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23장 - 썩은물 #2 >
&
찬란한 황금빛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타락의 창을 뽑아낸 순간 용솟음친 용맥의 힘이 주변 일대를 뒤덮었다.
“크아아!”
“내 눈! 내 눈!”
이미 벨리알의 힘을 받아 타락해버린 성난뿔소 부족의 전사들이 용맥으로부터 분출된 성스러운 힘에 괴로워했다.
유더는 코델리아를 돌아보았고, 코델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타락의 창을 뽑아 용맥의 힘을 해방시켰지만 여기서 그칠 생각이 없는 두 사람이었다.
코델리아는 타락의 창이 박혀 있던 자리를 돌아보았다.
마치 찢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갈라진 지면 아래 맥동하는 황금빛 흐름을 직시하며 주문을 외웠다.
그리하여 만들어내는 것.
그리하여 폭발시키는 것!
“씨발 쾅!”
칼라마이트의 창이 용맥을 강타했다. 그대로 폭발해 이미 반폭주 상태였던 용맥을 완전히 폭주시켰다.
콰가가가가가-!
굉음이 터졌다. 연이어 지축이 뒤흔들렸고, 코델리아가 바란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지진! 지진이다!”
성난뿔소 부족의 전사들이 비명을 질러댔고, 정말로 흔들리던 땅이 아예 갈라지기 시작했다.
용맥을 폭주시켜 놈들의 본거지 자체를 파괴하려는 유더와 코델리아였다.
“얏호!”
지진으로 땅이 갈라지고 폭주한 용맥이 하늘로 솟구치는 와중에 코델리아가 두 팔을 높이 들며 환히 웃었고, 유더는 한탄했다.
머리에 꽃만 하나 꽂으면 완벽한 광년이로 보일 그녀를 보며 순간 예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마님!”
“돌쇠야!”
지축이 뒤흔들리는 와중에도 질풍이십사보는 건재했다.
질풍이 된 유더는 단숨에 코델리아를 향해 달려갔고, 코델리아는 그런 유더를 향해 도약했다.
“합체!”
대단한 건 아니었다.
코델리아의 외침을 듣는 순간 유더가 등을 돌렸고, 코델리아가 그런 유더의 등에 찰싹 달라붙듯이 매달린 것뿐이었으니 말이다.
“튀자!”
코델리아가 한 손으로나마 유더의 목을 끌어안으며 쾌활하게 외쳤고, 유더는 코델리아를 고쳐 업은 뒤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꽉 잡아!”
“이미 잡고 있어!”
쾅!
유더가 지면을 박찼다. 선풍들과 함께 갈라지며 흔들리는 지면을 박차 성난뿔소 부족의 본거지를 탈출했다.
곳곳에서 성난뿔소 부족 전사들의 아우성은 물론이고 부서지고 깨지고 무너지는 등 각종 굉음이 들려왔지만 모든 일의 원흉인 코델리아는 명랑하게 웃었다.
“아이 신나!”
그리하여 마침내 지진의 영향권 밖.
야트막한 언덕 위에서 바라본 본거지는 풍비박산 그 자체였다.
“미션 클리어.”
“참 잘했어요.”
유더의 칭찬에 엣헴엣헴 거린 코델리아는 오른손에 거머쥔 타락의 창을 돌아본 뒤 말했다.
“유더야, 이제 고운눈바람의 힘이 돌아오겠지?”
“돌아오겠지. 아니, 돌아온 거 같아.”
유더는 코델리아를 등에 업은 채 고운눈바람 부족의 분지 방향으로 돌아섰다.
그리고 코델리아도 볼 수 있었다.
성스러운 푸른빛이 저 먼 곳에서부터 솟구쳐 오르고 있었다.
&
마드가도 보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놈들이 용맥의 힘을 차단하고 있던 타락의 창을 뽑아냈다.
푸른 달의 정수를 내다버리고 본거지를 공략했다.
놈들에게 필요한 것은 푸른 달의 정수가 아닌 고운눈바람의 힘을 회복할 수단이었으니까.
목적과 수단을 혼동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 결과 고운눈바람이 힘을 회복하였다.
“···안 돼.”
일련의 사태들이 의미하는 것.
실패.
그것도 참담하기 짝이 없는 대실패.
마드가 자신이 실패했다.
임무를 망치고 말았다.
“안 돼.”
마드가의 숨이 거칠어졌다.
두 눈에도 핏발이 서기 시작했다.
스스로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마드가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 거렸다.
“실패는 안 돼.”
실패해서는 안 돼.
하라겐님도 날 버리실 거야.
스승님이- 아니, 스승이라 자처하던 그 개새끼가 그랬던 것처럼 날 버리실 거야.
실패는 안 돼.
실패해서는 안 돼.
유더와 코델리아의 분석대로였다.
마드가는 출세지향적이며 오만한 성격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성격의 근원은 스승에게 버림받았다는 과거의 아픔이었다.
실패하면 안 되니까, 모든 일을 성공해야만 하니까.
버릴 수 없는 존재가 되어야 하니까.
버림받지 않는 위치에 올라서야 하니까.
오만함으로 스스로를 무장했다.
매사에 직접 나서는 것으로 완벽을 추구했다.
“실패는.”
마드가는 성공에 대한 집착이 강했다.
그만큼 실패를 용납할 수 없었다. 실패를 막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었다.
“마드가님?”
부관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마드가를 보았고, 마드가는 고개를 들어 그런 부관을 보았다.
마치 쏟아내듯 말하였다.
“대의를 위해 희생해라.”
“마드···가님?”
거기까지였다.
마드가의 손이 부관의 이마 위에 자리했다. 그가 무어라 대응하기도 전에 주문을 외워 미리 박아두었던 술식을 발동시켰다.
“아아? 아아아?!”
부관의 이마를 중심으로 하여 전신에 검붉은 마법진이 그려졌다.
그리고 그것은 부관만이 아니었다.
마드가가 데려온 이십여 명의 병사들 전원이 그러했고, 그들 모두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러댔다.
“마드가님!”
“어, 어째서!”
마드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대로 주문을 외우며 주먹을 움켜쥐었고, 그 순간 부관을 비롯한 수하들 전원이 핏물로 화했다. 제물이 되어 마법진에- 벨리알의 제단에 바쳐졌다.
인신공양.
악마의 힘을 빌리기 위한 가장 빠르고 명확한 수단.
마드가는 눈을 감았다. 부관과 수하들이 서 있던 자리에 검붉은 기운이 응집되었고, 그것들은 이내 마드가를 향해 밀려들었다.
“실패해서는 안 돼.”
성공한다.
용맥이 해방되었다지만 이제 막이었다.
고운눈바람의 힘이 차단된 시간은 길었다. 벨리알의 힘이 그녀를 좀먹었다.
그러니 지금이라면 아직 기회가 있다.
아직은 할 수 있다.
마드가가 눈을 떴다.
파리의 그것처럼 겹눈으로 변한 그녀의 눈에서 붉은 안광이 일었다. 등 뒤로 커다란 나방의 날개가 돋아났다.
마드가가 날아올랐다.
고운눈바람 부족의 분지를 향해 돌진했다.
&
고운눈바람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천사의 날개와도 같은 순백의 날개를 활짝 펴며 힘을 발하니, 분지를 위협하던 악마의 기운들이 단숨에 씻겨 나갔다.
“가라, 아이들아! 나의 힘이 너희와 함께 할 것이니!”
고운눈바람의 힘이 부족의 전사들에게 깃들었다.
푸른 바람을 두른 그들이 각자의 무기를 들고 돌진했다.
맑은눈과 고운눈 형제가 함께 주술을 펼쳐 돌풍으로 전사들을 도왔다.
“쓸어버려라! 돌풍이여!”
“휩쓸어라! 질풍이여!”
미친바람이 일어 성난뿔소 부족의 전사들을 헤집어놓았고, 그 뒤를 고운눈바람 부족의 전사들이 따랐다.
숫자만 따지면 여전히 몇 배나 되는 성난뿔소 부족의 전사들이었지만 야생신의 직접적인 가호는 강력했다.
더욱이 고운눈바람은 그냥 구경만 하지 않았다.
“바람의 방패여! 바람의 칼날이여!”
하늘 높은 곳에서 고운눈바람이 연속해서 손을 놀렸다. 바람의 장벽으로 전사들을 보호했고, 직접 바람의 칼날을 휘둘러 성난뿔소 부족을 공격했다.
이대로 놈들의 군대를 와해시킨다.
성난뿔소 부족을 몰아낸 뒤 남부의 다른 부족들과 힘을 합친다.
고운눈바람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싸움을 좋아하지 않는 그녀였지만 자신과 아이들을 멸망시키려 한 자들을 징벌하는 순간이었다.
자비는 잠시 미루고 쌓인 노여움을 터트렸다.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이어졌을까.
야생의 땅 최강의 전사 부족임을 증명하듯 힘겹게나마 고운눈바람 부족의 맹공을 견뎌내던 성난뿔소 부족의 전사들 뒤로 사이한 기운이 급속도로 다가왔다.
야생신인 그녀조차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아니, 지독한 기운이었다.
“마드가님!”
“마드가님이시다!”
성난뿔소 부족의 전사들이 기뻐 외쳤다.
겹눈이 생기고 나방의 날개가 돋아났지만 아직 사람의 형상을 유지하고 있던 마드가였기 때문이다.
마드가가 그런 전사들을 보았다. 다시 시선을 돌려 고운눈바람을 보았고,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역시, 약해져 있구나.”
아직 완전한 상태가 아니구나.
기회가 있구나.
마드가가 손을 들어올렸다. 불길함을 느낀 고운눈바람은 급히 바람을 일으켰지만 마드가의 주문이 더 빨랐다.
“대의를 위해 희생해라.”
성난뿔소 부족의 전사들의 이마를 시작으로 마법진이 그려졌다.
수백에 달하는 전사들 가운데 일부였지만, 그래도 그 숫자가 일백에 육박했다.
“마드가님?”
부관과 같았다.
성난뿔소 부족의 전사들은 멍청한 얼굴로 마드가를 올려다보았고, 마드가는 주저하지 않았다. 주먹을 움켜쥐어 다시 한 번 제물을 바쳤다.
“아아악!”
“히익?!”
“마드가님?!”
“악마의 술수다!”
적과 아군을 가릴 것 없이 곳곳에서 비명과 괴성, 두려움에 가득 찬 목소리들이 울려퍼졌다.
마드가는 모두 무시했다.
일백의 제물을 바쳐 얻은 일시적인 힘을 그저 받아들였다.
“하하! 하하하하!”
중급 마인의 몸으로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큰 힘이었다.
때문에 마드가의 육신은 비대해졌다.
거미의 다리와 몸 위로 각질로 뒤덮인 여인의 상반신이 생겨났고, 다시 그 위에 사마귀의 팔처럼 날카로운 칼날을 가진 팔이 돋아났다.
등 뒤에는 나방의 날개가 넓게 펼쳐졌고, 머리칼 대신 수많은 뿔들이 돋아났다.
사람이 아닌 괴수.
악마.
하지만 마드가는 황홀감을 느꼈다.
전신에 충만한 악마의 힘에 전율했다.
“고운눈바람.”
마드가가 정신적인 미소를 지었다. 십여 미터에 육박하는 거체가 된 그녀가 고운눈바람을 향해 돌진했다.
“바람의 장벽이여!”
고운눈바람이 다급히 외치며 수십 겹에 달할 바람의 장벽을 세웠다.
마드가는 개의치 않았다. 두 팔을 마구 휘둘러 바람의 장벽을 찢어발겼다. 그대로 한발 한발 고운눈바람을 향해 나아갔다.
맑고 푸른 하늘이 검게 물들어갔다.
마드가가 지난 자리에 있던 눈들이 검붉은 색이 되었다.
바람의 장벽이 하나씩 찢어질 때마다 고운눈바람이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좌중을 압도하는 악마의 기운.
성난뿔소 부족은 물론이고 고운눈바람 부족 역시 그저 바라보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야생신과 악마의 격돌을 그저 바라만 보았다.
하지만 두 사람.
그렇지 않은 자들이 있었다.
&
“와, 실화냐. 저거 데몬프린스 아냐?”
“원작처럼 조잡해. 역시 마드가. 이번에도 최후의 발악은 똑같구나.”
데몬프린스.
강대하기 짝이 없는 지옥의 군주들.
지금 눈앞에 나타난 것은 데몬프린스가 아니었다. 마드가가 인신공양을 통해 스스로의 힘을 억지로 키운, 그나마도 시간이 지나면 결국 사라질 일시적인 괴물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래도 강대했다.
“원작에서는 15분 버텨라였지?”
“15분이면 저 상태가 깨지니까.”
“고운눈바람이 15분 못 버티겠지?”
“못 버틸 것 같지?”
“어, 기본적으로 싸움을 못 하네.”
지금도 그냥 서서 방벽만 줄창 만들뿐이었으니까.
이대로라면 15분은커녕 3분도 안 되어서 고운눈바람이 마드가의 손에 박살이 날 터였다.
“특별한 약점은 없어.”
유더는 눈을 가늘게 뜨고 마드가를 바라보았다.
애당초 원작에서도 저 상태일 때 잡으라고 내보낸 마드가가 아니었다.
공략법은 그저 버티고 버텨 시간을 버는 것.
하지만 이곳은 현실이었다.
더욱이 고운눈바람이라는 야생신이 존재했다.
그러니 무언가 방법이 있지 않을까. 찌를 구석이 있지 않을까.
유더가 고민하기 시작한 그때, 코델리아는 생각하지 않았다. 허리춤에서 끈 하나를 꺼내들더니 길고 풍성한 머리를 한데 묶어 말끔히 정리했다.
“머리 굴리기는. 그래서 네가 안 되는 거야.”
“저기, 내가 1등이거든?”
요새 들어 언급을 안 했지만 1등은 유더 자신이었고, 코델리아는 만년 2등이었으니까.
하지만 코델리아는 코웃음을 쳤다.
만년 2등인 그녀에게도 딱 하나 1등인 분야가 있었으니 말이다.
“사냥은 내가 1등이야.”
더욱이 그것만이 아니었다.
“고운눈바람이 있어. 저렇게 커진 괴수형이면 오히려 인간형보다 상대하기도 편해. 그리고······.”
“그리고?”
“너도 있으니까.”
코델리아가 씨익 멋지게 웃었고, 유더는 저도 모르게 멍한 얼굴로 그런 코델리아를 바라보았다.
“그럼 가보실까?”
코델리아가 다시 웃었다. 도핑에는 도핑으로 대항하기 위해 허리춤에 고이 간직해두었던 약통을 꺼내 안에 든 액체를 단숨에 삼켜버렸다.
무덤의 수호자.
짐승형 천사의 피.
원작에서는 달리 쓸모가 없는 물건이었다.
하지만 현실이었고, 다양한 실험 끝에 사용처를 하나 알아낼 수 있었다.
천사의 피가 코델리아의 목구멍을 따라 흘러내렸다.
천사의 기운이 전신에 번졌고, 오랜 시간 잠들어 있던 힘을 일시적으로나마 일깨웠다.
마녀화로 인해 검게 물들어 있던 코델리아의 머리칼은 그대로였다.
하지만 육신에 새로운 힘이 더해졌다. 송곳니가 마치 짐승의 것처럼 길어졌고, 푸른 안광이 이는 두 눈의 눈동자 역시 고양잇과 맹수의 그것처럼 변하였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비스트 모드.
“진짜 짐승이네.”
토끼 귀에 꼬리까지 달고 있는 코델리아였으니까.
작게 중얼거린 유더는 새삼 구천구문 이문을 열었다.
전신에 힘을 활성화시키며 황금빛 성투기를 일으켰다.
“뭐야, 이문은 패시브 아니었어?”
“아니, 나도 뭔가 해야 할 것 같아서.”
유더의 대답에 코델리아는 눈을 깜박이더니 이내 까르르 웃었다. 그리고 다시 정면을 보았다.
어느새 바람의 장벽은 절반 이상 날아가 있었고, 싸움에 서툰 야생신의 얼굴은 울기 일보 직전이었다.
“가자.”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말했다.
마지막으로 서로를 돌아본 두 썩은물들이 악마를 향해 돌진했다.
&
< 제23장 - 썩은물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