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엔딩메이커-77화 (77/473)

< 제25장 - 뜻밖의 조우 >

제25장 - 뜻밖의 조우

게일과 아델리아는 고운눈바람 부족의 마을로 바로 출발하려 했지만 생각처럼 일이 진행되지는 않았다.

망망대해와도 비교할 수 있는 야생의 땅의 지형 때문이었다.

“지도가 있어도 문외한들은 길을 잃기 십상이다. 조금만 기다려라. 고운눈바람 부족에게 사자를 보낼 것이니, 그들과 함께 가라-래.”

보기만 해도 안락해 보이는 가죽 의자에 몸을 파묻은 거친눈사태가 빵빵해진 자기 배를 두드리며 말했다.

옆에 자리한 것은 위대한폭풍 부족의 족장인 붉은질풍이었다.

“유더와 코델리아. 우리의 은인이자 친구. 그들의 형제자매인 너희 역시 우리의 친구. 그러니 돕는다. 하지만 기다려라.”

붉은질풍이 어색하게나마 공용어로 말하자 아델리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게일을 돌아보았고, 게일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미소로 아델리아를 달랬다.

“붉은질풍님, 사자의 출발은 언제인지 알 수 있을까요?”

“내일 아침이다.”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아침까지 기다리겠습니다.”

“이해해주어 고맙다.”

붉은질풍에게 미소로 화답한 게일은 여전히 약간은 불만섞인 표정을 짓고 있는 아델리아와 함께 밖으로 나섰다.

“게일 공자, 괜찮을까요?”

“저도 많이 걱정이 됩니다만··· 이러나저러나 이곳은 야만의 땅. 아는 것이 거의 없는 곳이니 저들의 조력을 받는 것이 좋을 겁니다. 그 편이 오히려 더 빨리 도착할 수도 있을 테고요.”

“으으··· 오늘 오후에라도 출발하면 좋을 텐데.”

“이미 호의를 베풀려는 이들입니다. 이쯤에서 우리도 한 걸음 물러서는 것이 좋겠죠.”

게일이 다시 부드럽게 말하자 아델리아는 못내 고개를 끄덕였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부관인 오론이나 동료 단장인 카탄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면 일단 반발심부터 생겼을 텐데.

그런데 게일이 말하면 그냥 따라주고 싶어졌다.

“자, 이왕 이렇게 된 거 숙소로 가 노독을 풀도록 하죠. 그간 너무 강행군이라 고생하셨죠? 제가 피로회복에 좋은 차를 끓여드리겠습니다.”

“네, 게일 공자.”

저도 모르게 활짝 웃으며 답한 아델리아는 다시 한 번 당황했고, 아델리아의 환한 미소를 처음 본 게일 역시 당황했다.

‘내가 왜 이러지?’

‘예···쁘다.’

그리고 그때.

각자의 당황 때문에 얼어붙은 게일과 아델리아를 문 너머로 바라보던 거친 눈사태는 끌끌끌 혀를 찼다.

“똑같구만. 똑같아.”

다시 한 번 쯧하고 혀를 찬 거친눈사태는 환장의 커플을 떠올렸다.

역시 형제는 닮는 모양이었다.

&

하얀 설원이 끝없이 펼쳐져 있는 곳.

코델리아는 아델리아보다는 거친눈사태를 닮은 시선을 유더에게 보내고 있었다.

“가끔 보면 똑똑한지 멍청한지 모르겠다니까.”

“흑흑.”

유더와 코델리아는 발이 쑥쑥 들어가는 눈밭 위를 걷고 있었다.

어딘가로 나아간다기 보다는 일단 오늘 하루 쉬어갈 곳을 찾기 위한 움직임이었다.

“진짜 애야, 애.”

비난의 이유는 단순했다.

코델리아를 안고 흑풍도래를 펼친 유더가 너무 신을 냈으니까.

달리는 것에만 집중하다보니 처음 정한 경로를 한참이나 벗어나고 말았는데, 문제는 얼마나 벗어났는지를 명확히 알지 못 한다는 사실이었다.

아무리 나침반과 지도가 있다지만 애당초 축척이 정확한 지도가 아니다 보니 쉽게 다시 길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밤이 되면 별자리가 뜬다는 것과, 별자리를 이용해 칼날부리 협곡으로 찾아갈 방법을 고운눈바람 부족에게 배워두었다는 사실이었다.

‘큰 도끼 자리가 있는 방향으로 쭉 나아가면 결국 발견할 수 있다.’

고운눈의 가르침이었다.

“그런데 유더야.”

“비난은 이제 그만.”

“안 해, 그냥 갑자기 궁금한 게 생겨서 그래.”

“뭐가?”

유더가 돌아보며 묻자 코델리아는 자연스럽게 두 팔을 앞으로 뻗었다.

저 자세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는 유더는 일단 눈부터 가늘게 떴다.

“야, 궁금한 게 있다며.”

“다리도 아파.”

“우리 공주님, 요즘 들어 자기 발로 걷는 일이 너무 적어지지 않았나요?”

“레벨 높아져서 튼튼해진 아빠가 있잖아요.”

“우리 공주님도 독립해야죠. 언제까지 아빠 품에만 안겨 있을 수는 없잖아요?”

“코델리아는 캥거루족이 될 거예요.”

“···뭔가 진짜 아빠도 아닌데 참담한 기분이군. 장인어른 보고 싶다.”

“아무튼 그래서 업을 거야 말 거야. 길 잃은 거 잘했어, 잘못했어?”

“잘못했지.”

“그럼 빨리.”

결국 유더는 코델리아에게 배낭을 넘겼고, 코델리아는 배낭을 멘 뒤 유더의 등에 폴짝 올라탔다.

“그래서 궁금한 건 뭔데?”

유더가 코델리아를 고쳐 업으며 묻자 코델리아는 유더의 어깨를 붙잡으며 말했다.

“여기에 손잡이를 달면 업히기 더 쉬워지지 않을까?”

“야, 너 궁금한 거 없지?”

“아니, 있어. 일단 구천구문 말이야. 선녀님을 봤다고 했지?”

“봤지.”

심상세계에서 보았던 여인.

유더는 그녀에게서 흑룡출수와 흑풍도래라는 두 가지 기술을 배울 수 있었다.

“앞으로도 문을 열 때마다 선녀님이 나와서 새로운 기술들을 가르쳐 주시겠지?”

“아마도?”

“좋아, 좋아. 테크 제대로 타기 시작했어. 맘에 들어.”

레벨을 올리면 새로운 마법을 배울 수 있다는 테크 트리가 진즉에 잡힌 코델리아 자신과 달리 유더는 지금까지 성장 루트가 다소 모호했으니까.

“이제야 좀 명확해진 기분이네.”

구천구문의 경지를 높일 때마다 새로운 무공을 배울 수 있다.

기존의 무공 역시 강화된다.

“그런데 유더야. 란디우스는 너한테 이런 이야기 안 해주지 않았어?”

“스승님은··· 아마 못 보신 게 아닌가 싶어.”

“선녀님을?”

“어.”

“왜? 선녀님이 마초남을 싫어하셔서?”

“진심으로 하는 말은 아니지?”

“아니지. 역시 천무지체 때문인가?”

“아마도.”

구천구문은 천무지체만이 온전히 익힐 수 있는 신공이었다.

때문에 란디우스는 선조회귀를 통해 거인의 힘을 일깨웠음에도 불구하고 구천구문을 온전히 익힐 수 없었다.

‘그나마 거인의 힘을 일깨웠으니 칠문까지 도달한 거겠지만.’

이번에 삼문을 열어보니 알 수 있었다.

천무지체인 유더조차도 새로운 문을 열기 위해서는 일단 기반이 되는 육체가 이전보다 더 강건해질 필요가 있었다.

그 필요치는 상위 단계의 문으로 갈수록 높아지는데, 천무지체가 아닌 이가 구천구문을 익히려면 훨씬 더 강력한 육체가 필요했다.

‘생각해보니 진짜 대단하네.’

우격다짐으로 칠문까지 열었다는 것이니까.

실로 엄청난 육체 능력이 뒷받침 되었기에 가능한 결과였다.

‘근손실 타령하는 이유가 있었구나.’

그 어마어마한 근육이 없으면 구천구문을 견뎌내지 못 했을 테니까.

“후훗, 그런데 우리 유더는 천무지체가 있다 이거군. 좋아, 좋아. 마음에 들어.”

기분 좋게 웃은 코델리아는 유더의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유더야.”

“어.”

“사실 구천구문은 우연히 익히게 된 거잖아? 란디우스 스승님을 만난 것도 그렇고.”

“응.”

“그럼 본래는 어떻게 강해질 생각이었어?”

원작의 유더는 바이엘 백작가의 무공을 익혀 정통파 검사로 성장했다.

그런데 애당초 지금의 유더는 원작보다 워낙 이른 시점에 집을 나서다보니 바이엘 백작가의 무공조차도 일부밖에 익히지 못 한 상태였다.

“본래는.”

“응응, 본래는?”

“흐레스벨그 백작가의 무공을 쪽쪽 빨아먹다가 야만의 땅에서 붉은질풍의 무공을 배울 생각이었어.”

이러나저러나 천무지체인 유더였다.

작정하고 달라붙으면 무공을 훔쳐 배우는 것도 불가능이 아니었다.

더욱이 유더에게 무척이나 호의적이었던 루카스가 아니었던가.

“붉은질풍에게는 붉은바람 구해준 대가로 배우려 했고.”

“잡식이네.”

“어차피 중반 이후에는 제왕검법을 익힐 생각이었으니까.”

영웅전기2의 진주인공인 막시밀리언이 이어받을 고대의 검공.

하지만 이제는 생각이 달라졌다.

“마지막 확장팩에서 유더는 어차피 구천구문을 배웠을 거야. 그런데 훨씬 일찍 구천구문에 입문하게 되었으니 한 눈 팔 필요가 없지. 더욱이 란디우스랑 카마엘도 있잖아?”

“극한과 극양.”

“그 둘을 한 몸에 담을 수 있는 음양지체.”

이 정도면 이미 무공 쪽으로는 차고도 넘치는 상황이었다.

레나의 구출과 성난뿔소 부족의 저지 등등 반드시 개입해야 하는 굵직한 사건들만 아니었다면 란디우스든 카마엘이든 졸졸 따라다니며 수련만 했을 유더였다.

“아무튼 일단 구천구문을 베이스로 키워나가면서··· 서브 직업 하나를 좀 키울 생각이야.”

“멀티 클래스 하게?”

“어, 스크롤 제작 능력을 좀 더 키워보려고.”

지금도 이미 스크롤을 열심히 잘 써먹고 있는 유더였지만 대부분 기초 마법에 국한되어 있었다.

고위 마법을 스크롤에 담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는 마법적 능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흠, 좋아. 어떻게 강해질지 충분히 생각해뒀구나. 누나는 우리 유더가 잘 자라서 참 기뻐요.”

코델리아는 유더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고, 유더는 얌전히 그 손길을 받아들였다.

묘하게 기분이 좋았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렇게 언제나처럼 떠들고 나아간 지 얼마나 지났을까.

야트막한 언덕 위에 도달한 유더와 코델리아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같은 곳을 보았다.

“으아아아!”

하얀 설원 위를 하얀 옷을 입은 남자가 미친 듯이 달리고 있었다.

어차피 사람이 하나도 없는 곳이라 그런지 사람 살려라는 말 대신 그냥 비명만 지르면서 말이다.

그리고 그 남자의 바로 뒤.

지축을 뒤흔들며 눈밭 위를 달리는 거대한 괴물.

“와, 화이트 자이언트 베어인가? 타락하기 전에는 저렇게 생겼구나.”

“생각보다 더 큰데?”

몸길이만 6미터는 족히 되어 보였으니 말이다.

“구해줘야겠지?”

“퀘스트는 마다하는 게 아니니까.”

코델리아는 유더의 등 뒤에서 폴짝 뛰어내렸고, 유더는 허리를 펴며 가볍게 손발을 풀었다.

“도망 잘 치네.”

“그러게.”

짧은 팔다리임에도 불구하고 도망치는 남자는 발이 제법- 아니, 정말 빨랐다.

유더와 코델리아가 바로 달려들지 않은 것도 그래서였다.

“그런데 어디서 본 것 같지 않아?”

“팔다리가 짧은데 엄청나게 빠르다.”

“드워프.”

“검은 수염에 대머리.”

“아, 모자 날아갔다.”

달리던 남자의 모자가 벗겨졌고, 유더와 코델리아는 햇살 아래 반짝이는 민둥머리를 확인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걔 같지?”

“인디아나 카플란.”

“아르곤 제국의 모험가이자 고고학자.”

“악운에 강한 남자. 트러블 메이커. 불행을 부르는 자.”

수많은 유적을 탐사하고 빛나는 성과를 낸 위인이었지만, 별명 그대로 늘 트러블을 몰고 다니는 남자였다.

때문에 영웅전기2의 초보들은 만나면 일단 피해야 하는 NPC 중에 하나였다.

하지만 썩은물인 유더와 코델리아에게는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나 반가운 인물이었다.

“지금 시점엔 여기에 있었구나.”

“어··· 그럼 우리가 여기서 안 구해줘도 살지 않을까?”

“그건 모르지. 아무튼 구해주자. 저러다 진짜 잡히겠다.”

코델리아는 배낭을 풀었고, 유더는 지면을 박차올랐다. 바로 헤이스트를 걸고 따라붙는 코델리아에게 외쳤다.

“멋진 모습을 보여줄게!”

“지랄!”

하지만 코델리아의 두 눈이 기대로 반짝이는 것을 확인한 유더였다. 더욱이 유더에게는 아직 코델리아에게 보여주지 못 한 신기술이 남아 있었다.

“카플란을 맡아!”

“오케이!”

유더와 코델리아가 쏜살처럼 나아갔다.

거센 선풍으로 눈밭을 헤치며 나아가니 숨 가쁜 추격전을 펼치던 카플란과 화이트 자이언트 베어도 두 사람 쪽을 돌아보게 되었다.

“후.”

유더는 숨을 토했다. 그 순간 지면을 박차 흑풍도래를 발동시켰고, 검은 바람의 잔영이 화이트 자이언트 베어의 눈을 어지럽혔다.

“크오오!”

카플란을 쫓기 위해 네 발로 달리던 자이언트 베어가 벌떡 일어서서 포효했다. 하지만 시야를 넓혔음에도 불구하고 놈의 눈에는 유더가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된 것일까.

자이언트 베어가 급히 주변을 돌아보았다.

바로 그 순간 카플란의 팔을 붙잡은 코델리아는 탄성과 함께 하늘을 보았다.

“올?”

하늘로 치솟은 흑풍.

십여 미터가 훌쩍 넘는 그곳에서 유더가 지상에 도래했다. 화이트 자이언트 베어의 정수리를 향해 일장을 내뻗었다.

그로 인해 방출되는 것.

대기를 뒤흔드는 용의 포효!

콰가가가가가-!

검은 용의 기운이 출수되었다. 마치 진짜 용이라도 된 것처럼 입을 크게 벌린 그것이 화이트 자이언트 베어의 머리를 집어삼키며 돌진했다.

쾅!

굉음과 함께 화이트 자이언트 베어가 주저앉았다. 하지만 흑룡의 기운은 멈추지 않았다. 놈을 무너트리는데 그치지 않고 지면을 뒤흔들었다. 강렬한 기파에 반경 십여 미터 안에 있던 눈들이 단번에 흩어져 바닥을 드러내게 만들었다.

“와우.”

경천동지할 위력에 코델리아가 감탄하고 카플란이 깜짝 놀라 입을 벌린 그때.

유더가 기절한 화이트 자이언트 베어의 가슴 위에 안착했다.

처음 쓰는 기술이라 힘을 좀 과하게 배분한 덕에 내공을 반 이상 소모했지만 이 정도면 만족이었다.

“어때?”

유더의 물음에 코델리아가 물개박수로 화답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즐길 시간은 너무나 짧고 짧았다. 이미 흑룡출수가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돌연 땅울림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유더야?”

“카플란.”

유더가 말했고 코델리아가 눈을 크게 떴다.

트러블 메이커 카플란.

마른하늘에도 날벼락이 떨어지게 하는 악운의 남자.

“씨발.”

코델리아의 외마디 욕설이 끝난 그때.

지반이 무너져 내렸다.

추락을 시작했다.

&

“코델리아!”

“카플란은 맡겨!”

눈 때문에 몰랐는데 애당초 서 있던 지점이 협곡 사이의 틈이라도 되었던 모양인지 발밑이 그야말로 천길 낭떠러지였다.

코델리아는 급히 카플란을 붙잡은 뒤 플라이 마법을 펼쳐 낙하 속도를 줄였고, 유더는 잔해들을 박차며 연신 바람을 일으켰다.

“유더!”

“걱정 마!”

황금빛 선풍들이 유더의 주위를 맴돌았고, 유더는 돌개바람을 일으켜 낙하 속도를 줄이는 한편 몇 번인가 벽을 차 수직으로 낙하하는 사태를 막았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었다.

질풍이십사보가 경공을 겸하는 보법이라고는 하나 그렇다 하여 하늘을 누빌 수 있는 비행술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유더는 집중하고 또 집중했다.

바람을 일으킴과 동시에 절벽 사이에 이는 바람을 읽어냈다.

바람을 타며 낙하의 궤적을 머릿속에 그렸다.

지면을 박찼다.

궤적을 수정하며 주변 모두를 살폈다. 단순히 눈으로 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감각을 총동원해 모든 것을 느꼈다.

점점 더 어두워졌다.

그리고 소리가 들려왔다.

먼저 떨어진 잔해의 소리.

첨벙하고 빠지는 소리가 아니었다.

쿵하고 깨지는 소리 역시 아니었다.

푹.

밑은 눈밭.

그것도 깊이가 상당한.

하지만 완전히 푹신푹신한 상태는 아님이 분명했다. 쌓인 눈 아래는 얼어있을 터였다.

“유더!”

다시 한 번 코델리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플라이 마법을 펼칠 수 있는 그녀는 유더보다 훨씬 더 안정적인 속도로 낙하하고 있었지만 카플란이 문제였다.

여간한 성인 남성 세 명 분의 무게를 가진 그를 붙잡고 있으려니 아무리 40레벨을 넘어 육체 능력이 강화된 코델리아였지만 팔이 빠질 것처럼 아팠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팔이나 손가락보다는 유더를 걱정하고 있었다.

“유더!”

유더보다 낮은 곳에서 위를 쳐다보고 있는 코델리아였던 터라 그나마 유더의 위치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유더는 아니었다. 정신 없이 떨어지는 와중에 바람을 타고자 몸부림을 치다보니 발 아래를 제대로 확인하기가 너무 어려웠다.

“코델리아!”

유더는 다시 소리쳤다. 코델리아의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명확히 기억한 뒤 마지막으로 바람을 일으켰다.

츠화아-!

거친 바람이 협곡 사이를 갈랐다.

유더는 마침내 지상에 안착했고, 저만치서 반짝이는 작은 빛을 볼 수 있었다.

“유더! 괜찮아?!”

코델리아였다. 작은 마법의 불꽃을 피운 그녀의 옆에는 카플란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널브러져 있었다. 아무래도 기절한 모양이었다.

“너는?”

“나는 괜찮아.”

안도의 숨을 토한 코델리아가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유더는 그런 코델리아에게 다가선 뒤 주변을 둘러보았다.

예상대로 협곡 사이였는데, 어찌나 깊이 내려왔는지 주변이 어두컴컴한데다가 한기까지 보통이 아니었다.

겨울의 가호를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춥다는 생각이 들었으니 말이다.

“카플란은?”

“기절한 것 같아.”

유더는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무리 적게 잡아도 백 미터 이상은 되어 보이는 절벽의 높이였다.

“딱 틈바구니였네.”

“과연 카플란.”

물론 지반을 무너트린 것은 결국 흑룡출수이긴 했지만, 유더와 코델리아 모두 이 사태의 원흉을 카플란이라 생각했다.

영웅전기2에서도 카플란과 엮이면 이런 상황이 곧잘 연출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어쩌지?”

“올라··· 가는 건 무리겠지?”

“아마도.”

코델리아 혼자라면 플라이 마법으로 어떻게든 될 것 같았지만 유더와 카플란까지 데리고 가는 것은 무리였다.

“나무판도 없고.”

“있었어도 무리이지 않을까?”

“음··· 그렇겠네.”

카플란이 너무 무거웠다.

유더와 코델리아 두 사람을 태운 상태에서도 비실비실 상승하던 나무판이었으니 말이다.

“암벽등반은··· 이것도 카플란이 안 되겠네.”

“아니, 나도 이 정도 높이는 좀.”

밧줄이나 이렇다 할 안전장치도 없이 백미터나 되는 협곡을 기어 올라가는 것은 아무리 천무지체인 유더라도 사양하고 싶은 일이었다.

“그럼 이 협곡을 빠져나가는 수밖에 없나?”

“아마도. 그리고··· 어쩌면 오히려 잘 된 걸 수도 있어.”

유더의 말에 코델리아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이내 씩 웃으며 말했다.

“카플란이니까?”

“카플란이니까.”

카플란은 단순히 운이 없는 게 아니었다.

악운이 강한 남자였다.

언제나 사건 사고를 일으키지만 그 사건 사고로 말미암아 이득을 보는 남자.

‘절벽에서 떨어졌더니 기연을 만났다! 같은 식이지.’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정말 절벽에서 떨어진 일행이지 않은가.

“아무리 야생의 땅이라지만 이 정도 협곡이 흔하지는 않을 거야. 방향도 얼추 맞으니··· 칼날부리 협곡과 이어질 가능성이 높아.”

더욱이 칼날부리 협곡에는 고대 엘프들이 세웠던 마도 왕국의 유적이 있었다.

“아르곤 제국에서 활동하는 카플란이 왜 여기에 있을까.”

“마도왕국의 유적 때문이겠지?”

얼추 이야기가 맞아 떨어졌다.

그리고 유적 탐사라면 이러나저러나 영웅전기2에서 한 손에 꼽히는 카플란이었다.

항상 누군가에게 쫓기거나 함정을 극복하거나 아무튼 모험가적인 모습을 보여서 그렇지 본직은 고고학자인 그였다.

“신기하네. 진짜 악운이란 게 있구나.”

지반이 무너져서 눈 밑에 감춰져 있던 협곡 사이에 빠지게 되다니.

코델리아가 새삼 눈을 깜박이며 카플란을 내려다보자 유더 역시 어깨를 으쓱였다.

“뭐··· 마법도 실존하니까.”

이런 마법 같은 사람도 하나 쯤은 있을 수 있겠지.

“으··· 그나저나 짐 또 잃어버렸네.”

코델리아가 울상이 되어 말했다.

고운눈바람 부족의 마을을 나서며 새로 챙긴 짐들이었는데, 이번에도 홀랑 잃어버리고 말았으니 말이다.

“그래도 카플란 짐이 있으니까 어떻게든 되겠지.”

위로하듯 말한 유더는 카플란을 깨우기에 앞서 주변을 다시 살펴보았다.

그래도 카플란인데 혹시나 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와, 진짜네.”

“뭐가?”

“아니, 잠깐 쉬어갈만한 곳이 있어서.”

저만치에 작은 동굴이 하나 보였는데, 잠깐 쉬어가기에는 충분할 것 같았다.

“신기하네.”

“아무튼 일단 가자.”

유더와 코델리아는 각자 카플란의 다리와 팔을 붙잡은 뒤 끙끙 거리며 동굴까지 이동했고, 다시 한 번 감탄했다.

“와, 진짜.”

“이래도 되는 걸까?”

가까이서 보니 자연 동굴이 아닌 인공 동굴이었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의 흐름으로 인해 많이 마모되긴 했지만 고대 엘프어로 된 문구까지 확인할 수 있었다.

“정말 칼날부리 협곡 근처인가 봐.”

그렇지 않으면 이런 협곡에 뜬금없이 고대 엘프어가 새겨져 있는 것을 설명할 방법이 별로 없었으니까.

코델리아는 정말 신기하다는 듯 기절한 카플란의 얼굴을 살펴보았고, 유더는 미간을 찌푸린 채 고대 엘프어를 해석하기 위해 노력했다.

고대 엘프 문자를 몰라서가 아니라, 마모가 너무 심한 탓에 글자를 알아보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렇게 몇 초.

이번에는 유더가 멍한 목소리를 토했다.

“세상에.”

“왜? 보물고 같은 거야?”

“아니, 그건 너무 뜬금없고. 아니, 이게 더 뜬금 없나.”

“대체 뭔데 그래.”

“온천.”

“응?”

“온천.”

유더가 다시 한 번 말하자 코델리아는 눈을 깜박였다. 그리고 이내 붙잡고 있던 카플란의 두 손을 털썩 놓고 소리쳤다.

“온천?!”

“어, 온천. 그런데 카플란 머리부터 떨어졌어.”

하지만 다행히 쌓인 눈 덕분에 딱히 다치거나 하진 않은 카플란이었다.

코델리아는 엉거주춤 다시 카플란의 두 팔을 집어든 뒤 유더에게 물었다.

“진짜? 진짜진짜 온천이야? 온천이라고 써 있어?”

“어, 아무래도 지하수맥 같은 게 있는 거 같아.”

“지금도 있을까? 있어야 하는데. 있겠지?!”

“모르지. 그리고 설사 없어도 일단 중요한 건 욕조 아니야?”

“그러게. 온천이면 일단 물 담을 수 있는 곳 있을 테니까.”

“물 담아서 끓이면 되겠지.”

“와와, 온천. 목욕. 엄청나게 오랜만에 목욕목욕!”

야생의 땅으로 건너온 이후 사실상 제대로 된 목욕을 하지 못 한 코델리아였다.

그런 반면 땀 흘린 일은 어마어마하게 많았으니, 지금 당장은 보물고보다 더 반가운 온천이었다.

“진짜 복덩이야, 복덩이.”

에헤헤 웃은 코델리아가 무척이나 사랑스럽다는 듯 카플란을 바라보았다. 가만 내버려두면 카플란의 머리에 키스라도 해줄 것 같았다.

때문에 유더는 재빠르게 입을 열었다.

“아무튼 빨리 들어가자.”

“응!”

해맑게 답한 코델리아는 콧노래를 부르며 동굴 안에 들어갔고, 두 사람은 이내 다시 한 번 감탄을 토했다.

“진짜다.”

“진짜 목욕탕이야.”

오랜 시간이 흘러 여기저기 마모되거나 부서진 곳이 있었지만, 생각보다 훨씬 넓은 동굴 안쪽은 목욕탕 그 자체였다.

돌로 만든 커다란 욕조들과 사이사이에 놓여 있는 기둥들.

더욱이 놀라운 것은 아직도 온천수가 솟구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흑흑. 흐흐흑.”

“코, 코델리아?”

“너무 좋아. 너무 행복해.”

감동의 눈물까지 주르륵 흘린 코델리아는 평평한 바닥 위에 카플란을 내려놓은 뒤 유더를 돌아보며 말했다.

“먼저 씻을게.”

“어··· 그래.”

목욕은 중요한 거니까.

유더는 주변을 뒤져 태울만한 것들을 찾은 뒤 불을 피웠고, 코델리아는 목욕탕 깊은 곳에 위치한 돌 욕조 앞에 자리를 잡았다.

“감사합니다. 아무튼 감사해요.”

누구에게인지 모를 기도까지 마친 코델리아는 일단 수질과 온도부터 확인해 보았다.

잘은 모르겠지만 제법 맑은 것 같았고, 물 온도는 딱 좋았다.

아니, 이 정도면 누가 관리를 하고 있었다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카플란 최고.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해요.”

아예 두 손 모아 기도까지 한 코델리아는 바로 옷을 벗기 시작했다.

사락사락 옷 벗는 소리에 저만치 자리한 유더가 움찔움찔했지만 머릿속에 목욕 밖에 없는 코델리아였다. 유더가 갑자기 외우기 시작한 불경 소리 같은 것은 들리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다시 한 번 감사, 그리고 입수.

“아······.”

발끝만 담갔는데 등줄기를 따라 전율이 이는 것만 같았다.

코델리아는 천천히 물속에 다리를 집어넣었고, 이내 몸 전체를 탕 속에 담갔다.

깊이도 딱 적당해서 몸을 웅크리니 목과 머리만 딱 좋게 물 밖으로 나왔다.

“하아아······.”

이 얼마만의 목욕이란 말인가.

젖은 수건으로 적당히 닦는 것도 아니고, 땀을 흘리든 말든 그냥 참는 것도 아니고, 정말 제대로 된 목욕.

뜨거운 수증기를 쐰 코델리아의 얼굴에 행복이 번졌고, 자연스럽게 입술이 벌어졌다. 마음에서 우러난 노래를 속삭이듯 불렀다.

“반짝 반짝 작은 별~ 아름답게 비치네~”

자꾸만 웃음이 흘러나왔다. 온몸이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와, 얘 좀 봐. 엄청 예뻐.”

“진짜 예쁘다.”

“뭐야뭐야, 우리 목욕탕에 누가 왔어? 와! 엄청 예뻐! 리스펙!”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 패턴.

그러고 보니 작금의 상황 자체도 어째 익숙했다.

목욕탕.

노래.

더 없이 아름다운 소녀.

“얘얘, 우리랑 놀지 않을래?”

“맞아, 맞아. 우리랑 놀자.”

“얘 정도면 밤놀이에 낄 수도 있을 거야.”

재잘거리는 소리에 코델리아는 눈을 떴고, 볼 수 있었다.

머리에 개나 고양이처럼 동물 귀가 달렸을 뿐만 아니라 엉덩이에 꼬리까지 달린 작고 예쁜 페어리들.

8대 페어리들 가운데 하나인 와일드 페어리들이었다.

&

< 제25장 - 뜻밖의 조우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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