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31장 - 성지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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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기사 빌바인.
악마의 눈의 중급 마인들 가운데서도 손에 꼽히는 강자인 그는 고개를 들어 분지를 바라보았다.
“저곳이 성지.”
아르곤 제국의 몰락한 기사 집안 출신인 그는 야만의 땅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그조차도 눈앞의 성지에서는 특별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정보대로라면 지키고 있는 것은 야생신 하나와 최하급 천사 넷.’
사실상 야만의 땅 서부는 이미 성난뿔소 부족의- 악마의 눈의 손에 들어온 상황이었다.
덕분에 악마의 눈은 야만의 땅의 온갖 정보를 취득할 수 있었고, 개중에는 동부에 자리한 야생신들의 정보와 용맥과 성지의 위치 등도 있었다.
‘용의 형상을 한 야생신 푸른수염.’
용이라 하나 아직 어린용이라 그리 강하지는 않을 터였지만, 어찌되었든 용인 동시에 야생신이었다.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더욱이 목표는 생포.’
용맥을 오염시켜 야생신의 정신을 흐리게 한 뒤 위대한 대군주 벨리알의 힘으로 푸른수염을 타락시키는 것이야말로 빌바인이 부여받은 임무였다.
‘놈을 꾀어낸 뒤 술식을 발동시킨다. 야생신을 묶어둔 상태로 무덤의 수호자들을 격파하면 성지는 무주공산이 될 터이니.’
머릿속으로 대강의 작전을 점검한 빌바인은 성지의 입구로부터 백여미터 떨어진 곳에서 발걸음을 멈춘 뒤 수하들에게 진형을 펼치게 했다.
‘나올 수밖에 없게 해주마.’
용맥은 마치 인체의 혈맥과 같이 야만의 땅 전체에 그물망처럼 펼쳐져 있었다.
성지에 자리한 것은 그러한 용맥들이 모여서 순환하는, 사람으로 치면 심장과도 같은 곳.
용맥을 제대로 오염시키기 위해서는 그러한 심장을- 용맥천을 점령해야 했지만 어찌되었든 세세한 용맥들도 용맥은 용맥이었다.
“시작해라.”
“명을 받들겠습니다.”
빌바인이 낮게 명하자 주인을 좇아 검은 갑주를 입은 수하들이 대군주 벨리알의 저주가 어린 창들을 지면에 꽂기 시작했다.
“벨리알의 힘이 이 땅에 어릴 지어니······.”
줄지어 꽂힌 저주의 창들 사이에서 빌바인이 주문을 읊조리자 저주가 발동하였고, 주변 일대의 눈들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창대를 따라 보랏빛 기운이 솟구치는 것과 동시에 지독한 녹색의 저주가 땅속으로 스며들었다.
빌바인은 고개를 들어 성지의 입구를 보았다.
바랐던 바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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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바인이 저주의 창을 지면에 꽂기 10분 전.
유더와 코델리아는 서로를 돌아보며 빠르게 말을 주고받았다.
“빌바인은 단순한 무력캐가 아니야.”
“머리가 있다 이거지? 성격도 신중한 편이고.”
“맞아, 거기다 거친눈사태가 말했던 거 기억하지?”
“야생신들을 제압할 수단?”
“그래, 그 수단. 거친눈사태는 놈들이 준비한 사악한 기물과 저주 때문에 움직임이 봉쇄되었다고 했어. 이번에도 비슷한 걸 준비했을 가능성이 높고.”
“푸른수염을 봉쇄하고 무덤의 수호자들을 잡고?”
“바로 그거지. 그러니 우린 빌바인의 계획을 근본부터 분쇄해야만 해.”
“어떻게? 씨발 쾅으로?”
“아니, 저기 말이야. 성지를 날려버리면 성지를 점령 못 하는 게 맞긴 한데.”
“농담이야, 농담. 누굴 폭탄마로 알아. 나 그런 사람 아니야.”
“···일단 그렇다 치고.”
“그렇다 치고?”
“아무튼 현재 빌바인이 놓치고 있는 게 뭘 것 같아?”
“그냥 나한테 묻지 말고 이야기해주면 안 돼? 생각하기 귀찮아.”
“···마님, 쇤네는 아직 마님을 포기하고 싶지 않······.”
“알아, 알아. 우리라는 말을 하고 싶은 거지? 빌바인이 놓치고 있는 거.”
빌바인의 정보 속에 유더와 코델리아는 없을 터이니까.
더욱이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거친눈사태의 산에서도, 고운눈바람의 들에서도 악마의 눈의 마인들과 수하들을 사실상 전멸시킨 유더와 코델리아였다.
아직 놈들에게는 유더와 코델리아에 대한 정보가 전달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았고, 설사 전달되었다 할지라도 성지에 유더와 코델리아가 나타날 거라고는 생각하기 쉽지 않을 터였다.
“오오··· 역시. 하면 되는 아이였잖니. 앞으로도 정진하자꾸나.”
“뇌절은 이쯤치고. 아무튼 근본부터 부순다면 역시 푸른수염?”
“맞아, 빌바인의 계획은 ‘푸른수염을 봉쇄한다’에서 시작할 가능성이 높아. 즉, 푸른수염을 봉쇄하지 못 하게 하면 놈의 계획을 근본부터 말아먹게 할 수 있어.”
“수단은?”
“저거.”
빙글 돌아선 유더는 성지를- 정확히는 푸른수염의 신전을 가리켰고, 코델리아는 미간을 좁혔다.
“어··· 터트리는 건 하지 말자며.”
“아니, 용맥말고. 저긴 야생신들의 신전인 동시에 솔라리의 성지니까.”
유더의 말에 코델리아는 눈을 몇 번인가 깜박하더니 이해했다.
야생신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별로 없는 유더와 코델리아였지만 솔라리에 대해서는 아니었다.
“이용할 수 있어?”
“할 수 있지.”
“시간이 될까?”
“그러니 지금부터 서둘러야해.”
유더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코델리아는 입구 쪽으로 달려가며 소리쳤다.
“시간을 벌고 있을게!”
“무리하지는 마! 알았지?!”
“너도!”
대충 소리친 코델리아는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달렸고, 유더 역시 신전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리고 십분 남짓.
빌바인이 지면에 꽂은 저주의 창에 푸른수염이 반응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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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용맥을 더럽히는가!”
신전을 뛰쳐나온 푸른수염이 노성을 터트렸다.
당장이라도 빌바인과 그 수하들을 향해 돌진할 기세였다.
아니, 분명 혼자였다면 그리했을 터였다.
백 년의 가까운 세월동안 성지를 지켜왔지만, 실질적인 공격을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인 그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코델리아가 있었다.
“잠깐! 스톱! 가면 안 돼요!”
마녀화로 힘을 끌어올린 코델리아가 마력까지 섞어 외치니 푸른수염도 발을 멈추었지만 노한 표정은 그대로였다.
“멈추라니! 저놈들이 하는 짓거리가 보이지 않느냐!”
지면에 저주의 창을 꽂고 벨리알의 저주를 퍼트린다.
이미 비슷한 짓을 고운눈바람의 땅에서 본 코델리아였던 터라 대강은 이해했지만 그래도 물러서지 않았다.
“알아요! 하지만 함정이라구요! 그것도 눈에 뻔히 보이는 함정!”
제대로 된 용맥- 용맥천이 아니면 용맥을 오염시킬 수 없었다. 즉, 놈들이 하는 짓은 삽질이라 할 수 있었는데, 굳이 저런 삽질을 하는 이유는 오직 하나뿐이었다.
‘낚시야!’
푸른수염을 꾀어내기 위한 미끼.
“유더는요? 안에서 마법진 그리고 있죠? 유더가 일을 마칠 때까지 기다려야 해요!”
용맥에는 무지하지만 솔라리에는 밝은 유더였다.
성지의 힘을 이용하기 위한 마법진을 그리고 있을 터이니, 유더가 마법진을 완성할 때까지는 경거망동하지 말아야 했다.
“하지만 놈들이 땅을 오염시키고 있지 않느냐!”
“나중에 정화하면 되잖아요!”
“아니, 그건 그렇다만.”
성지에 혼자 있다 보니 말발이 약한 푸른수염은 순간 주춤했지만 잠깐 뿐이었다.
“에이잇! 막지 마라! 나는 성지의 수호자이니! 저런 놈들 따위 단매로 때려잡고 말겠다! 무덤의 수호자들이여! 일어나 적에 맞서라!”
“쿠오오!”
푸른수염의 명에 응답하는 입구에 자리하고 있던 무덤의 수호자 넷이 동시에 날개를 펼쳤다.
코델리아는 다급한 얼굴로 발을 동동 구르더니 이내 결단을 내렸다.
“패럴라이즈!”
“아닛?!”
코델리아의 두 번째 특기인 마비 마법이었다.
하지만 이러나저러나 야생신인 푸른수염이었다. 코델리아의 마비 주문에 일순 몸이 굳기는 했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푸른수염의 목에 걸려 있던 솔라리의 목걸이가 푸른빛을 발하며 코델리아의 마법을 해제해 버린 탓이었다.
‘솔라리의 저주해제 목걸이!’
하루에 한 번, 착용자를 해로운 주문으로부터 수호하는 목걸이로, 횟수 제한이 있지만 보호의 힘이 워낙 강하다보니 구하면 일단 챙기고 봐야하는 기물이었다.
어찌되었든 목걸이의 힘으로 코델리아의 마법을 튕겨낸 푸른수염을 노한 얼굴로 소리쳤다.
“선한 아이인줄 알았더니 안 되겠구나!”
“아니이! 그냥 말 좀 들으라구요! 네?!”
“저리 비켜라!”
더 이상 방해하면 진짜 공격이라도 하겠다는 듯이 위협적으로 외친 푸른수염은 그대로 지면을 박차 허공에 떠올랐다. 풍운조화를 부려 구름을 타더니 그대로 무덤의 수호자들과 함께 빌바인을 향해 날아갔다.
“아, 진짜!”
욕지거리를 삼킨 코델리아는 유더가 있을 신전을 한 번 돌아보더니 이내 이를 악 물고 섰다.
푸른수염이 걱정되기도 했지만 놈들이 양동작전을 펼칠 때는 대비해 한 명은 신전 인근에 남아야 했기 때문이다.
‘제발!’
이왕 이렇게 된 거 야생신의 위용을 보여줘요!
코델리아가 그렇게 소망한 순간이었다.
“벨리알의 저주망치여! 적을 때려라! 저주그물이여! 적을 포획하라!”
빌바인이 크게 외치자 수하들 가운데 다섯이 스스로의 목을 갈라 인신공양을 했다.
선명한 붉은 피가 허공에 번졌고, 그 순간 저주의 창으로부터 솟구친 검붉은 저주의 힘들이 푸른수염을 향해 돌진했다.
악마의 눈이 이번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오랜 시간을 투자해 개발한 야생신 전용의 봉인 저주였다.
“크아악!”
기세는 굉장했지만 전투 경험이 부족한 푸른수염이다 보니 연속해서 덮쳐오는 저주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 했다.
저주의 망치에 머리를 당한 푸른수염이 바닥에 추락했고, 그물의 저주들이 그런 푸른수염의 육신분만 아니라 영혼까지 결박해버렸다.
이미 오늘치의 수호를 사용한 솔라리의 목걸이는 무용지물이나 다름없었다.
아니, 설사 사용가능한 상태였다 하더라도 달라질 것은 없었다.
애당초 악마의 눈이 준비한 것은 열 개의 저주가 연속해서 발동하는 형태였으니 말이다.
“저주를 강화한다! 야생신을 완전히 봉하라!”
빌바인이 외치자 수하들 가운데서 다시 다섯이 앞으로 나서며 스스로의 목을 갈랐다.
애당초 인신공양을 위해 준비해온 세뇌된 제물들이었다.
“크아아!”
필사적으로 저주에 맞서 싸우던 푸른수염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인신공양의 제물들이 추가된 순간 저주의 힘이 거의 두 배 가까이 강해졌기 때문이다.
“야생신은 봉인되었다. 이대로 성지를 친다!”
검을 뽑아든 빌바인이 소리치자 수하들이 깃발을 세우며 뿔나팔을 불었다.
악마의 눈 소속이지만 기사단에 가까운 그들이 푸른수염을 지나쳐 성지를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쿠오오!”
무덤의 수호자들이 날개를 펼치며 그런 빌바인의 수하들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애당초 무덤의 수호자들에 대한 대책도 준비도 해온 그들이었다. 열 명씩 조를 이루어 무덤의 수호자를 상대하니, 마치 몰이사냥에 나선 사냥꾼과 사냥감과 같은 상황이 만들어졌다.
“하나씩 숨통을 끊는다.”
검 위에 칠흑의 검기를 두른 빌바인은 섣불리 성지로 향하는 대신 무덤의 수호자를 향해 나아갔다.
열 명의 수하들이 무덤의 수호자의 발을 묶으면 빌바인 자신이 숨통을 끊는 단순하면서도 확실한 사냥법이었다.
“크아아······.”
첫 번째 무덤의 수호자가 맥없이 목숨을 잃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코델리아는 이를 악물며 생각했다.
이미 상황이 어그러졌다. 여기서는 자신이라도 나서서 무덤의 수호자들을 지켜야 했다. 녀석들과 협력해 빌바인과 그 수하들을 막는 것이 최선이었다.
“가자.”
심호흡을 한 코델리아는 그대로 지면을 박찼다.
그리고 그 순간 등 뒤에서 굉음이 터져나왔다.
콰아아-!
신전이었다.
솔라리의 신전 최상단에는 태양을 맞이하기 위해 뻥 뚫린 공간이 있었는데, 그곳으로부터 찬란한 황금색 빛기둥이 솟구쳐 올랐다.
코델리아는 재빨리 돌아서서 빛기둥을 보았고, 환호했다. 유더가 무엇을 한 것인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태양 만세!”
코델리아가 두 손을 높이 들어 태양을 경배하는 자세를 취했다.
딱히 의미가 있는 행동은 아니었지만, 마치 그에 호응하기라도 하듯 빛기둥이 반응을 보였다.
창-!
마치 유리가 깨지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빛기둥이 수백, 수천 조각으로 갈라졌다. 정지한 시간 속에 있는 것처럼 조각 하나하나가 부서진 상태 그대로 허공에 머무는가 싶더니 이내 강렬한 빛이 온 세상을 뒤덮었다.
솔라리의 땅.
솔라리의 힘을 주변 일대에 퍼트려 일시적으로 솔라리의 성지를 만들어내는 술식.
그리고 그 효과는 실로 굉장했다.
“오오오오!”
무덤의 수호자들의 덩치가 커졌다. 눈에서는 황금빛 안광이 일었고, 전신에 두른 성스러운 힘은 거의 두 배 가까이 강해졌다.
뿐만이 아니었다. 푸른수염을 짓누르고 있던 벨리알의 저주 역시 그 기세가 단번에 꺾여나갔다. 빌바인과 그 수하들의 힘 역시 약화되었다.
“역시 우리집 유더!”
방금 술식으로 인해 성지에 저장되어 있던 솔라리의 힘을 탕진했을 터였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빌바인과 그 수하들을 격퇴하는 것이었다.
활짝 웃은 코델리아는 신전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 유더가 뛰어나오면 함께 빌바인을 향해 돌진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코델리아의 기대와 달리 유더는 뛰어나오지 않았다.
아니, 뛰어나올 수가 없었다.
코델리아는 물론이고 유더조차 생각지 못 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술식이, 술식이 멈추지 않아!’
신전의 중심.
커다란 술식 마법진의 중심에 자리한 유더는 당황한 얼굴로 꼼짝도 하지 못 했다.
술식은 잘못되지 않았다.
신전에 저장된 솔라리의 힘을 탕진하다시피 하여 솔라리의 땅을 발현시키는 것에도 성공했다.
그런데 술식이 멈추지 않았다.
이미 솔라리의 힘을 탕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힘을 끌어모았다.
그리고 유더는 깨달았다.
지금 이 순간 마법진이 끌어당기고 있는 것은 성지에 남은 솔라리의 힘이 아니었다.
용맥의 힘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유더!”
신전 입구에 코델리아가 나타났다. 그녀는 유더를 보았고, 동물적인 직감으로 깨달았다.
“야! 터트리면 안 된다며!”
용맥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마치 코델리아가 일부러 폭주시켰을 때처럼 금방이라도 사달이 벌어질 것 같았다.
그리고 다시 둘은 깨달았다.
유더는 술식 마법진 바로 위에 서 있기에 간파했고, 코델리아는 다시 한 번 동물적인 직감 덕에 알아차렸다.
달랐다.
용맥의 흐름이 정상은 아니었지만 폭주는 아니었다. 폭발 역시 일어나지 않을 터였다.
다른 무언가.
폭발은 아니지만 용맥의 힘을 용솟음치게 하는 무언가.
술식이 아니었다.
술식은 그저 계기일 뿐, 지금 이 순간 용맥을 움직이는 것은 다른 누군가의 의지였다.
콰아아아-!
“유더!”
술식으로부터 다시 황금색 빛기둥이 솟구쳐 올랐다. 유더를 뒤덮는 그것을 본 순간 코델리아는 앞뒤 가리지 않고 술식을 향해 돌진했다. 빛기둥 사이로 몸을 던져 유더를 붙잡으려 했다.
그리고 그랬기에 코델리아도 볼 수 있었다.
본래는 유더만이 보았어야 할 광경을 공유했다.
황금색.
온통 황금으로 빛나는 세상.
“코델리아!”
유더가 급히 코델리아를 자신 쪽으로 끌어당긴 뒤 숨기듯 등 뒤로 보냈다.
얼결에 유더 등 뒤에 서게 된 코델리아는 무어라 말하는 대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더 이상 신전이 아니었다.
실제 공간인지, 아니면 정신적인 공간인지 알 수 없었지만, 눈앞에 펼쳐져 있는 것은 노을이 진 하늘이 아닌 거대한 존재의 눈이었다.
“황금의 용.”
코델리아가 저도 모르게 말한 그때 유더 역시 고개를 들었다.
코델리아의 말이 맞았다.
황금색 비늘로 뒤덮인 거대한 황금의 용이 푸른 안광을 빛내며 자신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황금의 용이다.”
하늘에서부터 땅으로 목소리가 퍼졌다.
거대하고 또 거대한 존재의 목소리에 유더와 코델리아는 자신들의 존재 자체가 작아지는 기분을 느꼈다.
“나는 용맥과 하나 된 존재이니-”
저 높은 곳에 있던 황금의 용의 머리가 유더와 코델리아를 향해 천천히 내려오기 시작했다.
코델리아는 움찔하면서도 마력을 끌어올렸고, 유더는 조금 더 코델리아를 가리기 위해 반걸음 옆으로 움직였다.
“근래 연속된 용맥의 폭발을 경험하였다. 그리고 그 폭발은 너희가 일으킨 것이구나.”
황금의 용의 목소리에는 고저가 없었다. 그렇기에 감정을 읽을 수 없었다.
담담한 사실의 나열에 코델리아는 입술을 깨물며 다시 한 번 움찔했고, 유더는 저 거대한 존재로부터 어떻게 코델리아를 지켜야 할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역시 도망쳐야 하나? 아니, 무리야. 이 공간 자체가 황금의 용의 심상이라면 결코 도망칠 수 없어. 그렇다면 용서를? 야생신들을 구하기 위함이었으니- 혹여 벌을 내린다면 내게 내리라는 식으로-’
유더의 머리가 바쁘게 움직이는 그때 코델리아가 앞으로 나섰다. 무언가 결심한 얼굴로 굳게 닫고 있던 입술을 열었다.
‘잘못했어요. 용서해주세요. 유더는 봐주세요. 전부 제가 한 일이에요.’
그렇게 목소리를 토하려는 순간이었다.
“고맙구나.”
“잘못했- 네?
코델리아가 멍한 얼굴로 눈을 깜박이자 황금의 용이 다시 말했다.
“고맙구나. 너희 덕분에 눈을 뜰 수 있었다.”
이게 무슨 소리인 걸까.
황금의 용이 나타난 것은 자신들을 벌하기 위함이 아니었던 것일까?
“나는 용맥과 하나 된 존재. 그렇기에 용맥과 생사를 같이 하나니. 사악한 무리들이 야생의 땅 서부를 완전히 장악했다. 내가 잠들어 있는 틈을 타 서부의 용맥을 모조리 오염시켜 나를 더욱 더 깊은 잠에 빠져들게 하였다.”
영웅전기2편에서도 황금의 용은 깨어나지 않았다.
악마의 눈이 야생의 땅 서부의 용맥뿐만 아니라 동부의 용맥들까지 모조리 다 오염시켜 황금의 용을 영원한 잠에 빠트린 탓이었다.
하지만 유더와 코델리아가- 정확히는 코델리아가 상황을 바꾸었다.
동부의 오염을 연속해서 막아냈다.
서부의 용맥만이 오염된 상태이기에 아직은 깨어날 가능성이 있던 황금의 용의 의식을 회복시킬 결정적인 행동들을 하였다.
“용맥의 폭주.”
유더가 작게 말했다. 스스로에게 말한 그 순간 깨달았다.
용맥의 폭발이 용맥 전체에 파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 파문은 깊이 잠들어 있던 황금의 용의 의식에까지 닿았다.
“처음에는 작은 파문이었다. 하지만 최근에 있었던 커다란 충격으로 말미암아 나는 눈을 뜰 수 있었다.”
엔디미온 전체를 붕괴시키고도 남을 용맥의 대폭발.
코델리아는 다시 눈을 깜박였다.
유더처럼 완벽하게 이해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번에도 대강의 사정을 직감한 그녀였다.
때문에 약간은 소심한 어조로나마 말하였다.
“어··· 그럼 저 잘한 거예요?”
“잘해주었단다. 너의 행동은 칭찬받아 마땅하다.”
코델리아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요 며칠 이어진 구박에 굽어 있던 등과 어깨가 활짝 펴진 것은 덤이었고 말이다.
“엣헴, 엣헴.”
턱까지 치켜든 코델리아의 시선을 애써 회피한 유더는 황금의 용에게 물었다.
“황금의 용이시여, 그럼 완전히 깨어나신 겁니까?”
“아니, 애석하게도 그렇지 않다. 눈을 뜨긴 했지만, 충격으로 인해 잠시 의식을 회복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니 아이들아, 나의 부탁을 들어다오. 내가 온전히 눈을 뜰 수 있게 도와다오.”
“도와드릴게요!”
코델리아가 바로 외치자 황금의 용의 얼굴에 작게나마 미소가 번졌다.
“고맙구나, 아이야. 그렇다면 나의 이야기를 잘 듣고 실행에 옮겨다오.”
황금의 용이 눈을 한 번 감았다 뜨자 황금빛 하늘 위로 야생의 땅의 지도가 떠올랐고, 그 위에 다시 용맥의 흐름이 그려졌다.
“오염된 서부의 용맥천들을 폭발시켜 사악한 힘을 떨쳐내고 용맥 전체에 파문을 일으켜다오. 그리하면 내가 온전히 눈을 뜰 수 있을 터이니.”
“······네?”
유더는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말인즉, 서부의 용맥들을 모조리 폭파시키라는 것인가?
“와, 그럼 우리 이제 합법인 거야?”
코델리아의 감탄을 애써 외면한 유더는 이성적으로 생각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래, 어차피 오염된 땅이니.’
성지고 나발이고 서쪽의 것들은 모조리 오염되었다. 그렇다면 모조리 터트리는 것 역시 방법이리라.
“사악한 자들이 오염된 용맥천을 지키려 할 것이다. 하지만 굴하지 말고 모두 파괴해버려라.”
“네, 반드시 그럴게요. 약속드려요!”
“그래, 고맙구나.”
어쩐지 선악이 역전된 것 같은- 황금의 용과 코델리아의 훈훈하면서도 훈훈하지 않은 대화사이에서 혼미함을 느끼는 유더였지만 이내 정신을 바짝 차렸다 지금 이 순간 가장 필요한 말을 입에 담았다.
“황금의 용이시여, 명을 따르겠으니 저희에게 명을 수행할 힘을 주소서.”
일이야 어찌되었든 받아낼 수 있을 때 받아낼 수 있는 곳에서 악착같이 받아낸다.
유더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린 코델리아 역시 예를 표하며 말했다.
“가호를 부탁드려요.”
“그리하겠다. 나의 가호가 너희와 함께할 것이니, 모든 야생신들이 너희를 도울 것이다.”
그 순간이었다.
유더와 코델리아의 왼쪽 손등에 타는 듯한 뜨거움이 일더니 황금색 용의 문장이 새겨졌다.
‘헉! 용의 문장?!’
소유자에게 용의 힘을 부여하는 문장이었다.
영웅전기2의 수많은 문장들 가운데서도 특히 레어도가 높은 녀석으로, 소유자는 인간의 몸으로 용의 힘을 사용할 수 있었다.
‘전사는 용투기를, 마법사는 용마력을.’
특히 마법사의 경우 문장의 힘을 계속 키워나가면 용들의 마법인 용언 마법까지 사용할 수 있었다.
“우와앙.”
마치 다이아몬드 반지를 본 것처럼 코델리아의 얼굴이 풀어졌다. 그리고 사실 유더도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아이들아, 부탁한다. 야생의 땅을- 야생과 함께 살아가는 모든 이들을-”
마지막 당부를 끝으로 황금의 용이 눈을 감았다.
유더와 코델리아 역시 뒤를 따르듯 눈을 감았고,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신전 안이었다.
“마법진이 멈췄어.”
유더가 말한 그때 코델리아는 다시 손등을 보았다. 티 하나 없이 하얀 손이었지만 의식을 집중하자 황금색 용의 문장이 떠올랐다.
“진짜야. 거기다 면허까지 얻었어.”
“면허?”
“응, 폭파 면허.”
다른 누구도 아닌 야생신들의 왕이자 야생의 땅의 진정한 주인인 황금의 용의 허락이었다.
이제 누구도 코델리아의 행보에 태클을 걸지 못 하리라.
“아, 안 돼. 살인 면허는 안 돼.”
“되거든? 그리고 폭파 면허야, 폭파.”
베-하고 혀까지 내민 코델리아는 배시시 웃더니 가볍게 주먹을 쥐었다 폈다.
재보진 않았지만, 황금의 용을 만나는 그 순간동안은 사실상 시간이 흐르지 않았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아무튼 이제 갈까?”
빌바인을 때려잡고 푸른수염을 구하러.
“합법 해결사들의 행차시다.”
송곳니를 빛내며 씩 웃은 코델리아가 앞으로 나섰고, 유더는 바로 따라 걷는 대신 잠시 하늘을 우러렀다.
‘황금의 용이시여.’
어쩌면 살짝 실수하신 걸지도 모릅니다.
‘아니, 어쩌면 살짝이 아닐지도.’
쓰게 웃은 유더는 시선을 내려 정면을 보았다.
벌써 신전 입구를 지나고 있는 코델리아의 뒷모습을 따라잡고자 지면을 박차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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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31장 - 성지 #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