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32장 - 합법적 수호자 >
제32장 - 합법적 수호자
적의 숫자는 변하지 않았다.
애당초 인신공양을 위해 데려왔던 제물들을 제외한 전투 병력의 숫자는 그대로였다.
하지만 유더의 얼굴에는 처음 적을 맞이했을 때와 같은 우려는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코델리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우리 망치와 모루 하자!”
유더가 자신을 따라잡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코델리아가 소리쳤다.
망치와 모루.
유더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내가 모루?”
“내가 망치!”
결정되었다.
코델리아가 생각한 것은 일반적인 망치와 모루 전술과는 다소 괴리가 있었지만 눈빛만으로도 대화가 통화는 마당에 말까지 섞었으니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하지 않았다.
“부탁할게!”
“나도!”
쿵!
유더가 거칠게 땅을 박차 추진력을 더했다. 단숨에 속도를 두 배 이상 증폭시켜 빛살처럼 코델리아의 곁을 떠남과 동시에 거친 선풍을 일으켰다.
쾅!
흑풍도래.
바람을 찢으며 돌진한 유더는 전장 전체를 시야에 담았다.
솔라리의 땅 위에서 포효하는 무덤의 수호자들의 위치를 파악했고, 저 너머에서 꿈틀꿈틀 몸을 일으켜 세우는 푸른수염을 보았다.
그리고 그뿐만이 아니었다.
적의 위치.
적의 숫자.
유더 자신이 모루가 되어 붙잡아야만 하는 빌바인의 위치!
쿵!
다시 한 번 가속했다.
굉음과 질풍에 놀란 적들이 모두 다 유더를 돌아보았고, 개중에는 빌바인도 있었다.
‘중급 마인.’
그 중에서도 강한 축에 속하는 네임드.
하지만 그것이 어떻단 말인가.
“하!”
유더가 몸을 회전시켰다.
선풍과 질풍이 소용돌이를 이루어 회전하니 주변의 눈이 날리며 순간적으로 적들의 시야를 차단했다.
그리고 유더는 보았다. 반사적으로 방패를 들어 방어 자세를 취하는 빌바인의 모습에 만족하며 전신의 힘을 발끝에 집중시켰다.
흑룡십자격- 진
흑룡십자격에 용의 문장을 더했다.
그로 말미암아 흑룡의 기운이 강해졌다.
허공에서 몸을 회전시킨 유더의 뒤차기가 빌바인의 방패 위에 작렬하였고, 롤링 소배트라기보다는 밀어차기에 가까운 타격이 칠흑의 십자가와 함께 무시무시한 힘을 발했다.
콰가가가가-!
성벽에 비견되는 빌바인의 방어는 굳건했다.
무지막지한 타격에도 불구하고 방어가 깨지지 않았다.
하지만 뒤로 크게 밀려나는 것만은 어찌할 수 없었다.
빌바인은 이십여 미터 이상을 밀려났고, 순간적으로 수하들로부터 완전히 독립되었다.
그리고 다시 유더가 돌진했다.
선풍과 질풍을 더욱 크게 일으켜 마치 용권풍처럼 만들어 자신과 빌바인을 에워싸게 했다.
흩날리는 눈발이 다시 한 번 모두의 시선으로부터 유더와 빌바인을 차단하였다.
“흑기사 빌바인.”
강한 남자였다.
일대일 대결이라면 악마의 눈의 중급 마인들 중에서도 당해낼 자가 거의 없는 독보적인 존재였다.
“하지만.”
유더는 빌바인의 레벨을 알고 있었다.
그의 전투패턴 역시 알고 있었고, 모든 특성과 약점 역시 꿰고 있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상대조차 할 수 없었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고운눈바람의 땅에서 자라쿨과 싸웠을 때 비해 레벨을 거의 20가까이 올린 유더였다.
육체 능력만 해도 비교가 되지 않을 만치 강해졌는데 여기에 구천구문 역시 새로 삼문을 개방하였다.
‘거기에 다시 능력치 보너스들.’
평범한 55레벨 플레이어블 캐릭터들보다 훨씬 더 강하다.
단순 계산으로 하면 60레벨 이상의 능력치.
‘빌바인의 레벨은 62’
참으로 높다.
하지만 상대할 수 있다.
충분히 모루가 되어 놈을 잡아두는 것이 가능했다.
“바이엘 백작가의 유더 바이엘이다. 흑기사 빌바인, 그대에게 결투를 신청한다.”
유더가 돌연 예를 갖춰 말하자 흠칫한 빌바인이었지만 이내 기수식을 취하며 응답했다.
“흑기사 빌바인, 그대의 도전을 받아들이겠다.”
몰락한 기사 가문 출신인 빌바인은 악마 추종자가 된 지금도 가문에 대한 자긍심을 가지고 있었다.
유더가 예를 갖춰 결투를 청하니 약간이지만 반가운 기색까지 보이는 것이 그 증거였다.
‘좋아, 몇 초 끌었고.’
여기에 좀 더 예의를 갖추고 몇 마디 말을 주고받으면 20초는 너끈했다.
“흑기사의 높은 위명은 예전부터 듣고 있었다. 오늘 이렇게 상대하게 되어 영광이다.”
“바이엘 백작가의 이름은 나도 알고 있었다. 명가의 후예와 검을 맞대게 되어 나 또한 영광이다.”
아아, 빌바인. 아아, 빌바인.
유더는 주먹을 말아 쥐며 다시 말을 던졌고, 빌바인은 이번에도 성실히 답했다.
눈발과 함께 회전하는 돌개바람은 시야뿐만 아니라 여간한 소리까지 차단해주었고, 그렇기에 두 사람은 독립된 공간에 자리한 것처럼 서로에게만 집중할 수 있었다.
“간다.”
“오라, 명가의 후예여.”
마지막까지 근엄하게 말하는 빌바인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린 유더는 바로 지면을 박차 올랐다.
비록 솔라리의 땅으로 인해 약화된 상태라고는 하나 상대는 흑기사 빌바인.
순간의 방심이 죽음을 부를 수 있는 검호였다.
츠팟!
빌바인의 검이 유더의 가슴에 쇄도했다. 단순한 찌르기가 아닌, 유더의 진로를 읽고 도달할 수밖에 없는 위치에 검을 찌른- 그야말로 피할 수 없는 일격이었다.
그렇기에 유더는 피하지 않았다.
애당초 빌바인이 이렇게 나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수갑을 두른 팔로 빌바인의 검격을 차단했다. 팔등으로 부드럽게 밀어내 찌르기의 궤적을 변경시켰다.
팍!
유더가 빌바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순간 빌바인의 방패가 마치 벽처럼 밀려왔지만 유더는 이번에도 당황하지 않았다. 방패를 이용한 타격은 빌바인의 특기 가운데 하나였으니 말이다.
츠확!
바람이 일었다.
흑기사 빌바인의 속성은 땅이었고, 때문에 유더는 가지고 있는 장비를 총 동원해 바람 속성으로 세팅을 마친 상태였다.
애당초 돌개바람이 평소 이상으로 강하게 유지되고 있는 것 역시 그 때문이었고 말이다.
콰가가-!
바람이 쉴드 어택의 기세를 조금이나마 꺾었다. 유더는 다시 한 번 몸을 회전시켜 빌바인의 품에 완전히 파고듬과 동시에 등으로 빌바인의 가슴을 강하게 밀쳐냈다.
쿵!
팔극권의 철산고를 연상케 하는 공격에 빌바인이 밀려났지만 짧았다. 마치 뿌리를 내리듯 금방 자세를 고친 빌바인이 재차 유더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아니- 휘두르고자 했다.
탁!
막혔다.
검이 제대로 된 궤적을 그리기 전에 유더의 팔이 빌바인의 팔을 쳐냈다.
공격을 사전에 차단한 직후 다시 몸을 회전시키며 비어있던 손으로 빌바인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탕!
지근거리 타격에 빌바인의 갑옷이 마치 종처럼 울렸다.
“큭!”
빌바인이 뒷걸음친 순간 유더는 숨을 토했다. 이를 악물고 뇌성박을 펼쳤다.
콰가강!
벼락같은 칠연격이 빌바인에게 쏟아졌지만 빌바인도 호락호락한 자가 아니었다.
방패를 이용해 유더의 공격을 모조리 다 막아냈다.
탕탕탕!
쇠가 울렸고, 빌바인이 방패에 두른 대지의 기운에 유더가 타격을 입었다.
풍속성으로 풀세팅을 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공격한 유더가 오히려 더 큰 피해를 입을 뻔 했다.
스칵-!
바로 그 순간이었다.
방어 일변도였던 빌바인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휘두른 검격이 유더의 목을 향해 날아들었다.
유더는 이 공격을 알고 있었다. 미리 마음의 준비까지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야말로 간신히 피할 수 있었다.
자세를 바짝 낮춰 검격을 피한 유더의 머리칼 몇 가닥이 잘려 허공을 날았고, 빌바인의 무릎이 유더의 얼굴을 향해 쇄도했다.
탁!
유더가 손바닥으로 빌바인의 무릎을 감쌌다. 그대로 빌바인의 밀어치는 힘에 몸을 맡겨 뒤로 크게 도약했다.
쿵!
유더를 밀어낸 발로 빌바인이 땅을 밟는 소리였다.
단번에 자세를 굳힌 그는 유더를 향해 연속해서 검기를 내뿜었다.
스칵칵!
피할 수 있으면 피해보라는 듯 세 가닥의 검기가 서로 다른 궤적을 그렸다.
때문에 유더는 피하지 않았다. 흑룡십자격으로 검기 그 자체를 상쇄시켰다.
콰가가!
십자가와 검기가 공멸했다.
너무 급히 힘을 끌어낸 유더는 신음을 삼키며 착지했고, 빌바인은 이미 지면을 박찼다.
유더를 몰아붙이겠다는 듯 단번에 거리를 좁히며 검을 휘둘렀다.
블랙 라이트닝.
흑기사 빌바인의 필살기라 할 수 있을 일격.
검은 궤적을 그리며 쏟아지는 벼락같은 일격에 유더는 눈을 빛냈다.
마치 지금 순간을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츠콰악!
빌바인의 검이 땅을 찍었다. 뻗어나간 검기에 돌개바람이 찢어졌고, 펑하는 소리와 함께 돌개바람 전체가 분쇄되었다.
쏴아아-
돌개바람을 타고 올랐던 눈들이 하늘에서 쏟아져 내렸다. 그리고 그 사이에 유더가 섞여 있었다.
요정의 발걸음으로 블랙 라이트닝을 피한 유더는 그대로 미련 없이 빌바인과의 거리를 벌렸다.
‘번개는 두 번 치니까.’
블랙 라이트닝은 단발기가 아니었다. 검격을 피해 접근하면 방패를 쥔 손에 집중되어 있던 두 번째 번개를 얻어맞게 되어 있었다.
더욱이 이제는 시간이 되었으니까.
“코델리아.”
부서진 돌개바람 너머 보이는 광경에 유더는 미소지었다.
반면 빌바인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검붉은 머리칼의 마녀가 빌바인의 수하들을 문자 그대로 박살내고 있었다.
무덤의 수호자들과 함께 짐승처럼 날뛰는 그녀는 자연재해 그 자체였다.
더블 캐스팅.
주문의 메아리.
주문 하나로 네 개의 주문을 만들 수 있게 된 그녀였다.
다연발 매직 미사일을 한 번 시전 할 때마다 매직 미사일 수십 발이 생겨났고, 그것들 모두가 폭풍처럼 주변을 휩쓸었다.
“인간재해.”
영웅전기2편에서 코델리아가 가지고 있던 별명.
그렇지 않아도 솔라리의 땅의 영향으로 약화된 빌바인의 수하들이었다.
여기에 무덤의 수호자들이 신성한 아우라를 발하고, 뒤늦게나마 몸을 일으킨 푸른수염이 합류하니 놈들로서는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이걸 노린 것이냐?”
빌바인이 배신이라도 당한 사람처럼 유더를 노려보았고, 유더는 미소 지었다.
애당초 이쪽의 전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 한 상태에서 일대일 결투 놀이에 빠진 빌바인의 잘못인 것을 누굴 탓하겠는가.
그리고 유더가 미소 지은 이유는 하나 더 있었다.
“비스트 모드네?”
유더는 빌바인이 아닌 코델리아에게 말했다.
아직 빌바인의 수하들이 제법 남아 있었지만 무덤의 수호자들과 푸른수염에게 맡긴 코델리아는 유더와 빌바인의 곁으로 다가왔다.
유더의 말을 못들은 척 하며 빌바인에게 말했다.
“망치가 왔으니 2라운드 시작해 볼까?”
모루와 망치.
흠칫한 빌바인은 다시 유더를 보며 소리쳤다.
“비겁하다! 일대일 대결에서 협공을 할 생각인 것이냐!”
“응.”
“어.”
너무나 상쾌한 두 사람의 대답에 빌바인조차 순간 멍해진 그때 코델리아가 다시 한 걸음을 내디디며 말했다.
“아니, 애당초 수하들 잔뜩 끌고 덤빈 니가 더 비겁하잖아.”
비율만 따지면 사십 대 오였으니까.
코델리아의 말에 빌바인이 다시 흠칫하며 이를 악물자 코델리아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그래도 염치를 아는 빌바인을 위해 입을 열어 말했다.
“흑기사 빌바인, 황금용의 대행자로서 상대해주겠다.”
이런 식의 선언을 좋아하는 빌바인이었으니까.
하지만 유더는 코델리아의 속마음을 간파했다.
‘마음에 들었구나.’
황금의 용에게 인정받은 폭파범- 아니, 대행자라는 사실이.
하지만 지적하면 얼굴이 빨개질 터였기에 유더는 속으로만 웃은 뒤 자세를 갖췄다. 코델리아와 호흡을 맞춰 발걸음을 내디뎠다.
“이익! 오라!”
빌바인이 발악하듯 외쳤고, 유더와 코델리아는 사양하지 않았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빌바인을 향해 돌진했다.
&
“승리!”
브이 자를 그리며 활짝 웃는 코델리아의 가슴께에 빛의 고리 두 개가 연달아 떠올랐다.
전투의 여파로 머리는 산발이 되었고, 옷 여기저기가 찢어졌지만 활짝 웃는 얼굴에서는 빛이 나는 것만 같았다.
유더는 짝짝짝 박수를 쳐준 뒤 재가 되어 흩어지는 빌바인의 곁으로 다가갔다.
악마화를 했으면 조금 더 상대하기 곤란했을 터인데, 역시 원작처럼 죽으면 죽었지 끝까지 인간인 상태로 싸운 그를 위해 짧게나마 묵념을 해주었다.
“잘 쓸게.”
빌바인이 남긴 갑옷과 방패.
중갑을 입지 않는 유더였지만 챙겨 가면 어디든 쓸모가 있을 터였다.
루카스를 준다든가, 그냥 팔아버린다든가.
“저쪽도 다 끝난 것 같아.”
코델리아의 말마따나 빌바인의 수하들도 사실상 전멸한 상태였다.
개중 몇이 도주를 시도했지만 분기탱천한 얼굴로 하늘을 날아 쫓아가는 푸른수염을 보니 놓칠 일은 없어 보였다.
“민망해하는 거 같지?”
“민망하겠지.”
코델리아의 만류를 무시하고 돌진했다가 죽을 뻔 했으니까.
여기에 다시 두 사람 덕분에 목숨을 구하고 치욕까지 씻을 수 있었으니, 염치가 있는 푸른수염으로서는 민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헤헤, 그럼 더 많이 뜯어낼 수 있겠다.”
“···어?”
“아니, 지은 죄가 있으니까 말 잘 듣겠지. 안 그래? 일단 솔라리의 목걸이는 무조건 챙길 거야.”
“그, 그래.”
코델리아가 천사같은 얼굴로 배시시 웃으며 말하자 유더는 일단 동의하기는 했지만 어쩐지 모를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뭘까.
이 새하얀 눈밭 위를 마구 더럽힌 것 같은 죄악감은.
“표정이 왜 그래? 어디 아파? 칼이라도 맞았어?”
“아니, 그냥··· 순수했던 옛날이 생각나서.”
거짓말도 잘 못해서 국어책 읽기를 하던 그 옛날의 코델리아는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아니, 물론 내가 더럽힌 거긴 하지만.’
그렇게 유더가 홀로 죄악감에 씨름할 때 고개만 몇 번 갸웃한 코델리아는 다시 활짝 웃으며 레나가 있는 신전 쪽을 돌아보았다.
&
“그게 무슨 말이에요? 늦어진다고요?”
“이번 싸움으로 성지의 힘을 너무 많이 소모하고 말았다. 자연 더러움을 씻어내기 위한 힘 역시 부족하게 되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격앙된 코델리아의 목소리에 살짝 기가 눌린 듯 푸른수염이 난처한 얼굴로 답했다.
성지- 정확히는 솔라리의 힘을 너무 써서 치유에 쓸 힘이 부족하다.
그러니 솔라리의 힘이 회복되는 시간과 느려진 치유 속도 등을 고려하면 적어도 한 달 가까이 시간이 필요하다.
‘역시 그런가.’
코델리아와 달리 작금의 상황을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던 유더였다.
애당초 솔라리의 힘을 탕진한 장본인이었으니 말이다.
“코델리아, 어쩔 수 없어. 그래도 회복이 가능하긴 하니까 맡기고 떠날 수밖에.”
“우그으······.”
유더와 코델리아가 야생의 땅에 온 것은 레나를 구하기 위함만이 아니었다.
위대한폭풍 부족과 힘을 합쳐 동부 연합을 구축, 서부를 장악한 성난뿔소 부족과 싸워야 했으니 이제 슬슬 위대한폭풍 부족의 마을로 돌아갈 때였다.
“으으··· 하아··· 어쩔 수 없지. 푸른수염 아저씨, 레나를 잘 부탁할게요. 알았죠?”
“알았다.”
푸른수염이 코델리아의 허리에 걸린 솔라리의 목걸이를 보며 말했다.
거대한 푸른수염이 차고 있던 것이라 코델리아에게는 너무 커서 목 대신 허리에 건 것이었는데, 어찌되었든 이제부터는 푸른수염 자신의 것이 아닌, 코델리아의 소유물이었다.
그리고 사실 그것만이 아니었다.
유더와 코델리아의 몸 곳곳에는 성지에 오랜 세월 보관해온 솔라리의 유물들이 몇 개씩 걸려 있었다.
푸른수염 자신이 내준 것이긴 했지만, 내어줄만한 이유가 분명 있었지만 탈탈 털린 기분이 드는 것만은 어쩔 수가 없었다.
‘목숨도 구해주고, 성지도 지켜주고, 거기다 두 사람은 황금의 용께서 인정하신 야생의 땅의 수호자이니······.’
지원을 아끼지 말라는 그분의 말씀을 어찌 거역할 것인가.
푸른수염이 남몰래 눈물을 훔친 그때 코델리아는 카플란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카플란 경은 여기 남으신다고요?”
“예, 성지를 연구하며 레나님이 깨어나시기를 기다릴 생각입니다.”
씩씩한 카플란의 말에 코델리아는 빙긋 미소 짓더니 그를 한 번 꼭 끌어안아준 뒤 말했다.
“카플란 경 덕분에 엔디미온에서의 사건을 해결할 수 있었어요. 고마워요. 카플란 경은 저와 유더에게는 행운의 천사나 다름없어요.”
카플란 덕분에 와일드 페어리들을 만날 수 있었고, 엔디미온의 숨은 길들 역시 찾을 수 있었다. 마지막에 용맥이 있다는 사실 역시 카플란이 하이 엘프들의 언어를 해석해 준 덕분에 알게 된 정보였고 말이다.
“코델리아 양······.”
카플란의 얼굴이 순식간에 눈물 범벅이 되었다.
계속 함께해준 것만으로도 감사한데 행운의 천사라니.
지금까지 살면서 한 번도 듣지 못 한, 들을 일도 없을 거라 생각한 그런 말이지 않은가.
“다시 만날 날을 기대할게요.”
“예, 꼭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카플란이 눈물을 훔치며 활짝 웃자 코델리아는 마주 웃어준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 너도.’
뒤에서 어쩐 일인지 숫자를 세고 있던 유더에게 코델리아가 눈짓하자 유더 역시 입을 열어 말했다.
“카플란 경, 잊지 마세요. 카플란 경은 신이 아니라는 것을. 그저 성실하고 믿음직한 탐험가이자 고고학자라는 사실을요.”
“예, 잊지 않겠습니다. 유더 군.”
카플란과 악수를 나눈 유더는 마지막으로 푸른수염과 인사를 나눈 뒤 코델리아와 함께 신전을 나섰다.
“이제 바로 돌아가는 거야?”
“그래야겠지. 페어리 퀸을 뵙지 못하는 건 조금 아쉽긴 하지만 엔디미온을 거쳐서 가면 시간이 걸리니까 여기서 바로 질러서 가자.”
칼날부리 협곡을 지나지 않고 일직선으로.
유더가 지도를 펼치는 대신 바닥에 그림을 그리며 알려주자 코델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바로 출발하자.”
“그래.”
“그런데 유더야.”
“어?”
“뭐 좋은 일 있어? 평소보다 더 표정이 밝은 거 같은데?”
“이겼으니까?”
“흠, 하긴. 이겼으니까.”
배시시 웃은 코델리아는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고, 유더는 그런 코델리아와 어깨를 나란히 한 채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리고 같은 시각.
“여기서 하루만 더 가면 칼날부리 협곡이 나올 겁니다. 고운눈의 말대로라면 유더와 코델리아가 그곳에 있을 거고요.”
이미 알고 있던 내용이지만 게일의 말이었기에 일단 경청한 아델리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 정말이지. 이러다 야생의 땅을 전부 다 돌겠어요.”
“그러게 말입니다.”
흐레스벨그 백작령에서 얼추 끝날 줄 알았던 여행이 국경을 넘어 여기까지 이어질 줄이야.
더욱이 점입가경으로 코델리아의 위치를 대강이나마 추적할 수 있는 유일한 마법기인 체이스 백작의 반지 역시 야생의 땅에 들어온 이후 망가진 터라 추적이 더 어려워진 상태였다.
‘뭐··· 그래도 다행히 행선지들이 뚜렷하긴 하지만.’
넓긴 해도 사람이 사는 땅이 적은 야생의 땅인데다가 국경 너머라 그런지 코델리아도 딱히 행선지를 숨기거나 하지는 않았다.
‘하아, 아무튼 만나면 엉덩이를 때려줘야지.’
물론 착하고 순한 코델리아가 아니라 유더의 엉덩이를 말이다.
“아델리아 양.”
“네?! 아, 네. 게일 공자.”
아델리아가 깜짝 놀라 답하자 고개를 갸웃한 게일이었지만 이내 다시 진지한 어조로 물었다.
“휴가는 괜찮은 건가요? 이미 처음 일정을 한참이나 넘어섰는데······.”
“뭐, 어쩔 수 없죠. 일이 이렇게 되었는 걸요.”
어깨를 으쓱인 아델리아는 쓰게 웃었고, 게일은 성실한 그 자체인 얼굴로 말했다.
“이번 일은 이미 단순한 가출 사건을 넘어섰습니다. 북부의 방위와 크게 연관된 대사건이 되었으니, 제가 왕립마법병단에 바이엘 백작가의 이름으로 탄원··· 아니, 진술서를 써서 보내겠습니다.”
“음··· 감사해요.”
평소라면, 그러니까 부관이 지금 같은 말을 하면 오버하지 말라고 했을 아델리아였지만 게일에게는 다른 말이 나왔다.
‘그, 뭐랄까. 단순히 성실한 걸 넘어서······.’
진정성이 있다고 해야 할까?
믿고 기댈 수 있는 안정감이 있는 남자.
“아델리아 양, 힘드시겠지만 조금만 더 가면 몸을 쉴만한 곳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슬슬 다시 출발하도록 하죠.”
자리에서 먼저 일어난 게일은 아델리아에게 정중히 손을 내밀었고, 아델리아는 괜스레 헛기침을 토한 뒤 그 손을 잡고 일어섰다.
“갈까요?”
“네, 출발해요. 게일 공자.”
서로를 보며 미소지은 게일과 아델리아 역시 어깨를 나란히 한 채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유더와 게일- 코델리아와 아델리아의 경로가 완전히 어긋나고 말았다.
그리고 다시 한 사람.
“큰일이군.”
어느새 네 개로 늘어난 가방을 돌아본 체이스 백작은 예산을 점검하더니 이내 마음을 굳혔다.
서둘러 붉은 여명 탑에 보낼 서신을 작성하였다.
‘공간 확장 가방을 보내도록.’
여행이 길어지다 보니 역시 그냥 가방만으로는 부족했으니까.
두 딸과 예비 사위 하나, 사위가 될지 모를 누군가가 국경 너머 야생의 땅에 있다는 사실을 아직은 알지 못한 그는 북부 최북단의 도시- 랑케부스트에 자리하고 있었다.
&
< 제32장 - 합법적 수호자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