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28장 - 귀환자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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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 게이트.
지옥과 지상의 직접적인 연결로.
그렇기에 따로 소환 작업이 필요하지 않았다.
번거롭게 제물을 쓸 것도 없이 악마들 스스로의 힘으로 지상에 강림할 수 있었다.
“안 돼.”
코델리아가 저도 모르게 말했다.
유더도 동의했다.
너무 일렀다.
영웅전기2에서도 극후반부에나 등장하는 지옥의 문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직 지옥의 문이 완전한 형태를 갖추지 못 했다는 사실이었다.
그저 균열에 불과한 지금 상태에서는 넘어올 수 있는 악마들의 질과 양 모두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 방치하면 파국이었다.
지옥의 문이 완벽한 형태로 정립되면 지옥의 대군주들조차 지상에 강림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그래서였어.’
이제는 온전히 이해가 되었다.
레나가 칼날부리 협곡에서 힘이 다해 죽은 이유.
지옥의 문 때문이었다.
레나는 지옥의 문을 닫기 위해 목숨을 바친 것이 분명했다.
난제였다.
지옥의 문을 방치하면 파국을 피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옥의 문을 닫기 위해서는 레나 정도 되는 존재의 희생이 필요했다.
‘아니야, 단정하지 말자. 단정해서는 안 돼.’
아직 상황을 온전히 파악한 것이 아니었다.
레나가 지옥의 문을 닫기 위해 목숨을 바쳤다는 사실만을 알 뿐, 어떻게 닫았는지, 그 와중에 어떻게 힘을 소비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니 아직 포기하기에는 일렀다.
어쩌면 무언가 다른 방법이 있을지도 몰랐다.
“왈왈!”
바로 그때였다.
벨라지오가 돌연 짖기 시작했고, 지옥의 문에 정신이 팔려 있던 유더와 코델리아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왈왈! 왈!”
“레나야! 레나가 어디 있는지 아는 거야! 따라가자!”
일단 레나를 만나자. 만나서 정보를 얻고 이 사태를 해결할 방법을 찾자.
코델리아의 말이 맞았다. 유더는 지옥의 기운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카플란을 번쩍 들어올린 뒤 코델리아에게 눈짓했다.
“루크! 안내해 줘!”
“왈왈!”
코델리아의 명을 받은 벨라지오가 쏜살처럼 달리기 시작했다.
향하는 방향은 정면.
마치 지옥의 문을 향한 질주와도 같았다.
그리고 유더는 보았다.
지옥의 문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명확히 볼 수 있었다.
지옥의 마물들이었다.
지옥의 보랏빛 사기와 독을 연상케하는 초록빛 사이로 수많은 마물들의 실루엣이 보였다.
개중에는 제법 강력해 보이는 악마의 것도 있었다.
‘적게 작아도 일백.’
이미 문을 통과한 마물들의 숫자였다.
어찌어찌 문을 닫는다 해도 저만한 숫자의 마물들을 처리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왈왈!”
“유더!”
벨라지오가 다시 주의를 환기했다.
코델리아가 유더의 정신을 눈앞의 현실로 이끌었다.
“레나.”
유더도 이제는 느낄 수 있었다.
도시 중앙에 자리한 지옥의 문으로부터 겨우 이백 미터 남짓 떨어진 장소.
탑처럼 생긴 5층 건물 안에 레나가 있었다. 그녀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반대 역시 마찬가지였다.
“꺄?”
코델리아가 작은 비명을 지른 그때 유더는 시야가 어둠으로 물드는 것을 느꼈다.
순간이지만 몸의 자유를 잃었고, 허공을 허우적 거리다 다시 빛을 보았다.
“아야!”
코델리아였다. 허공에서 뚝 떨어진 그녀는 엉덩방아를 찧었고, 천무지체답게 그 와중에도 낙법을 펼쳐 안착한 유더는 카플란을 내려놓으며 정면을 보았다.
예상대로의 인물이 서 있었다.
“제가 도망치라 하지 않았나요?”
회색 로브를 머리끝까지 눌러쓴 금발의 여인.
경어였지만 노여움과 약간의 짜증이 섞여 있었다. 아니, 초조함에 가까웠다.
“이제 당신들도 알았겠죠. 이곳은 위험해요. 마물들을 피해서 도망쳐요. 당신들을 보살필 여력까지는 없으니!”
반론은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단호한 어조였다.
하지만 유더는 그녀의 말을 따를 수 없었다.
오히려 그녀의 마음을 바꾸어 놓아야 했다.
그리고 유더는 자신이 무어라 말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란디우스의 제자 유더 바이엘이 인사드립니다.”
짤막한 말이었지만 레나의 마음을 흔들기에는 충분했다.
유더의 말에 순간 멈칫한 그녀는 이내 빠른 어조로 말했다.
“증명할 수 있나요? 아니, 설사 진짜 란디우스의 제자라 해도······.”
“항상 근육이 함께하기를!”
코델리아였다.
그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치자 벨라지오와 카플란은 갑자기 무슨 개소리냐는 듯 눈을 껌벅였고, 유더조차도 당황했다.
하지만 레나는 아니었다.
로브 때문에 얼굴이 잘 보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눈에 띄게 멍해진 그녀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란디우스의 지인이··· 그것도 가까운 지인이 맞군요.”
그런 괴상한 인사를 하는 것은 란디우스 뿐이었으니까.
더욱이 유더와 코델리아는 몰랐지만, 정말 가까운 지인에게만 근육의 가호를 비는 란디우스였다.
“맞아요! 유더는 란디우스님의 제자에요!”
코델리아가 다시 말하자 퍼뜩 정신을 차린 유더가 말을 보탰다.
“스승님께 구천구문을 전수받고 있습니다. 직전 말씀드린 것처럼 유더 바이엘입니다. 이쪽은 제 약혼녀인 코델리아 체이스고요.”
유더의 말에 레나가 다시 한 번 반응했다.
구천구문.
파라곤 왕국의 비극 이후 란디우스가 자신의 평생을 바칠 거라 선언한 선인의 신공.
놀란 것은 레나만이 아니었다.
작금의 대화를 겨우겨우 쫓아가던 카플란은 레나와는 전혀 다른 부분에서 경악을 표했다.
“바이엘과 체이스! 북부12가문의 자제분들이셨군요!”
세일룬 왕국 북부를 지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북부12가문 중에서도 특히나 이름이 알려진 바이엘 백작가와 체이스 백작가였다.
“아니, 잠깐. 그럼 북부12가문의 자제분들인 동시에 왕도 아카데미의 연구원이자 철인 란디우스의 직전제자이자 성십자수호단의 일원이란 말씀입니까?!”
“네, 거의요.”
왕도 아카데미의 연구원은 아니었으니까.
어느새 유더에게 배운대로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화법에 익숙해진 코델리아였다.
어찌되었든 지금 중요한 것은 카플란이 아니었다.
유더는 레나에게 한 걸음 다가서며 말했다.
“지옥의 문을 닫아야 합니다. 아직은 초기 단계- 정확히는 1단계 말- 2단계 초입에 가까운 형태이지만 이대로 계속 커지면 파국입니다. 4단계에 도달해 데몬 프린스라도 강림하게 되면 파라곤의 비극이 야생의 땅에서 반복될 겁니다.”
레나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유더는 굳이 언급했다.
지옥의 문에 대해 자신들이 결코 무지하지 않다는 사실을 레나에게 알리기 위함이었다.
“저는 란디우스님의 제자입니다. 아직 삼문까지 밖에 열지 못 했지만 구천구문의 계승자이고, 코델리아는 마녀의- ‘서쪽 숲의 마녀’의 힘을 이어받은 자입니다. 크든 작든 도움이 될 겁니다.”
속사포처럼 쏟아낸 말에 레나가 다시 반응했다.
구천구문과 서쪽 숲의 마녀- 과거 지옥의 대군주들과 대립했던 마녀의 이명은 그녀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하지만 정말로 위험해요.”
“물론이죠. 위험합니다. 하지만 지옥의 문 앞에서 위험한 것은 레나 님도 마찬가지에요. 그러니 돕는 것을 허락해주세요.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진심 어린 말에 레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덮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함께해요. 이미 알고 계신 것 같지만··· 저는 레나 아인스버그에요.”
“유더입니다.”
“코델리아에요!”
유더가 레나를 설득하는 장면을 애가 타는 얼굴로 바라보던 코델리아가 바로 따라붙었다.
“유더와 코델리아. 저쪽 분은······.”
“이, 인디아나 카플란입니다. 아르곤 제국 제도 아카데미의 교수입니다.”
카플란이 말을 조금 더듬긴 했지만 자신을 소개하자 레나는 고개를 끄덕인 뒤 다시 유더와 코델리아에게 말했다.
“이미 어느 정도 사태를 파악한 것 같으니 빠르게 말할게요. 유더가 말한 것처럼 지옥의 문은 지금 1단계 극후반 상태에요. 이대로 방치하면 2단계에 돌입할 거고, 그럼 보다 상위종의 마물들이 나타날 거예요. 이명을 가진 악마들 역시 강림이 가능해질 거고요. 그러니 그 전에 지옥의 문을 닫아야만 해요.”
지옥의 문을 닫는 방법은 두 가지가 존재했고, 그 중 가장 메이저한 방법은 태양신 미트라가 지상에 전한 천계의 주문인 ‘천상의 봉인’이었다.
“천상의 봉인을 펼치시려는 건가요?”
유더의 물음에 레나는 순간 놀라더니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하지만 천상의 봉인을 사용하기에는 힘이 부족해서 방안을 마련하던 중이었어요.”
“힘이··· 부족하시다고요?”
눈을 깜박이며 물은 것은 코델리아였다.
그도 그럴 것이 눈앞에 서 있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성천사 레나였으니 말이다.
선조회귀를 통해 천사의 힘을 손에 넣은 그녀는 이미 인간이 아니었다.
단순히 마력의 양만을 논한다면 다섯 영웅들 가운데서도 최강일 그녀였다.
그런데 그런 레나가 천상의 봉인을 제대로 펼칠 힘이 없다니 이해가 되지 않았다.
‘뭔가가 있어.’
천상의 봉인이 막대한 마력이 필요한 주문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레나의 목숨을 앗아갈 정도의 힘을 요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레나는 지옥의 문을 봉하고 힘이 다해 죽음을 맞이했다.
어째서일까.
둘 사이의 미싱링크는 무엇일까.
그리고 하나.
‘레나는 어떻게 알고 이곳에 온 거지?’
유더 자신과 레나가 몇 번이나 말했듯이 현재 지옥의 문은 1단계 후반부였다.
이 정도로는 엔디미온 밖으로까지 지옥의 기운이 새어나가지 않았다.
당장 엔디미온 외곽부와 영역을 공유하고 있는 페어리 퀸 조차도 지옥의 문의 존재를 모른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레나는 어떻게 알고 온 것일까.
‘우연으로?’
레나가 엔디미온에 찾아온 그때 마침 지옥의 문이 열려서?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여기서 또 하나의 의문이 생겼다.
지옥의 문을 연 것은 누구일까.
어째서 지옥의 문이 열린 것일까.
의문들이 머릿속에 나열되었다.
레나의 죽음.
천상의 봉인조차 제대로 쓸 수 없는 레나의 상태.
누구보다 빨리 엔디미온에 열린 지옥의 문을 포착한 레나.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는 대신 홀로 사태에 맞서고 있는 그녀.
‘지옥의 문. 지옥의 문이 열린 이유.’
코델리아의 물음에 레나가 바로 답하지 않고 주저한 그 시간 동안 유더는 추론했다.
하나의 답을 이끌어냈다.
“레나 당신이군요.”
앞뒤를 모두 자른 말.
그렇기에 코델리아와 카플란은 이해할 수 없는 말.
하지만 레나는 아니었다.
이를 악물며 어깨를 움츠렸다. 로브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얼굴이었지만 괴로워하는 그녀의 얼굴을 상상할 수 있었다.
“유더?”
코델리아의 부름에 유더는 눈을 감고 긴 숨을 토했다.
작금의 상황을 모두 설명할 수 있는 하나의 해답을 내놓았다.
코델리아가 아닌 레나를 보며 말했다.
“레나, 당신이 지옥의 문을 열었어요.”
악마의 눈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번 사건에 조금도 개입하지 않았다.
지옥의 문을 연 것은 성천사 레나.
유더의 말에 코델리아가 멍한 얼굴이 된 그때 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끝까지 눌러쓰고 있던 로브를 벗으며 말했다.
“당신 말이 맞아요, 유더. 제가··· 지옥의 문을 열었어요.”
< 제28장 - 귀환자 #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