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엔딩메이커-102화 (102/473)

< 제36장 - 카라발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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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폭풍 부족이 고대 엘프들 가운데 하나인 윈터 엘프의 피를 이었다면, 칼날노래 부족은 고대 오크들 가운데 하나인 하이잘 오크들의 피를 이었다.

‘과연.’

지금까지 만난 위대한폭풍 부족이나 고운눈바람 부족은 세일룬 왕국 북부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야만족’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크고 사납고 거친, 짐승과도 같은 야만의 무리.

이 또한 편견이긴 했지만, 칼날노래 부족은 북부인들이 생각하는 야만인 상과 여러모로 흡사했다.

‘애당초 매번 침공의 주역이 된 건 칼날노래 부족과 성난뿔소 부족이니까.’

지난 수백 년 세월 동안 갈까마귀들과 직접 충돌한 것은 언제나 성난뿔소 아니면 칼날노래였다.

‘그래도 좀 다르구나.’

원작에서는 정말 짐승처럼 생긴, 평범한 오크보다도 더 괴물 같은 모습들이었는데, 지금은 타락하기 전이라 그런지 오크보다는 인간에 가까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평범한 인간보다 적어도 머리 하나는 더 큰 커다란 체형에 넓은 어깨, 절로 삼각형을 그리게 만드는 하반신보다 크고 우람한 상반신.

여기까지 보면 오크 그 자체였지만 얼굴이 달랐다. 귀 끝이 조금 뾰족하고 전체적으로 선이 굵어서 그렇지 얼굴 자체는 인간이 분명했다.

‘그리고 회색 피부.’

하이잘 오크들의 피를 이었다는 가장 뚜렷한 증거.

“아홉칼날이 고운눈바람 님을 뵙습니다.”

선두로 나선 아홉칼날이 걸걸한 목소리로 예를 표했다.

이러나저러나 야생의 땅에서 나고 자란 그에게 있어 야생신들은 경의의 대상이었다.

“환영해요, 아홉칼날.”

이름을 드러내기 위함인지 머리칼을 아홉 가닥으로 땋은 아홉칼날에게 미소 지은 고운눈바람은 태양노래를 돌아보았다.

“당신이 태양노래군요.”

“고운눈바람님을 뵈어 영광입니다.”

태양노래가 정중히 예를 표했다.

그리고 그런 태양노래를 코델리아가 가늘게 뜬 눈으로 바라보았다.

‘으으음··· 원작보다는 나은 거 같지?’

‘아무래도.’

원작에서는 그야말로 미쳐 날뛰는 짐승 그 자체였으니까.

그때에 비하면 일단 성격도 차분한 것 같았고, 덩치도 좀 더 작았다. 키는 그대로인데 근육량이 다르다고 해야 할까?

‘그래도 크네.’

어림잡아도 2미터는 그냥 넘을 것 같은 큰 키였다.

거기에 상반신이 크게 발달한 칼날노래 부족의 특성까지 더해지니, 어깨와 팔, 주먹 등등이 평범한 인간보다 훨씬 더 커서 실제보다 더 크게 보였다.

“으으··· 불공평해. 체급이 비교가 안 되잖아.”

코델리아가 아주 작게 신음하듯 말했다.

그리고 사실이었다.

나이가 여섯 살 더 많은 것을 떠나 기본적인 체급에서부터 아예 상대가 되지 않았으니 말이다.

붉은바람의 키는 160초반.

가벼운 엘프들의 특성을 물려받아 몸무게는 40kg 언저리에 불과했다.

반면 태양노래는 못 해도 150kg은 가뿐히 될 것 같으니, 복싱으로 치자면 플라이급과 헤비급이 싸우는 것 이상의 차이였다.

불공평.

누가 봐도 공정하지 못 한 경기.

“그래서 할 만한 거야. 너도 알고 있잖아?”

유더의 말에 코델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불공평이란 개념을 이용할 수 있는 것은 태양노래만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맞아, 맞아. 우리도 불공평함의 끝을 보여주자. 자본주의의 힘을 보여주자구.”

“뭔가 좀 어긋난 것 같긴 하지만··· 아주 틀린 소리는 또 아니네.”

씩 웃은 유더는 코델리아와 함께 다시 태양노래 쪽을 보았다.

붉은질풍이 아홉칼날과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생각보다는 사이가 나쁘지 않은 것 같지?”

“서로 라이벌로 생각한다고 했으니까. 진짜 라이벌이면··· 오히려 저렇게 골골한 모습이 보기 싫겠지.”

유더의 말마따나 아홉칼날은 병약해진 붉은질풍을 보며 무척이나 씁쓸한 표정을 짓는가 싶더니 서부- 정확히는 성난뿔소 부족과 하라겐에 대한 분노를 표했다.

“동맹 자체는 잘 이루어질 거야.”

“문제는 누가 패권을 쥐느냐지?”

아홉칼날 부족이 패권을 쥐면 악마 추종자들과의 싸움이 세일룬 왕국 북부와의 싸움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었으니까.

“붉은바람을 믿자.”

“응, 그리고 자본주의의 힘도.”

코델리아가 송곳니를 빛내며 멋지게 웃었고, 유더는 붉은바람을 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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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발은 정통적으로 늦은 오후에 시작하여 노을과 함께 끝을 내게 되어 있었다.

“슬슬··· 시작해야 할 것 같네요.”

고운눈바람이 하늘을 우러르며 말하자 옆에 앉아 있던 거친눈사태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미 여러 부족의 족장들과 전사들이 슬슬 모여들고 있는 상황이었다.

장소는 유더와 코델리아에 의해 ‘정리된’ 들판이 있던 장소.

말뚝을 박아 영역을 표시해 경기장을 만든 뒤 각각의 부족을 상징하는 색색의 깃발을 세우자 제법 그럴싸한 무대가 만들어졌다.

“오는구만.”

먼저 등장한 것은 칼날노래 부족이었다.

우르르 몰려온 그들은 북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고, 맞상대인 위대한폭풍 부족은 자연스럽게 남쪽에 자리를 잡았다.

“다들 신났구만.”

당사자들인 위대한폭풍 부족과 칼날노래 부족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어려 있었지만 나머지 부족들은 아니었다.

어느 부족이 승리하느냐에 따라 연합의 성격이 바뀔 터이니 마냥 즐길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전반적인 분위기는 축제에 가까웠다.

“카라발이니까요.”

고운눈바람의 말에 거친눈사태는 고개를 끄덕였다.

카라발.

결투로 모든 것을 결정짓는 폭력적인 행위.

하지만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오히려 카라발이야말로 야만적인 폭력을 막기 위한 폭력이었다.

‘부족간의 대립을 일대일 대결로 정리하는 것이니까.’

당연한 이야기였지만 부족과 부족이 직접 대립하면 훨씬 더 많은 피가 흐를 수밖에 없었다.

죽고 죽이고 재산이 축나고.

그렇지 않아도 살기 힘든 야생의 땅에서 그런 일이 반복되면 결국 남는 것은 공멸뿐이었다.

그래서 카라발이 만들어졌다.

결과에 승복할 수 있으면서 동시에 피해도 최소화 할 수 있는 방안.

‘때문에 단순한 일대일 대결이 아니지.’

카라발은 부족 전체의 대리전이었으니까.

부족 전체의 역량을 과시할 수 있는 수단이었으니까.

우리 부족은 이렇게 강한 전사를 길러낼 수 있다.

우리 부족은 전사 하나를 이렇게까지 강화시킬 수 있다.

둥! 둥! 둥!

고운눈과 맑은눈이 북을 쳐 카라발의 개회를 알렸다.

어느새 경기장 주변을 가득 매운 부족장들과 전사들이 환호성을 질렀고, 고운눈바람 부족 역시 열띤 성원을 보냈다.

“고운눈바람님과 거친눈사태님이 지켜보고 계시니! 지금 이 자리에서 카라발의 개최를 선언하노라!”

“와아아!”

운집한 수백 명이 동시에 환호하니 분위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고운눈바람과 거친눈사태 역시 분위기를 타 얼굴에 홍조를 띄웠다.

야생의 땅의 아이들이 흥분하고 기뻐하니 그들을 보살피는 야생신으로서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그리고 흥분한 것은 고운눈과 맑은눈 역시 마찬가지였다.

평소 근엄하기 짝이 없는 고운눈이었지만 생기 어린 눈으로 껄껄 웃더니 북채로 칼날노래 부족을 가리키며 외쳤다.

“칼날노래 부족의 대전사! 태양노래!”

둥! 둥! 둥!

“와아아아아!”

칼날노래 부족이 들판 전체가 진감할만치 큰 환호를 보냈다.

그리고 태양노래가 앞으로 나섰다. 몇 시간 전 처음 이 땅에 들어섰을 때와는 차림새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오오! 저 가죽은 자색담비의 가죽이 아닌가?! 가죽임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칼날조차 막을 수 있다고 하는!”

“세상에나! 그 귀한 것을 저만큼이나?”

“역시 칼날노래 부족, 재력이 굉장하구만!”

태양노래가 전신에 두른 담비가죽 옷을 본 부족장들과 전사들이 수군거리자 아홉칼날을 비롯한 칼날노래 부족의 전사들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어디 그뿐인가? 저 팔찌를 보게나. 무르무르의 검은강철이 분명하네. 착용자에게 괴력을 부여하는 장비지!”

“오오오. 그 말은 칼날노래 부족이 무르무르를 잡았다는 말이겠군!”

“뭘 좀 아는구만! 자네 짐작대로네. 역시 칼날노래 부족이라 할 만한 위업이지.”

아홉칼날이 어깨를 으쓱이자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칼날노래 부족 모두가 헛기침을 해댔다.

그런데 아직도 끝이 아니었다.

“목에 걸고 있는 건 바르도의 빛이네. 자네들도 들어보지 않았나?”

“들어보았지. 잡기도 힘들고 보기도 힘든 바르도들의 몸에서 운이 좋아야 채취할 수 있는 신비한 보석이 아닌가.”

“바로 그걸세. 착용자에게 신비한 힘을 부여해주는 아주아주 귀하고 값비싸고 굉장한 물건이지.”

“역시, 역시 칼날노래 부족. 그런데 자네는 이런 것들을 어찌 다 아나?”

“내가 좀 식견이 높다네.”

사실은 칼날노래 부족이 일부러 분위기를 만들고자 사전에 풀어둔 이야기꾼이었지만 말이다.

“캬아··· 태양노래의 저 듬직한 몸을 보게나. 그 위에 걸쳐진 자색담비 가죽옷과 무르무르의 강철 팔찌, 바르도의 빛 목걸이!”

“장비부터가 압도적이구만.”

“이거이거 상대나 되겠나?”

왁자한 웃음소리가 번졌고, 아홉칼날의 얼굴에는 더욱 미소가 깊어졌다.

“오늘을 위해 들인 돈이 얼마던가.”

각종 값비싼 장비들을 동원한 것은 단순히 태양노래의 전투력을 강화하기 위함만이 아니었다.

칼날노래 부족의 힘과 재력을 여러 부족에게 과시해, 칼날노래야 말로 연맹의 맹주 역할을 맡을 적임자라는 사실을 온 세상에 알리기 위함이었다.

“물론 성능도 좋지만 말이다.”

그렇지 않아도 압도적인 육체 능력을 가진 태양노래였다. 값비싼 장비들로 강화까지 했으니 붉은바람은 죽었다 깨도 태양노래의 상대가 되지 못 하리라.

“흐흐, 저쪽도 이제 나오나 봅니다.”

“가엾군요. 차라리 저쪽이 먼저 나왔다면 등장 자체가 괴롭지는 않았을 터인데.”

“그러게 말입니다. 정말 너무 불쌍합니다.”

뭘 어떻게 꾸며도 태양노래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 분명했으니까.

딴에는 나름 열심히 꾸민 것일 텐데 비웃음만 사게 되었으니 어찌 불쌍하지 않겠는가.

“붉은바람은 어린 소녀라 들었는데 정말 가엾군요.”

“싸우기도 전에 우는 거 아닙니까?”

“하하하! 설마 그럴리가!”

“하지만 울 것 같지 않나?”

“사실 그렇다네. 너무 초라한 현실에 비참해져서 으앙으앙 울어대겠지.”

전사들이 킬킬킬 웃으며 떠들어대자 아홉칼날이 두 손을 들어 모두를 진정시켰다.

“그 정도들 해라. 들리겠구나.”

하지만 얼굴에는 진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오랜 세월동안 라이벌로 여겨온 붉은질풍을 직접 찍어 누를 수 없는 것은 아쉬웠지만, 이렇게 카라발로나마 압도적 승리를 거둘 거라 생각하니 연신 웃음이 흘러나왔다.

“자자, 이제 보자꾸나.”

뭘 어떻게 하고 나왔는지.

아홉칼날은 반대쪽을 바라보았고, 이내 맑은눈이 북채를 높이 들며 소리쳤다.

“위대한폭풍 부족의 대전사! 붉은바람!”

“와아아!”

위대한폭풍 부족이 환호성을 질렀고, 붉은바람이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직후 구경하던 부족장들과 전사들 사이로 경악이 번져나갔다.

“세, 세상에나.”

“어, 어찌.”

“허어어어?!”

다들 제대로 말조차 하지 못 했다.

기세등등하던 칼날노래 부족 역시 순간이지만 입을 벌린 채 넋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반짝반짝.

머리부터 발끝까지 호화현란.

과장이 아니라, 붉은바람의 전신이 정말 빛나고 있었다.

머리에는 티아라, 귀에는 귀걸이, 목에는 목걸이, 팔에는 팔찌, 열 손가락 가득한 반지, 반짝이는 허리띠, 허벅지를 감싼 장신구, 발목과 종아리를 잇는 발찌.

그냥 장신구만 화려한 것이 아니었다.

지켜보던 이들의 입에서 숨죽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저, 저건··· 설마 용의 비늘?”

붉은바람의 양어깨를 감싼 푸른 어깨갑주.

용의 비늘이 맞았다.

저주에 직격당한 푸른수염에게서 떨어져 나간 것을 유더가 알뜰하게 챙긴 것이었으니까.

“맙소사! 저걸 보게! 무르무르의 강철이 아닌가!”

“아니야! 무르무르의 강철 정도가 아니네! 저건 무르무르의 상위종인 무르파라의 강철이야!”

이번에도 정답.

카플란 덕분에 레어- 그것도 네임드 몬스터들을 잔뜩 영접한 유더와 코델리아였다.

희귀 소재라면 차고 넘칠 정도로 가지고 있었다.

“세, 세상에나. 저걸 전부 한 몸에 걸치고 있다는 말인가?”

“위, 위대한폭풍 부족의 재력이 저 정도였다니!”

부족장들과 전사들이 경악을 금치 못 했고, 아홉칼날을 필두로 한 칼날노래 부족은 이를 악물며 부들부들 떨었지만 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모습에 코델리아가 가슴을 활짝 펴고 웃었다.

“후후훗. 후후후훗.”

이게 바로 자본주의의 힘이다.

느그들 집에는 이런 거 없지?

“이이익! 태양노래! 그걸 꺼내라!”

칼날노래가 갑자기 외치자 흠칫한 태양노래는 허리춤에 챙겨온 것을 꺼내들었다.

“오오! 저것은 스크롤?!”

“고대 유적에서나 찾을 수 있는 것을!”

마법보다는 주술이 발달한 야생의 땅에는 마법을 담은 스크롤이 귀했다.

그런데 태양노래는 허리춤에서 스크롤을 무려 다섯 장이나 꺼내들었다.

“오오! 이번 카라발에 저 다섯 장을 전부 쓸 생각인가?”

“과연, 과연 칼날노래!”

분위기가 조금이지만 반전되었다.

그리고 코델리아가 다시 웃었다.

“스크롤? 스크로올?”

그 미소의 이유.

붉은바람이 허리춤에 차고 있던 주머니를 열자 두 번째 경악이 들판 전체를 뒤덮었다.

스크롤 뭉텅이가, 아니- 아예 스크롤 책이라 해도 좋을 것이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우리 유더가 엉? 우리집 유더가 엉?!”

코델리아가 어깨에 힘을 잔뜩 주었고, 유더는 작게 웃었다.

저걸 다 만드느라 밤을 새고 또 샜지만 코델리아의 미소와 주변의 반응을 보니 그간의 피로가 싹 씻기는 것 같았다.

“으윽··· 으으윽······.”

아홉칼날과 칼날노래 부족의 얼굴이 구겨졌고, 붉은질풍은 그저 흐뭇한 미소만을 머금었다.

그리고 거친눈사태가 말했다.

“역시 저것들은 생태계교란종이야.”

유더와 코델리아.

분명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딱히 가진 게 없었는데 어디서 저 많은 것들을 구해온 것일까.

“에잇! 태양노래! 스크롤을 사용해라! 양보단 질이다!”

양쪽 모두 입장을 마쳤으니 형식상으로는 이미 카라발이 시작된 상황이었다.

태양노래가 아버지의 명을 따르고자 첫 번째 스크롤을 찢었다.

“스트랭스!”

“디스펠.”

붉은바람도 따라서 스크롤을 찢었다.

디스펠이 스트랭스를 와해시켰고, 태양노래는 다급히 두 번째 스크롤을 찢었다.

“헤이스트!”

“디스펠.”

“아이언 스킨!”

“디스펠.”

“아이 오브 타이거!”

“디스펠.”

“으··· 으으··· 워리어 스피릿!”

“디스펠.”

다섯 장의 스크롤이 찢어졌고, 똑같이 다섯 장의 스크롤이 찢어졌다.

“너, 너무해······.”

구경하던 이들 가운데 누군가가 목소리를 흘렸고, 허무하게 찢어진 스크롤 다섯 장이 바람을 따라 바닥을 뒹굴었다.

하지만 이제부터였다.

진짜 너무한 일은.

“미, 미안.”

저도 모르게 사과한 붉은바람은 아직도 잔뜩 남은 스크롤들을 연달아, 그것도 한 번에 두 장씩 찢기 시작했다.

“헤이스트, 헤이스트.”

“스트랭스, 스트랭스.”

화려한 빛과 함께 마법의 힘이 붉은바람에게 깃들었다. 그 광경을 멍하니 쳐다보던 아홉칼날이 급히 외쳤다.

“태양노래! 쳐라!”

더 이상 스크롤로 강화하는 것을 지켜만 볼 수 없었다.

태양노래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아홉칼날이 외치기 전에 이미 바닥을 박찬 그였다.

“우오오!”

거대한 태양노래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돌진해오니 그 기세가 전차를 방불케 했다. 하지만 붉은바람은 침착함을 유지했다. 그대로 크게 물러서며 스크롤 찢기를 멈추지 않았다.

“아이언 스킨, 아이 오브 타이거, 워리어 스피릿.”

피부 강화, 용맹 부여, 전신 활력 증가.

헤이스트 이중첩을 건 붉은바람의 속도는 실로 엄청났다.

태양노래도 빨랐지만, 붉은바람을 제대로 건드는 것조차 무리로 보였다.

“정령이다! 정령을 써라 태양노래!”

아홉칼날이 다시 소리쳤다.

정령전사.

흔한 존재가 아니었다. 야생의 땅에서도 손꼽히는 전사들만이 정령들과 계약해 정령전사가 될 수 있었다.

“불꽃의 아이들아!”

태양노래가 노래하듯 외치자 언월도의 칼날로부터 불꽃이 일었다.

장난꾸러기 불의 정령인 살라만다가 태양노래의 어깨 위에 자리했다.

“오오! 정령!”

“살라만다가 분명하군!”

다시 분위기가 반전되었다.

하지만 아홉칼날은 섣불리 미소 짓는 대신 위대한폭풍 부족 쪽을 보았다.

그리고 얼굴을 찡그렸다.

눈에 확 띄는 아름다운 붉은 머리 소녀가 여전히 의기양양한 얼굴로 미소를 짓고 있었으니까.

붉은질풍을 비롯한 위대한폭풍 부족의 전사들의 입가에 숨길 수 없는 미소가 떠올랐으니까.

“어째서.”

그렇게 말한 순간이었다.

붉은바람이 검을 뽑아 휘둘렀다. 새로 사귄 친구의 이름을 불렀다.

“용맹한 불꽃이여.”

레클리스 파이어.

부름과 함께 불꽃이 피어올랐다.

아름답고 거대한, 살라만다의 불꽃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환상의 정수.

“키아아아-!”

불꽃의 새가 날개를 펴며 포효했다. 지켜보던 이들은 물론이고 태양노래조차도 순간 넋을 잃고 불꽃의 새를 바라보았다.

“부, 불사조.”

“불사조!”

환상의 새.

불꽃의 마수.

불사조가 붉은바람의 어깨 위에 도도히 자리했다. 매서운 눈으로 살라만다를 노려보았고, 잔뜩 쫀 살라만다는 태양노래의 옷 속에 숨어 꼼짝도 하지 못 했다.

압도적인 격차.

아니, 압도적인 템빨!

“이것이 자본주의의 힘.”

코델리아가 훗하고 웃으며 멋지게 말했고, 생태계교란종 운운하던 거친눈사태는 까륵까륵 웃었다.

어찌되었든 지금은 우리집 생태계교란종들이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유더가 말했다.

“보여줘, 붉은바람.”

단순히 템빨만이 아니라는 것을.

붉은바람이 지면을 박찼다. 불사조와 함께 이름 그대로 붉은 바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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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36장 - 카라발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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