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28장 - 귀환자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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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나.
풀네임은 레나 아인스버그.
파라곤 왕국의 왕실 마법사였던 바르도 아인스버그의 애제자.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바르도에게 있어 그녀는 친딸이나 다름이 없었고, 고아출신이었던 레나 역시 바르도를 친아버지처럼 모셨다.
마법에 입문한 나이는 비교적 늦은 편이었지만 그녀에게는 바르도의 헌신적인 지도와 타고난 마법 재능, 그리고 어쩌면 가장 중요한 요소였을지도 모를 바르도의 헌신에 보답하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이 있었다.
열다섯이라는 너무나 어린 나이에 정식 마법사 직위를 획득한 그녀는 바르도의 사문이기도 한 회색탑에 입문하였고, 단 3년 만에 모든 과정을 이수하는 쾌거를 이룩하였다.
‘스승님.’
열여덟.
여전히 어린 그녀는 얼굴 한 가득 미소를 지은 채 사랑하는 스승이자 아버지인 바르도를 만나고자 귀향길에 올랐다.
그 여정의 끝이 비극으로 점철되어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 한 채.
영웅전기1편에 묘사된 레나의 이야기를 유더가 떠올린 그때 코델리아는 달뜬 숨을 토하며 레나를 보았다.
‘진짜 레나야.’
코델리아 다음으로 좋아하는 레나였다.
아니, 사실 레나가 영웅전기2편의 플레이어블 캐릭터였다면 코델리아와 레나를 놓고 엄청난 고민에 휩싸였을 코델리아였다.
때문에 코델리아는 실존하는 진짜 레나를 마주하자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텅 비고 말았다.
‘너무 좋아.’
그냥 너무 좋다.
너무너무 좋아서 행복하다.
유더가 보았다가는 심장의 괴로움을 호소했을 정도로 사랑스러운 미소를 지은 코델리아는 그대로 레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레나는 코델리아는 물론이고 그 밑에 깔려있는 유더 역시 보지 않았다.
“이곳은 위험해요. 제가 몇 번이나 도울 수 있다는 보장은 없어요. 그러니 한시라도 빨리 이 도시를 나가세요.”
로브를 푹 눌러 쓴 채 내뱉듯이 말한 그녀는 휙 하고 돌아서더니 유더와 코델리아가 무어라 말을 건네기도 전에 빛이 되어 사라졌다.
“레나!”
코델리아가 다급히 외쳤지만 이미 사라진 후였다.
마치 방금까지 레나가 서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환상이었던 것처럼 새하얀 빛의 입자만이 흩날릴 뿐이었다.
“분신술.”
정확히는 쉐도우 클론 아츠.
분신을 만들어내는 마법이었는데, 영웅전기1편 최후반부에 습득 가능한 레나의 궁극기 가운데 하나였다.
‘본래는 시야 범위 내에서만 만들 수 있었는데.’
지금은 본체와 분신 사이의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10년의 세월 동안 괴물이 된 것은 란디우스와 카마엘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으··· 레나.”
코델리아가 울상을 짓자 유더는 일단 다시 고개를 바로 한 뒤 말했다.
“그래도 호신호야. 레나가 살아 있고, 엔디미온 어딘가에 있다는 건 확실하니까.”
아직 늦지 않았다.
레나를 구할 기회가 남아 있다.
유더의 설명에 코델리아는 급히 시선을 내렸다.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 있을까?”
“찾아봐야지. 그러니까 일단 내려와 줄래?”
딱히 무겁거나 싫은 것은 아니었지만 일단 일어나야 뭐든 할 수 있을 테니까.
코델리아는 급히 고개를 끄덕인 뒤 유더의 가슴에서 내려와 앉았다.
“아, 맞다! 카플란 경! 괜찮아요?”
“읍읍! 믑!”
아직 사일런트는 물론이고 패럴라이즈도 풀리지 않은 카플란이었다.
바닥에 널브러진 채 꿈틀꿈틀 거리는 카플란의 모습에 미안함을 느낀 코델리아가 서둘러 그에게 달려갔다.
“죄송해요, 금방 풀어드릴게요.”
“으븝.”
그렇게 코델리아가 카플란에게 걸린 마법들을 풀어주는 사이.
유더는 자리에서 일어나 일단 환영벽 너머에 주의를 집중했다.
다행히 마물들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레나의 마법에 속아 다른 곳으로 간 모양이었다.
‘이 환영벽 자체는 엔디미온의 것인가.’
레나가 만든 것이 아닌 본래부터 엔디미온에 있던 것.
‘레나가 활성화 시켰거나··· 마물들이 엔디미온의 기능들을 깨우는 와중에 발동된 건가?’
마물들이 지나던 복도에는 마법의 불빛들이 들어와 있었다.
레나가 되었든 마물들이 되었든- 아니면 마물들을 소환했을 악마의 눈이 되었든 누군가가 엔디미온의 도시 기능을 복구한 모양이었다.
‘레나는 엔디미온 어딘가에 있는 것이 분명해.’
레나는 ‘이 도시는 위험해요.’, ‘이 도시를 나가세요.’ 같은 표현들을 사용했다.
만약 레나가 도시 밖에 있었다면 ‘그 도시’나 ‘그곳’, ‘거기’ 같은 표현을 사용했으리라.
‘단순한 말장난 같지만 이게 꽤 잘 먹힌단 말이지.’
레나는 엔디미온 어딘가에 있다.
그렇다면 어디에 있을까.
그녀는 엔디미온에서 무엇을 하려는 것이고, 엔디미온에서는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천사의 깃털.’
레나가 사라진 장소에는 하얀 깃털 하나가 놓여 있었다.
평범한 새의 깃털이 아닌 천사의- 그것도 레나의 깃털임에 분명했다.
‘분신의 핵으로 쓴 건가?’
약간이지만 빛까지 발하는 하얀 깃털을 유더가 살펴보고 있을 때였다.
“유더야, 유더야.”
카플란에게 회복 마법까지 하나 걸어준 코델리아가 잰걸음으로 다가왔다.
유더가 돌아보자마자 빠르게 이야기했다.
“우리가 위험에 처하니까 레나가 도와주러 왔잖아? 그럼 다시 한 번 위험에 처하면 레나가 나타나지 않을까?”
제법 그럴싸한 이야기였다.
이야기 속의 성녀처럼 착한 레나의 성품이라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였고 말이다.
하지만 유더는 바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너무 위험해.”
모든 위험에 레나가 반응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었다.
당장 네임드 나쟈루스와 싸울 때도 나타나지 않은 레나였다.
“그치만······.”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
게임이었다면 코델리아의 제안을 받아들였을 터였다.
하지만 현실이었다.
방법이 그것뿐이라면 모를까, 하나뿐인 목숨으로 도박을 할 수는 없었다.
“코델리아, 레나의 깃털인데 혹시 역추적은 불가능할까?”
유더의 기대 섞인 물음에 코델리아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리야. 당장은 생각나는 마법이 없어.”
“역시 그런가.”
“그··· 역추적이라면 방법이 있습니다.”
마지막 말에 유더와 코델리아는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겨우 회복한 카플란이 땀으로 범벅이 된 머리를 훔치며 더듬더듬 말했다.
“확실하진 않지만··· 두 분께서는 혹여 ‘벨라지오’라는 이름을 들어보셨습니까?”
벨라지오.
유더와 코델리아는 눈을 한 차례 깜박이더니 서로를 돌아보았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입을 열어 말했다.
“아.”
“아아아.”
“아아!”
“아아아!”
“아.”
“아.”
“유더 군? 코델리아 양?”
눈빛만으로도 의사소통이 가능한 두 사람 사이에서 카플란이 소외감을 느낄 즈음 유더가 다시 입을 열어 말했다.
“벨라지오. 맞아, 벨라지오. 그게 있었어.”
“벨라지오면 레나를 찾을 수 있겠지?”
“있겠지.”
여기 이렇게 깃털까지 있으니까.
유더가 고개를 끄덕이자 자리에서 폴짝 뛰어오른 코델리아는 그대로 달려가 카플란의 머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최고에요 카플란! 카플란이 있어서 다행이에요!”
“흠흠. 어, 흠.”
코델리아의 가슴에 머리가 파묻힌 카플란은 얼굴을 붉힌 채 헛기침을 토했고, 유더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수를 헤아렸다.
‘하나, 둘, 셋.’
이 정도면 충분했다.
슬쩍 다가서서 코델리아의 팔을 잡아당기는 것으로 포옹을 중단시킨 유더는 빠르게 말을 이었다.
“카플란 경의 말이 맞습니다. 벨라지오가 있으면 레나를 찾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그··· 일단 벨라지오를 찾는 것도······.”
순간적으로 떠올라 이야기하긴 했지만 사실 벨라지오를 찾는 일 자체가 쉽지 않았다.
카플란 자신도 칼날부리 협곡 어딘가에 벨라지오들의 서식지가 있다는 것 외에는 그다지 아는 바가 없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유더와 코델리아는 아니었다.
“벨라지오가 어디 있는지 알아요.”
“정확히는 벨라지오를 누가 키우는지 알고, 그 누구를 만날 방법을 알고 있죠.”
환수 벨라지오.
손톱만큼 작은 마력의 흔적도 추적할 수 있다는 마법의 짐승.
“오! 정말입니까?”
“정말이에요.”
활짝 웃으며 답한 코델리아는 그렇지 않냐는 듯 유더를 돌아보았고, 유더는 고개를 끄덕였다.
‘영웅전기에서도 벨라지오들을 키우는 건 그 녀석들이었으니까.’
그러니 현실인 이곳에서도 키우고 있으리라.
“어디로 가야하죠? 악마들이 이렇게 돌아다니는 것으로 보면 엔디미온에 무언가 큰 일이 생긴 것이 분명합니다. 도시 밖으로 나가는 것이 쉽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유더와 코델리아와 달리 작금의 상황에 대한 정보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카플란이었지만 괜히 제도 아카데미의 종신직 교수가 아니었다.
부족한 정보나마 조합해 조리 있게 말하자 유더는 씩 웃으며 답했다.
“도시 밖으로 완전히 나갈 필요는 없습니다. 지도에 표시된 곳으로 가면 되니까요. 더욱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습니다.”
그리 말한 유더는 코델리아와 카플란을 위해 엔디미온의 지도를 펼쳤고, 코델리아는 이내 체크 표시가 된 곳을 가리켰다.
“우린 여기에 가야해요.”
“그곳에··· 무엇이 있는 거죠?”
카플란이 눈을 껌벅이며 묻자 유더와 코델리아는 다시 서로를 돌아보았고, 이내 코델리아가 가슴을 활짝 펴며 말했다.
“목욕탕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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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도는 어때?”
“딱 좋아. 너야말로 안대는 어때?”
“아무 것도 안 보여서 넘어질 것 같아. 잠깐만 벗으면 안 될까?”
“응, 안 돼.”
까르르 웃은 코델리아는 연이어 다른 곳을 보며 말했다.
“카플란 경, 답답해도 조금만 참으세요.”
“괜찮습니다.”
엔디미온 외곽에 위치한 목욕탕 안.
협곡의 온천이 그러했단 곳처럼 이곳도 제법 관리가 잘 되어 있는 상태였다.
유더와 카플란은 안대를 찬 채 빈 욕조 위에 앉아 있었고, 코델리아는 뜨거운 물을 가득 채운 욕조 앞에서 목욕 준비를 하고 있었다.
“자, 그럼 시작해볼까?”
욕조에 들어간 코델리아는 뜨거운 물로 몸을 씻기 시작했다.
지옥의 마물들이 엔디미온 지하를 누비는 와중에 과연 이래도 될까 싶을 행동이었지만 사실 무척이나 중요한 의식이라 할 수 있었다.
“응응응.”
콧노래를 부른 코델리아는 머리까지 감기 시작했고, 유더는 헛기침을 토하며 말했다.
“코델리아, 계속 목욕하려고?”
“치, 머리만 감고.”
뜨거운 물에 목욕할 기회는 아무 때나 오는 것이 아니니까.
정성들여 머리를 감은 코델리아는 숨을 크게 토한 뒤 페어리들을 부르기 위한 마법의 주문을 읊조렸다.
“반짠반짝 작은 별~ 아름답게 비치네~ 서쪽 하늘에서도~ 어, 왔다.”
이제는 익숙했으니까.
“와! 완전 예뻐!”
“진짜 예쁘다!”
“근데 우리 쟤 만난 적 있지 않아?”
“만난 적 있어.”
마지막은 코델리아였다.
욕조에서 일어난 뒤 마법으로 몸을 말린 그녀는 초롱초롱 빛나는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와일드 페어리들에게 말했다.
“나랑 놀지 않을래?”
“응! 놀래!”
“뭐하고 놀 거야?”
와일드 페어리들이 욕조 위에서 폴짝폴짝 뛰며 소리치자 코델리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페어리들의 목소리에 움찔움찔하는 카플란과 유더를 돌아본 뒤 옷을 챙겨 입으며 말했다.
“일단.”
“일단?”
“여왕님을 뵙자.”
“여왕님을?”
“여왕님을.”
코델리아의 얼굴에 악동 같은 미소가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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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일드 페어리 퀸.
사자의 갈기와도 같은 풍성한 금발의 소유자인 그녀는 침대에 누워 안정을 취하고 있었다.
이러나저러나 페어리였지만, 다른 페어리들이 꼬맹이라면 여왕인 그녀는 소녀였다.
때문에 바로 얼마 전 자신들을 휩쓸고 지나간 폭풍 같은 한 쌍의 여파로부터 아직 완전히 회복하지 못 한 그녀였다.
‘피곤해.’
육체적인 피로가 아닌 정신적인 피로.
뭔가 문제를 해결하긴 했는데 해결한 것 같지 않은 미묘한 기분.
거덜이 난 하이엘프들의 창고를 볼 때마다 드는 허탈감.
‘아니, 애당초 우리가 쓰지 못 하는 물건이긴 한데.’
그래도 뭔가 좀.
정말로 뭔가 좀.
‘어찌되었든 다 끝났으니까.’
그럼 된 것이겠지.
응응, 그럼 된 것이야.
페어리답게 생각한 페어리 퀸은 그대로 깊은 잠에 빠져들려 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이었다.
“여왕님!”
“여왕님!”
“여왕님!”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깜짝 놀라 눈을 뜬 페어리 퀸은 더더욱 놀라 침대에서 굴러 떨어졌다.
페어리들 사이에 아름다운 인간 소녀 하나가 끼어있었기 때문이다.
“여왕님! 보고 싶었어요!”
코델리아가 환히 웃으며 말하자 그 얼굴이 너무 예쁘고 사랑스러워 저도 모르게 따라 웃은 페어리 퀸이었지만 잠깐 뿐이었다.
“어··· 너희는 이미 볼 일이 끝나지 않았니? 보상도 다 받았고.”
설마 보상을 더 달라는 건 아니지?
너희도 양심은 있는 거지?
페어리 퀸의 물음에 코델리아는 다시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보상 때문에 온 게 아니에요. 이미 충분히 받았는걸요.”
“그렇지? 그래, 너희가 착한 아이들이라는 건 진즉에 알고 있었단다.”
보상을 뜯으러 온 것이 아니라 하니 안심한 페어리 퀸은 자애로운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너무 이른 판단이었다.
“보상은 필요 없지만 도움은 필요해요.”
“도움?”
“네, 여왕님의 도움. 정말정말 중요한 일이에요. 사실 어떻게 보면 저희가 아닌 페어리들이 도움을 받는 일이기도 하고요. 네, 오히려 저희가 페어리들을 돕기 위한 일이에요.”
페어리들이 도움을 받는다.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드는 어휘 선택이었지만 페어리 퀸은 일단 코델리아의 이야기를 마저 들어보기로 결심했다.
“이야기해보렴.”
“네, 여왕님.”
한 차례 숨을 고른 코델리아는 유더에게 배운대로 사기를 치기- 아니, 이야기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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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8장 - 귀환자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