지 의심이 많아.”
“뭐든지 자기 손으로 처리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고.”
“자신감이 과해.”
“오만한 성격.”
거기까지 말한 유더와 코델리아는 서로를 돌아보았고, 코델리아는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미친놈아, 차라리 마드가 스탯을 외우지 성격을 외우니?”
“에헤이, 스탯도 당연히 외우고 있지. 그러는 너야말로 의외로 잘 안다?”
“누구만큼 썩은 터라.”
“딱 좋게 썩었네. 이제 석유 되는 거야?”
“뇌절 치지 말구.”
“네, 마님.”
서로에 대한 공치사를 마친 두 썩은물들은 다시 정면- 정확히는 매복해있는 지점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온다.”
유더가 낮게 말했고 코델리아는 숨을 죽였다.
두 사람은 지금 달맞이 언덕이 아닌 높게 솟은 봉우리 위에 엎드려 있었다.
마드가의 본진이 있는 곳에서 달맞이 언덕으로 향하는 와중에 반드시 지나야만 하는 길목과 그 길목을 내려다볼 수 있는 봉우리.
아침부터 기다린 보람이 있는지 달맞이 언덕으로 향하는 성난뿔소 부족의 전사들을 목격할 수 있었다.
‘역시.’
‘과연.’
대열 중간에 마드가가 자리하고 있었다.
짐승의 뼈로 만든 투구와 해골 지팡이 덕분에 멀리서도 알아보기 쉬운 그녀였다.
확인을 마친 두 사람은 포복으로 본래 있던 자리에서 좀 더 아래로 이동한 뒤 서로를 보았다.
‘진짜로 마드가가 왔어.’
본래부터 성난뿔소 부족 출신인 마드가는 야생의 땅에 대해 잘 알았다.
당연히 푸른 달의 정수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고, 달맞이 언덕의 위치 역시 알았다.
마드가는 의심이 많고 중요한 일은 본인 스스로가 처리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때문에 유더와 코델리아는 생각했다.
높은 확률로 마드가 본인이 푸른 달의 정수를 취하러 올 것이라 말이다.
그리고 그 예상은 현실이 되었다.
때문에 코델리아는 유더에게 눈짓했고, 유더는 고개를 끄덕였다.
‘계획대로 가자.’
마드가가 직접 지휘에 나섰을 때를 대비한 계획.
코델리아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고, 두 사람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드가와 그 일행보다 앞서기 위해 발걸음을 서둘렀다.
&
달맞이 언덕에 도착한 마드가는 눈을 가늘게 떴다.
애당초 동물들초자 출입을 삼가는 달맞이 언덕이었지만 지나칠 정도로 인기척이 없었기 때문이다.
‘과연, 함정인가.’
궁지에 몰린 고운눈바람에게 희망은 푸른 달의 정수뿐이었다.
그런데 이렇게나 조용하다면 역시 함정 외에는 생각할 것이 없었다.
“마드가님?”
“기다려라.”
성난뿔소 부족의 전사들을 제지한 마드가는 언덕 위로 오르는 유일한 통로를 가만히 바라보았고, 이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조잡하구나.”
나름 열심히 숨긴 듯 했지만 통로 중간에 함정을 매설한 흔적이 보였다.
위아래로 깨끗한 와중에 발자국 하나가 통로 중간에 떡하니 찍혀 있었으니 말이다.
“놈들이 통로에 함정을 설치해둔 모양이다.”
마드가의 말에 부관을 비롯한 전사들이 깜짝 놀라 통로를 바라보았다.
마드가는 친절히 통로 중간에 찍힌 발자국을 가리킨 뒤 말을 이었다.
“어쩌면 언덕 위에 매복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모두 어리석은 짓에 불과하다. 우리에게는 푸른 달의 정수가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니 말이다.”
마드가의 말에 부관은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지만 잠깐뿐이었다.
이내 감탄과 함께 눈을 크게 떴다.
“아!”
“그래, 우리의 목적은 고운눈바람 부족이 푸른 달의 정수를 손에 넣지 못 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굳이 푸른 달의 정수를 손에 넣을 필요는 없지. 그리고 푸른 달의 정수가 바로 저곳에 있다 한들 고운눈바람 부족은 환상의 달이 뜨기 전까지는 정수를 손에 넣을 수 없다.”
즉, 굳이 달맞이 언덕을 올라갈 것도 없이 주변을 포위하고 있기만 해도 된다는 뜻이었다.
“푸른 달의 정수를 얻는다 해도 결국 돌아가기 위해서는 언덕을 내려와야만 하지. 우린 그저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놈들이 만들어놓은 무대에 굳이 올라갈 필요가 없는 것이지.”
“오오······.”
마드가의 설명에 성난뿔소 부족의 전사들 모두가 감탄했다.
전투를 좋아하는 그들이었지만, 아무 전투나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다.
성난뿔소 부족의 전사들이 좋아하는 것은 이기는 전투였다.
새삼 다시 통로와 저 너머에 자리한 언덕을 바라본 마드가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놈들의 인내심이 얼마나 될지 구경해보는 것도 좋겠지. 진을 펼치고 쉬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마드가를 따라온 전사들은 달맞이 언덕 전체를 감시할 수 있도록 띄엄띄엄 자리를 잡은 뒤 정말로 주저앉거나 무기를 내려놓는 등 저마다 휴식을 취하기 시작했다.
‘먼저 인내심이 바닥나는 것은 너희가 될 것이다.’
시간은 마드가 자신의 편이었으니.
오늘밤만 지나면 승리를 거머쥐는 자신들과, 오늘밤이 지나면 마지막 희망마저 잃어버리는 저들간의 차이는 하늘과 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어리석은 것들.”
재차 미소 지은 마드가는 자리에 편히 앉은 뒤 명상을 시작했다.
그리고 한 시간, 다시 두 시간.
마침내 해가 질 무렵.
천천히 눈을 뜬 마드가는 노을이 번지기 시작한 하늘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생각보다 인내심이 강하구나.’
푸른 달의 정수가 모습을 보이면 그 순간 들고 도망칠 생각인 것일까.
여전히 조용하기만 한 달맞이 언덕을 바라보던 마드가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전사들에게 턱짓으로 신호를 보냈다.
슬슬 환상의 달이 뜰 시간이 되었으니, 어떤 형태로든 전투가 시작될 터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몇 분.
노을 너머로 어둠이 번지고 밤의 장막이 펼쳐졌을 때.
달빛이 흘러내렸다.
별빛 사이로 뜬 두 개의 달로부터 빛이 일었고, 언덕 위에 자리한 달맞이꽃들이 일제히 봉우리를 벌려 달빛을 맞이했다.
그리고 더해지는 하나.
아래에서 지켜보던 성난뿔소 부족의 전사들이 저도 모르게 탄성을 토했다.
흐드러지게 핀 푸른 달맞이꽃들 사이에서 물방울들이 치솟는가 싶더니 이내 언덕의 중심에 푸른빛이 집중되었다.
“푸른 달의 정수.”
마드가의 입술 사이로 달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거리가 멀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선을 빼앗기지 않을 수 없었다.
푸른 빛 사이로 모습을 보이는 달빛의 정수.
허공에 떠오른 푸르고 아름다운 별의 보석.
“아아······.”
재차 탄성을 토한 마드가는 이내 눈을 부릅떴다.
언덕에 매복해 있던 자들이 모습을 드러낸다면 바로 지금이었기 때문이다.
성난뿔소 부족의 전사들 역시 감지했다. 저마다의 무기를 뽑아들고 사냥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숨을 가다듬었다.
그렇게 1분.
다시 2분.
“마드··· 가님?”
부관이 마드가를 돌아보았고, 마드가는 미간을 찌푸렸다.
시간차를 노리는 것일까?
바로 취하지 않고 기다림으로써 이쪽의 방심을 유도하는 것일까?
아니었다.
그런 것이 아니었다.
“올라가라!”
마드가의 명령에 전사들이 즉각 반응했다. 경사로를 따라 질주하자 바로 반응이 돌아왔다.
쾅! 쾅! 쾅!
경사로 곳곳에서 폭발이 일었다. 미처 피하지 못 한 전사들이 폭발에 휘말렸지만 마드가는 저도 모르게 안도했다.
함정이 맞았다.
역시 이곳에 놈들이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경사로의 함정이 발동해 모두가 혼란한 그 틈바구니 속에서도 푸른 달의 정수를 취하는 자가 없었다.
어떻게 된 것일까.
설마 놈들이 푸른 달의 정수를 포기한 것일까?
“저리 비켜라!”
저도 모르게 노성을 토한 마드가는 그대로 경사로를 달려 올라갔다. 몇 가지 함정이 발동했지만 중급 마인인 그녀였다. 강대한 마력으로 스스로를 보호하니, 폭발을 비롯한 각종 함정들이 무색했다.
“푸른 달의 정수.”
언덕의 중심까지 단번에 도달한 마드가는 허공에 떠오른 푸른 달의 정수를 취했다.
가짜가 아니었다.
진짜였다.
손바닥 위에서 반짝이는 보석은 푸른 달의 정수가 확실했다.
때문에 마드가는 이해할 수 없었다.
함정은 진짜였다.
고운눈바람에게는 푸른 달의 정수가 유일한 희망이었다.
그런데 푸른 달의 정수를 방치했다.
함정까지 설치한 주제에 코빼기 하나 보이지 않았다.
어째서.
대체 무엇 때문에.
“마드가님!”
부관의 외침에 시선을 돌렸다. 부관의 손끝이 가리킨 곳에서는 붉은 새가 날아오고 있었다.
성난뿔소 부족의 주술사들이 연락용으로 사용하는 주술매였다.
날아온 방향은 본대가 있는 곳.
고운눈바람 부족의 분지 입구.
마드가 자신이 푸른 달의 정수를 취할 동안 고운눈바람 부족의 본진을 압박하기 위해 포위진을 형성하고 있는 본대.
그곳에서 위급을 알리는 주술매가 날아왔다.
어째서일까.
본대에게는 포위진만 구축할 뿐 싸우지 말라 했거늘.
고운눈바람 부족에게는 성벽 밖에서 싸울 여력이 남아있지 않거늘.
머릿속이 복잡하게 뒤엉키는 가운데 주술매가 당도했다. 입을 크게 벌려 소리쳤다.
“위급! 위급! 야생신 강림!”
고운눈바람.
힘이 억제되어 꼼작도 못 해야 할 야생신.
힘을 해방하기 위해 푸른 달의 정수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그녀.
마드가는 시선을 내려 자신의 손을 보았다.
푸른 달의 정수가 있었다.
고운눈바람의 손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런데 어째서.
그런데 어떻-
“거짓말.”
마드가는 이해했다.
어떻게 된 것인지.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그렇기에 그녀는 시선을 돌렸다.
본대가 아닌 본거지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
환상의 달이 뜨기 십여 분 전.
유더와 코델리아는 본질을 놓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푸른 달의 정수가 아니었다.
애당초 푸른 달의 정수가 필요한 것은 고운눈바람의 전력을 개방하기 위함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니 없어도 돼.”
푸른 달의 정수에 집착할 필요가 없었다. 고운눈바람의 힘을 해방할 보다 직접적인 방법이 존재했으니까.
마드가가 달맞이 언덕으로 향하는 것을 확인했을 때.
유더와 코델리아는 즉시 행동을 개시했다.
달맞이 언덕을 향해 달리는 대신 마드가가 출발했을 놈들의 본거지를 향해 미친 듯이 달렸다.
간단한 이론이었다.
‘마드가만 아니면 돼.’
중급 마인 마드가.
통상적인 방법으로는 아직 이길 수 없는 강자.
그녀의 위치가 명확해졌다.
그녀가 없는 곳 역시 명확해졌다.
때문에 유더와 코델리아는 마음껏 움직일 수 있었다.
쾅!
질풍이십사보.
선풍과 질풍이 일었다.
이에 호응하듯 코델리아의 머리칼이 검게 물들었고, 그녀의 주위에 마력의 구들이 떠올랐다.
“막아!”
“저지해라!”
마드가는 바보가 아니었다.
본거지에도 당연히 수비 병력을 남겨두었다.
소수이긴 하지만 성난뿔소 부족의 전사들은 물론이고 하급 마인까지 하나 자리하고 있었다.
“그래, 하급 마인.”
코델리아가 화사하게 웃었다.
유더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하급 마인- 정확히 말하자면 속성은 물이요 타입은 전사인 카라바와의 거리를 단숨에 좁히더니 성십자 지르기를 날렸다. 크게 튕겨져 나가는 놈을 추적하며 뇌성박을 터트렸고, 코델리아가 날린 검은 칼날이 놈의 가슴을 후벼 팠다.
“중급 마인은 아직 못 이겨.”
담담히 인정했다.
사실이니까.
그리고 이 말이 의미하는 것.
코델리아가 사방에 마력구를 던져 성난뿔소 부족의 전사들을 저지했다. 유더가 가슴을 부여잡고 괴로워하는 카라바에게 동방무사의 검으로 최후의 일격을 가했다.
츠화-!
유더와 코델리아의 가슴께에 새하얀 빛의 고리가 하나 떠올랐다. 이번에는 유더가 성난뿔소 부족의 전사들을 향해 돌진했다. 바람막이의 가호를 펼쳐 화살을 막아냈고, 질풍이십사보로 놈들 사이를 휘저었다.
“하아!”
코델리아가 마녀의 힘을 거칠게 일으키며 타락의 창을 향해 나아갔다.
푸른 안광을 빛낸 그녀가 어쩐지 사악한 미소와 함께 말했다.
“근데 하급 마인은 이기거든?”
마드가만 아니면 돼.
마드가만.
마드가의 막사 안.
코델리아가 타락의 창을 움켜쥐었다. 마치 용사가 성검을 뽑아들 듯, 악마의 창을 뽑아 용맥의 힘을 해방시켰다.
&
< 제23장 - 썩은물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