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34장 - 크로스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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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일 바이엘과 아델리아 체이스.
영웅전기2편에서 두 사람의 역할은 그리 크지 않았다.
‘게일과 아델리아 모두 전사하니까.’
유더 루트든 코델리아 루트든 두 사람의 운명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게일은 야만족의 북부 대침공 이벤트 때 전사했고, 아델리아는 그로부터 좀 더 나중에 일어나는 ‘세일룬 왕국 수도 궤멸 사건’에 휘말려 목숨을 잃었다.
그런 두 사람.
‘그래서 사실 잘 몰라.’
원작에서 두 사람을 마주할 기회가 별로 없었으니까.
게일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사람 좋고 실력 좋은, 유더와 나이차가 많이 나는 형- 정도가 다였고, 아델리아도 동생인 코델리아를 끔찍이 아끼는 엄마 같은 언니라는 것 외에는 알려진 바가 딱히 없었다.
‘물론 작중에 나온 여러 가지 정보를 종합해 대충은 인물상을 구축할 수 있었지만.’
그렇다 해도 절대적인 정보량이 너무 적은 두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라.’
유더와 코델리아는 어느 날 갑자기 유더와 코델리아가 된 것이- 두 사람의 인생을 아웃복서009와 노란폭풍이 빼앗은 것이 아니었다.
유더와 코델리아로 다시 태어나 십칠 년의 세월을 보내다 전생의 기억을 각성한 것이었다.
때문에 유더는 게일에 대해 잘 알았고, 코델리아는 아델리아에 대해 잘 알았다.
‘우리 형.’
더 이상 단순한 NPC가 아닌 진짜 혈육.
‘착하고 성실하고 믿음직하지만 사실 여린 구석이 있는 사람.’
애당초 명가의 장남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결혼을 하지 않은 것에는 한 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 한 가지 이유.
게일이 스무살 무렵에 겪은 하나의 사건.
유더는 생각을 멈추고 시선을 살짝 옆으로 돌렸다.
저 멀리서 이쪽을 향해 보무도 당당히 걸어오고 있는 여걸이 보였다.
‘아델리아 체이스.’
왕립마법병단 사상 최연소 단장이라는 타이틀을 보유한 마법의 천재.
유더로 보낸 17년이 있지만 그녀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애당초 코델리아와도 전생을 각성하기 전에는 데면데면한 사이였던 유더였으니까.
왕도에 가 있는 코델리아의 언니와는 사실상 교류가 없다시피 했다.
‘그래도 뭔가··· 이유가 있겠지?’
코델리아가 이렇게까지 경계하며 두려워하는 데에는.
“후우, 후우, 할 수 있어. 할 수 있어. 지킨다. 지키는 거야.”
코델리아는 마치 주문을 외우듯 작은 목소리로 같은 말을 반복했다.
나름대로 각오를 다지는 것 같았다.
‘귀여워라.’
다른 누구도 아닌 유더 자신을 지키겠다며 노력하는 모습이니 어찌 귀엽지 않겠는가.
“좋아, 좋아, 좋아.”
다시 훅훅훅 숨을 토한 코델리아는 슬쩍 한걸음 나서더니 유더를 가리듯 섰다. 평소 유더가 코델리아를 보호하기 위해 자주 취하는 자세였는데, 이번에는 정반대인 셈이었다.
물론 차이는 있었다.
각성한 초기에는 유더보다 오히려 코델리아가 더 컸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불과 몇 달 사이에 완전히 역전되어서 이제는 제법 덩치 차이가 나는 유더와 코델리아였으니 말이다.
코델리아의 작고 가냘픈 몸으로 유더를 온전히 가리는 것은 무리였지만, 그래도 최대한 가슴을 펴고 두 팔을 벌려 유더를 가린 코델리아는 마지막으로 숨을 크게 삼켰다.
나름대로의 차분함을 유지하며 정면을 주시하였다.
그리고 그런 코델리아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던 유더는 순간 흠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아델리아.’
거리가 이제는 제법 좁혀져 서로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체이스 백작을 닮아 붉은 머리인 코델리아와 달리 어머니의 금발을 물려받은 아델리아.
태양을 녹여 만든 것 같은 밝고 선명한 황금빛 머리칼 사이에 드러난 하얀 얼굴은 코델리아를 닮아 아름다웠지만 눈이, 눈빛이 장난 아니게 매서웠다.
고고고고고고고고고-
기의 압박이라고 해야 할까.
환청처럼 들려오는 효과음 속에서 유더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저도 모르게 꽉 쥔 주먹 사이로 땀방울이 흘러나왔다.
긴장.
마주하는 이로 하여금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존재.
엔디미온에서 네임드 악마 반다이젤을 마주했을 때의 기분이 이러했을까.
어째서 코델리아가 그토록 긴장했는지 이제는 알 수 있었다.
“마침내.”
아델리아가 말했다.
그녀의 하얀 얼굴에 아름다우면서도 무시무시한 미소가 꽃처럼 피었다.
유더 바이엘.
착하고 귀엽고 깜직하고 사랑스러우며 순진한 코델리아를 감언이설로 속여 온갖 만행을 저지르는데 그치지 않고 그릇된 선택까지 하게 만든 악의 결정체!
‘마침내!’
마주하였다.
드디어 그간의 울분을 쏟아부을 순간이 온 것이었다.
“너!”
아델리아는 일단 목소리를 높였다. 손을 들어 유더를 가리켰고, 그대로 말을 쏟아내려 했다.
“우리 착하고 귀엽고 깜찍하고 사랑스럽고 순진한 코델리아를 속여서 유괴를······.”
거기까지였다.
아델리아는 저도 모르게 말꼬리를 흐렸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게일의 시선 때문이었다.
그냥 시선.
딱히 뭐 노려보거나 하지는 않은, 그냥 시선.
하지만 아델리아는 저도 모르게 주춤했다. 본래 하려던 말을 그대로 내뱉을 수 없었다.
“아니, 사랑의 도피를······.”
도피.
아닌데. 본래 하려던 말은 이게 아닌데.
하지만 아델리아는 미간을 좁히며 잠시 괴로워하더니 다시 말을 바꾸었다.
“밀월여행! 아무튼 밀월여행을 나서다니!”
이미 엉망진창이 된 말이었다.
‘으그윽, 왜 이러지?’
왜 본래 하려던 말을 할 수가 없지?
아니, 물론 이러나저러나 유더와 코델리아는 약혼 관계였고, 바이엘 가문은 체이스 가문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명가였으니 그냥 무턱대고 막말을 뱉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역시 그것보다는 게일의 존재가 컸다.
게일이 신경쓰여서 너무 모진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아닌데, 이건 뭔가 아닌데.’
아델리아가 혼란 속에서 끙끙 앓는 소리를 내는 그때, 유더와 코델리아는 미심쩍은 눈으로 아델리아를 바라보았다.
‘왜 저러지?’
‘뭔가, 뭔가 평소의 언니랑 달라.’
왜일까.
왜 저러는 것일까.
“이이익! 아무튼! 유더 바이엘!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잘 알고 있겠지?!”
타협의 타협을 거쳐 대사를 내뱉다보니 뭔가 생각처럼 강한 말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더욱이 지옥의 악마를 연상시켰던 무시무시한 아우라와 박력 역시 사라져 노성을 토한다기 보다는 약간이지만 떼를 쓴다는 느낌도 들었고 말이다.
하지만 코델리아에게는 조금 다르게 보인 모양이었다.
이러나저러나 아델리아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그녀는 순간 움찔하더니 두 팔을 옆으로 크게 벌리며 소리쳤다.
“유, 유더 잘못이 아니야!”
“코델리아?!”
“정말이야! 딱히 내가 속거나 한 게 아니라··· 가, 같이 의논하고 한 거야!”
무엇을?
밀월여행을!
코델리아의 외침에 아델리아는 흠칫하더니 이내 다시 한 걸음을 내디디며 소리쳤다.
“그럼 그 편지는! 유더가 너무너무 좋아서 죽겠다는, 목숨보다 더 사랑한다는! 그걸 전부 다 네 의사로 적었다는 거니? 유더가 시킨 게 아니라?”
“우그윽.”
코델리아에게 조금 더 이성이 남아 있었다면 그런 말까지는 한 적이 없었다고 반박했겠지만 이미 시작부터 코너에 몰린 그녀였다.
끙끙 앓는 소리를 내더니 에라이 모르겠다는 얼굴이 되어 소리쳤다.
“맞아! 내가 쓴 거야! 전부 내가 쓴 거야! 내가 쓴 게 맞아!”
본래는 유더가 시킨 게 맞지만.
유더가 전부 대사까지 지정해줬지만!
코델리아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하다 못해 목과 귀까지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야말로 창피함과 수치심과 아무튼 이것저것이 뒤섞인 결과였지만, 필터가 잔뜩 쓰인 아델리아의 눈에게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히는 수줍은 반응으로만 보였다.
“코, 코델리아!”
그런데 아직 끝이 아니었다.
이미 버린 몸.
완벽한 방어를 위해 코델리아는 아예 결정타를 날려버렸다.
“유, 유더 없이는 못 살아! 난 유더 꺼고, 유더는 내 꺼야!”
지난번에 내던졌던 대본에 적혀 있던 대사들.
너무 창피해서 눈시울까지 살짝 붉어진 코델리아였지만, 아델리아의 눈에는 그게 또 눈물의 호소처럼 보였다.
“코, 코델리아······.”
그야말로 아연실색.
순간 비틀거린 아델리아였지만 그래도 명색이 근위마법병단의 일곱 단장들 가운데 하나였다.
어찌어찌 자세를 바로한 그녀는 애써 심호흡을 하며 말했다.
“아니, 아니 대체 저 비리비리해서 얼굴만 잘생긴······.”
거기까지였다.
평소 유더에 대해 품고 있던 생각들을 말하려던 아델리아는 저도 모르게 말끝을 흐리고 말았다.
이번에는 게일 때문이 아니었다.
그냥 눈에 보이는 현실 때문이었다.
‘뭐, 뭐야.’
유더 바이엘.
구음절맥을 타고난 아이.
몸이 약해 제대로 된 검술 하나 배우지 못 하고 방에만 틀어박혀 있던 병약 미소년.
그런데 아니었다.
눈앞에 자리한 유더는 분명 미소년이었지만, 결코 비리비리하지 않았다.
‘언제 저렇게 몸이 좋아졌지?’
솔라리의 목걸이를 얻어서 구음절맥을 치료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아델리아도 들은 바가 있었다.
하지만 그런다고 몸이 갑자기 저렇게 좋아질 수가 있나?
일단 키가 컸다.
아델리아 자신이 수집한 정보에 따르면 유더는 코델리아와 비슷하거나 조금 작은 키였는데, 지금은 유더가 훨씬 더 컸다. 적어도 10cm는 차이가 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건장했다.
막 근육이 부풀어 오른 덩치는 아니었지만, 어깨가 넓었고, 근육도 탄탄했다.
사방이 눈밭인 터라 제법 껴입은 유더였지만 업무상 왕도의 수많은 기사들을 마주한 아델리아였다.
핏만 봐도 근육의 형태와 두께를 대강은 파악할 수 있었다.
‘단단해.’
그냥 부풀리기만 한 것이 아닌, 잘 연마된 단단한 근육.
저 정도면 거의 게일 공자 수준- 아니, 게일 공자보다는 못 했지만 어찌되었든 농담으로도 비리비리하다는 말을 할 수 없는 건장한 육신이었다.
‘뭔가, 뭔가 까야하는데 깔 수가 없어.’
애당초 게일이 신경 쓰여서 뭐라 하기 어려운 마당이었거늘.
유더조차 깔 건덕지를 주지 않으니 무어라 할 말이 없어진 아델리아였다.
그리고 작금의 상황을 유더는 놓치지 않았다.
아델리아가 당황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코델리아가 나름의 분투로 인해 헐떡이고 있는 틈을 파고들었다.
덥썩.
유더가 앞으로 한 걸음 나서며 자신을 보호하듯 버티고 서 있던 코델리아의 어깨를 안았다.
자신 쪽으로 잡아당겼고, 얼결에 유더 품에 안긴 코델리아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의미로 당황했다.
‘유, 유더?’
이미 유더에게 안기거나 업히는 것에 익숙해진 코델리아였다.
그런데 이상했다.
여태까지는 안기든 업히든 아무렇지 않았는데, 지금은 기분이 이상했다.
두근두근.
갑자기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유더를 올려다 보는 뺨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의미로 달아올랐다.
‘뭐, 뭐야. 이상해.’
자기도 모르게 얌전해진 코델리아는 그대로 고개를 푹 숙였고, 유더는 그런 코델리아를 단단히 안은 채 입을 열었다.
“아델리아 누님.”
고르고 고른 호칭에 아델리아가 반응했다.
이쪽을 바라보는 그녀의 푸른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한 유더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말했다.
“저와 코델리아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입니다.”
꿈틀.
코델리아였다.
움찔한 그녀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유더를 보았고, 눈빛으로 외쳤다.
‘누, 누가! 너랑 내가?’
‘너랑 내가. 일단 받아들여. 아델리아가 보고 있으니 자연스럽게. 알지? 포기하면 편한거.’
‘우그으······.’
다시 얌전해진 코델리아가 고개를 숙였고, 아델리아와 게일의 눈에는 그런 코델리아의 모습이 부끄러운 긍정으로 보였다.
“밀월여행에 나선 것은 분명 잘못입니다. 네, 그리고 저의 잘못이죠. 코델리아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습니다. 조금이라도 더 둘만의 시간을 갖고 싶어 한 제 억지를 따라준 것뿐이니까요.”
절절하기 짝이 없는 유더의 말에 아델리아의 기색이 다소 움츠러들었고, 코델리아가 다시 고개를 번쩍 들었다.
어째 이야기가 이상하게 돌아갔기 때문이다.
“아, 아냐! 유더 잘못이 아냐! 내가 가자고 했어! 응응! 내가 둘만의 시간을 갖고 싶다고 떼를 써서 그래. 편지도 내가 남겼잖아?”
아델리아로부터 유더를 지키겠다고 마음 먹었는데, 전부 유더 잘못으로 할 수는 없었다.
사실 분위기상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는 코델리아였지만 연이은 사태로 인해 열이 오를대로 올라 정상적인 사고가 힘들어진 그녀였다.
어찌되었든 코델리아의 선언은 효과적이었다.
서로 자신이 잘못했다며, 상대가 아닌 자신을 벌해 달라 애원하는 소년과 소녀라니.
누가 봐도 서로를 지극히 사랑해 거짓말을 하는 모습이지 않은가.
“으으윽······.”
앓는 소리를 내던 아델리아는 결국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마음 같아서는 유더를 아주 박살내고 싶은 그녀였지만, 여기까지 오고나니 역시 그럴 수가 없었다.
코델리아가 저렇게 좋다는데 뭘 어쩐단 말인가.
그리고 사실 아델리아도 알고 있었다.
막상 만나봐야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흠흠.”
바로 그때였다.
여태까지 잠자코 있던 게일이 헛기침을 토해 모두의 시선을 모았고, 그대로 앞으로 나아가 아델리아의 옆에 섰다.
유더가 코델리아를 품에 안은 것처럼 딱히 손을 쓰지는 않았지만 옆에 서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아델리아는 든든한 버팀목이 생긴 것 같은 기분에 빠져들었고, 두 사람을 지켜보는 유더와 코델리아의 눈에 ‘혹시’라는 생각이 깃들었다.
“유더, 그리고 코델리아 양.”
“예, 형님.”
“네, 아주버님.”
유더와 코델리아가 바로 응답했다.
아주버님이란 호칭에 슬쩍 미소 지은 게일이 말을 이었다.
“여기까지 오며 두 사람의 행적에 대해 여러모로 알게 되었다. 두 사람이 서로를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는지는 두 눈으로 직접 보아 알게 되었고 말이다.”
게일의 말에 유더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코델리아는 마음속에서나마 고개를 붕붕 가로저었다.
‘아닌데요, 그런 거 아닌데요.’
슬슬 이성이 돌아온 것도 있지만, 뿌리 깊은 반발심에서 나온 반응이었다.
하지만 어찌되었든 마음속의 도리질일뿐.
게일은 유더와 흐뭇한 눈빛을 교환하더니 숨을 크게 골랐다. 지금까지와 달리 제법 엄격한 얼굴이 되어 말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행동은 분명 잘못 되었다. 흐레스벨그 백작가에 끼친 무례는 실로 커 용서받기 어려운 수준이고 말이다. 두 사람을 친구로 생각한 루카스 공자의 마음에도 큰 상처를 주었다는 것은 잘 알고 있겠지?”
루카스가 언급되자 유더와 코델리아 모두 미안함이 가득한 얼굴이 되었다.
그리고 그 반응에 게일은 만족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두 사람의 행동 때문에 우리 바이엘 백작가는 물론이고 체이스 백작가까지도 좋지 않은 소문에 휩쓸리게 되었다.”
자식 교육을 어떻게 시킨 것이냐며 비난하고 조롱하는 무리들이 있었으니까.
유더와 코델리아의 얼굴에 미안함에 이어 부끄러움과 죄책감이 번졌고, 게일의 표정이 한층 더 엄격해졌다.
“물론 자세한 사정을 들어보아야겠지만, 그와 별개로 너희가 저지른 일들로 인해 발생한 일들이 많다. 그리고 그 모든 일들에 대한 책임은 두 사람에게 있다.”
게일은 화를 내지 않았다.
언성을 높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게일의 말에는 무게가 있었다.
“돌아가면 책임을 지도록 하자. 도망치거나 피하지 않고, 자신이 저지른 일을 수습하는 거다. 알겠지?”
“예, 형님.”
“네, 아주버님.”
유더와 코델리아가 순순히 답하자 엄격했던 게일의 얼굴에 다시 미소가 번졌다.
평소처럼 사람 좋은 얼굴이 된 그는 나란히 붙어 선 유더와 코델리아를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다 말했다.
“그래도 다행이구나. 두 사람 모두 이렇게 무사해서. 많이 걱정했단다.”
채찍질 다음의 당근.
아니, 그런 계산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게일의 순수한 마음이었고, 그렇기에 유더와 코델리아- 특히 코델리아는 크게 감동하였다.
그리고 한 사람 더.
‘역시 멋져. 제대로 된 사람이야.’
게일의 옆모습을 바라보던 아델리아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마치 코델리아를 바라볼 때처럼 잔뜩 풀린 미소가 말이다.
“아델리아 양.”
“네?”
“저기··· 아델리아 양?”
“네? 아, 네!”
흠칫 놀라 자세를 바로 한 아델리아가 눈을 깜박이자 게일은 빙긋 미소 짓더니 유더와 코델리아에게 다시 말했다.
“아델리아 양도 두 사람의 안위를 무척이나 걱정하셨단다. 감정이 격해지실 정도로 말이다. 그러니 제대로 감사하는 것이 어떻겠니.”
마주하자마자 서로 대립 구도를 띈 아델리아와 두 사람이었으니까.
게일의 말에 코델리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 언니. 고마워. 그리고 미안해.”
“죄송합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코델리아에 이어 유더까지 예를 표하니 머쓱해진 아델리아였지만, 동시에 기쁘기도 하였다.
아델리아 자신만 왔다면 결코 이런 이야기를 듣지 못 했을 터이니 말이다.
“정말 많이 걱정하셨으니까요.”
게일이 웃으며 작게 말하자 아델리아는 입술을 움츠리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리고 그 모습에, 비록 연하다고는 해도 분명 일어난 뺨의 색조 변화에 유더와 코델리아가 반응했다.
‘잠깐, 이거 설마 혹시?’
‘호옥시?’
유더와 코델리아의 눈이 가늘어졌고, 이번에도 역시 코델리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언니.”
그냥 그 한 마디.
하지만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 말처럼 움찔한 아델리아는 허둥거리며 말했다.
“아, 아무 것도 아니야! 나랑 게일 공자는 아무 사이도 아냐! 그, 그렇죠? 게일 공자?”
의심을 거두기는커녕 더욱 깊게 할 행동인 동시에 아델리아가 코델리아와 마찬가지로 체이스 백작가의 피를 잇고 있음을 증명하는 반응.
그리고 이 순간 게일 역시 자신이 유더와 같은 피가 흐르는 바이엘 백작가의 남자라는 사실을 증명했다.
“아무 사이도··· 아닌 건가요?”
갑작스러운 발언에 아델리아는 흠칫했다.
아니, 이 남자 갑자기 왜 이래.
싫은 건 아닌데, 어, 분명 싫은 건 아닌데.
“아, 아니 그게······.”
가슴이 마구 쿵쾅거려서 제대로 말을 잇지 못 한 아델리아는 빨개진 얼굴로 어버버 거렸고, 유더와 코델리아의 눈빛이 차게 식었다.
‘과연, 그런 것인가.’
‘흐으응.’
똑같이 식었지만 반응이 조금 다르긴 했다.
유더는 과연 우리 형이라는 느낌이었고, 코델리아는 흐으응흐으응이었다.
“아무튼 이렇게 서서 이야기를 나눌 것이 아니라 들어가서 이야기를 하도록 하죠. 서로 교환해야 할 이야기도 많을 테니.”
게일은 마냥 밀어붙이기만 하지 않았다. 슬쩍 발을 뺀 뒤 원만하게 사태를 수습했다.
“가시죠, 아델리아 양.”
“네, 게일 공자.”
어째 평소보다 두 배는 더 다소곳이 답한 아델리아가 헛기침을 토한 뒤 게일과 함께 걸었고,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유더는 애써 웃음을 참은 뒤 발걸음을 내디뎠다. 아니, 내디디려 했다.
‘유더야.’
‘응?’
‘이제 다 끝났으니까 풀어주면 안 돼?’
‘안 돼, 아직은. 아델리아가 보고 있잖아.’
물론 보고는 있지만, 제대로 볼 수 있을지 의문일 정도로 민망함과 부끄러움과 기타 등등의 도가니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그녀였다.
‘흐으응.’
‘아무튼 가자. 익숙해지는 거야.’
유더는 코델리아의 어깨를 안은 채 발걸음을 내디뎠고, 코델리아는 일단 따라서 이동했다.
그렇게 두 쌍의 남녀가 떠난 자리.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째 꿔다놓은 보릿자루 신세가 되었던 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탁탁 털었다.
“이럴 거면 난 대체 왜 부른 거니. 응?”
거친눈사태.
누구에게랄 것 없이 불만을 토로한 그는 유더와 코델리아가 향한 방향을 돌아보았다.
어깨를 한 번 으쓱인 뒤 아장아장 발걸음을 내디뎠다.
&
< 제34장 - 크로스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