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엔딩메이커-75화 (75/473)

< 제24장 - 정산 >

제24장 - 정산

유더는 코델리아와의 첫 만남을 기억했다.

각자가 유더와 코델리아로 환생하기 전, 아직 아웃복서009와 노란폭풍이었던 시절.

유더와 코델리아로 살아온 세월이 있으니 햇수로만 헤아리면 22년 전이겠지만 감각적으로는 5년 남짓한 옛날.

아웃복서009- 임진호는 게임 하나를 시작했다.

사실 게임과는 제법 거리가 먼 삶을 살아온 임진호였다. 그런 그가 갑자기 게임을, 그것도 VR 기능까지 들어가 있는 RPG를 시작한 것은 그저 우연이라고 밖에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초심자의 행운이라고 해야 할까.

다행히 영웅전기2는 임진호의- 유더의 마음에 쏙 드는 게임이었다.

‘재밌네. 사람들이 이래서 게임을 하는구나.’

영웅전기2에는 싱글 플레이와 멀티 플레이 두 가지 모드가 존재했다.

싱글 플레이는 말 그대로 혼자서 스토리를 깨는 형식이었고, 멀티 플레이는 어떤 종류의 엔딩이든 일단 싱글 플레이 엔딩을 한 번 본 유저들이 함께 모여 모험을 펼치는 형식이었다.

‘멀티 플레이에서 강해지려면 싱글에 있는 캐릭터를 전부 다, 그것도 고득점으로 깨야 한다 이건가? 파고들 구석이 장난 아닌데?’

멀티 플레이에는 ‘덱 시스템’이란 것이 존재했다.

싱글 플레이에서 키운 각각의 플레이어블 캐릭터들의 능력치 등등을 종합해 멀티 플레이 캐릭터의 능력치가 강화되는 시스템이었다.

쉽게 말해 싱글에서 유더 하나만 클리어 한 유저의 캐릭터보다 유더와 코델리아를 둘 다 클리어 한 유저의 캐릭터가 멀티에서 더 강하다는 뜻이었다.

여기에 점수 산정까지 있어서 유더를 100점으로 클리어 한 유저보다 120점으로 클리어 한 유저의 멀티 플레이 캐릭터가 더 강했다.

‘한 마디로 싱글 캐릭터들을 전부 다 최고 득점으로 깨라 이거지?’

대놓고 노가다를 강조하는 시스템이었던 터라 흥미는 가지만 실제로 시도해볼 생각은 들지 않았다.

딱히 멀티 플레이에서 경쟁할 마음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래도 구경은 해보자.’

베드 엔딩도 일단은 엔딩이라고, 북부 야만족의 대침공에 휩쓸려 사망하는 엔딩을 봤더니 멀티 플레이 입장 권한이 생겼다.

‘좋아, 닉네임을 입력하면······.’

아웃복서009라는 이름으로 멀티 플레이에 입장했다.

얼핏 싱글 플레이와 크게 다를 것이 없어 보였지만, 무척이나 큰 차이가 두 가지 존재했다.

하나는 플레이아데스 내에 유더 자신 외에도 다른 플레이어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었고, 다른 하나는 게임의 전투 난이도가 급격히 어려워졌다는 사실이었다.

[당신은 죽었습니다.]

마을 밖에 나간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비명횡사한 유더는 시체가 되어 바닥에 널브러졌다.

‘이래서 싱글 깨고 들어오라 한 거군.’

일단 스펙이든 컨트롤이든 일정 수준 이상이 되어야 했으니까.

깨달음을 얻은 유더는 바로 리셋 버튼을 누르기 전에 잠시 대기했다.

저만치서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유저가 있었기 때문이다.

‘오··· 도와주려는 건가?’

멀티 플레이 시작할 때 주는 부활의 깃털을 사용하면 죽은 지 얼마 안 된 자를 살릴 수 있었으니까.

이 당시의 유더는 아직 게임 초보자였고, 덕분에 멀티 플레이 게임에 임하는 게이머들의 자세를 모르던 시절이었다.

때문에 순수하기 짝이 없는 마음으로 유저가 자신에게 다가서기를 기다렸다.

‘예쁘다.’

분명 저 캐릭터 이름이 코델리아였나?

붉은 머리가 인상적인 아름다운 소녀.

코델리아 유저는 바로 앞까지 다가오더니 시체가 된 유더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고, 유더는 기대 어린 눈으로 그런 코델리아 유저를 보았다.

그리고 코델리아 유저가 말했다.

[노란폭풍 : ㅋㅋㅋ 게임 개모태]

‘뭐?’

당황한 유더가 눈을 껌벅였지만 어차피 시체 상태였다.

코델리아 유저는 몇 번 더 웃더니 그대로 유더를 지나쳐 제 갈 길을 가버렸다.

그렇게 몇 초, 몇 분.

ㅋㅋㅋ 게임 개모태

게임 개모태.

너 게임 존나게 못 해.

별 거 아닌 말.

그냥 무시해도 되는 말.

하지만 이상하게도, 아니, 신비하게도 그 말이 유더의 뇌리를 강타했다.

아주 머리에 박혀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너무나 당연하게도 그 말을 한 유저 또한 유더의 기억 속에 확실히 저장되었다.

‘노란폭풍.’

유더는 기억하고, 코델리아는 기억하지 못 하는,

두 사람의 첫 만남이었다.

&

“야! 빨리 챙겨!”

“어?”

“빨리!”

마드가를 쓰러트린 직후.

푸른 달의 정수를 보며 마주 웃던 코델리아가 돌연 다그쳤고, 유더는 약간이지만 당황했다.

“푸른 달의 정수?”

“푸른 달의 정수! 고운눈바람이 뺏어 가면 어떡해! 빨리 챙겨! 아니, 그냥 아예 흡수해! 응? 빨리!”

고운눈바람이 분명 말하지 않았던가.

푸른 달의 정수는 무척이나 중요한 물건이라 주변의 동물들도 건들지 않는다고.

무척이사 비상사태이기 때문에 사용할 마음을 먹었다고.

“그냥 손대니까 힘이 빨려 들어왔다고 해. 응, 그게 좋겠다. 내가 변명하는 거 도와줄게.”

거기까지 말한 코델리아는 얼른 땅에서 푸른 달의 정수를 주은 뒤 유더의 손에 꼭 쥐어주기까지 했다.

푸른 달의 정수는 순수한 달빛의 정수였고, 성스러운 힘의 집결체였다.

때문에 마녀의 힘을 사용하는 코델리아에게는 어차피 제대로 사용할 수 없는 물건이었다.

‘아니, 문라이트가 있잖아.’

푸른 달의 정수도 일단 달빛이니 문라이트에 흡수시킬 수 있지 않을까?

“야, 잠깐만. 문라이트는 어때? 흡수시킬 수 있지 않을까?”

“어? 오··· 역시 우리 유더. 그럴싸한 생각인··· 아니야. 그냥 네가 먹어. 장비 강화보다는 그게 나을 거야.”

“아니, 그래도 네가 쓸 문라이트를······.”

“아냐, 아냐. 네가 먹어. 네가 먹고 삼문 열어버려. 그게 훨씬 이득이야.”

서로가 서로에게 아이템을 양보하는, 과거라면 상상도 못 할 일을 하고 있는 두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어울리지 않는 일을 하고 있는 와중에도 시간은 흘렀다.

“어떡해, 온다.”

고운눈바람이 이쪽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얼굴 한 가득 사랑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코델리아에게는 아이템 뺏어 먹으러 오는 사악한 얼굴로 보일 뿐이었다.

“내가 어떻게든 해볼게. 알았지?”

“무······.”

거기까지였다.

코델리아는 급히 유더의 입을 막았고, 고운눈바람이 유더와 코델리아 앞에 안착했다.

“해냈어요, 여러분! 우리가 해냈어요!”

고운눈바람은 활짝 웃더니 두 팔을 크게 벌리며 외쳤다.

코델리아는 그런 고운눈바람을 와락 끌어안는 대신 결연한 얼굴로 말했다.

“고운눈바람님!”

“네?”

“우리 유더가 아파요!”

“네?!”

고운눈바람이 깜짝 놀라 유더를 돌아보았고, 코델리아는 열심히 유더의 옆구리를 찌르며 소리 없이 속삭였다.

‘아픈 척! 아픈 척!’

대체 이게 무슨 짓일까.

하지만 유더는 일단 코델리아의 뜻에 맞춰주고자 힘겨운 표정을 지었고, 코델리아가 계속해서 말했다.

“사실 유더는 구음절맥이라는 체질을 타고났어요. 덕분에 어릴 때부터 몸이 엄청 약했어요. 여기 팔뚝 가는 것 좀 보······.”

유더의 가느다란 손목과 팔을 강조하려던 코델리아는 눈을 껌벅였고, 고운눈바람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뭐야! 언제 이렇게 튼실해진 건데?!’

비리비리하니 수수깡 같던 유더의 팔이 아니었다. 단단하고 튼튼한 것이 마치 몽둥이 같았다.

‘아니, 야. 생각을 해 봐. 우리 레벨이 몇인데.’

유더의 눈빛 항변에 코델리아는 헛 하고 숨을 삼켰다.

생각해보니 유더의 말대로였기 때문이다.

거듭된 레벨 업 덕분에 이미 레벨 40을 넘긴 두 사람이었다.

영웅전기2의 만렙 자체는 300 이상일 것이라 추정되고 있지만 그건 대악마들과 맞다이를 뜰 때의 이야기였고, 일반적인 기사들은 레벨이 20 전후인 것이 보통인 세계였다.

그런 와중의 레벨 40.

레벨이 오르면 기본적으로 육체 능력이 상승했고, 무인 캐릭터인 유더는 그 상승폭이 마법사 캐릭터인 코델리아보다 더 컸다.

여기에 란디우스의 가르침에 따라 매일 꾸준히 운동을 하고 있으니 자연 팔뚝이 굵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키도··· 컸다?’

바짝 붙어있으니 키 차이가 새삼 실감이 났다. 이제는 고개를 치켜들어야 유더와 눈을 맞출 수 있었다.

‘무슨 성장기 청소년도 아니고 폭풍성장을··· 아니지, 열일곱 살이니 성장기 맞구나.’

“코델리아?”

고운눈바람이었다.

흠칫 놀란 코델리아는 잠시 어리버리 하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아니, 그! 아무튼! 유더가 겉은 멀쩡해도 사실 속은 아주 엉망이에요. 그래서 치료가 필요해요!”

“엉망···이라고요?”

고운눈바람이 다시 유더를 보았고, 코델리아는 미간을 좁혔다.

그도 그럴 것이 유더가 너무 튼튼해 보였기 때문이다.

더욱이 유더의 맹활약을 지켜본 고운눈바람이었다.

질풍처럼 달리던 유더가 사실 병약한 상태라는 것을 납득시키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워 보였다.

하지만 코델리아는 포기하지 않았다.

“아니, 그! 지금 이게 엄청 무리한 거거든요. 이제 조금 있다가 자리에 누우면 막 피 토하고 구르고 장난 아닐 거예요.”

“지, 진짜요?”

“네, 그래서 치료가 필요해요. 치료하려면 좋은 기운이 많이 필요해요. 푸른 달의 정수 같은.”

여기까지 말한 코델리아는 두근두근 거리는 눈으로 고운눈바람을 보았고, 유더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아 간신히 웃음을 참았다.

엉터리 같은 코델리아의 사기도 사기였지만, 저리 열심히 사기를 치는 모습 그 자체가 무척이나 귀여웠기 때문이다.

더욱이 저렇게 끙끙 거리며 노력하는 이유가 유더 자신 때문이니 절로 얼굴에 미소가 그려졌다.

“어··· 그러니까 정리하면······ 유더는 지금 사실 병에 걸린 상태고, 치료하기 위해서는 푸른 달의 정수가 필요하다는 거네요?”

“네, 맞아요. 바로 그거에요.”

코델리아는 긴장한 얼굴로 고운눈바람을 바라보았다.

사실 지금 코델리아는 살짝 정상이 아닌 상태였다.

비스트 모드의 영향으로 이성과 감정 모두가 훨씬 단순해진 상태였기 때문이다.

“흠, 그렇군요.”

고운눈바람은 유더를 돌아보았고, 유더는 순순히 자신의 손에 들린 푸른 달의 정수를 보여주었다.

고운눈바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어차피 이제 푸른 달의 정수를 달맞이 언덕에 되돌릴 수는 없으니까요. 필요한 사람이 쓰는 것이 좋겠죠.”

“어? 못 돌려놔요?”

“네, 이미 푸른 달의 정수와 달맞이 언덕의 연결은 끊어졌으니까요. 시간이 오래 걸리겠지만 다시 달빛과 이슬을 모아 정수를 만드는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

잠시 말끝을 흐린 고운눈바람은 유더와 코델리아를 보며 푸근하게 웃었다.

“약혼자를 생각하는 코델리아의 아름다운 마음은 잘 보았어요. 저와 제 아이들을 구해주신 보답도 해야 하니 푸른 달의 정수를 드릴게요.”

“와, 감사합니다.”

코델리아는 꾸벅 고개 숙여 인사한 뒤 유더의 가슴을 툭 치며 윙크를 했다.

‘봤지? 누나가 하는 거. 나 아니면 누가 너 챙겨줘.’

어차피 되돌리지 못 할 푸른 달의 정수였지만 그래도 보물인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코델리아가 나섰기에 유더에게 넘어간 것이 사실이기는 했다.

‘좋아, 그럼 나도 나서볼까?’

‘어?’

유더는 다시 눈빛으로 답하는 대신 앞으로 한 걸음을 나섰다.

“고운눈바람님, 감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일단 감사부터 표하고자 합니다. 푸른 달의 정수를 제게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아니오, 당연한 대가일 뿐입니다. 당신과 코델리아가 없었다면 저와 제 아이들은 여전히 위기 속에서 헤매고 있을 터이니까요.”

고운눈바람이 푸근하게 웃었고, 코델리아는 새삼 쑥스러워졌는지 뺨을 살짝 붉혔다.

하지만 유더는 아니었다.

“그렇군요. 고운눈바람이 말씀하신 것처럼 저와 코델리아가 함께 노력한 덕분입니다. 아니, 사실 코델리아의 공이 더 컸죠. 저보다는 코델리아가 더 노력하고 활약했습니다.”

갑자기 이게 왜 이러지?

코델리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유더를 보았고, 고운눈바람은 순진한 미소를 지었다.

“그랬군요. 정말 감사해요, 코델리아.”

“네, 그러니 코델리아에게도 상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코델리아가 아니라 유더가 답했다.

푸른 달의 정수는 코델리아가 아닌 유더 자신에게 준 것이었으니까.

아직 코델리아는 보상을 받지 못 했으니까.

사실 이렇게 보상을 직접적으로 요구하는 것은 다소 무리한 일이었다.

하지만 유더는 개의치 않았다.

자신을 위해 무리해준 약혼녀를 위해, 그녀가 다음에는 보다 세련 된 사기를 칠 수 있도록,

“고운눈바람님, 제 생각에는······.”

유더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숙련된 조교의 솜씨를 순진한 두 소녀- 코델리아와 고운눈바람에게 보여주었다.

&

정리가 끝났다.

마드가가 죽자 성난뿔소 부족의 전사들은 대부분 도주를 택했고, 고금의 전장이 늘 그러하듯이 도주 중에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고운눈과 맑은눈은 무리하지 않았다.

고운눈바람의 영역에서 성난뿔소 부족을 모두 몰아낸 뒤에는 승리의 함성을 질렀고, 유더와 코델리아 역시 함께하였다.

그리고 그날 밤.

유더와 코델리아를 마주한 고운눈바람은 미간을 살짝 좁히며 물었다.

“다정한 모습이 보기 좋기는 하지만··· 그··· 괜찮은 거 맞나요?”

“네, 비스트 모드의 부작용 같은 겁니다. 내일 아침이면 괜찮아 질 거고요.”

어색하게 웃으며 말하는 유더의 무릎 위에는 코델리아의 머리가 얹어져 있었다.

마치 개나 고양이처럼 늘어진 채 유더에게 매달려 있는 코델리아였다.

‘개냥이에 가까우려나.’

몸을 잔뜩 웅크린 코델리아는 가끔씩 유더의 손을 핥으며 정말 고양이라도 된 것처럼 갸르르 거렸다. 가만있지 말고 쓰다듬어 달라는 것이었다.

“음··· 내일 아침이면 괜찮아 진다고요?”

“네, 기억은 있으니··· 아마 내일 아침이면 얼굴이 빨개져서 어쩔 줄 모를 겁니다.”

“흠흠, 그렇군요.”

헛기침을 토한 고운눈바람은 작은 함을 하나 내밀었다.

“바람의 기억이에요. 부탁한 조건에 부합하는 물건이에요.”

“정말 감사합니다.”

함 안에는 척 보기에도 무척이나 오래된 느낌이 드는 녹색 깃털이 하나 들어 있었다.

‘선조회귀를 위한 재료가 얼추 다 모여 가네.’

선조회귀는 시간을 거스르는 술법이었고, 이를 위해서는 과거의 힘을 담은 기물들이 필요했다.

바람의 기억은 본래 필수 재료가 아니었지만, 고운눈바람의 설명대로면 빙결석처럼 과거의 시간을 담고 있는 물건이었으니 충분히 활용이 가능할 터였다.

‘남은 건 천사의 피와 마법진을 그릴 때 사용할 특별한 잉크.’

후자의 경우 고농도의 마력만 농축하고 있으면 되었으니 어떻게든 대체재를 구할 방도가 있을 터였다.

즉, 현재 시점에서 지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천사인 레나의 피만 구하면 코델리아의 선조회귀가 가능하다는 이야기였다.

‘타천사 모드가 코앞이군.’

흐뭇한 미소를 머금은 유더는 다시 고운눈바람을 보며 말했다.

“고운눈바람님, 말씀드린 것처럼 위대한폭풍 부족을 중심으로 한 동부 연맹을 구축할 생각입니다. 함께해주시겠습니까?”

“함께해야죠. 주변의 야생신들과 부족들에게도 널리 알려 동부 연맹 구축에 힘을 보탤 생각이에요. 용맥 또한 더 이상 당하지 않도록 조치를 취할 생각이고요.”

거친눈사태에 비하자면 아직 어린 아이라 할 수 있을 위대한폭풍과 고운눈바람이었지만 가지고 있는 힘만을 따진다면 야생신들 사이에서도 상위권에 속했다.

그런 둘이 힘을 합쳐 연맹 창설을 부르짖으면 설사 아직 피해를 입지 않은 야생신들이라 해도 연맹 결성에 관심을 보일 터였다.

“어쩌면··· 이번에야말로 황금의 용왕께서 깨어나실지도 몰라요.”

“황금의 용왕이요?”

유더도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고운눈바람은 유더의 무릎 위에서 졸기 시작한 코델리아를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다 말했다.

“황금의 용왕님은 최초이자 최강의 야생신이십니다. 야생의 땅에 거하는 모든 야생신들의 어버이 같은 분이시죠.”

‘쉽게 말해 야생신들의 왕인가?’

그런데 고운눈바람은 그가 깨어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즉, 지금은 잠들어 있다는 이야기였다.

“먼 옛날 지옥의 대군주들이 지상에 강림했을 때··· 황금의 용왕께서는 야생의 땅을 지키기 위해 대군주들과 격전을 펼치셨어요. 다행히 대군주들을 야생의 땅에서 쫓아낼 수는 있었지만 용왕께서도 무척이나 큰 부상을 입으셨죠.”

“치료를 위해 잠드셨군요.”

“네, 벌써 천 년 가까이 된 이야기지만요.”

지상에 강림했던 지옥의 대군주들.

위치상 아마 파멸의 대군주 리바이어 던을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야생의 땅이 위험에 처하면 그분께서 깨어나신다는··· 그런 이야기가 있거든요.”

야생신들 사이에서도 전설 같은 이야기.

영웅전기2에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반드시 그러라는 법은 없었다.

“고운눈바람님,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칼날부리 협곡에 무언가 숨겨진 비밀 같은 것이 있나요?”

레나가 죽는 장소.

유더의 물음에 고운눈바람은 눈을 잠시 감아 긴 속눈썹을 늘어트리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 옛날, 야생의 땅에는 무척이나 강력한 엘프들의 마도 왕국이 존재했다고 해요. 지옥의 대군주들에 의해 결국 멸망하고 말았지만··· 그들의 흔적까지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죠.”

“그럼 칼날부리 협곡이······.”

“네, 멸망한 마도왕국의 수도가 있던 장소에요. 지금도 칼날부리 협곡 곳곳에는 그 시절의 유적들이 남아 있어요. 신비한 고대의 종족들도 소수지만 남아 있고요.”

레나가 왜 갑자기 칼날부리 협곡에 나타났는지 이제는 알 것 같았다.

고대 엘프들의 마도왕국.

그것도 지옥의 대군주들과 싸우다 멸망한.

평생을 바쳐 악마들과 대적할 것을 선언한 마법사인 레나가 관심을 가질만한 장소였다.

“유더, 칼날부리 협곡으로 향할 건가요?”

“네, 성십자기사단에게 부탁받은 일입니다. 반드시 가야만 합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동부 연맹을 결성한 뒤 두 사람을 기다릴게요. 다시 만날 그 순간을 기대하면서요.”

“감사합니다. 저도 다시 뵙게 될 날을 기대하겠습니다.”

여기까지였다.

재차 예를 표한 유더는 자꾸만 바닥을 구르는 코델리아를 등에 업은 뒤 사당을 나섰고, 고운눈바람은 둘의 뒷모습을 보며 미소를 흘렸다.

‘환상의 한 쌍이구나.’

정말 잘 어울리고 사랑스러운.

하지만 다르게 생각하는 이가 있었다.

“잘 어울리는 건 인정한다. 둘은 정말 환장의 커플이니 말이다.”

“어··· 환상이 아니라요?”

“환장이다, 환장.”

강하게 주장한 거친눈사태는 다시 한 번 바위산에서의 싸움을 이야기했고, 게일과 아델리아는 서로를 돌아보았다.

“음··· 두 사람이 많이 과격해지긴 했군요.”

“누구 동생 때문이에요.”

“흠흠, 유더는 무척 얌전한 아이입니다만.”

“그럼 코델리아가 과격하다는 말씀이세요?”

“맞다, 과격하다. 과격해. 무척이나 폭력적인··· 아니다. 음, 아니고말고.”

마지막에 끼어들려던 거친눈사태는 아델리아의 매서운 눈빛에 움찔하더니 열심히 딴청을 부리기 시작했고, 게일은 아주 작게 웃었다.

“어찌되었든 두 사람 모두 무척 강해진 것 같습니다.”

“그러게요, 이야기만 들으면 둘 다 대단한 수준이에요.”

“특히 코델리아가 싸움을 진짜 잘한다. 완전히 싸움닭··· 알았다. 찌그러져 있으마. 흑흑.”

거친눈사태가 다시 찌그러지자 애써 웃음을 참은 게일이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찌되었든 정황상 그저 사랑의 도피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무언가 얽힌 게 많은 느낌이군요.”

“그러게요. 성십자수호단에 페어리 퀸들이라니······.”

더욱이 지금은 야만의 땅 전체를 집어삼키려는 악마 추종자들의 음모에 대항해서 싸우고 있는 중이었다.

“서둘러 두 사람과 합류해야겠습니다.”

“네, 반드시요.”

“흠.”

마지막은 이번에도 거친눈사태였다.

작은 목소리에 서로를 마주하고 있던 게일과 아델리아가 동시에 거친눈사태를 돌아보았고, 하얀 아기곰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아니, 그냥 닮은 거 같아서.”

“유더와 코델리아 양 말씀이십니까?”

“어, 둘이랑 닮았네.”

“그야 게일 공자는 유더의 형님이시고, 전 코델리아의 언니니까요. 닮은 게 당연하죠.”

“네, 형제이고 자매니까요.”

거기까지 말한 게일은 아델리아를 보며 미소지었고, 아델리아는 평소처럼 흥하려다 말고 그냥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거친눈사태는 생각했다.

‘아니, 생긴 거 말고.’

묘한 분위기가.

하지만 입 밖에 내었다가는 아델리아가 맹렬한 시선을 보낼 것이 분명했기에 마음 속에만 담아둔 거친눈사태였다.

그리고 다시 십여 분.

“다 왔다!”

제자리에서 폴짝 뛰어오른 거친눈사태는 정면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고, 게일과 아델리아 역시 볼 수 있었다.

위대한폭풍 부족의 마을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

< 제24장 - 정산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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